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민주화 근간 된 ‘민주산악회’ 태동한 그 곳
[북한산] 민주화 근간 된 ‘민주산악회’ 태동한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11.0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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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6월 9일 북한산 등반으로 시작…민추협-신민당으로 이어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민주산악회는 민추협-신민당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근간이 됐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산악회는 민추협-신민당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근간이 됐다. ⓒ김영삼 회고록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서울에는 봄이 찾아왔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대다수 국민들도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 그랬듯, ‘서울의 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 군인들이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짧은 봄 뒤에 또 다시 찾아온 겨울은, 그 전보다도 더욱 혹독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민주화 분위기를 뿌리 뽑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10·26사건으로 이미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팽배했던 상황에서, 정통성 없는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을 경우 국민적 반발이 일어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이에 전두환은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준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공포 정치’를 시작한다.

비상계엄이 발동되면서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 JP(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3김’은 정치활동을 규제당했다. YS는 가택 연금된 뒤 정계은퇴를 강요받았고, DJ는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JP에게도 감금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뿐만 아니라 재야(在野)에서 활동하던 정치세력도 철저히 통제했으며,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도 가혹하게 진압했다.

상상 이상의 냉혹한 탄압에, 민주화 열기는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YS는 자서전 <나의 정치 비망록>에서 이 시기에 대해 “1차 가택연금은 분노의 1년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꽃봉오리가 무참히 짓밟힌데 대한 분노는 정말 삭이기 어려웠다. 잠도 잘 수 없고, 붓글씨를 쓰려 해도 잘 써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려 해도 잘 들어오지 않아 한참 읽어도 무엇을 읽었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바로 이때 ‘민주주의의 싹’을 다시 틔운 것이 민주산악회였다. 1981년 가택연금이 해제되자, YS는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이민우·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과 함께 산악회를 조직하고 흩어졌던 민주화 세력을 규합했다. YS에 따르면 “연금이 풀린 후 모임이 잘 안 돼 답답해하고 있는데, 김동영 전 의원과 정채권 목사가 찾아와 등산을 권해 함께 올랐다. 모임에 안 나오는 사람들을 등산에 초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등산을 권고해 점차 동반자들이 늘었다”고 한다.

1981년 6월 9일 북한산 등반으로 그 탄생을 알린 민주산악회는, 금세 민주화 투사들의 ‘산속 모임’으로 유명해졌다. 참고로 민주산악회 탄생일이 1981년 6월 9일이 된 데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회원들은 전두환 정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절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민주산악회가 언제 시작됐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민주산악회 회원 몇몇을 끌고 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1981년 6월 9일이 첫 등반’이라는 사실을 말했고, 이날이 민주산악회의 ‘생일’로 알려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기부가 민주산악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어쨌든 민주화 투사들이 다시 힘을 모으는 와중에 뉴욕타임즈, NHK 등의 보도로 민주산악회가 세계에 알려지면서, 전두환은 YS가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 헨리 스톡스와 북한산을 오르며 인터뷰를 한 것이 정치규제 위반이라는 이유로 다시 그를 가택연금했다. 하지만 각 시·도에서 지부·지회를 결성하며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해나간 민주산악회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민주산악회는 전두환 정권 하에서 숨을 죽이던 민주화 세력이 다시 힘을 합치게 만든 구심점(求心點) 역할을 했다. YS의 최측근이었던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은 2013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민주산악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야당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 민주산악회가 정치적 결사체로서 그 역할을 했다. 재야에 있었고 공식적 야당은 아니었지만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산악회가 있었기 때문에 YS와 DJ세력이 함께한 민추협도 결성할 수 있었다. 민추협은 민주산악회라는 근간이 있어서 가능했고, 민추협이 있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이 가능했다. 민주화 투쟁사에서 민주산악회는 나름대로 커다랗고 찬란한 역할을 했다.”

1981년 6월 9일 북한산 등반이 민주산악회 탄생 계기로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안기부의 추적 덕분이었다. ⓒ시사오늘
1981년 6월 9일 북한산 등반이 민주산악회 탄생 계기로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안기부의 추적 덕분이었다. ⓒ시사오늘

실제로 YS는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인 1983년 5월 18일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들의 복직 △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 수용과 야당인사 석방 등 민주화 5개항을 주장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23일 간의 단식 끝에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낸 YS는 곧바로 민주산악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결사체 결성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연대해 만들어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다.

알려진 대로, 민추협은 신한민주당(신민당)을 만들어 1985년 제12대 총선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며 총칼로 굳건함을 지켜내던 전두환 정권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자그마한 불빛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북한산을 향해 내딛은 한 걸음이 민주산악회로, 민추협으로, 신민당 돌풍으로, 민주화로 뻗어나간 셈이다.

한편, 민주산악회는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해체된다. 민주산악회가 월계수회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우려했던 YS가 해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월계수회는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노태우 집권 후 권력집단화되며 각종 비리에 연루된 바 있었다.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지난 2011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당선되고 닷새 정도 됐는데, 최형우가 노태우 정권 때 월계수회 폐해를 이야기하면서 YS의 뜻을 우리에게 전했다”며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다음은 민주산악회 해체 당시의 언론보도 내용이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자신의 최대 사조직인 민주산악회(회장 최형우 의원)를 해체할 방침인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김 당선자의 한 측근은 “민주산악회의 결성 목적인 민주화와 김영삼 총재의 대통령 당선이 달성된 데다, 계속 존속할 경우 6공 초기의 월계수회처럼 권력집단으로 국민에게 비쳐질 우려가 있다”며 “김 당선자는 지난 19일 최형우 회장에게 이런 뜻을 전하고 해체하는 쪽으로 활동을 정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민주산악회는 23일 오전 최형우 회장 주재로 회장단 회의를 열고 우선 대선운동 기간 중에 드러난 회원 규모와 숫자를 대폭 축소하는 등 활동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1992년 12월 24일자 <한겨레> ‘민주산악회 해체 방침’

담당업무 : 국회 및 자유한국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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