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되짚기④] 유기홍 “4‧13 호헌 조치가 임계점 건드렸다”
[6월 항쟁 되짚기④] 유기홍 “4‧13 호헌 조치가 임계점 건드렸다”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9.25 17: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전 국회의원
“민청련과 학생운동을 연결한 연결책이 나였다”
“김근태는 민청련의 두꺼비, 6월 항쟁의 거름 됐다”
“10‧26도 6월 항쟁도 예상 못했다…놀라운 대중의 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6월 항쟁 되짚기 네번째는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전 의원의 '4·3 호헌조치가 결정타' 편이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6월 항쟁 되짚기 네번째는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전 의원의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 편이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때때로 몹쓸 습관, 고질병과도 같게 느껴진다. 왜 역사는 반복되는 걸까. 2019년을 살지만, 체제는 87년이 모태다. 독재와 민주주의 시대는 87년 전후로 갈린다. 그러나 그 정신은 늘 위협받고 있다. 비슷한 느낌의 데자뷔 현상은 시대를 떠나 생겨난다. 역사를 되짚는 이유이며 반복되는 패턴을 어떻게 정립할지는 오늘을 사는 자의 몫이다. 요즘 정국이 어수선하다. 다시금 6월 항쟁이 회자되고 있다. 역류의 솟구침도 그렇지만, 거대한 저항의 불씨가 덮쳐오기까지 한 치 앞을 알기 어렵다. 블랙홀 한가운데 태풍의 눈에 있을수록 더욱 그렇다.

그때도 그랬다. 10‧26사태도, 서울의 봄도, 6월 항쟁도, 진짜 올 줄은 몰랐다.

“박정희의 죽음? 예상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전 의원의 말이다. 6월 항쟁 되짚기. 시작은 79년 10월 26일 기억부터 소환됐다.

“10월 26일 저녁이었다. 친구들과 북한산인가, 도봉산인가로 놀러 갔다. 이상했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술을 엄청 많이 마셨다. 나중에 안 거지만, 박정희가 (김재규로부터) 총 맞은 시간이었다. 근처 후배네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지하철을 탔다. 선로에다 구토하고, 말이 아니었다. 앞의 누군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신문 바탕 위 큼지막하고 시커먼 글자로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고 쓰여 있었다. 순간, 유고? 유고가 뭐지, 분명히 죽었다는 얘기인데…?”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나고 보니 무르익어가는 과정이었다고 유 전 의원은 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거스른 반역과도 같았다. 그래도 봄은 찾아왔다. 5월이 오기 전까지지만. 꽃이 지듯 달뜬 희망도 돛을 내려야 했다.

이번은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편이다.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에 이어서다. 故김근태와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한 유 전 의원은 6월 항쟁 주역으로 꼽힌다. 인터뷰는 지난 8월 12일 서울 관악구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유기홍 전 의원은 6월 항쟁 주역으로 꼽힌다. 김근태 의장과 민청련을 조직해 6월 항쟁의 거름이 됐다. 유 전 의원은 학생운동을 연결한 연결책이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기홍 전 의원은 6월 항쟁 주역으로 꼽힌다. 김근태 의장과 민청련을 조직해 6월 항쟁의 거름이 됐다. 유 전 의원은 학생운동을 연결한 연결책이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학생운동의 계기

- 87년 6월 항쟁을 과거로만 치부하는 경우가 있다.

“그 시대를 조명하고 87년 이후 새 체제를 개편하려면 87 체제는 다각도로 조명돼야 하는 게 맞다.”

유신 정권 말부터 유 전 의원은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 77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해 과대표, 학내 서클 회장 등을 맡았다. 원래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고등학교 때까지는 담배 한 대 안 피우고 술 한모금 안 마신 범생이었다. 책을 좋아했다. 읽기도 많이 읽었다. 사회현상에 대한 학문적 탐구에도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 들어가서는 ‘역사철학’ 서클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종의 이념서클, 운동권 서클이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세계를 발견했다. 이영희 선생님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를 접하면서 우리 역사가 어떤 불공정 과정을 겪었는지를 알게 됐다. 유신 교육 하에서 얼마나 일방적 강요를 받아왔는지를 깨달았다.”

