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안동일 “10·26, 우발 아닌 민주회복 위한 계획범행”
[時代散策] 안동일 “10·26, 우발 아닌 민주회복 위한 계획범행”
  • 글=안동일 변호사 /정리=김병묵 기자
  • 승인 2019.09.26 23:2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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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일 변호사
“직접 만난 김재규, 예상밖 차분하고 겸손…‘부하들 살려달라’”
“신군부, 민주세력 구심점 될까봐 김재규 등 사형 서둘러 집행”
“4·19 세대, 정치권으로 안 가서 ‘586 기득권 논쟁’ 안 나왔다”
“이념의 시대는 끝나…대한민국 전진 위한 정치대혁명 필요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안동일 변호사/정리=김병묵 기자)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 재판과 관련해 미리 작성해 놓은 재심청구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보통 재심청구가 되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재심에서 어떤 판결이 날 줄도 모르는데,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으니까 집행을 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김재규를 포함한 6인이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이나 상징이 될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 신군부는 서둘러 나흘 만에 그들의 사형을 집행했다고 안 변호사는 밝혔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변호사법에 의하면 변호사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 변호(辯護)는 남을 감싸고 돕는 일이다. 어떤 사정으로 자신을 충분히 변호하기 어려울 때, 함께 목소리를 내 주는 것이 법조인이고 변호인의 직분이 아닐까.

그래서 생각해본다. 10·26에 대해 혁명인지, 시해(弑害)인지를 판정 내리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으로서, 이젠 세상을 떠나 스스로 변호하기 어려운 그가 남긴 것을 대신 세상에 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2005년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에 이어, 2017년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를 펴냈다. 9월 23일 서소문 사무실을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오랜만에 1979년의 기억을 다시 펼쳤다.

4·19 세대 변호사의 두 번의 도피

나는 평생 동안 정부당국으로부터 두 차례 쫒긴 적이 있다. 첫 번째 는 변호사가 되기 전이고, 두 번째는 변호인 시절이다.

1960년 4·19혁명 당시 대학생으로서 시위에 참여해 경무대 앞까지 달려갔었다. 그 후 지금으로 치면 운동권 학생들인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의 일원으로 남북학생회담을 주창해 그 때문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그로 인해 도망 생활을 해야 했다.

두 번째는 김재규 등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있던 1980년 5월 20일이다. 당시 합수부의 알고 지내던 후배 법무관 하나가 달려오면서 “형님, 피하세요. 이번에 김재규 사건에 관여한 변호인 모두 체포령이 내렸습니다”라고 알려줬다.

그래서 변호인단 7인이 모두 몸을 피했는데, 강신옥 변호사만 시청 앞 사무실에 잠깐 들른다고 했다가 잡혔다. 다행히 5·18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신군부의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어서, 강 변호사도 큰 고초를 겪지 않고 20여 일 만에 풀려났었다. 하지만 우리의 재심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기 전에 사무실에 전화해서 미리 작성해 놓은 재심청구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보통 재심청구가 되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재심에서 어떤 판결이 날 줄도 모르는데,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김재규를 포함한 6인이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이나 상징이 될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 신군부는 윤보선 전 대통령 등 재야의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나흘 만에 그들의 사형을 집행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안 변호사는 김재규에 대해 ‘유신의 주구, 박정희 정권의 2인자 였던 사람인데 어쩌다 욱 해서 그랬겠지'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12월 11일, 첫 접견에서 만난 김재규는 내 예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재규의 변호인이 되다

나는 4·19 혁명 세대고, 유신 선포 이후엔 긴급조치로 인해 부당한 일을 겪은 이들을 주로 변호했다. 정말 억울한 사건이 많았다. 지금으로선 상상이 쉽지 않겠지만, 누군가 술을 마시면서 '김일성은 덩치가 큰데 우리 박정희 대통령은 왜 이리 작은가'라는 말을 했다가 잡혀가 몇 년 씩 징역을 살던 시절이다.

