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추진협의회] 독재세력 종식 가져온 '야권연합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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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추진협의회] 독재세력 종식 가져온 '야권연합의 요람'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9.17 22: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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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1984년 그날,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결단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시사오늘〉의 아홉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반(反)군부·민주화 세력 통합의 요람, 민추협의 탄생 과정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시사오늘〉의 아홉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반(反)군부·민주화 세력 통합의 요람, 민추협의 탄생 과정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1985년 2월 총선,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줄기의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이름하야 ‘신한민주당(신민당) 돌풍’이었다. 12대 총선에서 ‘선명야당’을 내세우며 관제야당인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떠오른 신민당. 신민당 돌풍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투쟁에 힘을 더했고, 마침내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대한민국 정치 흐름을 바꿔버린 신민당 돌풍. 이 신민당의 뿌리에는 '반(反)전두환' 신념으로 모인 재야정치인들의 단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있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아홉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반(反)군부 민주화 세력 통합의 요람, 민추협의 탄생 과정이다.

 

1983.05.18.~1983.06.08. 김영삼의 단식투쟁

1979년 12월 12일 발생한 전두환의 군사 쿠테타로, 정국은 깊은 소용돌이에 빠졌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재야인사들은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침묵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1980년 5·17 비상계엄 조치는 전국으로 확대됐고, 다음날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대유혈사태까지 발생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1981년 2월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연임했다. 한국 민주화 역사에서 ‘좌절의 시기’였다. 가택 연금을 당하던 김영삼과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은 물론, 박정희 군부세력의 최측근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마저도 일신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나날이었다.

망명 생활 중에 한국에서는 나에 대한 소문이 끊임없이 생산되어 유통되었다. 근거 없는 소문들은 바다 건너 미국에까지 들려왔다. 고급 아파트에서 호화 생활을 하고, 커다란 루비 반지를 끼고 다닌다는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뜬소문들은 정보기관에서 치밀하게 만들어 흘렸을 것이다. 실제로는 내가 살던 아파트는 월세 900달러짜리 셋집이었고, 내가 끼고 다니는 루비 반지는 하버드 대학 학생들이 끼는 평범한 것이었다.

군사 정권은 나에게 “과격하다”, “용공이다”, “거짓말쟁이다”며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나를 음해하고 내 명예를 한없이 추락시켰다. 나는 살아오면서 저들의 탄압보다 국민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것이 더 무섭고 괴로웠다. 전혀 사실이 아님에도 나에 대한 거짓이 사실처럼 굴러다니는 것에 정말로 가슴이 아팠다. 그건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었다. 나 홀로 골병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 인격에 대한 비열한 테러였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77~478쪽.

1983~1986년 나는 오랜 기간 미국에서 머물며 지냈다.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었기 때문에 국내에선 옴짝달싹할 수 없던 시기였다. 나는 조용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종필 증언록 2권, 122쪽.

이때, 김영삼이 긴 침묵을 깨기 시작한다. 1983년 5월 18일, 5·18 광주항쟁 3주기를 맞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에 들어선 것이다.

김영삼은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들의 복직 △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 수용과 야당인사 석방 등 민주화 5개항을 주장하며 상도동 자택에서 무려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시도한다. 

그의 투쟁은 내란음모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미국으로 망명생활 중이던 김대중과, 재야에 숨죽여 살던 민주화 투사들의 열망에 불을 붙였다. 

김영삼은 단식을 고리로 미국의 김대중과 야권연대에 대한 협의를 이룰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양김은 검열을 피해 조신스럽게 서신으로 교감하며 민주화 투쟁에 대한 결의를 다진다.

한편 단식은 나와 김대중 사이에 다시 연대를 맺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식 직후인 1983년 여름, 한 재미교포가 나에게 문안을 왔다. 나는 그를 통해 미국의 김대중에게 전갈을 보냈다. 8·15광복절을 기해 공동성명을 발표하자는 제안이었다. 성명문안은 국내보다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처지인 김대중에게 작성을 일임한다는 편지와 함께 내 서명을 넣은 백지를 동봉하여 보냈다. 서신 왕래조차 보이지 않는 검열의 눈길을 피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도리어 나에게 성명문안을 작성해 달라고 다시 연락해 왔다. 시간도 촉박했고 부자유스러운 상태에 있었지만, 결국 내가 문안을 작성해서 워싱턴으로 보내야 했다. 이렇게 해서 1983년 8·15광복절에 ‘민주화투쟁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는 제목의 긴 성명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오전 9시 내가 발표한 성명에는 ‘서울에서 김영삼, 워싱턴에서 김대중’이라는 서명이 실렸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82쪽.

