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성결교회에는 박봉진 목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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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성결교회에는 박봉진 목사가 있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1.09.0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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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십자가와 씨름한 나의 신앙편력-1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나는 초등하교 4학년 때 같은 반 동무의 몇 번의 권유를 뿌리치기가 어려워서 인심 쓰는 기분으로  이웃동네에 있는 교회의 주일학교에 따라 나갔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예수가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졌다거나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황당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몇 번 나가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올라왔는데,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는 순천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동무를 따라 그의 친척집으로 갔다. 그런데 마침 예수 믿는 집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그 집의 영향으로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가 혜화동에 있는 혜성교회였다. 오택관 목사가 개척한 교회인데 내가 나갔을 때는 오 목사는 6·25동란 중에 이북으로 납치되어갔고 그 후임으로는 그 교회의 사찰로 있다가 목사가 된 정 아무개가 담임하고 있었다.

그 목사는 무식했다. 고등학교나 제대로 나왔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때 우리는 고향동무 셋이 한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주일이면 오전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그 목사가 한 설교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일로 열을 올리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래도 교회이니 예수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선포하기는 했을 터인데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몇 년 후에 나를 교회로 인도한 집 가족이 모두 혜화동교회로 옮겼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따라 교회를 옮겼다. 혜화동교회는 1947년 이른 봄, 명륜동 입구에 있는 선학례 집사의 집에서 7명의 교인이 모여 개척예배를 드렸다. 홍순균 전도사가 부임한 후 교회가 점차 안정되고 교세도 불어나자 주일예배는 옆에 있는 사진관을 빌려 드리다가, 그곳도 비좁아지자 다시 명륜동 입구에 있는 박소아과병원 2층을 빌려 <명륜동교회>라는 간판을 붙였다. 그리고 1948년에는 혜화동에 자리를 잡고 50평의 건물을 지었다. 홍 전도사는 1950년 5월 말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자 전북 김제군에 있는 부용교회로 전임해가고 그 후임으로 공주교회에서 시무하던 정진경 전도사가 부임해왔다. 그러나 부임 한 달이 채 안되어 6·25동란이 터졌다.

그는 피난지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1952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울이 수복되자 바로 올라와서 혜화동교회에서 다시 목회를 시작했는데 교세가 늘어나자 교회당을 20평 증축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1956년 3월 25일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후임으로는 안성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정호 목사가 부임해 왔다. 
 
1962년에 내가 그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도 김정호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었다. 김 목사는 1960년부터 2년 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제15∼16대 총회장을 역임한 교단의 중진 목사였다. 그러나 그의 교단 내 위상과는 달리 교회 내부에서는 신인숙 전도사와의 불화로 목회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신 전도사는 원래 감리교회의 전도사였는데 상처(喪妻)한 성결교회의 박봉진 목사와 결혼하면서 교적을 성결교회로 옮겼다. 그 후 남편인 박 목사가 일제 치하에서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1943년 5월 24일, 조선총독부는 성결교회의 목사 전원과 장로, 전도사, 집사 등 300여 명을 전국 경찰서로 연행하여 일본 국체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30여 종의 성결교회 교리에 대하여 심문했다. 그런데 서울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된 이명직 목사 등 지도급 목사 6인은 7개월 후인 동년 12월 29일에 경찰이 작성한 <성결교 해산명령서>에 서명하고 만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교리로서 신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고조하여 왔는데 재림의 항은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못할뿐더러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트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이다. 성서는 (그 뿌리를) 유태사상에 두어 우리 국체의 본의에 배반하는 치명적 결함을 포장하는 것으로서 이로부터 이탈하지 못한다면 완전한 국민종교로서 성립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현 시국에 감하여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자발적으로 해체하였다.” 

 이 성명서를 보면서 참으로 허망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보다 5년 전인 1938년 12월 12일, 일제의 강요로 성결교회의 이명직 목사는 장로교회의 홍택기 목사, 김길창 목사, 감리교회의 양주삼 목사, 김종우 목사와 함께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했다. 그리고 “소극적이며 현실적으로 교단과 신학교를 지켜 나가려 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현실의 파도를 타고 신앙, 전도, 집회, 교회 설립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오직 그 하나의 목적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신앙정조를 버리고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이제 그 유일한 목표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마당에 차라리 강제해산을 당하지, 구약성서와 재림교리까지 부인하면서 자진해산 형식의 문서에 서명했는가 하는 서글픔이 남는다. 
 
그러나 7개월 동안 얼마나 심한 고초를 당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들을 비난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혹독한 고초를 이겨낸 사람이 여기 있다. 당시 철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박봉진 목사다. 해산명령서에 서명한 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풀려났는데 그는 풀려나지 못했다. 서산의 정재학 목사, 군위의 최현 목사, 삼천포의 천세광 목사는 1년의 옥고 끝에 풀려났는데 그때도 단 한 사람 박 목사는 풀려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44년 8월 10일 철원경찰서는 박 목사의 부인인 신인숙 전도사를 불러, 갖은 악형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인 박 목사를 내어주면서 입원시키라고 하였다. 철원도립병원에 입원하자 내과의사 홍종기 씨가 심한 언어장애로 말을 못하는 박 목사를 진찰하고  1주간을 성심껏 치료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8월 15일 새벽에 박 목사는 “헛된 세상 오래 살면 뭘 하나.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이 유언은 부인 신 씨와 의사 홍 씨가 들었다. 
 
경찰은 다른 목사들은 모두 풀어주면서 왜 박 목사만 사경을 헤맬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해주는 자료는 없다. 경찰에 연행된 후에 밀폐된 유치장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순교를 “병사지 무슨 순교냐”고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논리는 경찰이 다른 사람은 다 풀어주면서 박 목사만 사망 직전까지 풀어주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성결교 해산명령서>의 내용으로 보아 재림교리와 구약성서가 일본의 국체와 상치되므로 이를 주장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는 경찰의 다그침에 그는 끝까지 “아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한 자세로 일관하다가 옥사나 다름없는 죽음을 당했다면 분명히 순교 아닌가? 조금만 지혜롭게 대답했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터인데 미련해서 그렇게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 말대로 사는 사람만 세상에 산다면 순교자는 한 사람도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장로교회에 주기철 목사가 있듯이 성결교회에는 박봉진 목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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