그런 이들을 변호하는 역할을 하던 나는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좋지 않았다. 국선변호인 선임 통지를 받고 나는 ‘유신의 주구, 박정희 정권의 2인자 였던 사람인데 어쩌다 욱 해서 그랬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워낙 역사적인 대사건이기 때문에, 법조인으로서 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해보자는 의욕은 강했다. 하지만 12월 11일, 첫 접견에서 만난 김재규는 내 예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애초에 김재규를 변호하겠다는 쟁쟁한 유명 법조인들이 사선 변호인단을 구성했었는데, 김재규는 4차 공판부터 이를 거부했다. 사선 변호인들의 조력을 받으면 10·26이 민주혁명으로서 원형(原型)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법적으로 절차상 국선변호인은 꼭 필요했고, 1차부터 4차까지 공판을 전부 지켜본 내가 변호인이 되어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있는 독립 가옥에 접견을 하러 갔다. 아주 추운 날이었던 기억이 난다. 흰 한복 차림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가죽수갑을 찬 김재규는 차분한 음성에 매우 겸손했다. 단주를 쥐고 있어 나와 같은 불자(佛子)임을 알 수 있었다. 까만 얼굴에 전기고문 흔적이 보였다. 접견 시 수갑을 풀어야 하는 규정에 따라 내가 지금 당장 수갑을 풀기를 요구하자, 당시 김재규를 담당하던 박모 상사가 상부에서 풀지 말라고 했다며 난감해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나중에 저 친구가 곤란해질 수 있으니 변호사님, 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접견은 약 한 시간동안 이어졌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경청해볼만 하다고 생각했고, 진정성이 느껴졌다. 나도 나름 신문(訊問)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 얼추 사람의 거짓말을 감지할 수 있는데 김재규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마지막에 내가 자리에서 나오려고 일어서는데, 내 손을 꽉 잡고는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변호사님. 우리 부하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변론을 위해 온 변호사에게. 그러면서 일본의 수상저격사건에서 부하들은 무죄판결이 난 판례가 있다고 말했다. 나중에 내가 일본 신문을 뒤져서 양형판단에 참작해달라며 증거로 냈다. 나는 1심은 국선변호인, 2,3심은 무료 사선 변호인단의 일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10·26은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

보통은 우발적 범행은 형량이 낮은 편이다. 그래서 우발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10·26은 다르다. 김재규는 우발적 범행이 아닌,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어서다.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대의명분이 있는 거사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재규의 증언이기는 하지만 많은 정황증거가 나온 바 있다.

1972년, 유신 선포 당시 3군단장이었던 김재규는 '아무리 한국적 민주주의라지만 이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그 때부터 여러 생각을 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부대방문 시에 담판을 지으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통상 바깥쪽을 향하는 철조망을, 안으로 향하게 해서 박정희를 나가지 못하게 하고 읍소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건설부장관 시절, 게양된 태극기가 늘어뜨려진 곳에 권총을 숨겼던 이야기 등 박정희를 저격하려고 마음먹었던 시도가 수차례 있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1979년 봄부터 '자유민주주의', '민주민권 자유평등' 등을 쓴 휘호를 보아도 10·26이 김재규가 가진 민주주의 신념에 의한 행동이었다는 증거라고 변호인들은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김재규가 사선변호인단을 처음 만났을 때의 녹음테이프가 나왔는데, 거기서부터 이미 김재규는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쌓이고 쌓인 쓰레기들을 누군가 치워야 할 것 아닌가. 박정희와 민주회복은 상관관계에 있다. 박정희가 없어져야 민주회복이 되고, 유신체제가 사그라진다. 박정희가 있음으로서 민주회복이 안 된다'라고 밝힌 것이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유명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부마항쟁, 그리고 그 부마항쟁을 촉발시킨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제명사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등이 결국 김재규로 하여금 10·26이라는 결단을 내리게 된 직접적 배경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안동일 변호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김재규는 10·26을 우발적 범행이 아닌,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며 10·26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대의명분이 있는 거사였다고 전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간혹 일부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부마항쟁이 대구를 거쳐 서울까지 올라와서 민중에 의해 박정희가 타도됐어야 진정한 혁명인데, 괜히 10·26이 일어나서 부마항쟁도 미완의 혁명이 됐다'는 주장을 한다. 김재규는 직접 부마항쟁을 목도하고, 몸으로 겪고, 그 과정에서 신발도 한 짝 잃어버리고 돌아와 박정희에게 보고했던 사람이다. 부마항쟁의 열기를 모를 리 없지만, 동시에 많은 피가 흘릴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재규는 차지철의 '200만 명 따위 탱크로 쓸어버리자'는 발언에 더 격분했을 수 있다. 

12·12와 신군부의 만행

보도되진 않았지만, 6번 법무감 방에서 합수부 요원들이 모니터링을 하면서 재판을 쪽지로 지시하기도 했다. 당시 합수부가 주도하던 재판일정은 매일매일 쉬지 않고 진행됐다. 보통 어떤 재판이든 그런 식으로 연달아 진행하지 않는다. 단 하루를 쉬었는데, 그건 12월 13일이었다. 12·12 사태 다음날이다. 그날도 사실 우리는 정신없는 재판일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지금의 국방부 청사 후문으로 출근하는데 검은색 피가 낭자했다. 공수단과 헌병들이 싸운 흔적이었다. 입구를 지키던 군인이 오늘 재판이 없으니까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육군본부 법무감실에 전화를 해보니 휴정이란다. 그 자리에 여러 외신 기자들도 재판이 있는 줄 알고 취재 왔었다. 그 중 한 외신 기자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가 "나는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 줄 알았다. 10·26 이후 범죄도 확 줄어들고, 이렇게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디 있나. 세상에 아무리 발전한 민주국가라고 해도, 돌발 사태에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너무 놀라서 한국을 다시 보려 했었다. 그런데 12·12 사태를 보니 우간다나 콩고와 비슷하구나 싶다"고 말했다. 

신군부는 사형 집행 이후에도 악랄함을 보였다. 부하들과 함께 묻어달라는 김재규의 요청에 그 가족들이 김재규의 묘아래 묫자리도 만들어놨었는데, 신군부는 상징적인 장소가 생길까 두려워 서울 외곽에 따로따로 흩어놨다. 

