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명성산 ‘가을 억새’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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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명성산 ‘가을 억새’에 취하다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19.10.20 14: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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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억새는 음지에서 자라지 않는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명성산의 가을 햇살을 담은 억새꽃이 은빛으로 빛났다. 사연이야 어떻든 곱디곱기만 하다 ⓒ 최기영
명성산의 가을 햇살을 담은 억새꽃이 은빛으로 빛났다. 사연이야 어떻든 곱디곱기만 하다 ⓒ 최기영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고복수 님이 부른 '짝사랑'이라는 노래 구절이다. 여기서 '으악새'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억새'라는 설이 많다. 실제 억새의 경기도 지역 방언이 '으악새'다. 

요즘은 정말 산을 타기 좋은 계절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시원한 가을날인 데다, 산야는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정말이지 산과 숲이 즐비한 우리나라 가을날에는 동네 산책로만 걸어도 눈 호강을 한다. 거기에 조금만 마음을 다잡고 길을 나서 은빛 억새 물결을 본다면 또 다른 색깔의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도 있다.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억새군락지가 있는 산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경기 포천에 있는 명성산에 가면 산행도 할 만하고, 가을 억새의 은빛 물결도 볼 수 있어 일석이조다. 특히 산정호수 유원지는 먹거리도 풍부하고 교통도 좋아서 그쪽에서 산행을 시작하고 다시 회귀하는 코스를 선택하면 편하다. 

책바위 코스로 오르면서 본 산정호수다. 책바위 코스는 비탈길이 가파르지만 산정호수 전경이 속 시원하다 ⓒ 최기영
책바위 코스로 오르면서 본 산정호수다. 책바위 코스는 비탈길이 가파르지만 산정호수 전경이 속 시원하다 ⓒ 최기영

명성산은 경기 포천과 강원 철원에 걸쳐 있다. 10월 둘째 주말부터 같은 달 마지막 주말까지가 명성산 억새꽃 축제 기간이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명성산이 또 유명한 것은 궁예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왕건에게 쫓겨 도망을 치다가 이곳에서 피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예는 죽기 전 나라를 빼앗긴 분노와 슬픔에 통곡했는데 그때 산도 따라서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鳴聲山)의 뜻도 그대로 울음소리산이다. 

나는 등산도 하고 억새도 보기 위해 지난 주말 명성산으로 향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명성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명성산을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원지에 도착해서 주차장 쪽에서 출발하면 책바위 코스와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로 나뉜다. 계곡길은 1km 정도 더 긴데 완만해서 억새군락지로 바로 오르기에 좋다.

나는 책바위코스로 길을 잡았다. 책바위코스는 굉장히 가파르지만 산정호수의 풍경이 시원하다. 명성산 자체가 산정호수 방면으로는 대단히 비탈진 암벽으로 이뤄져 있고, 반대편은 완만하게 생겼다. 계단과 산길을 따라 두어 시간을 오르다 보면 팔각정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억새군락지다. 팔각정 옆에는 명성산 표지석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저 억새군락지를 찾은 사람들을 위한 포토존에 불과하다. 명성산의 진짜 정상 표지석을 보려면 팔각정에서도 다시 1시간 30분가량을 더 가야 한다.

팔각정을 지나 명성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억새와 단풍이 어우러진 정겨운 길이다. 이리도 높은 곳에 저렇게 다정한 오솔길이 잘 나 있는게 신기하다 ⓒ 최기영
팔각정을 지나 명성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억새와 단풍이 어우러진 정겨운 길이다. 이리도 높은 곳에 저렇게 다정한 오솔길이 잘 나 있는게 신기하다 ⓒ 최기영

정상으로 가는 길은 정겹고 편안하다. 그렇게 높은 곳에 사방이 탁 트인 오솔길 같은 능선길이 잘 나 있는 것도 신기하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억새가 어우러져 하늘거리는 길이 한참 동안 이어진다. 왼쪽 아래에는 산정호수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각흘산, 광덕산, 백운산 자락이 이어지는  산세도 멋지다.  

그렇게 정겨운 길을 걷다 보면 먼저 삼각봉(906m)이 나온다. 삼각봉에서 명성산 정상과 함께 보이는 암봉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궁예능선이다. 삼각봉을 내려와 조금만 더 걸으면 경기와 강원의 경계 안내 표지판이 있고, 그것을 지나면 드디어 강원 철원 땅에 있는 명성산(923m)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는 쉼터도 있어 나는 그곳에서 한참 있다가 본격적으로 억새를 감상하기 위해 다시 팔각정 방향으로 돌아왔다. 

왼쪽으로 보이는 바위 암봉 능선이 궁예능선이다 ⓒ 최기영
왼쪽으로 보이는 바위 암봉 능선이 궁예능선이다 ⓒ 최기영

억새는 음지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숲이 우거진 곳에는 억새가 없다. 전쟁이 끝나자 화전민들이 명성산에서 밭을 일구며 살았다. 그들이 떠나자 억새가 군락을 이룬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억새꽃은 그렇게 가을 햇살을 그대로 담아 솜털같이 피어나 눈부신 은빛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포천과 철원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다. 산정호수는 김일성 별장이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서 숱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야말로 이곳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곳에 억새꽃이 피어나자 사람들은 명성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마음 둘 곳 없던 명성산은 뜨겁고 황량했던 그곳에 가을이 되면 피어나는 억새꽃에 정을 붙이며 그 긴 세월을 견디어 낸 건지도 모르겠다. 

정상을 다녀와 팔각정이 있는 억새군락지로 다시 돌아왔다. 억새 은빛 물결이 파도를 친다 ⓒ 최기영
정상을 다녀와 팔각정이 있는 억새군락지로 다시 돌아왔다. 억새 은빛 물결이 파도를 친다 ⓒ 최기영
억새군락지에는 나무데크가 설치돼 있다. 편안하게 억새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다 ⓒ 최기영
억새군락지에는 나무데크가 설치돼 있다. 편안하게 억새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다 ⓒ 최기영

억새꽃이 이룬 물결 사이를 구석구석 걸으며 한참을 명성산의 가을 멋에 빠져 있다가 계곡길로 하산했다. 산행한 뒤라 땀에 젖은 탓인지 아직은 계곡물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거친 욕망이 들끓던 여름이 지나고 명성산에도 눈부신 가을이 와 있었다. 명성산의 아픈 사연은 이제는 단풍이 되고 억새가 돼 내 눈에는 곱디곱게만 보였다. 그리고 지난날의 열정도, 허물도 가을이 되니 추억처럼 그리운 것은 또 다시 나의 한 세월도 이렇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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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남 2019-10-20 19:45:17
산꾼의 건강함과 역사관이 깃든 아름다운글 잘 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