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구 되면 심사 없이 노병구는 관악구 공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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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구 되면 심사 없이 노병구는 관악구 공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10.1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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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등포 을구에서 출마

1980년 8월27일,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뒤를 이어 기존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과 국민을 협박, 공갈하는 수단으로 법에도 없는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었다.
 
마치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삼청교육대는 고문이라 할 수밖에 없는 혹독한 훈련과 기합으로 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불구가 된 사람도 많았다. 980년 5월17일, 전두환 일파는 계엄을 선포해 놓고 김대중, 김종필을 잡아갔고, 다음 날부터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는 헌병 1개 중대로 둘러싸인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전두환은 5월18일 광주학살사건을 일으키며 무리한 정권장악에 들어갔다. 무장한 계엄군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을 죽이고 부상을 입혔으며, 엄청난 파괴가 뒤따랐다.

정권야욕에 눈이 뒤집힌 전두환과 그 패거리들이 저지른 만행은 또 다시 국민의 가슴을 멍들게 했고, 순탄하게 선진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할 또 한 번의 기회를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며, 올바른 방향을 잡은 우리의 역사를 또다시 뒤틀어 놓고 말았다.

1981년에 접어들면서 제12대 대통령선거와 제11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선거는 박정희의 유신정권 때 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해체하고 이름만 바꾸어 대통령선거인단을 구성해 거기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게 했는데, 각 국회의원 선거구에서 동 단위로 한 사람의 선거인을 뽑는 선거를 했다.

1981년 2월25일, 선거인단회의에서 대통령선거를 하는데, 입후보등록은 민주정의당 전두환, 민주한국당 유치송, 민권당 김의택 세 사람이 했지만 말이 경쟁이고 선거이지 민한당의 유치송 씨와 민권당의 김의택 씨는 자기 쪽 선거인도 몇 사람 안 되어 완전히 전두환을 위한 들러리로 입후보한 것이었다.
 
이는 실제로는 전두환 단독출마나 다름 없는 속 보이는 선거로 전두환은 사상 최초로 7년 임기의 체육관대통령이 되었다. 두환은 박정권 시절에 있었던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여야를 인위적으로 전두환의 민정당, 유치송 씨의 민한당, 김의택 씨의 민권당으로 나누어 이름뿐인 정당정치로 판을 바꾸어 출발했다.

나는 고흥문 씨와 잘못 맺은 인연으로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집을 몇 번 지어본 경험을 살려 건축업을 하려고 집안 몇 분의 공동투자로 남부순환로 큰길가의 신림동 난곡입구에 그때로는 제법 큰 지하 1층 지상 3층의 빌딩을 준공했다. 그리고 그 빌딩 1층에 약국도 열고 2층에는 탁구장을 개설해서 운영했다.

나는 정치규제에도 묶이지 않았고,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 신민당 복수공천으로 출마해 이름도 얼굴도 유권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주변사람들은 전에 같이 출마했던 김수한 의원도 정치규제에 묶여 나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명목상의 야당이라도 공천만 받으면 누구보다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다시 출마해서 야당성을 회복하면 되지 않느냐고 일단 민한당에 공천신청을 내야 한다고 강권하다시피 했다.
 
물론 주변의 영향도 컸지만 경옥이 앞장서서 정치규제에 묶였으면 오히려 다행이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입후보를 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출마를 고집했다.
주변사람들의 권고도 고마웠지만 평생 동반자인 아내가 어떠한 고난이 와도 달게 받겠다고 하면서 앞장서는데 오히려 새로운 용기가 불끈 솟아 입후보할 결심을 굳혔다.
 
먼저 민한당 유치송 총재와 사무총장 신상우 의원을 만나 내 결심을 전하고 민한당에 공천신청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정치규제에 묶여 정치를 못하게 된 선배들에게도 일일이 찾아가서 위로의 말과 함께 나의 입후보 결심을 전하고 도움을 청했다.

나와 같이 계보를 형성하고 오랫동안 정치를 함께했던 고흥문 의원도 그동안 나에게 실망을 준 데 대한 미안함도 있고 해서 신상우 사무총장을 만나 나의 공천을 부탁했더니 이번에는 꼭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다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유치송 총재도 자신의 보좌관 고병수 동지까지 내 사무실에 보내 민한당 유치송 대통령후보를 지지할 선거인단후보를 많이 출마시켜 당선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후보자를 내는 데 열중하고 없는 돈에 나로서는 적잖은 금액을 관내 모든 선거인단후보들에게 지원하며 고병수 동지와 함께 열성을 다해 운동을 해서 다른 선거구에 비해 여러 명의 선거인을 당선시켰다.
 