6월 1일 이민우, 조윤형, 김상현, 김덕룡, 이기택, 황낙주, 박용만, 최형우, 김녹영, 김정두, 홍영기, 이중재 등 전·현직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58명의 인사들이 김영삼과의 연대투쟁을 선언했고, 이들이 101명의 서명을 받아 훗날 민추협의 뼈대를 이루는 ‘민주화추진 범국민단체’를 구성한다. 

김영삼의 죽음으로 인한 시민혁명의 폭발을 두려워했던 전두환은 민주정의당 권익현 사무총장을 보내 “가택 연금을 해제해주겠다”, “해외에 잠깐 있다 오시라”며 수차례 단식 중단을 설득했지만, 김영삼은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라”며 단호히 거절한다.

 

1983.06.09. 단식투쟁 종료

언론은 군부의 탄압으로 오랫동안 침묵했지만, 김영삼의 단식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은 일일이 전화로 외신 기자들에게 단식 사실을 알렸고, 상도동계 인사들을 비롯해 미국에 있던 김대중도 단식 투쟁 알리기에 나섰다. 김대중은 6월 4일 70여 명의 교포들과 함께 워싱턴 한국대사관에서 백악관까지 ‘김영삼을 구출하라’는 팻말을 들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단식 22일째인 6월 9일, 김영삼은 건강 악화로 인해 병상에 누워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비록 그가 요구했던 5개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가택 연금 해제와 더불어 야권 인사들의 각성을 가져왔다는 평가다.

나의 단식은 1980년대의 한국정치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민추협(民推協)과 신민당(新民黨)을 조직해 가는 과정이 잘 풀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단식 덕분이었다. 단식은 나에게는 용기를 다른 야권 인사들에게는 각성을 주었던 것이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79쪽.

YS의 23일간의 단식투쟁은 야권 인사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켜 야권 통합론에 불을 붙였다는 평가다.ⓒ김영삼자서전
YS의 23일간의 단식투쟁은 야권 인사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켜 야권 통합론에 불을 붙였다는 평가다.ⓒ김영삼자서전

1983.07.01.~1984.05.17. 민추협 협의 과정

연금이 해제된 김영삼은 민주화의 실질적 실현을 위해선 야권 연대가 필수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동교동계 인사이자 김대중의 측근이던 김상현을 만나, 대통령직선제 쟁취를 위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연합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며 ‘범야권연대’ 구성을 제안한다. ‘서울의 봄’ 이후 또 한 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영삼은 필사적으로 동교동계를 설득하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공동 참여해야만 한다.” 

나는 소위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단식 후유증을 어느 정도 극복한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야권의 단합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1983년 7월, 나는 김대중의 측근인 김상현을 만나 민주화운동을 함께 벌이자고 제의했다.

범야권 연합의 민주화투쟁 기구를 만들자는 나의 제의를 받은 동교동계에서는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박영록·김종완·박종태 등은 나와의 연대를 반대했고, 김상현·조연하·김녹영·박종률 등은 공동전선 구축을 주장했다. (중략) 1984년 들어 나는 새로운 민주화투쟁 기구 발족을 위해 8인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협의에 나섰다. 8인위원회에는 내 쪽에서 나와 이민우·김명윤·최형우, 김대중 쪽에서 김상현·조연하·김녹영·예춘호가 대표 자격으로 참가,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결성에 합의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87쪽.

전두환 정권은 민추협의 시작부터 그들을 막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민추협에 참여 서명을 하려던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찾아가 핍박했으며, 1980년 제정된 정치활동 규제법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근거로 압박했다. 

그러나 민추협을 만들기까지 참으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전두환 정권의 핍박으로 곤욕을 치르거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누구를 만나서 민추협 동참 성명을 받으면 그 사람은 당장 어딘가로 불려갔다. 서명을 하고도 안 한 걸로 해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서명하기로 약속하고는 해외로 나가 버린 사람도 있었다. 내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에까지 찾아갔는데도 자리를 피해 버린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지금도 정치일선에 남아 있다. 민추협 발기인 서명용지를 보면 먹으로 지운 명단이 상당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서명용지가 걸레가 되다시피 했을까.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87쪽.

