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서거 4주기/지도자의 자격] “YS 정치가 국민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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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서거 4주기/지도자의 자격] “YS 정치가 국민통합이다”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11.17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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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산악회 해체·하나회 척결·전노 구속… "대의 위해 희생"
15대 개혁공천, 이념 초월 영입… "인적쇄신 통해 좌우화합"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YS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시사오늘〉은 ‘YS의 사람들’을 찾아가 ‘국민의 지도자’로서 YS의 능력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그들의 증언을 재구성해 쫓아가본 YS의 국민통합 행보. ⓒ시사오늘 김유종
YS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시사오늘〉은 ‘YS의 사람들’을 찾아가 ‘국민의 지도자’로서 YS의 능력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그들의 증언을 재구성해 쫓아가본 YS의 국민통합 행보. ⓒ시사오늘 김유종

천지교태(天地交泰),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해야

한국사회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압축(壓縮)’일 것이다. 1960년대 경제 산업화도, 1987년의 대통령 직선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뤄졌다. 한국사회의 압축 성장에 대응해, 사회 갈등도 거의 동시에 분출됐다. 

군부로 대표되는 산업화 세력과 YS(김영삼)·DJ(김대중)로 대변되는 민주화 세력. ‘조국 비호’에 목소릴 높인 386운동권 세대와 ‘조국 사태’에 분노하는 청년 세대. 이 모든 계층이 한 시대에 뒤섞여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다. 압축성장과 더불어 이른바 ‘압축 갈등’도 시작된 것이다.

2014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펴낸 사회통합 실태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는 OECD 25개국 가운데 5위로 최상위권이다. 반면 갈등관리지수는 OECD 34개국 중 27위로 하위권이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은 최소 82조 원에서 최대 246조 원으로 추정됐다. 한국 사회의 갈등은 전 세계에서 심각한 수준이지만, 정치권의 능력 부족으로 국민통합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은 채 사회적 비용만 낭비한 셈이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급진적 민주주의가 불러온 사회갈등. 2019년은 이 분열이 극단으로 치달아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분열된 국론이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자원을 고갈시키는 악순환의 시대다. 국민통합은 문재인 정부와 20대 국회가 당장 해결해야하는 눈앞의 과제이자,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선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 지도자, 대통령의 행보가 더욱 중요해진다. 일단 분열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다음 국민통합을 성숙시키기 위해 어떤 제도적 쇄신을 시도할 것인지, 정치지도자가 국민들 앞에 비전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뉴라이트 대표주자이자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신지호 전 국회의원은 지난 10월 본지와 만나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YS처럼만 정치하면 된다”면서 YS를 ‘국민통합 대통령’의 롤 모델로 정의한 바 있다.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정상화시키고 바로잡은 게 YS다. 노태우, 전두환을 감옥에 보내고, 5‧18을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한 게 YS다. 한국당은 YS의 유산을 이어받으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조상, 유산마저도 걷어차고 있는 게 지금의 한국당이다. 보수 진보로 나눠 얘기할 필요도 없다. YS 정치가 국민통합이다.”

그렇다면 YS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시사오늘〉은 ‘YS의 사람들’을 찾아가 ‘국민통합 지도자’로서 YS의 능력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그들의 증언을 재구성해 쫓아가본 YS의 국민통합 행보다. 

1992년 YS의 대선 운동을 위해 사비까지 털었던 충성심 높은 조직이었으나, 노태우 '월계수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강제로 해체됐다.  ⓒ김영삼 회고록
1992년 YS의 대선 운동을 위해 사비까지 털었던 충성심 높은 조직이었으나, 노태우 '월계수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강제로 해체됐다. ⓒ김영삼 회고록

육참골단(肉斬骨斷), 승리하기 위해선 자기희생 각오해야

지난 4일 만난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YS의 최측근으로,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 내내 YS의 곁을 지킨 인물이다. 그는 1993년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5일 후 민주산악회를 해체시킨 일을 언급하며 “주변의 반발이 극심했다”고 회상했다.

