[호남의 후광] 反호남 지역주의, 족쇄이자 발판
스크롤 이동 상태바
[호남의 후광] 反호남 지역주의, 족쇄이자 발판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8.28 1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호남 지역주의, DJ를 키우다…군부 독재가 만들어 준 호남의 후광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병묵 기자 한설희 기자]

DJ는 ‘대선 4수생’으로서 지역주의로 인해 3번의 패배를 맛봤지만, 역설적이게도 4번째의 승리는 지역주의로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DJ의 족쇄이자 발판이 됐던 반호남 지역주의의 이중성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DJ는 ‘대선 4수생’으로서 지역주의로 인해 3번의 패배를 맛봤지만, 역설적이게도 4번째의 마지막 승리는 지역주의로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DJ의 족쇄이자 발판이 됐던 반호남 지역주의의 이중성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전문(全文)을 아우르는 간단한 문답(問答)으로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질문 하나. 대한민국 진보 정당에게 호남이란 무엇인가? 삼국시대의 한강과도 같다. 질문 둘. 김대중 전 대통령(DJ)에게 호남이란 무엇인가? 영남 패권주의 하에서 ‘호남정치인 김대중’ 프레임에 가둔 족쇄이자, 동시에 ‘대통령 김대중’을 만들어 준 위대한 발판이었다. <편집자 주>

삼국시대는 한강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 중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만이 전성기를 맞고 삼국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한강은 단순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징성을 갖는 주요 지역이었다.

호남도 그랬다. 호남 출신의 바른미래당 임재훈 사무총장은 호남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호남만 가지고서 대한민국 민주화 전체를 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호남 빼고 민주화를 논할 수도 없다.”

진보 성향을 표방하는 정당에게 있어, 호남은 선거의 승기를 잡기 위해 무조건 우선 탈환해야 하는 필수 격전지였다. 일단 발자취를 ‘찍고’ 시작하는 곳, 호남. 이에 대해 호남 민심은 때론 자조(自嘲)했다. ‘광주 토박이’를 자처하는 한 정계 관계자는 지난 26일 기자에게 씁쓸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는 누구 말마따나 선거철에 하나씩 꺼내 먹는 민주당 ‘곶감 항아리’ 아니었습니까. 표 주면 당연한 거고, 안 주면 역적이고. 이래서 맞고, 저래서 맞고. 아무리 민주당이 미워도 독재색(色) 빼지 못한 보수당 싫으니 울면서 표 줬었지요.”

그의 말대로 진보 정당은 선거철만 되면 맡겨둔 표를 찾듯 호남으로 가서 지역 민심을 구걸한다. 2020년 총선이 8개월 여 남은 지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정의당, 민주평화당과 대안정치연대, 바른미래당 출마 예정자들은 호남 지역에 뒤엉켜 정당 지지를 호소하는 모양새다.

전남 지역을 지역구로 둔 한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 27일 통화에서 “여기는 총성 없는 전쟁터”라고 표현했다.

“원래 전남·전북 나눠 비(非)민주당끼리 ‘짬짜미’하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지금 ‘조국 사태’와 지소미아(GSOMIA) 종료 때문에 지역 유권자들 사이에서 한국당 기세를 꺾기 위해 민주당에 전략적으로 몰아줘야 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선거 전략이 하루걸러 하루 바뀌어요. 진보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정당들의 전쟁터입니다.”

반호남 지역주의, DJ를 키우다…군부 독재가 만들어 준 후광 

이렇듯 호남이 진보의 ‘전략적 요충지’ 또는 ‘곶감 항아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반(反)호남 지역주의’ 역사를 꼽는다.

호남을 고립시키는 지역주의는 일차적으로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박정희 군부 독재 세력에 의해 심화됐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박정희 정권은 선거 전략으로 지역주의를 적극 조장했고, 이는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호남 지역민들의 울분을 결집시켰다.

<거산에 오르면 큰 길이 보인다> 저자이자,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을 지낸 최양부 전 수석은 지난 7월 기자와의 대담에서 “애향심(愛鄕心)을 정치에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지역주의가 나타났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대선에서 호남을 비난하면서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주의를 끌어들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도 2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정치학계에서도 영·호남 지역갈등의 시작을 71년도 대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동의했다.

