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기수론] “세대교체로 활력” vs “정치적 미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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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 “세대교체로 활력” vs “정치적 미성년”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12.0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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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1969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열두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71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에게 리더십을 넘겨줘야 한다’고 주창한 40대 기수론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두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6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에게 리더십을 넘겨줘야 한다’고 주창한 40대 기수론이다.ⓒ시사오늘 김유종

‘40대 기수론’은 어언 50년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50년 전의 논리를 빌려 살고 있다. 그 논리는 선거철이면 줄곧 발현되곤 했다.

2006년에는 당시 열린우리당 40대 재선 그룹이었던 김부겸‧김영춘‧이종걸‧임종석 의원이 당권에 도전하면서 신(新) 40대 기수론이 대두됐다. 또 2011년에는 당시 한나라당에서 40대 나경원‧남경필‧원희룡이 당권을 노리고 경쟁하면서 또 한 번 40대 기수론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문자 그대로 연령대가 40대인 정치인들이 빛을 발할 때마다 등장했던 40대 기수론은, 결국 넓은 의미에서 젊은 정치인을 찾는 정치권의 새로운 움직임을 뜻한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두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6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에게 리더십을 넘겨줘야 한다’고 주창한 40대 기수론이다.

대통령 회고사는 대통령의 입을 빌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 회고사는 또 다른 당사자인 이철승의 회고록도 참고했다.

 

1969.11.08. YS 신민당 후보 지명전 출마 선언

1969.11.8 서울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40대 기수론'을 선언하는 모습ⓒ김영삼 민주센터
1969.11.8 서울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40대 기수론'을 선언하는 모습ⓒ김영삼 민주센터

신민당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었다. 1969년은 박정희가 집권을 연장하려고 만든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동시에, 야당인 신민당과 시민들의 반대투쟁이 무위(無爲)로 끝났던 해였다. 때문에 신민당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이제 신민당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와 맞설 강력한 후보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새로운 출발선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김영삼 원내총무였다. 김영삼은 11월 8일 오전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신민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중략) 박정희 씨의 3선 개헌 강행을 통해 이러한 위장민주주의의 지향하는 바를 뚜렷이 체감한 우리 야당은 빈사상태에서 헤매는 민주주의를 기사회생 시키는 데 새로운 결의와 각오로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의 시점에 섰습니다.

나는 이 중대하고 심각한 사명의 대열에서 야당의 일원으로서 짙은 의무감과 결단, 그리고 벅찬 희생을 각오하면서 71년 총선거에서 대통령후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외람되나마 사랑하는 당내 동지들과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가장 먼저 출마 선언했던 김영삼의 당시 나이는 만으로 41세였다. 그는 당시 그의 심정을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표현했다.

야당은 비록 박정희의 3선 개헌 저지에는 실패했으나, 71년도 대선에서 승리해 박정희 장기집권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남아 있었다. (중략) 나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패배감과 무기력에 젖어 있는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박정희독재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 누군가 이러한 역사적 대임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당 내외를 통틀어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 십자가를 지겠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332~333쪽.

무엇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만 41세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신민당 내부의 체질개선 요구가 뒤따르는 와중에 등장한 이 주장은 세대교체론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확연히 엇갈렸다. 우선 40대 기수론의 물결에 있던 김대중은 확실한 긍정을 보냈다. 하지만 같은 물결 속에 있었던 이철승은 40대 기수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반(反) 40대 기수론의 선두 주자였던 유진산을 동조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 보였다.

그때는 이미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이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세대교체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40대 기수론’은 나도 동조하고 있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09~210쪽.

(중략) 김영삼 의원이 1971년의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신민당 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선언해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정치적 선수(先手)치기였다.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02쪽.

유진산 당수는 “대통령 후보가 40대라야 한다는 얘기는 구상유취한 언사”라며 40대 기수론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대통령 후보를 나이와 세대 문제와 대결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미성년자 사고(思考)로서 그냥 묵과할 수 없다. 대통령이 되고 야당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망에 앞서 국가와 민족을 어떻게 이끌어 가겠다는 지혜와 용기와 경륜이 아쉽다”며 반40대론을 폈다. 자신이 키워 낸 김영삼 씨가 말 한마디 없이 치고 나간 40대 기수론에 불의의 뒤통수를 맞은 것에 대한 역공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후보 출마에 대해서는 “나는 후보로 나설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서의 나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는 등 아리송한 태도를 보였다. 얼마나 섭섭했으면 그런 심정을 토로했겠는가?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09쪽.