유 전 의원은 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 입학 후 관악구 봉천동에서 자취생활을 한 이후 지금까지 터를 잡고 있다.

- 학생운동에 뛰어든 직접적 계기는.

“시위 현장에서 느낀 울분 때문이었다. 대학 1학년, 박정희 유신 정권 때였다. 강의실 앞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의식도 못할 만큼 순식간에 전경들이 서울대 주변을 에워쌌다. 처음으로 사복 경찰들이 친구들을 두들겨 패고,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을 봤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도 당시의 장면이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뭔가 잘못된 사회인 것 같다.’ 피부로 느끼면서 열심히 활동하게 됐다. 시위도 참여하고, 관련 공부도 많이 했다. 그때만 해도 번역되지 않은 외국서적들이 많았다. 주로 일본어 책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걸 보려면 일어 공부를 해야 했다. 지금도 어지간한 일본 책은 단어만 찾으면 볼 수 있는 정도다.”

- 주로 지하서클 위주였다고 하던데, 몸담았던 서클 말고도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전통 있는 운동권 서클이 몇 개 있었다. 하나가 농촌법학회다. 유시민(현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다녔던 서클이다. 그리고 내가 다닌 역사철학, 다음으로 사회과학연구회가 있었다. 이런 몇 개의 서클들이 주축이 돼 서울대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어느 서클이건 대략 삼학년쯤 되면 학생운동 지도부가 자연스럽게 결성됐다. 내 경우는 비공개 지도모임인 무림의 일원이었다. 사실 조직이랄 것도 없는데, 나중에 공안당국이 서울대 지하조직 사건으로 엮었다.”

80년 12월 경찰은 서울대 학생운동 핵심부를 대상으로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일명 무림 사건이었다. 이처럼 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80년을 암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유기홍 전 의원은 서울의 봄 이후 학생운동 핵심부에서 활동했다. 심재철 의원과 유시민 이사장의 합동진술수사본부 진술서를 둘러싼 진실공방전 관련  당시의 상황을 잘 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기홍 전 의원은 서울의 봄 이후 학생운동 핵심부에서 활동했다. 심재철 의원과 유시민 이사장의 합동진술수사본부 진술서를 둘러싼 진실공방전 관련 당시의 상황을 잘 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울의 봄과 암흑의 도래

- 80년은 학생운동도 격변의 시기였다. 당시 어떤 변화를 겪었나.

“(10‧26 박정희 유고 이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휴교령이 내려졌고, 풀리면서 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서울대가 시작하니까 다른 대학들도 생겨났다. 그전까지는 학생회가 아닌 학도호국단 체제였다. 학생회부활추진위는 학교 내 임시정부 같은 역할이었다. 나는 총무부위원장을 맡았다. 학생회 준비위 활동도 하고 선거관리도 했다. 그 결과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심재철, 대의원회 의장에는 유시민, 복학생협의회 회장에는 이해찬 선배가 뽑혔다. 가장 액티브한 활동을 했달까.”

이해찬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제외하면 유 전 의원, 유시민 이사장,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 모두 77학번 동기였다. 모두들 학생운동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80년 5월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내상을 입게 된다. 학생들은 애초 5월 5일 서울대 앞에서 100만 명이 모일 경우 청와대 앞까지 진격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등을 놓고 논쟁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진격의 가두시위도 잠시, 광풍이 닥쳤다. 5·17 비상계엄령, 광주 민주화운동,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이 휘몰아친 것이다.

