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인터뷰] 김무성 “黃-劉, 국민경선 디딤돌로 보수통합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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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인터뷰] 김무성 “黃-劉, 국민경선 디딤돌로 보수통합 나서라”
  • 정세운 기자·김병묵 기자
  • 승인 2019.11.15 19: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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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국회의원
“광주실상에 분개, 상도동 합류해 본격 민주화투쟁 시작”
“민산·민추협이 민주주의 정착시켜 사회발전…큰 보람”
“YS, 지지층 넘어선 통합정치로 문민정부에서 개혁 성공”
“패스트트랙 저지, 나경원, 협상대신 장외투쟁으로 놓쳐”
“黃-劉 국민경선 연결고리로 내세워야 보수통합 성공”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김병묵 기자]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은 흔들리지 않고 한 곳에 서 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시작했고, 결국 군정을 종식시켰다. 정치인으로서는 부침(浮沈)을 겪었을지언정 그는 한결같은 선택을 했다. 민주주의자, 그리고 의회주의자다.

수차례의 부당한 공천 탈락에도 그는 자리를 지켰다. 1988년, 이미 받은 공천을 양보해야 했음에도 그는 당을 떠나지 않았다. 제18대 총선에서 부당하게 탈락했을 때도 무소속으로 이긴 뒤 돌아왔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또 다시 공천에서 배제됐지만 그 해 12월 제18대 대선에선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을 맡아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재보선을 통해 다시 돌아왔다. 그가 당을 떠났던 순간은 민주주의가 훼손됐다고 생각할 때뿐이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었음에도 친이가 득세할 때는 친박으로, 친박이 득세할 때는 비박으로 몰렸다.

극단주의자들은 여전히 김 의원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평가에 김 의원은 손사래를 친다. 지금 서 있을 곳은 자신이 정한다고 선을 긋는다. YS서거 4주기를 맞아 〈시사오늘〉은 14일 의원회관 706호를 찾아갔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의원은 14일 보수 통합의 필요성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상당히 위험하다. 이를 막아야 하는 것이 보수인데, 분열된 채로는 아무 힘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통합을 해야 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 보수 정치인의 사명이다."라고 설명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어느새 정치 경력이 40여 년에 달한다. 정치 입문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하다.

“정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원래 어려서부터 있었다. 학창시절 줄반장을 할 때부터, 지금으로 치면 ‘리더십’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김용주)가 사업을 하다 정치를 하지 않았나. 5·16 쿠데타 때문에 좌절하신 뒤에 가족들에겐 ‘우리 집안은 정치가 안 맞으니 하지 마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포항에서 둘째 형이 운영하던  철강공장 공장장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1978년에 신민당 당원들이 포항 영일지구 당 개편대회에 출마해보라고 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 때 시작됐다.”

1978년 10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 포항 영일 지구당 개편대회가 있었다. 전임 위원장은 이철승계 조규창이었다. 포항에서 둘째 형이 경영하던 동해제강 공장장으로 있으면서 정치에 꿈을 꾸어오던 김무성이 상도동계의 지원을 받으며 경선에 출마했다.

김무성은 YS에게 친서를 받으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경선과정에서 김무성이 당원에게 정종 1병씩 돌린 것이 화근이 됐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을 받아 정계진출의 꿈이 좌절됐다.

-그 때 이미 험로가 예상됐는데도 YS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을 듯싶다.

“본격적으로 내가 민주화 투쟁과 정치를 시작한 것은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엔 ‘광주사태’라고 불린 사건을 접했을 때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언론에 일체 보도가 안 됐다. 그런데 우리 옆집에 광주 정내과라는 의사집 딸이 포항에 시집와 살고 있었다. 새벽에 사색이 돼서 문을 두들겼다. 광주에 큰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데 가족들이 괜찮은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당시 광주에 부친이 운영하던 전남방직 회사가 있으니, 그리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물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전남방직에 전화를 하고, 다시 거기서 광주공장에 전화를 해서 정내과가 무사함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된 거다.