하지만 당 원로들은 40대 기수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그중 유진산은 40대 기수론을 묻는 기자들에게 ‘구상유취(口尙乳臭)’의 표현을 빌려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들이 무슨 대통령이냐”고 비난했다. 김영삼은 그 당시를 ‘당원들의 반대가 아닌 중진들의 핍박이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성명 발표 전 나는 수원의 빈센트 병원에 입원 중이던 유진오 총재와, 나와 가까운 소수의 동지들에게만 사전에 통고했을 뿐, 당내의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나의 전격 선언은 당 내외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당 원로와 중진들은 보수질서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결같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략) 나한테 닥친 것은 당원들의 반대가 아닌 중진들의 핍박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336~337쪽.

1970.01.24. DJ 신민당 후보 지명전 출마 선언

1970년대 연설회장에서ⓒ김대중평화센터
1970년대 연설회장에서ⓒ김대중평화센터

김영삼이 신민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한 지 78일째 되는 날이었다. 김대중은 1월 24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용의가 있다”며 “오는 1월 26일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안이 확정되는 대로 출마 선언을 해서 후보지명 경쟁을 벌일 것”이라 말했다.

두 번째로 출마 선언한 김대중의 당시 나이는 만으로 46세였다. 그는 3선 개헌을 막지 못한 뒤 다시 박정희와 싸울 잠재적 후보는 당시 신민당 유진오 총재였지만, ‘곁에서 지켜본 유 총재는 정치적 안목과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용희의 말에서 ‘순간 영감 같은 것을 받았다’며, 출마 선언하게 된 배경을 우회적으로 설명했다. 

박 대통령 후의 3선의 길은 열렸다. 우리는 다시 싸워야 했다. 선거에 이겨서 3선을 막아야 했다. (중략) 지난 총선에서 공화당의 대대적인 부정 선거로 국면 전환의 호기를 잡았는데도 시간을 끌다가 놓쳐버린 것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중략) 나는 이 같은 문제로 혼자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나를 형님이라 부르던 이용희가 말했다. 

“유 총재를 믿을 수 없습니다. 저 양반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형님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십시오.”

나는 순간 영감 같은 것을 받았다. 하지만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유진오 박사와 일전을 준비하였다. 우선 참모진을 정비하고 전국 지구당을 돌면서 조직을 다졌다. 그런데 유 총재가 갑자기 쓰러졌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08~209쪽.

1970.01.26. 유진산 신민당 총재 선출

2년 반 남짓 운영된 유진오 총재(당수) 체제는 그의 유고(有故)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메우기 위한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가 1월 26일에 열렸다. 

총재 선거에는 유진산, 정일형, 이재형이 삼파전을 벌였다. 총 대의원 616명 중 606명이 참석한 전당대회에서 2차에 걸친 결선 투표 끝에 327표를 얻은 유진산이 총재에 당선됐다.

한편 김대중은 유진산의 총재 당선을 두고 ‘총재직은 유지해도 대통령 후보는 될 수 없다’고 평가했다.

1970년 1월 초 신민당 임시 전당 대회가 열렸고, 유진산 씨가 총재로 선출됐다. 유진산 씨는 사쿠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성을 의심받고 있었다. 따라서 대중적 지지가 약했다. 총재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 후보로는 될 수 없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09~210쪽.