그러나 민추협 결성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괴롭힘이 아니었다.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를 자랑하던 김영삼의 상도동과 김대중의 동교동, 두 계파의 합심(合心) 그 자체였다. 

몇몇 동교동계, 그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은 민추협 결성에 소극적이었으며 때론 부정적이었다. 이는 김대중 자서전엔 적혀 있지 않은 ‘숨겨진 사실’이다. 김대중의 자서전에는 그의 해외 망명 시절 고생담과, 1984년 5월 18일 민추협 발족 선언 이후의 상황만 묘사돼 있을 뿐이다. 

실제로 김대중을 대신해서 8인위원회에 참여한 후 민추협을 이끌었던 동교동계 정치인 김상현은 2009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동교동계만의 독자 노선을 만들라”며 김영삼과의 연대를 처음부터 반대했으며, 권노갑·한화갑·김옥두 등 동교동 핵심 중진들도 “선장(DJ)이 없는 상태에서 김영삼에게 붙으면 조직(동교동)이 와해된다”고 김상현을 말렸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민추협 구성에 반대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을 선언했을 때인데, 저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만나 정치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민주화추진 간담회’로 이름을 정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구국’과 ‘투쟁’ 두 단어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구국투쟁동지회’라고 하자고 했었습니다. 결국 명칭은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됐지요.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앞장서야 민주세력이 활성화된다고 여겼지만 미국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YS하고 손잡지 마라’며 저를 말렸습니다.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같은 동교동계 가신그룹은 민추협에 참여를 안 했지요.” - 김상현 2009년 본지와의 인터뷰 中 발췌

결국 민추협 발족은 양김 중 김영삼의 몫으로만 남은, 그의 업(業)이었다. 

김영삼은 ‘반(反)신군부’라는 기치 아래, 범야권연대를 완전하게 구성하기 위해서 박정희 세력이던 구 공화당계 출신 박찬종 등을 포용했다. 그 과정에서 김종필에게도 손을 내밀었지만, 김종필은 당시 정치규제법을 이유로 거절한다.

나는 1983년 10월 귀국했다. 1980년 5·17 이후 숨죽이고 있던 야권이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는 김대중 씨의 측근인 김상현과 손잡고 범야권 연합체 결성에 나섰다. 1984년 5월 발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였다. YS는 내게도 민추협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보내왔다. 구 공화당계로서 민추협에 가담한 중진 의원이 청구동으로 찾아와 같이 여기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사양했다. 나를 포함한 3김이 아직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여 있을 때였다. 1980년 11월 만든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른 규제였다. 악법도 법이고 법은 지켜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었다.
-김종필 증언록 2권, 125쪽.

 

1984.05.18.~1984.06.14. 민추협 발족 및 결성대회

마침내 김영삼의 ‘야권연대’라는 염원이 담긴 민추협이 닻을 올렸다. 민추협 결성식은 김영삼 단식투쟁 1주년이자, 광주민주화운동 4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신군부의 정치 탄압으로 언론은 침묵했지만, 동교동계 김녹영 전 의원의 ‘민주화투쟁선언문’ 낭독은 정권 교체를 열망하며 서울 외교구락부에 모인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우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진 절대적 사명임과 민주주의는 오직 국민의 투쟁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임을 선언한다. (중략) 우리는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군부독재를 청산해서,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민주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한다.”

민추협의 지분은 철저히 ‘5대5’ 원칙을 따랐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공동의장으로 취임했고,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을 대리하여 김상현이 공동의장 대행직을 맡았다. 최고의결기구 운영위원 10명 역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각자 5명씩 나눠 가졌다. 차후 발생할 수 있는 권력 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국에서는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을 선언했다. 그리고 6월 14일 결성 대회를 가졌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임원을 철저하게 반분했다. 김영삼 씨가 공동의장에, 나를 대신하여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에 취임했다. 그리고 망명 중인 나는 고문직을 맡았다. 민추협의 탄생은 독재의 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김대중 자서전 1권, 480쪽.