- 유 전 의원도 무기정학처분을 받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잡혀갈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80년 5월 17일 밤 붙들려가 사십 며칠 동안 일체 면회도 없는 상황에서 수사를 받았다. 바지 하나, 속옷 하나로 버텼다. 매 맞고, 조사받으면서 폐결핵이 악화됐다. 각혈이 심했다. 나중에 풀려났을 때, 바지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어머니가 그걸 굉장히 오랫동안 보관하셨다. 훗날 고문 받다 폐결핵이 악화된 것을 계기로 5·18 국가유공자가 됐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심재철과 유시민, 악연의 실타래

당시 상황이라 함은, 얼마 전 논란이 된 ‘심재철 vs 유시민’ 간의 합동수사본부 진술서를 둘러싼 진실공방전을 말한다. 유 이사장이 한 방송에서 그 시절 일화를 전하자, 심 의원은 폄훼‧왜곡하지 말라며 유 이사장이 쓴 진술서 사본을 연속 공개했다. 밀고자, 배신자 논란의 폭로전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유 이사장이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쓴 진술서가 자신을 비롯해 77명의 민주화 동지들의 목에 칼을 겨눈 것과 같다는 주장이었다. 심 의원은 이해찬 대표의 진술서에 대해서도 100명의 민주화동지를 위험에 빠지게 했다고 추가로 폭로했다.

유 전 의원은 심 의원의 주장에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심재철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평화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공천 받으려고 했다가 안 돼서 저쪽(당시 신한국당)으로 갔다. 그때도 내게 상의도 구하고 했다. 처음엔 (신한국당에서) 광진구로 보내 추미애랑 대결시키려 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광진구에는 호남민이 많다. 추미애 대표는 대구 사람이다. 진짜 호남 사람이 나오면 누가 유리하겠나. 결국 돌고 돌다가 안양에 가서 출마했다. 굉장히 친했지만, 악연이 됐다.”

그러나 양측이 기억하는 오래전 그날의 파편은 서로 다른 퍼즐 조각으로 남은 듯했다. 심재철 의원실은 이와관련 <시사오늘>에  “유 전 의원의 공천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며 반박문을 보내왔다. 심 의원실은 “당시 민주당에서 광주 서구 공천준다고 했으나 거부했다”며 “이에 민주당 측에서는 운동권 출신 언론사기자를 통해 설득하다 안 되니 동교동 만남을 주선했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유기홍 전 의원은 심 의원과 굉장히 친했지만 추후 악연이 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기홍 전 의원은 심 의원과 굉장히 친했지만 추후 악연이 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어떤 이유로 악연이 됐나.

“한동안은 안쓰럽게 생각했다. 스물 몇 살 때 감옥에 들어갔으니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거다. 하지만 확실한 건 심재철 외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자들은 고문 때문에 할 수 없이 시인했다손 치더라도 재판 과정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강압에 의해 조작된 거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심재철은 아니었다. 김대중 당시 총재가 이해찬 대표한테 돈을 줬고, 이 대표가 심재철한테 줘, 서울대 시위를 만들어냈다는 게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한 그림이었다. 심재철이 재판 과정에서 그걸 인정한 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심재철을 용서했다. 하지만 한순간에 뒤집어진 사건이 있었다.”

반면 심재철 의원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는 입장이다. 심 의원 측은 <시사오늘>에 보내온 입장문을 통해 “민주당 측은 최근에도 ‘심재철이 이해찬을 통해 김대중씨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허위진술을 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완성됐다고’고 했다. 이어 “하지만 당시 심재철의 공소장에는 김대중씨나 타인에게 금품을 수수했다는 내용이 없다”며 “재판에서도 그런 진술을 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 무슨 사건인가.

“2004년 그가 신한국당(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다.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이해찬 선배가 총리 후보자가 돼 인사청문회를 앞둘 때였다. 심재철이 스스로 저격수를 자임하더라. 청문위원을 맡아 색깔론으로 공격을 했다. 그 순간 우리가 다 뒤집어졌다. 자기 때문에 이해찬 선배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중간 고리가 돼버린 거 아닌가. 어떻게 색깔론으로 공격할 수가 있나. 그러다 이번에는 유시민을 공격하고 나온 거다.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사람이니까.”

- 서로 간 앙금이 많은 것 같다. 풀긴 풀어야겠다.