“그 전만 하더라도 영호남 갈등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71년 여촌야도(與村野都·농촌은 여당, 도시는 야당을 지지한다) 선거구도가 되면서, 이대로 가면 박정희가 집권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고 의식하게 된 겁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치 공학적으로 영호남 배타적 지역감정을 이용했습니다. 영남이 호남보다 인구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영남을 안고 가는 것이 당선에 유리하다 판단한 것이죠.”

장신기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이 지난 2017년 출간한 저서에도 다음과 같은 분석이 나온다. 장 연구원은 “보수 세력이 동원한 반호남 지역주의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 정권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호남 배제와 호남 소외라는 사회적 현상이 있다”며 박정희가 경제적·정치적 두 갈래로 호남을 완전 고립시켰다고 주장한다.

박정희식 경제 발전 전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첫째, 불균등 발전 전략이었기 때문에 성장과 개발에서 차별이 나타났다. 대다수 농민, 저임금 노동자, 호남 지역 등이 개발에서 소외되었다. 둘째, 수직하향식 통치 체제 속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억압되어 학생과 지식인층이 반발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한 저항 운동이 197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에 대해 보수 세력은 과거와 다른 전략을 내세우게 되었다. (중략) 그 중 하나가 ‘반호남’이다.

업그레이드된 반공주의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적 차원의 저항이 전과 다르게 확산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1971년 7대 대선을 통해서 야권의 새로운 리더로 김대중이 등장했다. (중략)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지역감정 조장이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도전을 받게 되자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은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이효상의 발언(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경상도는 개밥의 도토리가 될 것이다)은 처음으로 지역주의를 정치적으로 동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호남 지역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대표적인 곳인데, 이것이 정치·사회적 배제로 확장된 것이다. 그 후 반호남 지역주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적 균열을 초래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장신기, 〈진보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반노무현주의, 탈호남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의 부활〉, 105~110페이지

박정희에 의해 촉발된 반호남 지역주의와 그로 인한 호남의 한(恨)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대항마로 떠오르던 전남 출신 정치인 DJ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는 전두환이 1980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절정을 맞는다. 5·18 민주화 항쟁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5·18 광주 항쟁을 ‘DJ 내란음모 사건’으로 엮어 눈엣가시 같던 야당 지도자 DJ를 축출하려고 시도했다. 호남에 대한 물리적 탄압은 DJ에 대한 탄압과 결부됐고, 호남과 DJ는 그렇게 운명 공동체가 됐다.

28일 김종회 의원(전북 김제시 부안군)은 DJ가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 특히 5·18을 함께한 정치인”이라는 점을 꼽았다.

박정희 군부의 중심에 있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그의 회고록에서 “5·18은 전두환 신군부가 DJ 세력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 군사 작전”이라고 언급한다.

5·17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군부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군사 작전이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오후 9시 50분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이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중략) 김대중과 예춘호·문익환·김동길·인명진·고은·리영희는 사회 혼란 조성과 학생·노조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끌려갔다.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됐다. 신군부는 이어 모든 정치·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국회의사당을 병력으로 봉쇄했다. 국회는 사실상 해산되었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가 3권을 장악했다.

- 김종필 회고록, 93페이지 中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의 김태균 사무처장도 지난 26일 “5·18 민주화 운동으로 호남과 DJ는 정치적으로 ‘한 몸’이 됐다”고 설명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5·18 민주화 운동을 겪으면서 DJ와 호남은 완전히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 된 거죠. (신군부 때문에)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야 했고, DJ는 정치적으로 고립된 상태가 됐습니다. 80년대 민주화의 봄을 맞고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는 과정까지, 지역주의 프레임이 작동하면서 YS는 영남, DJ는 호남 각자 출생 지역을 대변하는 지도자로 성장한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군부가 자극한 지역주의로 인해, 호남은 DJ의 출생 지역이자 그가 대의(代議)하는 지역구를 넘어서 정치적 유대를 형성한 ‘정치 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강상호 대표는 “역설적으로 군부 세력이 DJ를 대통령 감으로 키운 측면이 있다”고 평가한다. DJ는 반호남 지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라는 것이다.

“DJ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호남을 대표하게 되면서, 반독재의 상징으로 우뚝 섰습니다. 결국 박정희의 공화당이 DJ라는 정치인을 키워준 측면이 있어요. 정치인은 이처럼 어떤 부정적 사건을 계기로 삼아 대권 주자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여촌야도 구도를 호남 대 영남 구도로 만들기 위해 지역주의 정치를 이용한 것은 공화당이지만, 영남과 호남 이분법 아래에 선 한 축의 인물로서 떠오른 것은 DJ지요.”