5월 18일 발족을 선언한 민추협은 인선 등 준비작업을 거쳐 1984년 6월 14일 결성대회를 가졌다. 이 날 민추협은 지도부와 운영위원(1차) 64명을 발표했다. 민추협의 지도부는 내가 공동의장, 김대중은 고문, 김상현은 공동의장대리로 했고, 김대중이 귀국하면 공동의장을 맡기로 했다. 최고의결기구인 10인 운영위 소위(小委)는 김명윤·이민우·윤혁표·김동영·최형우(이상 상도동계), 조연하·김녹영·박종률·박성철·김윤식(이상 동교동계) 등으로 구성됐다. (중략) 민추협은 각 도별로 지부를 설치,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성명 발표나 기자회견 등을 통해서 민주화운동을 펴 나갔는데, 인권변호사들이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의 언론탄압으로 국내언론에는 이러한 사실이 전혀 보도되지 않아 민추협의 활동에는 애로가 있었다. 외신이나 유인물을 통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 활동상이 알려졌던 것이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90~291쪽.

당시 민추협 참여를 거부했던 김종필은 “나에겐 나의 길이 있다”고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뒤로 비켜서 있었다. 뛰거나 걷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나는 칩거했고 어느 땐 누워 있었다. 나의 그런 처신을 놓고 민주화 투쟁에 힘을 보태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옛 공화당 동지 몇몇은 내가 정치 재기의 기회를 놓칠까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YS·DJ에겐 그들의 길이 있고 나에겐 나의 길이 있었다. 꼭 그들과 함께 뛰고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종필 증언록 2권, 127쪽.

한편 민주협은 둥지를 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들은 변변한 사무실조차 구하지 못하고 이 건물 저 건물을 옮겨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의 협박을 받은 종로의 건물주들은 민추협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저었고, 민추협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건물을 얻었다가 나중에 계약해지를 통보받고 쫓겨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어렵사리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대왕빌딩에서 사무실 한 칸을 얻었다. 이마저도 김영삼의 비서인 홍인길 이름을 빌려 얻은 옥탑방이었다. 그러나 민추협 사무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물주가 사무실을 뒤집어엎고 출입문을 자물쇠로 폐쇄하는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사무실을 얻어 입주하는 데도 파란이 많았다. 전두환이 민추협의 활동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건물주들에게 사무실을 주지 말라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1984년 6월 초 민추협은 비밀리에 서울 관철동 대왕빌딩 13층에 어렵사리 사무실을 냈다. 사무실이라고 하지만 12층 건물의 옥상에 지어진 가건물이었는데, 내가 비서인 홍인길(洪仁吉)을 시켜 그의 이름으로 사무실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자 들통이 났다. 민추협이라는 것을 안 건물주는 임대보증금까지 받았음에도 일방적으로 해약을 통보하고는, 책상·의자·전화기 등 집기를 모두 들어내고 사무실 출입문을 폐쇄시켜 버렸다. 물론 그것은 건물주의 뜻이 아니라 정보부의 뜻이었다. 그래서 민추협 사무실 개소식을 하던 7월 12일에는 출입문 자물쇠를 뜯어내고 들어가야 했다. (중략) 이 때문에 민추협 출범 초기의 두 여 달 동안은 텅 빈 사무실 바닥에 비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회의를 진행해야 했고, 일명 ‘돗자리 회의’라는 말까지 나왔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92~293쪽.

 

1984.11.30. 3차 해금조치

12대 총선이 세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정계의 초점은 정치인의 해금(解禁) 문제로 쏠렸다. 해금이 돼야 민추협 인사들이 총선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 11월 30일에 있을 ‘3차 해금 조치’ 명단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둘을 비롯해 김종필, 이후락, 오치성, 김창근, 성낙현, 이철희 등 5명의 박정희계 정치인들과 김상현, 홍영기, 김명윤, 김윤식, 윤혁표, 김덕룡 등 6명의 민주계 정치인은 3차 명단에 없었다. 결국 ‘3김’은 12대 총선에 강제로 참여할 수 없게 됐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정국의 초점은 해금문제로 모아졌다. 1980년 11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으로 567명이 정치활동 규제를 받아 온 이래 1, 2차에 걸친 해금이 있었지만, 1984년 11월까지 99명이 여전히 정치활동 피규제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중략) 미해금자 중 김종필·이후락 등 부정축재로 규제된 6명을 제외하면 모두 민추협 소속 정치인이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은 미해금자의 명단에 끼어 있었다. 이때가 12대 총선을 불과 70여일 앞둔 시점이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94쪽.