공권력이 시민을 죽이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비분강개해서 사업을 중단키로 하고 민주산악회(민산)에 들어가면서, YS와 함께하게 됐다. YS는  23일 단식으로 광주의 실상을 알렸고, 문민정부 들어선 이를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했고, 망월동 공동묘지를 국립묘지화 했다. 그런데 일부 광주시민들과 한총련 등은 YS의 망월동 참배를 막기도 했다. 퇴임 후에 오히려 유족회에서 ‘YS가 우리를 도왔는데 왜 못 오게 하느냐’고 초청해서 우리가 모시고 갔다.”

김 의원이 YS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때는 삼동산업을 운영하는 등 사업에 전념하던 1980년대 초다. 1983년 YS는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김 의원은 자신의 사업을 계속하면서 상도동계에 들어가 막후 인물이 됐다고 알려졌다. 민추협이 서울 종로 관철동 수협중앙회 건물에 사무실을 구할 때 임대료를 대는 등 재정적인 지원을 하며 상도동 진영에 합류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의원은 14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대한 확신도 있었지만, 그 때는 민주화 투쟁이 정의라고 믿었고 그래서 힘들 때도 함께 행동했다."고 회고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할 때는 정말 어려울 때다. 아무도 돈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삼동산업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내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혹시나 피해를 줄까봐 내가 가지고 있던 전남방직 주식을 전부 팔았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내가 썼던 돈이 지금 생각하면 사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당시엔 큰돈이나 다름없었던 거다.

관철동 뒷골목에 있는 수협중앙회 건물 9층 옥탑방을 빌릴 때 절반을 내가 냈다. 그런데 그 사무실에선 일해보지도 못했다. 경찰이 정보를 듣고 와서 밤새 집기를 전부 1층에 내려다놓고 엘리베이터를 꺼버렸다. 그러면 우리가 등짐을 지고 올라가서 돌려놓고, 경찰은 또 밤에 와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서소문에 있는 대한교육보험 빌딩으로 옮겼다. 그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우리를 사무실로 들어가지 못하게 경찰이 막았다. 어느 날은 7~8시간 정도 대치가 이어졌는데, YS가 소변이 마려워진 거다. 그래서 잠깐 소변만 보고 오시라고 주변에서 말했는데 절대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국 사진 찍히지 않도록 우리가 몸으로 에워싸고, 깡통에 소변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버텼지만 결국 또 밀려나 무교동 시그너스 빌딩으로 들어갔다. 훗날 통일민주당 창당 때도 사무실을 내가 비밀리에 얻었다.”

민추협이 사무실을 얻기 어려웠던 배경에는 전두환 정권의 공작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민추협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서울 종로 일대의 건물주들에게 사무실을 주지 말라는 협박을 했다. 일례로 김명윤 전 의원이 종로 모 빌딩에 사무실을 구해 계약금까지 내고 온 날 밤, 관리인이 그의 집에 찾아와 ‘살려달라, 집에 처자식이 있다’고 애원한 일도 있었다. 김 의원도 그 당시에 사무실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민추협 인물들 중 한 사람이다.

-정치를 하면서 YS에 대한 확신이 있었나.

“확신도 있었지만, 그 때는 이 길이 정의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 1987년 김대중 (DJ) 전 대통령과의 단일화협상 때도 그랬다. 학생들이 양김 단일화를 위한 요구를 하는 와중에 우리는 YS가 반드시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DJ는 탄압을  받다보니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는 서지 못했고, 그래서 실질적인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은  YS와 우리 상도동계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

DJ도 YS보다 나이가 많고, 호남 세력이 있으니 자신이 먼저 대통령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엔 민주화 세력 분열로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옳다, 우리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눈이 멀어서, YS 단독으로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대선을 졌다.”