DJ 측은 오히려 ‘호남대통령 DJ’ 칭호에 난감한 기색을 표한다. “DJ를 호남의 정치인이라고 보는 것은 박정희계 보수가 만든 선거 공학적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이라는 주장에서다. ⓒ시사오늘 김유종
DJ 측은 오히려 ‘호남대통령 DJ’ 칭호에 난감한 기색을 표한다. “DJ를 호남의 정치인이라고 보는 것은 박정희계 보수가 만든 선거 공학적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이라는 주장에서다. ⓒ시사오늘 김유종

DJ, 다시 지역주의를 키우다…호남, DJ의 족쇄이자 발판으로

한국 최초 호남 출신 대통령. 반호남 지역주의 장애물 속에서도 호남을 발판으로 삼아 집권한 성공신화. 그러나 DJ 측은 오히려 ‘호남대통령 DJ’ 칭호에 난감한 기색을 표한다.

‘동교동계 막내’로 정계에 입문한 바른미래당 임재훈 사무총장은 지난 27일 “DJ는 호남의 지도자, 호남의 대표자라기보다는 우리 민주 세력의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김태균 민화협 사무처장도 27일 “DJ를 호남의 정치인이라고 보는 것은 박정희계 보수가 만든 선거 공학적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DJ는 (지역주의가 정치에 등장한) 1971년 전부터 이미 야당 지도자가 될 만큼 성장한 상태였습니다. 호남이라는 지역 기반으로 성장한 게 아니에요. 5·18 항쟁으로 DJ의 의사와 관계없이 호남과 DJ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 고착화 됐지만, ‘호남 정치인’이라는 표현은 DJ가 갖는 함의(含意)를 격하시키는 프레임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 DJ’가 맞는 표현이죠. DJ는 호남을 자기기반화 하지 않았습니다. DJ를 호남과 무조건 연계시키고 가두는 순간, 우리 정치는 영원히 후진적인 상태에 머무를 것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DJ는 선거에서 수차례 호남의 지지 기반을 적극 활용한 바 있다.

DJ는 1987년 대선 당시 ‘4자필승론’을 내세웠다. 4자필승론이란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 자기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DJ 본인이 당선될 수 있다는 선거 공학적 계산이었다.

또한 1995년 지방선거에선 ‘지역등권론’을 내세웠는데, 이는 “40년 동안 영남 정권이 계속됐다. 이제는 호남·충청·강원·제주 지역도 동등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호남 및 비(非)영남 지역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는 작전이었다.

이 지역등권론은 JP의 ‘핫바지론(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를 핫바지 취급한다)’과 맞물려 지역감정을 부추겼고, 민자당은 영남에서, 민주당은 호남에서, 자민련은 충청에서 압승했다. AP통신은 당시 선거를 이렇게 분석했다.

“이번 선거의 승자는 지역주의고, 패자는 김영삼 정권이다.”

DJ는 그가 승리한 1997년 15대 대선에서도 지역주의를 재현했다. 기존의 지역주의와는 다른 형태였다. 87년 대선이 호남 대 비호남 구도였다면, 97년 대선에 등장한 DJP연합은 ‘반(反)영남 지역주의’ 연대가 핵심이었다. 즉, DJP연합은 기본적으로 영남 패권주의에 대한 투쟁을 목적으로 영남이 독점했던 권력을 돌려받기 위한 호남과 충청 지역의 연대였다.

호남 민심은 올곧게 DJ의 선택을 지지했다. 1996년 당시 월간지 〈말〉과 언론조사기관 인텔리서치가 광주·전주 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회의를 지지한 호남 민심 약 63.2%가 야권 전체의 통합을 바랐다고 나온다. DJ의 대권을 위해서라면 군부 세력과 손을 잡는 것까지 용인한 것이다. 호남과 DJ에게 DJP연합은 핍박받았던 세월을 집권으로 보상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결국 DJ는 호남을 지지 기반으로 1997년 ‘DJT연합’을 통해 유신 세력과 손을 잡았다. 충청의 김종필, TK의 박태준과 연합한 끝에 DJ는 15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만 이에 대해 민화협 측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그때 유행하던 선거 전략을 택했을 뿐”이라며 “공화당과 박정희가 만든 구상에서 지지자를 모으기 위해 (역으로) 사용한 것 아니겠느냐”며 선을 그었다.