“글쎄. 풀릴 리가. ‘유시민, 이해찬이 진술 과정에서 많이 불었다’ 이런 건 심재철이 할 얘기가 아니다. 관련해 내가 공개토론하자고 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유시민이 불었던 사람들은 어차피 다 공개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원래 우리가 그렇게 역할 분담을 했다. 진짜 지도부들만큼은 유시민이 보호한 거다. (지하조직인) 무림 지도부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학생운동을 재생해낼 수 있었다.”

덕분에 학생운동은 건재할 수 있었다는 평가였다. 이듬해 봄에도 서울대 안의 시위는 들끓었다.  학내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유 전 의원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할아버지가 故류기수 전 국회의원이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운동 시절 더욱 곤란한 일이 많았을 것 같다.

“6‧25 때 국회의원하시다 납북당하셨다. 81년 처음 잡혀 관악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였다. 눈 가리고 남산에 끌려갔다.  다짜고짜 때리고서는 하는 말이 ‘너 할아버지 언제 만났어.’ 처음에는 무슨 말이진 몰랐다. 못 알아듣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서운 얘기였다. 나를 간첩으로 엮으려는 유도심문이었던 거다. 그들은 늘 그런 얘기를 했다. ‘너 같은 거 하나는 고문 받다 죽어도 문제가 안 된다. 휴전선 근처에 던져두고 월북하다 죽었다고 하면 된다’, 겁을 주고 그랬다. 내가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가 나를 불러 앉혀놓고 그러셨다. ‘우리 집은 다른 집하고 다르다. 납북되신 할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요시찰이 돼 있다. 너는 절대로 데모하면 안 된다’ 당부하셨다. 그런데 그리 된 거다.”

유 전 의원의 할아버지이자 2대 국회의원을 지낸 류 전 의원은 납북된 후 86년 병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기홍 전 의원은 김근태 의장과 함께 민청련 조직을 만들었다. 이후 반합법 투쟁을 통해 재야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기홍 전 의원은 김근태 의장과 함께 민청련 조직을 만들었다. 이후 반합법 투쟁을 통해 재야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청련과 반합법 투쟁

유 전 의원하면 민청련을 빼놓을 수 없다.

숨은 비화지만, 민청련과 학생운동을 연결하는 연결책이 그였다.

- 처음 민청련은 어떻게 조직하게 됐나.

“83년 김근태 선배를 처음 만났다. 그해 9월 선배와 함께 민청련을 조직했다. 초대의장은 김 선배가, 사무국장은 내가 맡았다.”

- 경찰의 감시도 삼엄했을 텐데.

“반합법이라고 있다. 지하조직 기반의 선도투쟁을 하게 되면 피해가 너무 컸다. 그래서 꺼낸 전략이 반합법이었다. 법적 허용 범위 내에서 투쟁하는 거였다. 한발 나아가면 잡혀가고 마는 아슬아슬한 선이었다. 경찰이 볼 때 잡아넣기도 그렇고, 그냥두기도 그렇고, 투쟁하는 게 반합법이었다. 그 전략으로 민청련 사무실도 낼 수 있었다. 재야 어르신들도 있고 하니, 함부로 못 잡아갔다. 경찰들은 우회 방해전략을 폈다. 사무실을 못 쓰게 건물주에 압력을 가해 나가라고 종용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집기가 다 내려와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이었다. 집기를 갖고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어느 땐 현판을 떼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버텼다.”

- 6월 항쟁 기간엔 무엇을 했나.

“그 기간 나는 수배 중이었다. 86년 민청련 사무실이 압수수색 되는 과정에서 책임질 일이 있었다. 도망 다니면서 시위주동하고, 그러다 6월 항쟁을 맞았다. <민중 신문> 편집인으로, 시위군중으로 있었다. 민청련 지도부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 곳은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조직에 피해가 갈까봐. 그러다보니 현장을 많이 봤다.”

- 수배 중 일화에 대해 듣고 싶다.

