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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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표곡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0.08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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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순의 음악실타래4-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
지금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2~3년 전까지 ‘7080’바람이 불었다. 지하철을 타면 7080노래 100곡을 7장의 CD에 담아 만 원에 판다는 행상인의 선전을 며칠에 한 번씩은 들을 무렵이다. 그 100곡 중의 한 곡으로 꼭 들어갔던 노래가 ‘휘버스(Fevers)’의 ‘그대로 그렇게’(정원찬 작사, 작곡)다.

휘버스를 ‘열기들’이라는 다소 억지스런 한글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1970년대 말 외래어나 외국어를 한글로 순화시키려 했던 박정희 정권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 시절 방송이나 음반들을 보면 ‘샌드 페블스’를 ‘모래와 자갈들’, ‘블루 드래곤’을 ‘청룡’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1979년에 발매된 휘버스의 음반 자켓에는 열기들이라는 한글 이름과 FEVERS라는 영문 이름이 위아래 나란히 적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 '그대로 그렇게'는 1978년 해변가요제 인기상 수상곡으로 1년 쯤 후에 가요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 시사오늘


필자가 ‘그대로 그렇게’를 처음 들었던 때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0년 봄 경이다. 같은 집에 살던 시집가기 전 고모가 ‘그대로 그렇게’를 전축으로 틀어놓고 따라 부르는 걸 고모 방 밖에서 들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이 노래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사를 쓰며 ‘그대로 그렇게’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니 1979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가 최고 인기를 끌던 시기로 가요 차트 정상까지 오른 기록이 보인다.

‘그대로 그렇게’에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제1회 해변가요제 인기상 수상곡’이다. 1978년 7월 22일 서해안 연포 해수욕장이 그 무대였다. 그러나 이 곡이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것은 이보다 약 넉 달 전인 같은 해 3월 연세대 ‘무악골 잔치’에서다.
 
휘버스에서 키보드를 담당했고 작사, 작곡까지 맡아 실질적 리더였던 정원찬과 이명훈(보컬), 문장곤(베이스)은 서울 배명고 동기생들로 고등학교 2학년 경주 수학여행을 계기로 그룹사운드를 만들기로 합의를 본다.

드디어 1978년 2월 송용섭(드럼)과 김흥수(기타)가 합류하며 5인조로 위용을 갖춘 휘버스는 연세대 학내 레크리에이션 동아리 RRC에서 포크댄스 부장을 하던 정원찬의 주선으로 그해 3월 신입생환영회인 무악골 잔치 무대에 올라 ‘그대로 그렇게’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현장 분위기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음반으로 발표된 곡이 아니어서 폭넓은 인기를 끄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듯싶다.

휘버스는 해변가요제 출전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들은 1978년 8월 한 달을 대천에서 텐트를 치고 음악 연주를 해주기로 했다가 이 일이 무산되자 연포로 장소를 바꿨던 것이다. 멤버들의 회고에 의하면 해변가요제 참가 이유는 단지 “연포 해수욕장에 공짜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요제가 스타의 등용문으로 인식되기 전 시절이니 거짓말로 보이지는 않는다.

휘버스는 무려 429팀이 참가한 1차 예선부터 2차 예선을 거쳐 15개 팀이 겨루는 본선에 올라 공짜 피서를 즐기는 데 성공했다. 대회가 끝나고 곧바로 대학가는 개강을 맞이했는데 1970년대 대중 음악 유행을 주도하던 다운타운가 음악 다방에서 ‘그대로 그렇게’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면서 휘버스는 점차 직업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제1회 해변가요제 음반도 불티나게 팔려 기획사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음반에 녹음된 ‘그대로 그렇게’는 실황곡이 아니라 음반 제작을 위해 따로 녹음한 스튜디오 버전이다.
 
휘버스는 ‘그대로 그렇게’의 대중적 성공을 발판으로 1978년 가을 휘버스의 이름이 실린 첫 레코드를 내 놓았고 이듬해 6월에는 ‘산’,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같은 빼어난 작품이 담긴 독집(이 음반에도 ‘그대로 그렇게’가 연주를 새로이 해 실려 있다.)을 발매했다.
 

▲ 휘버스의 보컬 이명훈은 팀 해체 후에도 솔로로 활동하며 인기를 모았다.     © 시사오늘


아직 대학생들이었던 휘버스의 멤버들은 학업과 직업 등의 문제로 탈퇴 소동이 벌어져 1980년 1차 해산한 후 잠시 솔로 활동을 하던 이명훈이 신진 멤버를 영입해 1982년 휘버스를 재결성하지만 히트곡을 내지 못해 영영 해산되고 말았다.

보컬을 맡아 다른 멤버들에 비해 얼굴이 널리 알려진 이명훈은 ‘얼굴 빨개졌다네’를 크게 히트시키며 198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솔로 활동을 계속 했다. 이명훈의 솔로 음반에도 ‘그대로 그렇게’는 어김없이 실려 있다. 휘버스 버전은 멤버들의 저음 코러스가 절묘한 반면 이명훈의 솔로음반은 코러스가 빠져 있어 단조롭고 심심한 느낌이 든다.

‘그대로 그렇게’ 이 곡은 단순 명쾌한 멜로디에 애수어린 가사가 어울린 전형적인 ‘1970년대 식’ 노래이면서도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7080의 대표곡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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