국민의 정부 관계자도 28일 “호남 정치인으로 인(印)이 박힌 사람에게, 그런 작전 말고는 집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97년 대선 당시 DJ와 반목했던 이철 전 의원은 지난 5월 기자에게 “당시엔 DJ의 그런 선택을 미워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후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DJ 정권의 출범은 '지역주의로의 편승'으로 얻은 성취였다. DJ는 ‘대선 4수생’  시절을 겪으며 지역주의로 인해 3번의 패배를 맛봤지만, 역설적이게도 지역주의로 인해 마지막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반호남 지역주의는 DJ 정권의 장애물이자 '정치인 김대중'을 호남 지역에 묶어둔 족쇄였지만, 동시에 DJ정부를 탄생시킨 발판이기도 했다.

한국 정치는 아직까지도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에게 불리한 ‘영호남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호남 지역구 정치인들마저 의석 보전을 위해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뉴시스
한국 정치는 아직까지도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에게 불리한 ‘영호남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호남 지역구 정치인들마저 의석 보전을 위해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뉴시스

“지역주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하면 완화돼… 지역주의 자극하는 호남 정치인 반성해야”

2019년 8월. 호남과 DJ의 유대는 서거 10주기를 맞은 지금도 여전히 끈끈하다. 앞선 호남 정계 관계자는 지난 26일 “호남 민심이 (민주평화당과 대안정치연대에게) DJ 좀 그만 팔라고 비난해도 그들이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뭐겠느냐”고 반문하며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호남 정치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 DJ 말고 누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대통령들은 모두 영남 사람이지요. 물론 여기도 ‘호남 자민련은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만, 우리 목소리를 대변해줄 수 있는 정치인을 찾는 게 주민정치 아닙니까. 이게 피해의식이라고요? 피해를 입었으니 피해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민주평화당 조배숙 의원(전북 익산시을)은 28일 “아직까지도 호남정치에 있어 DJ의 발자취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이정표”라며 “호남은 60년 가까이 지역차별의 벽에 가로막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지금도 지역차별의 벽은 여전하다. 그래서 호남에게 DJ는 ‘호남정치’의 상징이자 가장 큰 자산”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종회 의원도 “세월이 흘러 DJ의 영향력은 과거보다 떨어졌지만, 아직도 호남인의 가슴에는 DJ가 살아있다”며 “이는 오랜 후세까지도 기억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이와 관련해 강상호 대표는 “한국 정치는 아직까지도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에게 불리한 ‘영호남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도 영남 출생을 내세운 것 아니겠느냐”고 인정하면서도 “그렇지만 호남 지역구 정치인도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몇몇 호남 국회의원들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포함한 선거제 개혁을 반대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호남권에서 분권형 제도를 반대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렇게 된다면 인구수가 많은 영남이 대다수의 의석을 가져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것을 분권형을 반대하는 하나의 논거로 사용해 국민의 지역주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 다수 대표제가 지역주의를 심화시키는 측면이 있는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병행실시되면 지역주의 구도도 완화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현 선거제도는 지나치게 승자 독식 구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는 영남, 일부는 호남, 또 일부는 충청으로 의석을 나눠 갖는 지역주의가 성행하고, 정당의 각종 이합집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지방 분권과 행정 구역 개편이 이뤄지면 본격적으로 지역주의가 많이 없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가면,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죠.”

원인 없는 결과 없듯, 가해자 없는 피해자도 없을 것이다. 지역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군부 독재 세력이 만든 반호남 지역감정은 DJ 평생의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DJ는 집권을 위해 지역주의의 피해자 위치에서 편승자, 나아가 활용자 위치로 올라서기도 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에 몰린 정치인들은 저마다 시민들을 향해 ‘DJ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었다. 출마 의사를 밝힌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진짜 DJ의 계승자다”, “우리 당도 DJ의 서자는 아니다”라며 호남에서 ‘DJ의 후광(後光)’을 찾았다.

DJ의 호는 그가 살던 지역명을 딴 후광(後廣)이다. 그리고 후광 김대중 선생의 ‘정치적 후광’은 ‘호남의 지지’였다. 후광의 후광, 호남. 내년 총선에서 호남이 어떤 선택을 할지, 누구의 후광이 되어줄지, DJ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 정치권이 주목하고 있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