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원사에서 오른 지리산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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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대원사에서 오른 지리산 천왕봉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19.09.08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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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삶의 절망 끝에는 언제나 山이 있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천왕봉에서 본 지리산 봉우리들. 바람에 흐르는 구름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자맥질이라도 하는 것 같다 ⓒ 최기영
천왕봉에서 본 지리산 봉우리들. 바람에 흐르는 구름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자맥질이라도 하는 것 같다 ⓒ 최기영

등산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전하는 곳이 바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장쾌하게 이어지는 25.5km의 지리산 주능선이다. 계곡을 오르내리는 것까지를 포함하면 약 45km 정도가 되고 16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그야말로 대장정이다. 지리산 종주를 화대종주라고도 하는데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산행을 시작해 경남 산청군에 있는 대원사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지리산 종주는 구례에서 성삼재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가 노고단에서 바로 산행을 시작해 천왕봉을 밟고 주로 중산리나 백무동 쪽으로 하산한다. 

나는 매년 화대종주를 포함해 보통 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한다. 올해도 아껴뒀던 여름휴가를 지리산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대원사에서 산행을 시작해 천왕봉 쪽으로 향했다. 대원사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 중에서 가장 지루하고 험하기로 악명높은 길이었지만 꼭 한번 오르고 싶은 길이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경남 산청군 원지에 도착해 다시 대원사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대원사 주차장에서도 약 2km를 더 걸어 올라가야 대원사가 나온다. 다시 2km 정도 더 걸으면 유평마을이 나오고 그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지리산 첫날 목적지인 치밭목 대피소다. 이날 이곳 예약자는 나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지리산의 밤을 포근하게 맞이했다 ⓒ 최기영
지리산 첫날 목적지인 치밭목 대피소다. 이날 이곳 예약자는 나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지리산의 밤을 포근하게 맞이했다 ⓒ 최기영

나는 그날 천왕봉으로 가는 산길에서 단 한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짊어지고 낑낑대며 그 크고 깊은 지리산을 그렇게 혼자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저녁 6시가 넘어서야 이날의 목적지인 치밭목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날 대피소 예약자는 단 한 명! 바로 나뿐이었다.

'산을 오래 타다 보니 이런 호사도 누려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어느 호텔 스위트룸 부럽지 않았던 그 곳에서 포근했던 지리산의 밤을 홀로 누렸다. 새벽부터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산청까지 내려와 무거운 배낭을 메고 8km가 넘는 산길을 걸어 올라온 탓에 몹시도 피곤했던지 밥을 먹자마자 나는 정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중봉에서 본 천왕봉의 모습이다. 구름이 걷히며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는 천왕봉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 최기영
중봉에서 본 천왕봉의 모습이다. 구름이 걷히며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는 천왕봉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 최기영

둘째 날 산행은 여유롭다. 중봉과 천왕봉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일부러 산행을 길게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대피소에서 늦잠을 자고 아침을 먹은 다음 천왕봉으로 향했다. 치밭목에서 천왕봉 가는 길은 몹시도 가파르다. 쉬엄쉬엄 숲을 헤치며 써리봉(1685m)을 지나 지리산 중봉(1874m)에 도착했다. 그러자 그렇게도 그리웠던 지리산의 산세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도 높고 커다란 천왕봉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가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이란….

나는 그날 아무도 없는 중봉에서 1시간도 넘게 머무르며 흘러가는 구름에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천왕봉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서서히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왕봉에서 본 지리산 봉우리들. 바람에 흐르는 구름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자맥질이라도 하는 것 같다 ⓒ 최기영
천왕봉에서 본 지리산 봉우리들. 바람에 흐르는 구름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자맥질이라도 하는 것 같다 ⓒ 최기영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1915m)이다. 천왕봉에 오르니 아래에는 구름이 파도처럼 흐르고 있었고 지리산 봉우리들은 마치 자맥질이라도 하듯 그 파도에 잠겼다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구절초, 쑥부쟁이, 산오이풀 등 천왕봉에는 이미 가을을 알리는 야생화가 지천이었다.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니 이번에는 중봉이 구름에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숱하게 걸어 다녔던 지리산 주능선의 모습도 반갑다. 보통의 종주 일정이라면 마지막 날 일출을 보기 위해 천왕봉에 오른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북적북적해서 인증사진 한번 찍는 것도 힘들 정도인데 이날만큼은 여유롭게 곳곳을 다니며 천왕봉을 오랫동안 품을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산은 지리산이다. 

제석봉의 천년 고목이 가을 야생화와 어우러져 있다 ⓒ 최기영
제석봉의 천년 고목이 가을 야생화와 어우러져 있다 ⓒ 최기영

그렇게 천왕봉에 취해 머무르다 보니 땀으로 흠뻑 젖어 있던 온몸에 어느새 한기가 돌았다. 나는 천천히 제석봉을 거쳐 장터목으로 향했다. 지리산의 야생화와 어우러진 제석봉의 천년 고목도 여전했다. 휴가 시즌도 지난 평일인데도 장터목에는 제법 많은 산꾼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내일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천왕봉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도 하얗던 운해를 벌겋게 물들이며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로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장터목의 일몰이다. 그리도 하얗던 운무를 벌겋게 물들이며 깊고 깊은 지리산 계곡으로 태양이 떨어졌다 ⓒ 최기영
장터목의 일몰이다. 그리도 하얗던 운무를 벌겋게 물들이며 깊고 깊은 지리산 계곡으로 태양이 떨어졌다 ⓒ 최기영

천왕봉을 이미 다녀온 나는 다른 산꾼들보다 한가롭게 아침을 맞았다. 그러나 오늘은 지리산을 내려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지리산을 걷고 싶어 바로 하산을 하지 않고 세석 쪽으로 걸었다. 세석에 도착하기 직전 촛대봉에 올라 천왕봉과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종주 능선길을 멀뚱히 바라봤다. 저리도 다정한 산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하산이라니… 엿가락처럼 들러붙어 있던 미련을 뚝뚝 떼어내며 나는 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산을 찾는 이유는 산은 늘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든 찾아가도 산은 늘 그곳에서 우리들의 시리고 아픈 상처를 말없이 쓸어주곤 했다. 지리산은 유독 그랬다. 세상을 바꾸려다 좌절했던 사람도, 인연과의 이별에 심장을 다친 사람도, 굶주림과 세파에 쫓겼던 사람도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우리의 삶 속 절망의 끝에는 언제나 지리산이 있었다. 

저리도 끝없이 산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하산을 해야 했다. 우리네 사연을 다 담으려고 끝없이 지리산은 산길이 이어지고 있다 ⓒ 최기영
저리도 끝없이 산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하산을 해야 했다. 우리네 사연을 다 담으려고 끝없이 지리산은 산길이 이어지고 있다 ⓒ 최기영

'주황빛이나 주홍빛의 단풍들 사이에서 핏빛 선연한 그 단풍들은 수탉의 붉은 볏처럼 싱싱하게 돋아 보였다.……<중략>……피아골 단풍이 그리도 고운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했다. 먼 옛날로부터 그 골짜기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조정래 <태백산맥> 中에서

지리산은 이미 가을 정취가 물씬했다. 올해도 그곳에는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곧 벌겋게 피어날 것이다. 지리산의 산길과 봉우리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건, 우리 군상들의 수많은 사연과 한을 그렇게 모두 담아 두려고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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