노태우는 전두환의 3차 해금조치는 민정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전두환은 ‘절반의 해금조치’를 통해 김영삼과 김대중의 야당이 총선에 참여하게 되면 고작 제3당에 머무를 것이고, 나아가 민주화 세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속단한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이른바 구(舊)정치인들을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 놓은 1984년 11월 30일에 풀어 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하면 야권(野圈)이 강경 신민당과 온건 민한당으로 분열되어 민정당(民正黨)이 압승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통령 참모들은, 김영삼·김대중 씨가 지원하는 신민당이 민한당에 이어 제3당이 되면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계산하기도 했다.
-노태우 회고록 上권, 295쪽.

총선을 두고 ‘반군부’라는 거대한 틀로 묶여 있던 민추협의 내분도 시작됐다. 정치규제에 묶이지 않은 사람들만이라도 총선에 참여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로써 정권을 심판하자는 ‘참여파’와, 선거에 참여해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만 부여해주는 ‘들러리’ 역할로는 설 수 없다는 ‘거부파’로 나뉜 것이다.

둘의 분쟁에선 결국 ‘참여파’가 승기를 잡았다. 민추협은 신당을 만들어 ‘어용야당’, ‘관제야당’이 아닌 제대로 된 야당, 즉 ‘선명야당’으로 선거에 도전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민추협의 신당참여 문제는 선거참여와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선거 거부파와 참여파의 양론은 팽팽했다. 거부파는 총선참여 자체가 전두환 정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당시의 선거제도나 촉박한 일정으로 볼 때 선거에 참여해도 참패가 분명해 결과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들러리를 서 주는 꼴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참여파에서는 “총선에 불참하더라도 현재의 언론구조 아래에서는 효과적인 거부운동이 불가능하다”, “총선거부란 선언적 의미밖에 못 갖는 것이며 총선을 통한 민주화투쟁이 훨씬 적극적인 대응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민주화의 불씨를 겨우 살려 민추협을 만들었는데, 총선참여를 놓고 의견이 갈리면서 갈등양상까지 빚어졌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비록 나 자신은 정치규제로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명실상부한 야당을 창당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국민에게 전두환 정권을 공개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시일이 촉박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억눌려 온 우리 국민들은 전두환에 대한 분노를 표출시킬 기회만 마련된다면 엄청난 힘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 신당(新黨)창당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95쪽.

그런데 여기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진술이 엇갈린다. 김영삼은 김대중이 처음부터 ‘총선 거부파’였다고 주장한다.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애당초 민추협이 신당을 창당하고 총선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총선참여는 이미 대세였다.
 
민추협은 새로이 건설되어야 할 신당의 요건을 세 가지로 압축하였다. 첫째는 민주세력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둘째는 민주투쟁을 전개하는 정당이어야 하며, 셋째로 노동자·농민·청년학생·종교인·지식인 등 민주통일 운동권과의 연대를 지속·강화시키고 대변하는 정당이어야 한다는 등이 그 내용이다.

신당창당에 모여든 세력은 크게 민추협 세력과 비(非)민추협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민추협은 나와 김대중계로 나누어졌고, 비민추협은 이청승계·신도환계·김재광계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렇게 내부는 복잡한 갈래와 계보관계로 얽혀 있었지만, 모두의 마음 속에는 “또다시 분파작용을 재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96~297쪽.

반면 김대중은 본인의 이견(異見) 없이, 일련의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총선 참여를 위한 신당 창당으로 이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와 당을 도우려 했다고 반박한다. 
 

그래도 정치인의 해금 조치는 새로운 기운을 움트게 했다. 자연스럽게 신당 창당을 거론했다. 사실 당시의 민한당이나 국민당은 관제 야당이었다. 민추협을 모체로 해서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다. 12월 11일 나와 김영삼 공동 의장, 김상현 공동의장 대행의 명의로 민추협의 신당 창당과 총선 참여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민한당 소속이었던 의원들이 신당에 합류하려 대거 탈당했다.

나는 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일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나의 귀국이 총선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 상황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동지들이 직간접적으로 내 신변의 위험을 걱정하면서도 귀국 자체가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해 왔다. 그렇다면 선거 전에 조국의 땅을 밟아야 했다. 나는 2월 8일 서울에 들어가기로 했다.
-김대중 자서전 1권, 483~484쪽.