1987년, YS와 DJ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어부지리로 당선됐다. 단일화 실패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지구당 조직책 임명 문제가 있었다. 지구당 조직책은 경선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당시 당내 지분을 따져 보면 DJ 측이 열세였는데, 전국 92개 지구당 중 미창당지구당 36곳을 제외하면 56개 지구당 중 30 대 26으로 YS 측이 우세했다. 미창당지구당  조직책과 관련해 상도동 측 김동영 의원은 18곳씩 50 대 50으로 나눠 임명하자고 제안했고, DJ로부터 전권을 받고 나선 동교동 측 이용희 의원은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23곳을 동교동계에게 달라고 주장했다.

경선이 늦어지는 것을 우려한 YS는 10월 22일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나 동교동 측 제시안을 전격 수용했고, 상도동계 내부에서는 ‘YS가 결국 후보를 양보했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DJ가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분당을 선언하면서 단일화는 완전히 결렬됐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의원은 14일 "단일화 실패와 3당합당으로 민주화 운동의 색이 바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3당합당으로 인해 문민정부가 열리고, 군정이 종식 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3당합당이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라고 반문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이 직선제를 쟁취하고, 군정도 종식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독재권력의 총칼 앞에서 다들 머리도 들지 못하고,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하던 시절에 우리는 저항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목숨을 걸었다.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사회가 그로 인해 발전했다. 큰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3당합당으로 민주화 운동의 빛이 바랜 경향이 있다.

“단일화 실패와 3당합당으로 민주화 운동의 색이 바랜 것은 사실이다. 지금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우리 민주계는 빼놓고 마치 자신들만 민주화 운동을 해 온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3당합당을 놓고 당시 우리 상도동계 내에서도 매일 회의를 열고 격론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지도자를 따라가야 한다’는 의견과, ‘따라가면  다 죽는다’는 의견이 팽팽했다.

그럴 때마다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책상을 탕 치면서 ‘우리가 오야붕(대장) 믿고 따라가야 한다’라며 설득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해 봐야 한다. 3당합당이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3당합당으로 인해 문민정부가 열리고, 군정이 종식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문민정부는 3당합당으로 출범했음에도 하나회를 없애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구속시켰다. 또 민주산악회를 해체했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도려내기가 쉽지 않았을 듯싶다.

“개혁이란 그런 것이다. 개혁은 표가 떨어지는 일이다. 표만 생각하면 안 하는게 낫다. 하지만 YS는 그런 것을 생각 안 하는 사람이다.”

YS는 문민정부에서 강한 수준의 개혁과 통합 행보를 지향했다. 자신의 사조직이라 할 수 있었던 민산을 해체하면서 민주계의 원성을 샀고, 하나회와 전·노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면서 민정계의 반발을 들어야 했다. 주요 지지층인 영남 일부의 비판을 감수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법을 제정하며 영호남 통합의 발판을 놓기도 했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도 내보냈다. 이는 실책이라 지적되기도 한다.

“JP가 나가게 된 일은, 결국 보수우파의 분열의 시작이다. 정치적 패착이라고 봐야 한다. 최형우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JP를 내보낸다’는 식의 실언을 했고, 그 내용이  보도가 되니까 YS가 최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YS가 내친김에 JP를 그냥 내 보낸 거다. 공화당 세력만이 아니라 충청도가 아예 떨어져 나가면서 보수 세력은 기반 일부를 잃어버리는 모양새가 됐다.”

김 의원은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 보수진영이 처한 분열을 되새기는 듯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의원은 14일 "보수통합도 이 국민경선이 열쇠가 돼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새누리당 대표를 하면서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도입에 공을 들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공천 때는 돈거래가 난무한다. 나도 1988년 제13대 총선 때 공천에 돈이 오가는 과정에 휘말려서 출마를 못 한 적이 있다. 목동에서 5년을 살았던 때인데, 서울 양천갑에서 공천심사위원회도 통과하는 등 공천이 거의 확정됐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끼리 돈이 오가는 상황에 말려서 YS가 내게 양보하라고 해서 포기했다. 이 시절엔  아예 ‘공천가격’이 매겨졌다는 말이 있을 만큼 심했다. 이런 나쁜 풍토가 없어지기 전에는 정치발전이 안 된다.