박흥주 대령에 대하여

김재규 외 당시에 사형당한 5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흥주, 박선호, 이기주, 김태원, 유성옥 모두 법정에서 끝까지 당당했고 의연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다시 그런 일이 생겨도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김재규를 원망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김재규는 부하들을 사랑했고, 그들은 김재규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관계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박흥주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박흥주는 유일하게 현역 군인이라, 단심(單審)으로 가장먼저 총살형을 당했다. 서울고 출신인 박흥주는 나와 나이가 같은데, 당시 서울법대에도 서울고 출신들이 많다 보니 나와 함께 아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아주 우수한 군인으로 집안 형편 때문에 육사를 간 것으로 아는데, 차기 육군참모총장감이라고 모두 칭찬했었다. 내가 그의 행당동 집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육군 대령인데도 차도 못 들어가는 산꼭대기에 있었다. 그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다. 사형이 확정됐다고 해도 공범들의 재판이 끝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3월 7일에 박흥주만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그의 고교 동문들이 수소문해 장례를 치렀다. 아까운 인물이다. 박흥주, 박선호 등 5인의 자녀들이 잘 장성했다는 이야기를 최근 전해 듣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10·26과 지금 이 시대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방청객을 모두 나가게 한 뒤에 이뤄졌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최후진술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대단했다. 준비한 원고도 없이, '10·26 혁명의 목적'이라며 다섯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회복, 둘째는 부마항쟁 등이 군부와 충돌했을 시 발생했을 수 있는 국민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 셋째로 궁극적으로는 북한으로 인한 적화통일의 방지, 넷째는 최악으로 치닫는 미국과의 관계 회복, 다섯째는 이승만 12년, 박정희 18년으로 인한 독재국가라는 나쁜 이미지를 씻고 국격을 제고하는 것이다. 누가 말하고를 떠나 모두 이 시대에도 새겨볼만한 이야기 아닌가.

지금은 과도기에서 오는 성장통의 시대

요즘 정치·사회적 갈등이 많다고 한다. 좌우로, 혹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지금은 과도기다. 성장통을 겪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안 변호사는 최근 일련의 정국과 관련해서도 보수에서도 극우, 수구적폐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진보에서도 극좌, 위선자들의 정체성이 알려지고 있다며 과거엔 이곳저곳 숨어있었는데 이제 국민들이 다 알게 되는 과정, 그게 지금이라고 밝혔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왜 과도기가 왔는가 하면 사실 우리가 자유에 대한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가진 것이 1948년 이후니 잘해봤자 70년이고, 1987년 직선제부터 기준 삼으면 30여 년 밖에 안 됐다.

남들이 200년, 300년에 걸쳐 확립한 자유의 개념과 체제에 비하면 우리는 100년도 안 된 거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합쳐 30년의 독재,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또다시 신군부가 왔다. 노태우 정권은 엄밀히 말하면 군사정권의 유얼(遺孼)이고, 문민정부도 3당합당으로 태생부터 군부의 잔재를 남겼으며, 수평적 정권교체라고 자랑하던 국민의정부도 사실 DJP 연합으로 군사정권의 맥을 남겨뒀다. 그리고 직선제 쟁취 이후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이 대거 정치권에 들어가 있는 것도 갈등이 심화된 한 가지 요소다.

당연히 이념갈등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나를 포함한 4‧19 혁명 세대는 학생신분이기도 했지만, 당시 아무도 정치권으로 간 사람이 없었다. 시대의 소명을 마치고 물러났었다. 그래서 이후 지금 나오는 소위 ‘586 운동권 기득권 논쟁’과 같은 것은 4‧19 세대에겐 아예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념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자유의 가치와 평등의 가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의 싸움이다.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대결 과정에서 서서히 지금 걸러 낼 이들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보수에서도 극우, 수구적폐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진보에서도 극좌, 위선자들의 정체성이 알려지고 있다. 과거엔 이곳저곳 숨어있었는데 이제 국민들이 다 알게 되는 과정, 그게 지금이다. 앞으로 국민의 선택만이 남았다.

개인적으로는 좌파와 우파의 장점만 섞은, 그야말로 새 시대로 나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한다. 프랑스의 마크롱이 '앙 마르슈(전진)'을 내세워 정치대혁명을 이루지 않았나. 마크롱의 전진은 공화국을 위한 전진이었다. 10·26이 있었던 지도 40년이 흘렀다.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이 혁명이라 믿었고 어찌됐든 그 이후로 세상은 변했다. 우리도 이제 ‘대한민국을 위한 전진’을 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시대를 뛰어넘어 변호를 해온 법조인이 한 마디 화두를 던져본다.

 

담당업무 : 국회 및 더불어민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行人臨發又開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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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ong 2019-09-27 20:16:51
간만에 인터뷰 기사 볼만하네요. 잘봤습니다.

이경자 2019-09-27 15:37:43
중요한 우리 역사의 한 사건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