한편, 전두환은 급작스럽게 노태우를 불러 12대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구나 대구 지역에 출마할 것을 제안한다. ‘민추협 신당’인 신민당을 견제한 움직임이었다. 이에 노태우는 한 차례 출마를 고사했으나, 전두환이 전국구 의원을 권하자 결국 수락했다. 다만 노태우는 그의 저서를 통해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올림픽 성공의 사명을 가지고 출마했다”며 선을 긋고 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서울올림픽 준비에 모든 정력을 쏟고 있던 1985년 초, 전두환 대통령은 내게 12대 총선(總選)에 출마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12·12’ 이후의 시대 상황은 군인으로 생애를 끝내고 싶어 했던 많은 이들을 다른 운명의 길로 몰아가고 있었다.
 
전(全) 대통령은 그 전에 몇 차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제2인자로 보고 있소”라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그 말이 좋게 들리지를 않았다. 나는 자문(自問)해 보았다. 

‘내가 무엇을 바라고 일하고 있는가? 세상이 2인자라고 하니 1인자의 자리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다’고 생각했다. (중략) 정치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서울올림픽 준비에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할 시기에 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정을 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전(全) 대통령에게 지역구를 맡을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왜? 지역구에 자신이 없는가? 지금 살고 있는 서대문에서 한번 출마해 보라. 아니면 출생지인 대구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큰 인물이니 그래도 대구보다는 서울이 나을 것이다. 지역구를 통해 정치인의 코스를 밟기를 바라니 깊게 생각해 보시오.”

이런저런 연유 끝에 결국은 전국구로 낙착되었다. 나는 전국구 의원을 하는 것이 올림픽 준비를 차질 없이 추진하는 데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해서 ‘정치는 정치 프로가 하는 것이고, 나의 사명은 올림픽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국구 후보로 지명된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취약 지역구를 지원했다. (중략)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올림픽 업무에 선거까지 겹치다 보니 연간 힘들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 上권, 292~294쪽.

민주화추진협의회 개소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 ⓒ 김영삼민주센터
민주화추진협의회 개소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 ⓒ 김영삼민주센터

1985.02.12. 12대 총선

전두환의 염원은 산산조각 났다. 개표 결과,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는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12대 총선 직전 이민우 당 총재에게 “정치 1번지를 신민당이 차지할 수 있다면 ‘야당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며 종로 출마를 종용했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 전 총재의 종로 출마는 ‘신민당 돌풍’을 불러와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획득하며 제1야당으로 도약했다. 신민당은 서울·부산·인천 등 대도시에서 승리를 거두고 향후 정치민주화를 가져오는 ‘태풍의 눈’이 됐다. ‘관제야당’ 민한당이 전국구 포함 35석을 차지한 것에 비해, 신민당은 67석이라는 두 배에 가까운 성과를 보였다.

과거 전두환 정권하에서 치러진 각종 선거는 정권의 개입과 협박, 매수로 얼룩져 있었고, 국민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도 점차 커지던 때였다. 이 상황에서 실시된 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을 결집시키는 기폭제이자, 나아가 1987년 6월 10일 발생한 민주화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김영삼은 이를 ‘선거혁명’으로 칭하며, 이 모든 동력은 자신의 단식 투쟁과 민주산악회, 민추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자평하는 등 몹시 고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마침내 1985년 2월 12일 투표함이 열리자 정부·여당은 경악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신민당이 예상을 뒤엎고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1월 18일 창당한 지 불과 25일 만에 얻은 눈부신 성과였다. ‘선거혁명’ 바로 그것이었다. (중략) 12대 총선에 폭발한 민심의 위력은 관제야당이던 민한당의 붕괴를 가져왔다. 민한당 당선자 35명 중 29명이 총선 2개월도 채 못 된 4월 3일 민한당을 탈당해서 신민당에 개별 입당했다. 결국 총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민당은 일약 103석의 거대야당으로 도약했다. 

(중략)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했고,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언론에서는 “2·12총선은 김영삼의 작품”이라고 보도했다. 

야권이 정치적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것은 나의 단식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내가 심혈을 기울인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은 신민당의 산파 노릇을 했다. 그 신민당이 선거투쟁에 참여가, 2·12총선에서 선거혁명을 성공시킨 데 대해 나는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04~305쪽.

반면 김대중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귀국했던 일이 ‘신민당 바람’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면서, “목숨을 건 나의 귀국이 민주 세력의 야성을 일깨웠다”고 언급한다.