지금은 많이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부정이 많아서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내가 여당 대표가 됐으니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공천권을 가진 당 대표가 결단하지 않으면 누가 바꾸겠나. 당 대표는 가만히 있으면 돈 벌고, 자기사람을 심을 수 있는 자리다. 내가 먼저 이런 것들을 포기하면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사람을 단 한 명도 심지 않았다. 바보 같다, 의리 없다고 비난받아도 어쩌겠나. 내가 지금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것도 그 때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당내 반대가 심했지만 수차례 회의 끝에 당헌당규를 상향식 공천으로 개정했다. 당헌·당규상 ‘우선 추천’ 규정이라고 내가 손을 못 댄 부분이 있었는데, 자칫 전략공천 빌미가 될 수 있어서 나는 이마저도 없애버리려 했다. 당내에서 반대 숫자가 워낙  많으니 별 수 없이 일단 놔뒀는데 결국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이한구를 보내 이 우선 추천 규정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공천이 엉망이 되고 말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경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보수통합도 이 국민경선이 열쇠가 돼야 한다고 본다.”

지난 2016년 제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최악의 공천파동을 겪었다. 당시 당 대표였던 김 의원은 친박계가 내세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과 정면충돌했다. 이 위원장이 우선 추천 규정을 통해 친박계를 공천하려 하자 김 의원은 이를 막기 위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일명 ‘옥새 파동’으로 잘못 알려졌다. 공천파동 결과 새누리당은 선거에서 패하며 제1당의 자리를 내줬다.

-국민경선제를 통해 보수통합의 길을 만들겠다는 뜻인가.

“예를 들어 지금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을 중심으로 한 ‘변혁’과 보수통합을 한다고 하자. 과거 양 김 시절엔 리더들 간 합의로 결정하고 밀어붙여도 됐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당장 지지자들이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따르지 않는다. 유 의원에겐 원내 지지세력 외에도, 원외에 공천을 챙겨줘야 할 인사가 많다. 한국당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틀림없이 양자 간 양보 못하는 지점이 생기고 갈등 끝에 통합이 무산된다. 여기서 한시적이라도 국민경선을 도입하면 된다. 경선을 그냥 치를 경우 의석도 당원도 훨씬 많은 한국당이 유리하니, 아예 국민들에게  후보자 선택을 맡기면 공평하지 않은가. 국민들이 선택했으니 총선에서 승리 확률도 좀 더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민경선은 현역들에게 유리할 수 있기 때문에, 소위 ‘물갈이’가 잘 안될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한국당 내에서 ‘영남 다선은 서울로 올라 와서 도전하라’고 말한 거다. 그냥 다선이라는 이유로 그만하라는 건 그거대로 불공정 하니, 돌파구를 만들어 주긴 해야 한다. 하지만 마냥 유리한 곳에서 버티지 말라는 것이다. 나도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난 총선 공천에서 청와대의 부당개입을 못 막은 책임이 있다. 나를 포함해 당시 지도부 전부 책임 져야 한다. 개인으로선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한다. 그게 신뢰의 정치고, 보수의 품격이다. 국민의 마음을 돌려세우려면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꼭 보수 통합이 돼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이게 보수의 가치다. 그런데 지금 더불어민주당은 DJ·노무현 시절 정체성이나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상당히 위험하다. 이를 막아야 하는 것이 보수인데, 분열된 채로는 아무 힘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통합을 해야 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 보수 정치인의 사명이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의원은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문 후보, 당신이 대통령 된 후에 개헌을 안 하면 또 비극이 생긴다. 3년 이내에 당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사건으로 레임덕에 빠진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보수 통합 너머 더 큰 시대소명이 있을 듯싶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지금 소명의식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제왕적 권력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나라 모든 병인(病因)이 여기에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결심하면 쉽지만 문재인 정부는 일단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지난 제19대 대선을 얼마 남기지 않고, 한 언론사 사장이 상을 당해 조문을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뒤따라 들어온 분이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 후보였다.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대로 가면 당신이 대통령 안 되겠나. 내가 부탁이 있다. 대통령 되면 문 후보 손으로 권력분산형 개헌해라. 그거 아니면 나라에 미래가 없다. 안 그러면 여덟 번째 실패한 대통령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 현 시스템의 문제를 쭉 설명했다. 한참 후에 설명을 다 들은 문 후보가, ‘선배, 저는 그래  생각 안한다.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문 후보, 당신이 대통령 된 후에 개헌을 안 하면 또 비극이 생긴다. 3년 이내에 당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사건으로 레임덕에 빠진다. 박근혜를 내가 잘 알지 않나. 부정부패에 결벽증 환자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최순실과 얽히고 그 사건이 파생돼서 저렇게 불행하게 됐다. 당신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 말을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경고했다. 결국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조국 사태가 터졌다.”