반면 이철승은 유진산 체제 출범을 ‘보수파 노장층의 재기’이자 ‘3선 개헌 반대 투쟁 이후 거듭한 진통에서 일단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유진산 체제의 중심부인 정무위원의 평균연령만큼은 56세로 보수파 노장층의 재기였다. 유진산 체제의 최대 과제는 3선 개헌을 저지하는 마지막 대결이 될 1971년 대선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었다. 그것은 곧 김영삼, 김대중의 지명전 경쟁 선언으로 때 이르게 닥친 ‘40대 기수론(四十代旗手論)’의 선풍을 흡수해 잠재우는 것이었다. 당 기구에서 짠 50대의 노장층 중심 체제라는 것도 사실 그 이면에는 ‘40대 기수론’을 견제하겠다는 유진산 당수의 포석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노장층 중심의 유진산 체제는 격심한 지명전이 예고된 것이었다.

비록 많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유진산 체제의 출범은 신민당이 3선 개헌 반대 투쟁이 이후 거듭해 온 혼미와 진통에서 일단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01~402쪽.

1970.02.12. 이철승 신민당 후보 지명전 출마 선언

마지막으로 신민당의 새 출발선 앞에 선 사람은 이철승이었다. 이철승은 신민당 정무위원으로 입당한 지 20일이 지난 2월 12일, 전주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간접적으로 후보 출마 뜻을 내비쳤다.

이철승이 신민당 후보 지명전 출마 선언한 당시 만으로 47세였다. 이철승은 ‘나설 뜻이 있었지만 결정한 건 아니라고 완곡하게 표현했다’며 얼떨결에 지명전 출마가 기정사실화 됐다고 회고했다. 

나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설 뜻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그것을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인데 두 신문은 각각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다. 중앙지들은 한발 더 앞서 나갔다. 그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중앙지들은 전주발 기사로, ‘이철승 씨, 대통령 후보에 출마’라는 표제로 나의 지명전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로써 나는 김영삼 씨가 선수 친 ‘40대 기수론’에 합류하게 되었다.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05쪽.

이렇게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세 사람이 40대 기수론의 깃발을 들고 신민당의 새 출발선 앞에 나란히 서게 됐다. 지명전은 유진산 총재의 출마 여부가 변수인 가운데 40대 후보 세 명의 삼파전이었다.

1970.07.23. 40대 후보 단일화 노력 다짐 성명

김영삼의 제안으로 23일 인천 올림포스호텔에서 40대 후보 세 사람이 비밀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세 사람은 △9월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최 △당풍개혁에 적극 협력 △1971년 선거를 앞두고 공동협력과 젊은 후보 단일화에 최선의 노력 등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세 사람의 단일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일화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 대해서도 명시돼 있었다. 만일 단일화가 성립되지 않을 시 경쟁을 하되 1차 투표에서 모두 과반수 미달일 때는 셋 중에서 2위 3위는 경쟁을 포기하고 다른 경쟁자가 있을 경우엔 1위에 표를 몰아주며, 다른 경쟁자가 없을 경우엔 셋 중 1위를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한다는 내용도 명시돼 있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세 후보의 단일화를 도모했던 김영삼은 회고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합의 과정을 명시했다.

나는 세 후보의 단일화를 도모했다. 나와 이철승, 김대중은 1970년 7월 24일 나의 제의로 인천 올림프스호텔에서 만나 지명대회까지의 협력과 함께, 반드시 40대 후보의 단일화를 성취하기로 다짐했다. (중략) 나의 제의로 고흥문 총장과 세 후보 측 대표가 40대 후보 조정을 위한 기구(4인전권위)를 구성했고, 이 후보조정에 무조건 승복키로 합의하기도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341~342쪽.

이철승은 스스로를 ‘어중간하게 40대 기수론을 뒤따라가는 형국’이라고 평가했다.

당 내외 원로들은 한결같이 거당적 추대가 아닌 불확실한 표 대결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을 후보로 추대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남은 것은 유진산 당수와 40대의 경쟁이었다.

나는 어중간하게 40대 기수론에 그냥 뒤따라가는 형국이었다.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면서 후보 경쟁 국면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은 김영삼 의원이었는데 나는 당시 김영삼 의원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보아 온 김영삼 의원의 당력이나 개인 능력으로 보나, 자기를 그토록 키워 준 대부 유진산 선생을 무시하고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영삼 의원의 당돌한 ‘선수 치기’는 김영삼 의원의 뒤에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는데 과연 내 생각도 그랬다.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다.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10쪽.