선거 나흘 전이었지만 나의 귀국은 바람이었다. 총선은 예측 불허의 격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귀국 이후 나에 대한 가택 연금은 신당 후보들에게는 현장 유세 이상의 위력이 있었다. 강제로 망명의 길을 떠났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다시 귀국했다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유권자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폭풍의 귀국’은 선거 정국의 폭풍이었다. 신당 후보의 연단에서는 예외 없이 내 이야기가 나왔다. 충청도에서도, 경상도에서도 내 이름을 외쳤다. 어떤 후보는 나를 단독으로 만나 시국을 논의했다고 과장해서 말하기도 했다.

(중략) 국민도 정부 여당도 그리고 신민당 내부에서도 믿기지 않은 야당의 선전이었다. 참다운 야당 출현을 국민들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민주화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알 수 있었다. 헌법을 바꿔서 직접 ‘우리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 표심(票心)이었다. 결국 목숨을 건 나의 귀국은 국민들의 민주 의식과 민주 세력의 야성을 일깨웠다.
-김대중 자서전 1권, 492~493쪽.

여당인 민정당 소속으로 출마해 전국구 의원에 당선된 노태우는 “제5공화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라며 “12대 총선이 불러온 대통령 직선제가 나를 역사의 무대 한복판으로 불러내었다”고 후술한다.

‘여당 참패’라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당을 정비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야당과 재야(在野) 세력이 강력한 여론과 호의적인 언론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는 정치구도가 형성되었다. 제5공화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선거결과는 이런 계산을 뒤엎어 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 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생애를 건 투쟁을 해온 김대중·김영삼 씨가 비록 정치활동은 금지당하고 있었으나 선거 투쟁의 사령탑이었다. 김영삼 씨는 1983년 2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야권을 결속시켰고, 김대중 씨는 투표 직전 귀국을 강행했다. 두 김(金) 씨가 5년 만에 한국의 정치판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때까지 민정당의 정국(政局) 파트너였던 온건 야당 민한당은 선거 지구 신민당에 흡수되고 말았다. 2·12 총선을 이렇게 하여 민주화를 한국 사회의 대세(大勢)로 만들었다. 12대 총선은 한국 현대사가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分水嶺)이었다. 이 선거는 또 나를 역사의 무대 한복판으로 불러내었다.
-노태우 회고록 上권, 294~296쪽.

 

"민추협 성공, 야권 각성 덕분… 정당 매몰되지 않고 시대정신 위해 뭉쳐야"

민추협으로 시작한 신민당은 이처럼 12대 총선에서 정치사를 새로 썼다.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해 노력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1987년 6월 항쟁이 펼쳐졌으며, 노태우의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29 선언’을 얻어내기도 했다.

신군부의 장기집권을 위해 ‘패권정당제’를 수립하려 했던 전두환의 시도는, 분열되었던 야권이 통합을 이룬 덕분에 좌절될 수 있었던 셈이다.

민추협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던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이날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민추협은 당대 두 세력인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우리의 분열로 독재세력이 나라를 엉망으로 유린할 수 있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그들의 분열에 기생했던 신군부를 막기 위해, 야권은 대의를 내세워 민추협으로 ‘통합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은 또다시 분열함으로써 결국 노태우를 당선시키며 선거에 패배하고 만다. 이는 야권의 ‘통합필승론’ 공식을 뒷받침하는 역사다.

그런 민추협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足跡)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덕룡 수석부의장은 “그 당시 시대정신은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국민이 내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있었다”며 “민추협은 정치인들이 계파나 정당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국민이 요구한 시대정신을 위해 하나가 됐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날 통화에서 기자에게 “지금처럼 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이 요구하는 방향과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정치인들의 통합 정신을 강조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야권의 잦은 분열과 통합의 반복이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여야를 불문하고 분열과 통합을 거듭했기 때문에 정당은 정체성을 확립할 시기가 없었고, 국민들 또한 정당일체감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시각에서다.

이와 관련해 강상호 국민대 교수도 지난 16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시대정신을 담아낼 가치 중심이 아닌 선거를 위한 정치 공학적 연대는 감동을 줄 수 없다. 현안별 반대 입장만 부각하기보다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 국민에 신뢰를 주는 노력이 먼저 선행돼야 할 것”이라며 시대정신에 부합한 야권연대를의 필요성을 조언한 바 있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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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주 2019-09-18 16:06:20
시사오늘 회고록 읽는 재미가 있어요
정치에 관심 없지만 읽을때마다 새롭스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