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②] 대규모 민주투쟁 …‘유신체제 막을 내리다’
[부마항쟁②] 대규모 민주투쟁 …‘유신체제 막을 내리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10.16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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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79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1979.10.13. 신민당 전원 사퇴서 제출

1979년 10월 13일 의원총회에서 신민당은 지난 4일 여당에 의해 강행된 김영삼 총재 제명에 대한 항의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이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  

신민당 의원들도 제명에 항의, 무기한 등원거부 결정을 내렸으며, 10월 13일엔 소속의원 66명 전원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통일당 3명도 동조했다. 제명의 부당성에 대한 비난의 여론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53~161쪽.

이와 관련 15일 공화당사에서 열린 공화·유정 합동조정회의에서 △일괄반려 △일괄수리 △선별수리 등의 방법이 엇갈려 제기됐다. 결국 이날 회의 끝에 구체적인 처리 방법과 처리시기를 신민당의 태도와 정국 추이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YS의 투쟁은 뉴욕타임즈 인터뷰로 절정에 달했고 그 반작용으로 국회의원직 제명에 이르렀다. YS 제명은 그렇지 않아도 끓어오르던 반 유신 정국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4~16쪽.

이후 10월 24일 공화당과 유정회는 경색정국을 수습하고 대야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명목으로 신민당 의원들의 사퇴서를 일괄반려하기로 결정한다.

 

1979.10.16~20. 부산·마산 민주 항쟁(이하 부마항쟁)

부산일보 사진기자 출신 정광삼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산광역시지회 자문위원이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기증한 부마항쟁 당시 광복동 시위 행렬 사진이다.ⓒ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산일보 사진기자 출신 정광삼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산광역시지회 자문위원이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기증한 부마항쟁 당시 광복동 시위 행렬 사진이다.ⓒ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마항쟁은 당시 ‘부산사태’라고 불렸다. 16일과 17일 부산 지역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를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현 창원시 서부지역)으로 확산됐다.

치안본부는 18일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일련의 사태와 학생들을 ‘조직적인 폭거로서 민심교란 선동과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폭도’로 설명했다. 아래는 당시 치안본부의 발표 내용 중 일부다.

“지난 16일, 17일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교내에서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의 제지로 해산됐다가 시내 번화가 중심지에 다시 집결, 200명에서 500명씩 6개 방향으로 진출,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야음을 탄일부 불순분자들이 합세하여 경찰관에서 투석, 기물을 파손하는가 하면 순찰 중인 경찰 차량을 불사르고 경남도청, 세무서 및 방송국과 신문사에 침입, 기물을 파괴하는 등 우발적인 군중시위 행동이 아닌 조직적인 폭거로서 민심교란 선동과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폭도로 변했다. 방화, 폭행, 기물파괴, 투석 등으로 부산 전역의 치안과 질서를 극도로 마비시키고 전 시민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김영삼은 부마항쟁을 ‘유신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주항쟁’으로, 김대중은 이를 ‘4·19를 떠올렸다’고 회고했다.

10월 16일 오후 부산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나는 부산 사태를 알았다. (중략) 당시 내가 들은 부산사태는 대충 이러했다.

10월 16일 오후 7시 5만여 명에 이르는 시위 인파가 시청 앞과 광복동 일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대원들은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그 구호가 거리에서 이어지고 ‘김영삼총재 제명을 철회하라!’등 구호가 퍼졌다. (중략) 유신체제 아래에서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나의 총재직 제명을 계기로 폭발했다. 유신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주항쟁이 벌어진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64~165쪽.

남녘에서 올라오는 시위 소식을 들이며 나는 4·19를 떠올렸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재야 민주 세력의 결집체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부마사태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깊이 반성하고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 국군을 정권 안보에 동원시키지 말 것, 유신헌법을 개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민주화 투쟁의 불길은 이미 전국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광주와 서울 등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었다. 4.19처럼 국민 저항은 북상 중이었다. 유신 독재는 청와대와 몇몇 그들의 안가에서만 숨이 붙어 있었다. 민심이 떠난 박 정권은 헐떡거리고 있었다. (중략) 이제 저들이 민심에 쫓겼다.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오늘은 초조하고 내일은 불안했다. 목이 타들어 갔다. 모이면 술을 들이켰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76~379쪽.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한편 전두환과 김종필은 부마항쟁을 이후에 일어날 10·26을 예견하는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사건 발생 전인 10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중략) 1974년 제1호가 선포된 대통령의 긴급조치는 그 이듬해 5월 제9호가 내려져 10·26 당일까지도 지속되고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내성도 갈수록 강해져 더 이상 약발이 듣지 않는 듯 보였다. 