-의원내각제로 가야한다는 얘기인가.

“내각제로 가야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년 단임했으면 경제발전 못 이뤄냈다. 이제 시대가 변해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 안정적인 내각제가 맞다. 물론 국회의원들에 대한 불신과 저평가 때문에 내각제에 대한 여론이 나쁜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국회의원들이야 말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투표해서 왕(대통령)을 뽑고, 여당은 비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반대로 야당은 죽기 살기로 왕을 공격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는 사생결단으로 흐른다. 협상과 타협이 없이, 여야가 서로를 죽여야 할 적으로 여기는 게 전쟁이지 정치인가. 내각제를 통해 보다 책임 있고 안정감 있는 정치를 구현하는 게 맞다. 못하면 바로 총리를 바꾸고, 잘하면 일관성 있는 정책을 이어나가게 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 개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문제다. 상당히 우려된다. 우리가 막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뚫린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책임이 있다. 협상이 들어왔을 때 협상에 임했어야 했다. 협상에 임하면서 상대방이 멋대로 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중대선거구제라든가, 소수정당도 관심이 있을 만 한 대안을 들고 가서 협상을 이어가면 지금처럼 한국당만 제외하고 패스트트랙에 태우는 일은 없었을 거다. 패스트트랙이 불가능한 시점까지도 협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중요한 순간에 나 원내대표는 장외로 나가버렸다. 장외로 나가면 재미는 있다. 우리 지지자들이 모여서 성원을 보내주니까. 거기 취하면 안 된다. 그 사이 여당과 다른 정당들은 손쉽게 그들끼리만 모여서 선거법 개정을 패스트트랙에 태워 버렸다. 힘들더라도 원내에서 정치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기본 책무다. 그것이 바로 YS식 의회주의 정치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의원은 14일 “나는 YS와 민주화 투쟁을 하고 그에게 정치를 배운 사람으로서, 평생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실천해왔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마지막으로 40년 간 해 온 본인의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다. 나는 YS와 민주화 투쟁을 하고 그에게 정치를 배운 사람으로서, 늘 머릿속을 민주주의로 꽉 채워놓고 있다. 박근혜가 비민주적 정당운영을 하고, 권력을 행사했기에 거기 저항했다. 간혹 극우 유튜버들을 보면 박근혜를 절대선(善)으로 가정하고, 거기 저항했던 사람들을 전부 배신자로 본다. 모순이다. 누가 민주주의의 진짜 배신자 인가. 나는 평생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실천해왔다고 자부한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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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y 2019-11-19 16:57:59
보수의 품격이라.. 그 품격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다는건가요?
불출마가 답일까요.ㅎㅎㅎ
현 보수는 이상한 아집이 신뢰를 잃게 하는 것 같아요.
소탐대실의 소와 대가 뭔지 좀 알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