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드리운 남북경협…정부 ‘무책임’·재계 ‘당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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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 드리운 남북경협…정부 ‘무책임’·재계 ‘당혹’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9.10.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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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금강산 남측 시설 싹 들어내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 한마디에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 기조인 평화경제 남북 경제협력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 시사오늘
"금강산 남측 시설 싹 들어내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 한마디에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 기조인 평화경제 남북 경제협력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 시사오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금강산 시설 철거 발언으로 문재인 정권의 핵심 정책 기조인 남북 경제협력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청사진을 믿고 남북경협을 대비했던 재계는 당혹스러운 모양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매체들은 김 위원장이 금강산 일대 관광시설을 돌아보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남측 관계 부문과 합의해 싹 들어내도록 하고 금강산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 봉사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지난 23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금강산이 10여년 간 방치돼 흠이 남았다"며 "국력이 여릴 적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 됐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 "금강산이 마치 북남관계의 상징처럼 돼 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라며 "남녘 동포들이 오겠다면 언제든 환영하겠지만 우리의 명산인 금강산에 대한 관광사업에서 남측을 내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에 우리 사람들이 공통된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이 자신의 부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까지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금강산관광사업을 깎아내리고, 남북경협 정책을 비판한 이유는 지난해 9월 남북 정상이 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금강산관광사업 재개 약속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 정부에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도 높은 대북 제재를 이어가는 미국을 향한 간접적 비난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이달 초 스톡홀름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이 결렬된 것과 관련해 〈노동신문〉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은 저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라들에 제재를 들이대며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한 걸음의 양보는 열 걸음, 백 걸음의 양보를 가져오고 결국 망하게 된다"는 내용의 사설을 지난 21일 실은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한반도 평화경제를 강조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금강산 시설 철거 발언이 나왔다 ⓒ 국회사진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한반도 평화경제를 강조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금강산 시설 철거 발언이 나왔다 ⓒ 국회사진취재단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든 현재 우리 정부와 재계가 준비 중인 남북경협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만은 분명하다는 게 중론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남북경협을 강조해 왔다. 지난 2월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문 대통령은 "미국이 남북 간 철도, 도로 연결부터 남북 경협까지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지난 8월 한일 무역분쟁 국면에서는 "이번 일을 겪으며 평화경제의 절실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남북 간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단숨에 일본경제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4차 유엔총회에서 연설자로 나서 "남과 북, 미국은 비핵화와 평화뿐 아니라 그 이후의 경제협력까지 바라보고 있다. 평화가 경제협력으로 이어지고 경제협력이 다시 평화를 굳건하게 하는 평화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고 내세웠다. 지난 23일 펠리페 6세 국왕과의 정상회담에서도 "DMZ 비무장지대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처럼 평화의 길이 돼 세계인이 함께 걷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으며, 지난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한반도 평화경제 의지를 재천명했다.

정부가 연이어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자 경제인들은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지난 2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평화 정착으로 이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전환할 것"이라며 "대한상의가 남북경협을 잘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지난 8월 한반도평화경제포럼 창립기념 세미나를 개최하고 "전경련은 남북 상생 산업협력을 이끌 프로젝트 발굴을 실행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재벌 대기업들도 정부와 보폭을 맞췄다. 삼성, SK, LG 등은 지난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남북협력 전담조직을 꾸려 대북사업을 모색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총수들이 정상회담 일정에 동행키로 한 게 가장 큰 이유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됐을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계획을 준비하기 위한 행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한화그룹도 지난해 북미정상회담 직후 대북사업 TF를 조직해 남북경협 전략 짜기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북경협이 성사될 시 가장 많은 수혜를 누릴 것으로 전망되는 건설업계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해 대북사업 준비에 매진했다. 삼성물산, 현대건설, GS건설, 대우건설, 포스코건설, 롯데건설 등 10대 건설사 대부분이 대북사업 TF를 구성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했다. 반신반의했지만 남북경협에 대해 정부가 그린 청사진이 워낙 화려해 따라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는 게 복수의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대형 건설사 임원은 "부동산 경기도 좋지 않고, 해외 수주환경도 악화되는 국면에서 정부가 제시한 남북경협 청사진이 무척 휘황찬란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모그룹 지시도 내려온 마당에 안 따라가면 또 어쩌겠느냐"며 "그렇게 많은 자원을 투입하진 않아도 최소한의 준비는 할 필요가 있다는 분위기였다.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비용을 쓰지 않은 게 다행인 셈이 됐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북한이 금강산의 남측 시설을 모두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재계는 당혹스러운 눈치다. 특히 북한의 금강산관광사업 파트너인 현대그룹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양새다.