“민주산악회 해산에 반대하는 사람? 당연히 많았지요. 동기들(상도동계) 여론이 얼마나 안 좋았겠어요.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 조직을 한 번에 해체시킨 건데.”

전두환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5공화국 헌법을 만들고 기존 정당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YS는 1981년 이민우·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 민주화 운동 인사들과 함께 산악회 조직을 만들었다. 표면상으로는 친목 단체였지만, 독재정권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하는 등 사실상 ‘YS계 정치조직’이었다.

특히 산악회는 1992년 YS의 대선 운동을 위해 사비까지 털었던, 충성심 높은 조직이었다. YS 역시 공공연하게 “민주산악회가 없었다면 대통령 당선이 어려웠을 것”이라며 민주산악회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故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지난 2010년 본지와 만나 민주산악회 해체로 느낀 회원들의 배신감을 토로한 바 있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YS의 당선으로 (산악회) 중앙, 지부할 것 없이 축하행사를 준비하던 때였으니 그 놀라움과 배신감이 오죽했겠는가! 길게는 30여년을 YS를 따라 군사독재와 싸우느라고 얼마 안 되는 가산마저 지부운영을 위하여 털어넣으며 천신만고 끝에 얻은 승리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으라니. 아무리 올바른 국정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 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YS는 왜 그의 확고한 기반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을까. 여기엔 5공 시절 노태우 대통령의 사조직이었던 ‘월계수회’의 국정 폐해 사례가 있었다.

월계수회의 중심이던 박철언 당시 안기부장특별보좌관을 비롯해 강재섭·이재황·나창주·지대섭 등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돈과 권력을 앞세워 청와대와 안기부, 검찰 등을 장악하고 경제부처를 포함한 모든 행정부 요직에 앉았다. 이를 지켜본 YS는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가차 없이 자신의 세력 일부를 잘라낸 것이다.

결과만 두고 본다면, YS는 ‘비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민주산악회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그게 YS의 정치 철학이었으니까요.”

“민주산악회가 어떻게 보면 문민정부의 원천을 만든 조직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거나 부정한 청탁을 하는 부작용이 사실 예견이 됐기 때문에 YS가 산악회를 해산을 시킨 거예요. 남아 있었다면 높은 확률로 압력단체가 됐을 거예요.” -김봉조, 4일 인터뷰.

“YS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산악회 동지들 중 겨우 몇 명 외엔 스카우트 하지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서운했지요. 그러나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시킨 그 뜻을 이해했으니까요. ‘자기 사람’은 제껴 놓고, 능력 있는 사람 바탕으로 채용한 거지요. 그때 제가 아무 직책도 못 맡고 지금까지 가난하게 사니까, 주변에선 ‘너 김영삼 헛 따라다녔다’는 얘기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YS가 옳았다고 봐요.”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前민주산악회 여성부장), 12일 인터뷰

그러나 이에 대해 ‘제 살 깎아 먹기’식 무지(無知)한 행보라는 비판도 나왔다. 상도동계 일각에서는 문민정부 이후 상도동계의 재집권이 멀어진 이유는 패권 조직이었던 민주산악회를 해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사실 YS가 스스로를 불리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게 YS인 거예요. YS는 계파나 이해관계를 가지고 정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철저히 배제하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바른미래당 정병국 의원 (前문민정부 청와대 제2부속실장), 14일 인터뷰.

YS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권위주의 체제의 핵심적인 지배세력인 군부를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냈다 ⓒ김영삼민주센터
YS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권위주의 체제의 핵심적인 지배세력인 군부를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냈다 ⓒ김영삼민주센터

YS의 이 같은 행보는 민주산악회 해체에 그치지 않았다. 

취임한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았던 1993년, YS는 갑작스러운 청산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과거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최대 폐해가 군대 내 정치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로부터 비롯됐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회 소속의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서완수 기무사령관 등 군부 내 사조직으로 지탄받아온 정치군인들은 가차 없이 퇴진시켜 군의 정치 불개입 원칙을 확립했다. 일주일간 수십 여 명의 정치군인들이 해임됐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권위주의 체제의 핵심 지배세력인 군부를 영원히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이뤄낸 것이다.

