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된 세입자 지위향상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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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색된 세입자 지위향상 정책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9.09.18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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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조국 정국 속 태풍에 휘말리듯 발표된 주택 임차인 계약갱신청구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18일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주택 임차인 계약갱신청구권을 보장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과 '사법개혁·법무개혁 당정 협의'를 가진 뒤 브리핑을 열고 "주택 임차인의 안정적 임차 기간 보장을 위해, 상가 임차인에게만 보장된 임대차 계약갱신청구권을 주택 임차인에게도 보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현행법에서는 상가 임차인에게만 최장 10년의 계약갱신청구권을 보장하고 있다. 임차인이 계약 만료 1~6개월 전 계약갱신을 요구하면 임대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거절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당정은 이를 주택 임차인에게도 적용, 최장 2년 간 보호되는 전월세 거주 기간을 최장 4년까지 보호되도록 법제화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구체적인 도입 시기나 방식은 공개되지 않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예방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조국 법무부 장관이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예방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주택 임차인 계약갱신청구권은 임차인 지위가 현저히 낮은 국내 실정상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다. 우리나라는 계약갱신청구권은 물론, 공정·표준임대료, 임대료 분쟁조정 공적 기구 설치, 전월세상한제 등 선진국 대부분에 도입된 통상적인 임차인 보호책을 단 하나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

세계부동산시장조사업체 글로벌프로퍼티가이드(Global Property Guide·GPG)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대차 관련 제도(Landlord&Tenant Law)는 '임대인 우위'(Pro Landlord)로 평가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 임대인 우위에 속한 국가는 한국을 비롯해 영국, 체코, 슬로베니아, 그리고 '강한 임대인 우위'(Strongly Pro Landlord)인 일본 등 5개국에 불과하다.

이 같은 이유로 임차인 지위향상 정책은 매 선거마다 정치권의 주요 공약 중 하나였다.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가 대표적인 예다. 지난 19대 대선에서 두 부동산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약이자 민주당의 당론이었고,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등 다른 대권 주자들도 간판으로 내걸었던 사항이다.

소득 대비 과도하게 높은 집값과 임대료 문제로 국민 주거권 실현·보장이 요원한 현 상황에서 당정이 힘을 모아 계약갱신청구권을 도입키로 결정한 것은 분명 박수를 보낼 일이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선다. 겨우 빛을 보게 된 임차인 지위향상 정책이 빛바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권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신임 장관은 사실상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제1야당 대표는 국회가 아닌 거리로 나가 삭발 시위를 하는 시대착오적인 촌극이 연일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 조국 법무부 장관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조 장관은 당분간 전면에는 나서지 않는 행보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날 당정은 계약갱신청구권을 발표하면서 조 장관을 공개석상에서 앞세웠다. 아무리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법무부 소관이라도, 사법개혁·법무개혁 당정 협의 자리를 마친 뒤 진행된 브리핑이라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다. 더욱이 조 장관의 거취를 놓고 국민여론이 극과 극으로 분열된 시기다. 임차인 지위향상을 위한 중요한 정책이 국민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계약갱신청구권은 '조국표'라는 딱지가 붙어 국회에서 상당 기간 표류할 공산이 크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야당에게 반대할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20대 국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인 만큼, 자칫 21대 국회로 공이 넘어가게 되면 정책 추진동력이 떨어질 여지도 상당하다. 국민 주거권 실현과 보장이 또다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정부여당 내 적잖은 잡음도 예상된다. 주택 임차인 계약갱신청구권은 법무부 소관이지만 이를 일선현장에서 직접 관리하는 건 엄연히 국토교통부 업무다. 그러나 이날 브리핑 자리에서 김현미 국토부 장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표면적으로만 보면 당과 정, 그리고 각 부처 간 사전 조율과 협의과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석하기 충분한 장면이다. 얼마 전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를 두고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 장관이 불협화음을 낸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계약갱신청구권이 발표된 날 김 장관의 차기 총선 출마 여부를 놓고 민주당이 혼선을 빚은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김 장관의 불출마 관련 보도가 맞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렇게 알고 있다. 조 장관 청문회 과정에서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고 답했으나, 이날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에서는 "김 장관과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불출마 관련 기사는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6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당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조국 장관에게 정책 관련 질의를 하면서 띄운 피피티(PPT) 자료 화면 ⓒ YTN 캡처
지난 6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당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조국 장관에게 정책 관련 질의를 하면서 띄운 피피티(PPT) 자료 화면 ⓒ YTN 캡처

이쯤 되면 정부여당이 계약갱신청구권을 조 장관의 치적 쌓기용으로 활용한 게 아닌지 의문이 든다. '주택 임차인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은 조 장관이 후보자 때 제시한 정책 비전 중 하나다. 조 장관은 지난 청문회에서 "1인 가구와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며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을 위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정부 안으로 개정안을 발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약갱신청구권이 발표된 듯 하다. 국민 주거권 실현·보장을 위한 임차인 지위향상 정책이 조국 정국 속 태풍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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