현대그룹은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이제 오르막길을 걷는 일만 남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남북 간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은 우리에 의해 꽃을 피게 될 것"이라고 내세웠고, 남북정상회담 성료 직후 각 계열사가 남북경협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남북경협사업 TF팀을 발족해 자신이 직접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시설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유상증자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이번 발언으로 금강산관광사업 자체가 위기일로에 놓이면서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아산은 김 위원장의 발언이 보도된 직후 "금강산 관광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보도에 당혹스럽지만 차분히 대응해 나가겠다"는 입장문을 냈다. 표면적으로는 흔들림 없는 모습이지만 내부는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현대아산이 금강산에 투자한 금액은 총 7865억 원으로, 이중 2268억 원은 금강산 내 시설 투자금이다. 자칫 잘못하면 수천억 원을 허공에 날릴 판국이다. 다만, 지난해 현 회장 방북 일정 당시 리용남 북한 내각 부총리가 "현 회장의 일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덕담을 건넨 점, 김 위원장이 이번 발언을 하면서 '남측 관계 부문과 합의'라는 단서를 단 점은 현대그룹에 긍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문제는 재계를 남북경협 무대로 끌어들인 정부여당이 이번 사태에 대해 사실상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지난 23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한반도비핵화대책특별위원회가 개최한 비공개 정책간담회에 참석한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통일부 차원에서 구체적인 것을 확인을 좀 해보겠다.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맥락을 파악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 김한정 의원은 이날 간담회 자리에서 김 장관이 "금강산에 있는 우리 시설은 이미 10년 정도 경과하는 과정에서 많이 낡은 게 사실이다. 꼭 대북 제재 때문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금강산관광사업에 대한 그간 부진도 있다"는 설명을 했다고 전했다.

이후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을 통해 "북측이 요청을 할 경우에 우리 국민의 재산권 보호, 남북합의 정신, 금강산관광 재개와 활성화 차원에서 언제든지 협의할 계획이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언론매체 통해 보도된 것이기 때문에 의도와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발언은 지난해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합의한 금강산관광사업 재개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불만 표시인 동시에, 김 위원장 스스로 해당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인 만큼, 통일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금강산 시설이 많이 낡은 건 사실'이라는 김연철 장관의 발언은 비록 비공개 자리이긴 했으나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국민 재산권 문제가 달린 사안에 대해 경솔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청와대는 아예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취재진들에게 "(북한의) 향후 계획이 어떤지 명확히 분석하는 게 먼저다. 협의할 부분은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은 "남북 교류와 평화의 대표적 상징인 금강산 관광인 만큼 북측의 조치는 안타깝고 유감이다. 오랜 시간 반복과 갈등을 봉합하고 화합하는 길에는 남북 모두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남과 북은 차분한 진단과 점검을 통해 남북 상호 간 교류와 협력을 진척시키기 위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문제가 남북경협을 전반적으로 흔들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북한은 항상 그래왔고, 그 부분은 기업인들도 잘 알고 있다"면서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오히려 우리 정부다. 한반도 평화경제에 동참해 달라고 기업인들에게 요청할 땐 언제고, 막상 우리 기업의 실질적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북한의 요청이 있으면 협의하겠다'는 식의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데 앞으로 누가 믿고 투자를 하고, 따라가겠느냐"고 꼬집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좀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고, 솔직히 특별하게 입장을 낼 일이 아니라고 본다"면서도 "이렇게 될 줄 진짜 몰랐느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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