이에 박정희 정권의 지역 기반이던 TK(대구·경북)는 ‘TK 표적 사정’이라며 즉각 분노를 표했다.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성향 월간지 〈한국논단〉에는 1994년 당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정부가 4월 16일 단행한 이른바 ‘하나회 숙군(肅軍) 인사’는 과연 언론이 그처럼 큰 의미부여를 할 만한가. 군 내 하나회의 독주와 무소불위가 신문들의 지적대로 대단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소위 한 시기를 풍미했던 TK와, 지금 이 시점에서 독주와 무소불위가 역력해 보이는 PK(부산·경남)의 권력집중 현상에도 매스를 가해야 공평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YS의 차남 김현철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는 지난 1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실제로 군부 청산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TK쪽이 가장 높았다”며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들(TK·신군부)은 오랫동안 기득권 세력이었어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모두 ‘TK정권’이었잖아요. 당연히 시대정신이었던 ‘탈군부 개혁’에 맞춰 세대교체가 돼야 했습니다. 기득권을 위해 한 일이 아니고 국민을 위해 한 일이었습니다. 

하나회 청산하고 나서, 당시 YS 지지율이 거의 90%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국민들이 폭발적으로 지지했어요. 오히려 우리들(정부여당)은 지지율이 너무 높아서 부담스러웠어요. ‘지지율이 좀 정상적인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어요. 국민들이 지지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YS가 한 일이 어떤 특정한 계파나 정치 겨냥하는 ‘정치보복’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하나회 청산은 군부와의 작별을 바라는 국민들의 시대적인 소명이었습니다.” 

하나회 청산을 시작으로, YS는 군부 잔재와의 싸움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온점을 찍는다.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그 법을 기반으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항쟁 진압의 주범 전두환과 노태우를 피의자 신분으로 구속수감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YS에게 불리했다. 5·18 특별법과 신군부 구속은 3당 합당에 참여한 YS의 또 다른 세력, 구(舊) 민정계에 대한 힘의 약화를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당 내부적으로는 심한 갈등을 겪게 됐다. 

“이 일 때문에 TK지역 유권자, 여당 중에서도 과거 권위주의 세력들로부터 YS가 지지를 크게 잃은 건 사실입니다. 결국 개혁정책을 이끌어 가는 YS정부의 동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 DJ와 JP(김종필) 두 사람이 연합을 이뤄내면서, YS가 여당 내부에서도, 야당 외부에서도 공세를 받았지요.” -최양부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농림해양수석비서관, 12일 통화.

“그걸 민정계 주장처럼 정치 보복, '팽(烹)'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정파가 달랐고 충돌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YS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자유한국당 이성헌 전 의원(前 문민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11일 인터뷰.

김현철 교수는 특히 '5·18 특별법 및 전·노 구속 사태'가 YS로서도 힘든 결정이었으며,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내린 결단이었다고 회상했다. 

“구속까지는 가지 말자는 반대의 목소리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냥 역사에 맡기자는 말이 왜 없었겠어요. 96년 총선을 앞두고, 우리가 95년 지방선거에서 아주 참패를 했었지요. 총선에서 이기려면, 오히려 내부를 추스르고 가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특별법을 제정하고 두 대통령을 구속하게 되면 내부 전열을 흩뜨리게 되는데, 절대 저희가 원한 방향은 아니었죠. 게다가 총선에선 한 표가 중요한데, TK표도 확보해야 되는데…. 결국 손해를 감수하고 국민만 바라보고 간 겁니다.” -김현철, 14일 통화.