- 전두환 회고록 <혼돈의 시대> 1권, 34쪽.

그날 밤 대통령은 청와대로 돌아가 김계원 비서실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정보부장, 구자춘 내무부 장관, 노재현 국방부 장관, 정승화 육군참모초장 등과 대책회의를 열었다. 최규하 총리는 대통령 지시를 받고 밤 11시에 국무회의를 열어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했다. 

(중략) 공수부대 출동은 차지철의 아이디어였다. YS와 신민당,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차지철과 김재규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때마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꾸짖으며 차지철의 손을 들어줬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7~19쪽.

노무현은 부마항쟁을 회고하며 그때까지도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자성(自省)적인 목소리를 냈다.

부마항쟁 때 수많은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병원들이 겁에 질려 시위 중에 다친 학생들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사무장이 분통을 터뜨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을 뿐이다. 김광일, 이흥록 등 부산에서 활동하던 동료 변호사들이 험한 고초를 겪었다는 소문이 들려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운명을 바꾸었던 ‘그 사건(부림사건)’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판사로 변호사로 사는 동안 애써 억눌러 왔던 내면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71쪽.

부산 시내 대학교는 10월 18일 비상 계엄령과 함께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지고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11월 20일 동아대학교, 23일 부산대학교가 개강했다.

한편 나흘 간 부산에서 1천 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됐으며, 그 중 651명은 즉결심판에 회부됐다. 그리고 11월 29일 계엄군법회의에 연행된 학생 및 일반인 87명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20명이 실형을 받았다. 최고 징역 5년까지 선고받은 학생 및 일반인들의 죄목은 소요 방화 긴급조치 위반죄, 포고령 위반죄 등이었다.

 

1979.10.26. 10·26 사태

부마항쟁으로부터 10여일이 지난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날은 뭔가 이상했다’고 회고했다. 그날 오전 취재 차 박정희를 봤던 한 기자는 ‘죽기 전에 뭐가 씐다고 하지 않나’라며 ‘늘 보던 얼굴이었지만, 그날은 왜인지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후 7시 50분 경 박정희는 김재규가 쏜 몇 발의 총알에 암살당했다. 그 자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오후 6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마련한 만찬 자리로,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박정희 대통령이 함께했다. 

김재규의 암살 경위를 두고 여러 가지 설(說)들이 많다. 그중 당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와의 9월 23일 <시사오늘> 인터뷰와 김영삼이 당시 강신옥, 김정두 두 변호사로부터 들었던 말에 대한 회고록 등을 종합하면, 차지철의 발언이 결정적이었다.

안동일과 김영삼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차지철의 발언은 아래와 같다. 

“각하,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몇 백만 명을 죽여도 그만인데, 까짓것 십만이고 이십만이고 우리가 탱크로 깔아뭉개지요.”

이에 안동일 변호사는 인터뷰에서 “이 발언을 들은 김재규 입장에선 ‘이러면 큰일 나겠다’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삼은 ‘박정희 독재 권력의 진면목을 드러내주는 말’이라고 평가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을 깡패로 매도하고, 탱크로 수십만 명을 서슴없이 학살할 수 있다는 방자한 언행이야말로 박정희 독재 권력의 진면목을 드러내주는 말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68~171쪽.

하지만 김재규 행동에 대한 평가는 확실하게 엇갈렸다. 노태우는 김재규를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 이상의 패륜아’라고 평가했다.

군인들의 상식으로는 김재규야 말로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 이상의 패륜아였다. 정보부장에 의한 대통령 살해,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어떤 형태, 어떤 성격으로 규정되든 간에 있어서는 안 될 천인공노할 범죄였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231쪽.

총 3권으로 200쪽에 달하는 전두환 회고록의 시작은 다름 아닌 10·26 사건이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18년 넘게 권력을 유지한 것이 사명의식, 책임감 때문이라고 평가하며, ‘하산을 생각했지만 그 전에 김재규의 흉탄을 맞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18년 넘게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권력의 마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혁명의 그 순결한 목표를 완수해놓고 물러가겠다는 사명의식,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믿고 있다. (중략) 어쩌면 하산을 생각했지만 미처 실행에 옮기기 전에 김재규의 흉탄을 맞은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 전두환 회고록 <혼돈의 시대> 1권, 36페이지.