“수배 당시에도 나는 민청련 홍보국장을 맡아 <민중 신문>을 만들었다. <민주화 길>이 정책지이고 책자 형태라면 <민중 신문>은 신문 형태였다. 언론 통제가 심하던 때라 신문을 몰래 만들어 대중에 시국 상황을 알렸다. 반독재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6월 항쟁 기간은 인쇄소가 막혀 신문을 찍어내는 게 어려웠다. 을지로 인쇄골목마다 경찰들이 다 지키고 있었다. 같은 과 후배였던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집에서 피신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도 나중엔 민청련에 들어오지만, 그때만 해도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하던 친구였다. 근데 친구 집에 복사기가 한 대 있었다. 야, 이 복사기 좀 쓰자. 덕분에 <민중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 근데 몇 천부 찍어 나와 봤자 한 입 거리도 안 됐다. 어쨌든 그 집에서 그래도 복사기라도 돌렸다. 하지만 결국 복사기가 고장 났다. 나중에라도 물어줘야 하는데.(웃음)”

인쇄소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종식을 알리는 6‧29를 선언한 뒤에야 가동됐다.

- 신문을 거리에 배포할 때 어떤 방법으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갔나.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을 것 같다.

“돌아가신 김병건 선배라고 있었다. 유인물 뿌리는 방법들, 안 잡히고 어떻게 뿌릴까를 연구했다. 일단은 현수막을 크게 만든다. ‘전두환 독재 타도하자’라고 큼지막하게 쓴다. 그 안에 <민중 신문>을 쫙 펴서 말고, 나일론 실로 묶는다. 다음으로 담배를 준비한다. 알맹이는 버리고 쑥을 채워 넣는다. 나일론 실로 쑥 담배를 통과하게 만들고, 거기다 불을 붙인다. 서서히 타들어가다가 나일론 실에 닿으면, 현수막이 펼쳐지면서 유인물이 휘날리게 되는 것이다. 이걸 하려면 굉장히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 김병건 선배는 정장을 입고, 현수막 위로 포장지를 감았다. 겉에다 주소를 쓰고 우표까지 붙여서 소포인 것처럼 했다. 신한은행 본점에 올라갔다. 십 몇 층에 올라가 쫙 펼치는 거다. 이때도 요령이 있다. 곧바로 펼치면, 경찰 눈에 띌 수 있으니 몇 분 뒤 펼쳐지도록 타임렉(지연)이 생기게 했다.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한 거다. 버스 환기통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주로 키 큰 사람들이 맡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 유인물을 환기통 위에 올려놓는다. 차가 떠나면서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축적돼 87년 6월 항쟁을 맞은 거다.(웃음)”
 

유기홍 전 의원은 김근태 의장 중심으로 활동한 민청련이 6월 항쟁의 거름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시사오늘
유기홍 전 의원은 김근태 의장 중심으로 활동한 민청련이 6월 항쟁의 거름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시사오늘

 

6월 항쟁의 발아, 김근태와 두꺼비

- 6월 항쟁과 민청련의 역할,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

“무력으로 찬탈한 전두환 정권은 5‧18의 원죄를 갖고 시작한 정권이었다. 6월 항쟁이 있기까지 밑거름의 역할을 했던 분들이 너무나 많다. 80년 서울의 봄을 거쳐 87년 6월 항쟁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고 죽고 분신하고 희생됐다. 김근태 선배를 중심으로 한 민청련도 탄압에 저항하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 과거 “민청련이 6월 항쟁의 적자와도 같은 조직”이라고 소회한 바 있다. 특히 재야와 야당 세력 규합의 원동력이 돼줬다는 평가다.

“전두환 정권 당시 이에 가장 앞장서 싸운 것은 재야 세력이었지만, 그 투쟁은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야당이었던 민한당과 국민당은 독재 정권의 2중대로 불릴 정도로 무기력했다. 그때 민청련이 결성됐고, 반독재 투쟁의 거점 역할을 해줬다. 흩어져 있던 재야 세력들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될 수 있었다. 또 이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가택 연금 상태의 김영삼(YS)과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김대중(DJ)의 힘이 합쳐지는 계기를 줬다. 1983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85년 2·12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으로 나가, 돌풍을 일으켰다.”