요컨대 YS는 집권 후 지지층만을 위한 행보를 걷지 않았다. 자신의 최대 조직이던 민주산악회를 해체했고, 3당 합당으로 지지 기반이 되어준 민정계를 포함한 신군부 잔재 세력, TK 기득권이 등을 돌릴 만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肉斬骨斷(육참골단), 자신의 살을 배어 주고, 상대방의 뼈를 자른다는 뜻처럼, 지지층에서 일부 손실을 보는 대신에 국민통합과 정치개혁 부문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YS의 공천개혁은 좌우 통합과 포용이라는 시대적 명분을 얻었고, 그 결과는 유권자의 표심으로 인정받았다. ⓒ시사오늘 김유종
YS의 공천개혁은 좌우 통합과 포용이라는 시대적 명분을 얻었고, 그 결과는 유권자의 표심으로 인정받았다. ⓒ시사오늘 김유종

해불양수(海不讓水), 모든 물을 포용하는 바다처럼 

“제가 그때 YS의 정무비서관으로 15대 공천 과정을 전부 지켜봤었죠. 그때 YS가 각 지역마다 여론조사를 해서, 조사 반응이 좋게 나온 사람들을 다 추출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게 참, 기존에 있는 좋은 사람 살리는 건 쉽지만 새로운 사람 뽑아내는 건 정말 어렵거든요. 기존 지역위원장들은 자기 조직이 우선이니까, 자기보다 잘될 것 같은 사람은 절대 추천 안 합니다. 그래서 YS는 당 밖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해 정보를 교환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옥석을 걸러내는 작업을 했었어요. 물론 순탄치는 않았지요.”

YS의 정무비서관으로 일하면서 15대 공천 과정을 전부 지켜봤다는 자유한국당 이성헌 전 의원. 그는 지난 11일 기자와 만나 YS가 주도한 15대 공천에 대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혁신공천”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전 의원의 말대로, 공천 과정에서 민정계의 반발은 거셌다. 김윤환 대표는 “TK 공천자에 대한 내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고, 허삼수·정성천·허재홍·곽정출 등 공천에서 탈락한 민정계 의원들은 여의도 중앙 당사로 찾아가 항의하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반발했다.

이처럼 제15대 여당(신한국당) 공천은 YS가 진두지휘한 공천으로, 대통령 권력을 통한 과감한 공천물갈이가 특징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YS에겐 불리한 국면이 펼쳐졌다. JP가 여당을 탈당해 충청권 기반의 자민련을 창당했으며, 민주화 이후 처음 전국적으로 시행된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지역주의로 인해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YS는 총선을 앞두고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공천과정에서 당의 체질과 권력관계를 바꾸려는 과감한 수술을 단행한다.

YS는 자신과 껄끄러운 관계였던 이회창을 포함해 박찬종·이홍구·이인제·김덕룡·최형우·이한동·김윤환 등 일명 대권주자급 ‘9룡(龍)’을 전면에 내세워, 정파와 친분을 아우르는 ‘혁신공천’을 펼쳤다. 구 민정계 인사들과 하나회 등 지금까지 정통여당을 이끌어 왔던 주류세력을 대거 낙천시키고, 개혁적이고 참신한 인사들을 꼽아 수도권에 공천후보로 낙점한 것이다.

또한 진보의 대표주자였던 운동권 출신의 김문수, 이재오를 포용하고 ‘모래시계 검사’로 인지도가 높았던 홍준표, 벤처기업가 이찬진 등을 영입해 주목을 받았다.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이회창, 김문수, 이재오, 홍준표 같은 사람들을 다 영입했었죠. 특히 김문수나 이재오 같은 민중당 세력까지 이념을 초월해서 대거 영입한 점이 지금 봐도 놀라운 점이죠. 과거 민정당 시절부터 오랫동안 군부의 지지를 받았던 정치 거물들을 퇴장시켰고요. 덕분에 15대 총선에선 95년 지방선거와 다르게 집권당이 안전선 확보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성헌, 11일 인터뷰. 

이 전 의원은 “정부 여당이 이기는 선거는 보통 돈을 풀고 조직을 풀어서 이기는 관변선거인 경향이 있다”면서 “YS는 세대교체와 인적쇄신을 통해 성공한 희귀사례”라고 거듭 강조했다.

“YS의 정치 스타일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부분이 사람 쓰는 거예요. 끊임없이 새 사람을 찾았고, 계속 새로운 걸 추구한 정신이 공천에도 작용했던 겁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그땐 정말 민중당 출신의 이재오, 김문수를 영입하는 게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과감하게, 그것도 삼고초려를 해서 데려왔잖아요. 그 뿐입니까? 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이인제, 박찬종 등등 역대 대권 후보자들 대부분 다 YS 영입 인물이죠. 인재 풀이 정파를 떠나 굉장히 넓었다는 걸 증명해주죠.” -정병국, 14일 인터뷰.