김종필은 차지철과 김재규는 YS와 신민당,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이미 여러 차례 충돌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꾸짖고 차지철의 손을 들어줬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열흘 전 발생한 부마사태는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중략) 박 대통령은 10월 25일 부마대책회의에서 “정보부장은 뭐 하고 있어. 정보활동과 초동대응, 모두가 실패잖아”라고 질책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다 차지철의 장난이다.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발작증이 있는 중앙정보부장의 마음에 붉으락푸르락 분노가 쌓여갔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21쪽.

또한 김종필은 차지철과 김재규의 충성 경쟁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며 ‘종말의 무대에서 차지철은 불길했고 김재규는 불안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재규를 향해 ‘발작증 증세가 있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김재규의 발작증은 여덟 살이나 아래인 차지철과 경쟁하면서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고향 동생처럼 친밀하게 대했으나 그가 발작증이 있고 정보부장이 된 뒤 더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재규가 10.26 당시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들 때도 욱하는 충동에 발작 증세에 빠져 있었다. 제정신이 들어 자기가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오래전부터 준비한 거사라고 했는데, 그의 병을 알고 있는 나에겐 가소로운 얘기였다. 

(중략) 김재규와 차지철에게는 공통 목표가 있었다. 박 대통령 심기를 미리 읽어 ‘대통령 종신집권’을 위해 달려 나가는 일이다. 이 목표를 위해 서로 더 큰 공을 세워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상대방을 쫓아내려다가 무리한 짓을 저지르기 십상이었다. 

(중략)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피해의식이 컸다. 사로 경쟁하다 자기가 모자란 것을 대통령이 탓하면 차지철 때문에 당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김재규는 입버릇처럼 “차지철, 이놈을 죽여 버려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1권, 489~493쪽.

한편 김대중은 박정희의 죽음을 도리어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 이유는 김대중의 한 회견 중 답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하는데, 독재자가 독재자의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은 민주주의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바다를 건너온 소식은 새벽처럼 서늘했다. 독재자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밤 가장 믿었던 심복의 총을 맞고 생을 마감했다. 모든 독재자의 말로가 그렇듯 그의 최후 역시 참혹했다. 부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니, 이제 광주와 서울에서도 일어나 4.19처럼 국민의 힘으로 박정희 독재를 종식시켜야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10.26 사태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 

(중략) 김재규에 대한 판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인간적으로 그를 연민하지만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평가하고 싶지 않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80~386쪽.

12월 18일 김재규는 사형을 구형받는다. 당시에는 비공개로 진행된 최후 진술은 16년이 지난 1996년 9월, 강신옥 변호사가 신동아에 ‘김재규의 10·26 재평가돼야 한다’는 글과 함께 녹음테이프를 발표했다. 아래는 공개된 김재규의 최후 진술 내용의 일부다.
 
“난 오늘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회복 시켜 놨다, 20년 내지 25년 앞당겨 놨다, 하는 이점, 이것은 누구의 의함도 바꿀 수 없는 자부를 저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위대한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만만세가 되도록 기원하고 또 10월 26일, 민주회복 혁명이 만만세가 되도록 저는 기원합니다.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빨리 하직 하게 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만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그 여한이 한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기약이 됐기 때문에 내가 못 보았다 뿐이지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가겠습니다.”

해가 바뀐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김재규를 포함한 5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면서 유신 체제의 진정한 막이 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했다.ⓒ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했다.ⓒ뉴시스

유신 막 내린 부마항쟁…민심의 전환 나타내는 기념비적 사건

격동의 해 1979년이 지난 지 40년이 흐른 2019년 10월 16일 오전. 처음으로 열린 정부 주관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부마항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길고, 엄혹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유신 독재를 무너뜨림으로써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위대한 항쟁”이라고 평가했다.

이로써 부마항쟁은 4대 민주항쟁 중 마지막으로 국가기념일로 인정받으면서 40년 만에 재평가됐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1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부마항쟁은 10·26 사건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며 “김재규가 현장에서 보고 민심이 바뀐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10·26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강 대표는 부마항쟁의 의의에 대해 “박정희 독재의 절정이었던 유신의 막을 내리게 한 클라이맥스(climax)가 부마항쟁”이라고 평가하며, “비록 4·19만큼의 희생은 없었지만 민심의 전환을 나타낸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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