- 김근태 의장과 각별하다. 많은 영향을 받은 줄 안다. 김 의장과 관련한 일화 등 얘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6월 항쟁의 거름 역할을 했던 분이다. 1985년 민청련이 대대적 탄압을 받았을 때다. 김 선배가 남영동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그 뒤 ‘김근태 고문 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김형욱 김대중 김영삼부터 재야의 모든 인사들이 참여했다. 86년 개헌국면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공대위가 국민운동본부로 확대개편 됐다. 87년 6월 항쟁을 앞두고 86년 발족한 개헌 청원 요구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다. 그 뿌리가 공대위라는 점에서 거름이 돼준 것이다.”

- 유 전 의원도 그렇지만 민청련과 김근태, 따로 떼어놓기 어려운 것 같다.

“민청련 상징이 두꺼비다. 두꺼비는 산란할 때가 되면 뱀 앞에 가서 도발을 한다.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는다. 두꺼비는 독이 있다. 얼마 못가 그 뱀은 죽고 만다. 그러면 두꺼비 배속에 있던 알이 뱀의 시체를 자양분으로 해서 태어난다. 거기서 수십수백 마리가 나오는 거다. 김근태 선배가 두꺼비 역할을 했다.”

- 그러고 보니, 김 의장이나 유 전 의원 등 재야에서의 힘이 지하에서 수면 위로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전대협이 태동해 6월 항쟁의 동력을 만들어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싸운 만큼 공간이 생긴 거다. 공간은 점점 넓어져 노동자들이 모이고, 농민이 모이고 학생들이 모였다. 그러면서 87체제 전후의 운동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전에는 민청련 같은 식의 선도투쟁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후에는 789노동자 대투쟁을 비롯해 전교조 운동 등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됐다. 그 결과 민주노총이 만들어졌고 전민련이라는 연합조직이 만들어졌다.”
 

유 전 의원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은 4·3 호헌 조치였다고 분석했다. 이것이 민심을 폭발시키는 임계점이 됐다고 봤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 전 의원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은 4·3 호헌 조치였다고 분석했다. 이것이 민심을 폭발시키는 임계점이 됐다고 봤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4·13 호헌 조치와 임계점 

- 정리해 6월 항쟁의 도화선을 뭐로 보는가.

“직접적 도화선은 4‧13 호헌조치다. 국민들의 열망에도 전두환 정권이 체육관 선거를 하겠다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거기에 불을 댕긴 게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 맞아서 숨진 사건이었다. 사안은 걷잡을 수없이 어마어마하게 커져갔다. 명동성당 농성이 시작되고 6월 항쟁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 결과 6‧29선언이 나왔고,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지금의 87체제가 된 것이다.” 

유 전 의원은 과거 ‘6월 항쟁 아름다운 대하드라마’라는 글을 통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생생히 전한 바 있다. 97년 전대협 동우회, 한청협 등과 6월 항쟁 10주년 사업 청년추진위를 결성, 위원장이 된 이후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세대들을 위해 쓴 글이다. 글은 유 전 의원의 저서 <교육에서 희망찾기>에도 수록돼 있다.

‘4‧13 호헌에 국민들 일어서다’라는 단락을 일부 옮겨본다.

“85년부터 끈질기게 솟구쳐온 국민의 개헌 열망을 단숨에 짓밟아버린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가 발표된 후 지나친 충격 때문에 거짓말처럼 잠잠했다. 4월 19일 전후로 학생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봉쇄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호헌철폐를 외쳤다. 4월 22일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함석헌 송건호 박형규 씨 등 재야인사 28인이 ‘폭력호헌 저지, 민주개헌 관철을 위한 국민운동을 염원하면서’ 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신부 목사 대학교수 교사 문인 연극인 법조인 등의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요구하는 성명이 쏟아져 나와 사회면을 장식했다. 여기에 정의구현사제단이 5월 18일 은밀히 준비하고 있던 박종철군 고문살인 사건의 은폐조작 폭로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는 국민들 분노에 다시 한 번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유기홍의 <교육에서 희망찾기> 6월 항쟁 수록글 중”

유 전 의원은 6‧10 대회 착수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어 내려갔다.