YS의 15대 총선 신한국당 공천은 수도권에서의 집권여당 약진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새로운 인물로 대거 교체한 공천개혁 성과였다. 신한국당은 서울 전체 47곳 중 27곳에서 승리했으며, 인천 11곳 중 9곳에서, 또 경기 38곳 중 18곳에서 승리했다. 전체 수도권 의석 96석 중 54석, 과반이 넘는 56%의 의석을 차지했다. 또한 부산은 21석 전체를, 경남에서도 23석 중 17곳을 차지했다. 다만 JP의 자민련과 TK 민심의 반발로 전체의석은 139석으로 과반을 넘지는 못했다. 

“성과라고 볼 수 있죠. 만약 YS가 특히 수도권에 새로운 인물로 교체하지 않았다면 신한국당은 15대 총선에서 그만큼은 얻지 못했을 겁니다. 좌파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포용하고,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개혁 정책을 폈기에 잘 된 거지요.” -김봉조, 4일 인터뷰.

YS의 공천개혁은 '좌우 통합과 포용'이라는 시대적 명분을 얻었고, 유권자의 표심으로 인정받았다. 넓은 바다는 어디서 흘러온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흘러간다는 뜻의 해불양수(海不讓水)처럼, 좌우가 포용과 화합으로 개혁을 위해 나아간다는 통합 정신을 남긴 것이다.

YS의 통합정치는 그의 좌우명인 대도무문(大道無門), ‘옳은 길을 가는 데에는 문이 없다’는 정신의 연장선이다. ⓒ김영삼자서전
YS의 통합정치는 그의 좌우명인 대도무문(大道無門), ‘옳은 길을 가는 데에는 문이 없다’는 정신의 연장선이다. ⓒ김영삼자서전

대도무문(大道無門), 대의(大義)에는 문이 없다

조국 법무부장관을 두고 국민이 서초동과 광화문 두 곳으로 갈라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국론분열이 아닌 다양성 표출 행위”라는 정의를 내려 논란이 된 바 있다.

문 대통령의 생각대로 다양한 국민들의 의견은 획일화될 순 없고, 획일화돼서도 안 된다.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의견이 상이한 부분이 있고, 다른 의견들이 심화되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문제는 그 갈등을 인정하고 봉합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종국에는 분열로 나아간다는 데 있다. 

국민통합은 폭이 넓은 길, 대도(大道)다. 누구라도 통합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넓은 길이라도 방향은 정해진 한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국민통합의 큰 줄기인 ‘자기희생’과 ‘포용정신’이 없다면 '국민통합'이라는 도착지로 갈 수 없다.

YS 문민정부 당시 그의 국민통합 정치를 지켜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강조했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지지층만 보고 달려가는 정치를 하지 않을 것.

“통합은 상대방에게 너그럽고 나에게 엄격해야 하는 일이다. 때론 내 편을 등질 줄도 알아야 한다. 지지층만 보고 가는 것은 ‘패거리 정치’에 불과하다.”

YS는 개혁이라는 큰 뜻에 국민 모두를 품기 위해 때로는 자기를 지지해준 사람들을 버렸고, 때로는 자신을 미워했던 상대방을 품었다. 정파나 사욕을 초월했지만 국민을 위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 그의 좌우명인 대도무문(大道無門), ‘옳은 길을 가는 데에는 문이 없다’는 정신의 연장선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대로 권력은 영원하지 않으며, 인불백일호(人不百日好) 구절처럼 영원히 호감일 수 있는 지도자는 없다. 지지층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돼 있는 유동층임을, 우리는 지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와 최근 조국 사태로 확인한 바 있다.

지지층만 껴안고 가는 정치는 광의로 나아가지 못한 협의의 정치, 소도(小道)다. 대도(大道)엔 문이 없지만, 소도(小道)엔 국민이 없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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