 


공천심사위원장 신상우 사무총장을 비롯한 정치에 새로 입문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평소 나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공천심사위원이어서 특별히 나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중앙당에서 국장단에 같이 있던 서석재 씨와, 특히 고흥문 계보에서 특별한 인연을 맺은 바 있는 유용근 의원이 공천심사위원으로 있는 데다가 당시 서울 시내 전 선거구에서 신민당 시절 신인으로 복수공천을 받아 2만여 표를 받은 경력을 가진 신청자가 없었으므로 나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정당한 심사라면 거의 공천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민한당 1차 공천자가 발표되었는데, “영등포 갑구의 공천자는 서청원 씨로 하고 이 선거구는 분할될 선거구로서 곧 선거구가 분할되면 그 선거구에는 노병구 씨를 1차로 고려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렇게 발표한다”고 당시 민한당 대변인이었던 김원기(전 국회의장) 대변인 명의로 발표되어 여러 신문에 그대로 게재되었다.

나는 곧바로 김원기 대변인을 만나 공천자가 서청원이면 그냥 서청원이라고 발표하면 되지 그 다음 얘기는 무엇 때문에 갖다 붙인 것이냐고 따졌다.
“나도 몰라요.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적어준 대로 나는 발표한 것뿐이오. 노병구 씨, 너무 걱정 마시오. 여기에는 분구가 되면 준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니겠소?”

김원기 대변인은 그러면서 나에 대한 위로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새로 들어온 공천심사위원들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책이라는 김문석 씨도 만나 인사를 하고, 변호사로서 공천 심사위원이 된 박병일 씨를 인사차 찾아갔다. 내 이름을 듣고 박병일 씨는 무척 반기면서 말했다.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노병구 씨는 공천심사 첫머리에 아무도 이의 없이 공천결정이 나서 신상우 심사위원장이 방망이를 쳤습니다. 심사를 한참 진행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상우 위원장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고 난 신 위원장이 공천심사위원들에게 영등포 갑구는 다시 심사를 해야겠다고 해서 이미 심사가 끝나서 넘어갔는데 왜 그러느냐고 하는 말들이 있어, 그러면 이 선거구는 분구가 되는 구역인데 그때 노병구 씨를 공천하기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청서류를 보니까 제가 중앙대학교를 나왔는데 서청원 씨도 노병구 씨도 중앙대학교 출신이어서 그렇게 하면 두 분이 모두 공천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법률가의 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분구가 되면 별도의 심사 없이 곧바로 노병구 씨는 관악구의 공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선거운동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나는 황산성 씨를 찾아갔는데, 황산성 씨도 같은 말을 했다.
“노병구 씨는 인기가 좋으신데여. 선거운동이나 하시지 뭐 하러 이렇게 다니십니꺼? 열심히 운동하셔서 당선하시소.”

나는 두 변호사의 말을 믿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행태도 신경이 쓰였지만 선거인단선거를 위해 자신의 보좌관인 고병수 동지까지 내 구역에 파견했던 민한당의 유치송 총재도 힘을 못쓰는 것 같아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와 같이 고흥문 계보에 있던 함평 출신의 이진연 의원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해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노 국장, 흰떡에도 고물이 든다고 했는데, 혹시 모르니 나한테 돈 300만원만 만들어 주시오. 그 돈을 공천심사위원에게 써서라도 공천이 되도록 내가 노력해보겠소.”

나는 내 공천 문제를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이진연 의원이 너무 고마워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방법이지만 아내와 상의해서 돈 300만원을 마련해 이진연 의원에게 주었다.
 
며칠이 지나 이진연 의원은 공천심사위원들을 만나봤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한다면서 받았던 300만원을 도로 가지고 왔다. 나는 지금도 이진연 의원의 수고와 마음씀씀이에 감사하고 있다.

결과는 관악구가 분구되면서 한광옥으로 결정이 났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공천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해 가처분신청 등 사법적 판단을 기대하고 소송도 할 수 있었겠지만, 전두환 정권은 처음부터 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자의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군사정권 하에서는 정상적인 법질서의 정착은 요원하다고 생각해 체념하고 사업이나 하려 했다.

내가 지금까지 서운하게 여기는 것은 공천심사위원에 있던 유용근 의원의 태도가 나와의 인간관계를 생각할 때 그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고흥문 계보에서 유용근 때문에 문제가 되었을 때, 나는 유용근을 살리기 위해 고흥문 의원과 계보 내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사가면서까지 며칠을 버텨 보호했다.
 
그로 인해서 유용근은 국회에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나는 고흥문 의원과 소원해져서 결정적인 손해를 보았다. 그런데 유용근 자신이 공천심사위원이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어 우리들의 인간관계가 이정도인가 하여 서글픔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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