“6월 1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 312호에서 현판식을 가진 국민운동본부는 곧바로 6‧10대회 준비에 착수했다. 이날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호헌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날이었기에 전두환 정권으로는 필사적으로 국민대회를 막아내야 했던 것이다. 덕수궁 옆 대한성공회 구내에는 우거진 녹음 속에 철지난 아카시아 내음이 가득했다. 오후 6시 정각 성당 종탑의 스피커에 애국가와 함께 성당종이 42번 울렸다. 해방 후 42년 동안의 독재를 끝내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자는 뜻이었다. 애국가와 함께 성당종이 42번 울렸다. 해방 후 42년 동안의 독재를 끝내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자는 뜻이었다. 대회는 오충일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다. 6월 7일부터 대기하고 있던 박형규 목사, 지선 스님, 금영균 목사, 제정구, 유시춘 등 국민운동본부 20명과 성공회의 신부 수녀들을 포함해…(유기홍의 <교육에서 희망찾기> 6월 항쟁 수록글 중”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전 의원은 6월 항쟁의 성과로 놀라운 대중의 힘을 발견한 것이지만, 당시의 운동 세력은 문제 해결 집단은 못 되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전 의원은 6월 항쟁의 성과로 놀라운 대중의 힘을 발견한 것이지만, 당시의 운동 세력은 문제 해결 집단은 못 되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놀라운 대중의 힘과 과제

- 6‧10 대회 당일을 향해 달려가며 굉장히 비장한 각오였을 것 같다.

“사실 예상 못했다.”

- 무슨 말인가.

“10·26 때처럼, 6월 항쟁도 그랬다. 무슨 얘기냐면 이리 커질 줄 몰랐던 거다. 그저 ‘이대론 안 된다. 6월 10일 모여 한바탕하자’ 는 생각이었다. 며칠 뒤에 가려고, MT도 잡아놓을 정도였다. 곧 분출을 앞둔 활화산 위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활화산이 폭발하는 양상이었다.”

- 6월 항쟁의 성과로 꼽는 것은. 아쉬웠던 점 등 한계를 평가한다면. 

“놀라운 대중의 힘을 발견한 것 등이 성과였다. 아쉬운 점은 그때 우리는 문제제기 집단에 멈춰 있었다. 우리 선배들이 피 흘리고 죽어가면서 많은 것들을 진전시켰지만, 87년 선거에 패했다. 그 실패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문제 제기 집단에 그칠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 집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각들이 생겼던 것이다. 소수의 재야운동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보 정당도 만들고 기존 정당에도 들어가서 적극적 변화를 추동하는 데 힘썼다.”

유 전 의원이 정치에 입문한 이유로 볼 수 있다. 학생운동과 재야, 시민운동을 거쳐 김대중 정부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을 역임했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17대, 19대 관악갑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교육 의정활동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현재 당 중앙당선거관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 앞으로의 과제로 주목하는 것은.

“87년 6월 항쟁의 직접적 계승이 나는 촛불 시민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시민 혁명의 결과로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또 한 번의 개헌을 해야 할 때다. 헌법을 바꾸고, 그에 맞춰 우리 사회가 한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 개헌의 방향성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개헌은 민주주의가 더 심화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일반 민주주의는 87년 체제에서 어느 정도 담아냈다. 그러나 앞으로는 경제적 기본권에 대한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포용 사회, 포용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 성장을 성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도 약육강식의 정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지방분권화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 지방자치는 반쪽짜리다. 지방분권화를 담아내는 개헌이어야 한다.

- 민주당은 지금 문제 해결 집단이 됐나.

“많이 근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니다. 완성된 의미의 문제 해결집단이 되려면 세력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