1970.09.24.~28.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막전(幕前)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유진산(오른쪽 앞)은 YS(오른쪽 뒤)를 지원했지만, 승자는 DJ였다. 유진산·YS와 함께 앉아있는 사람은 박순천 여사 ⓒ 시사오늘DB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유진산(오른쪽 앞)은 YS(오른쪽 뒤)를 지원했지만, 승자는 DJ였다. 유진산·YS와 함께 앉아있는 사람은 박순천 여사 ⓒ시사오늘DB

김영삼이 가장 먼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언을 한 지 10개월이 훌쩍 지났을 무렵이었다. 꼬박 10개월이 지나고서야 신민당은 1971년 대선 후보 지명대회를 개최했다.

9월 24일 오전까지도 40대 세 사람이 단일화에 실패하자, 유진산은 새로운 카드를 들었다. 유진산의 제안은 자신이 출마를 포기하는 대신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지명할 권한을 자신한테 달라는 것이었다. 김영삼과 이철승은 그 제안을 수락했으나, 김대중의 입장은 달랐다.

자신이 출마할 기회가 점점 멀어지자 유 총재는 세 명 중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는 지명권을 달라고 했다. 대통령 후보대회를 나흘 앞둔 9월 25일 나, 이철승, 김영삼 씨를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이같이 제안했다. 그때는 당내는 크게 김영삼 씨가 포함된 진산계가 주류였고, 나와 정일형, 이재형계는 비주류였다. 유 총재는 나와 같은 야당이지만 나와는 계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걸어온 길과 정치 노선이 달랐다. 유 총재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김영삼, 이철승 씨는 유 총재의 지명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유 총재가 나를 지명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민주주의와 당원의 총의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09~210쪽.

그렇게 전당대회를 이틀 앞둔 27일, 김영삼과 이철승은 유진산과 다시 한 번 회동한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합에서 나는 후보 추천권을 유진산 당수에게 맡기고, 당수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추천했을 경우에는 나는 나를 지지하는 당원들과 함께 일체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당수의 추천에 승복하여 지명 대회와 대통령 선거에서 성의를 다해 협조할 것을 인격과 신의를 걸고 당과 국민에게 서약한다’는 내용에 서명했다.

이로써 유진산의 불출마가 확실시 되고 40대 기수로 이루어진 신민당의 전당대회만이 남았다.

유진산은 28일 오후 중앙상위 연설에서 “나는 당수로서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공개 발표했다. 유진산의 입에서 두 사람의 희비(喜悲)가 엇갈렸다. 김영삼은 ‘대세가 내게 쏠리는 듯했다’고, 이철승은 ‘속았다고 뒤늦게 깨달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유진산 당수는 지명대회 전날 28일 오후가 되어서야 최종 입장을 밝혔다. 중앙상위 연설 끝에 “나는 당수로서 김영삼을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공개 발표한 것이다. 당시 주류를 장악하고 있던 진산의 추천으로 대세는 내게 쏠리는 듯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342쪽.

너무나 순진했던 나는 그제야 ‘속았다’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이웃집 시악시(색시) 믿다가 장가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음모와 공작이 요지경 속에서 개재된 것을 그제야 알았던 것이다. 나는 이처럼 나와 관계된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뒷북만 치고 다녔다.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15~416쪽.

이어 이철승은 그간 유진산과 맺어 온 인간적 의리와 도리, 중부와의 관계, 건국 운동의 선봉장으로서의 인연 등을 언급하며, 유진산이 본인을 후보로 지명하는 것이 당연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김영삼을 지명한 유진산을 향해 ‘헌신짝 버리듯 나를 버렸다’는 표현을 썼다.

(중략) 그러나 유진산 당수는 헌신짝 버리듯 나를 버렸다. 유진산 당수의 이런 행동은 상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영남의 김영삼 씨보다는 호남의 나와 싸우는 것이 버겁다는 것은 정치인이면 다 아는 상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막상 김영삼 의원이 추천되는 것을 보고 그제야 내가 너무 순진했고, 심지어 멍청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16~417쪽.

1970.09.29. 신민당 후보경선 전당대회

YS는 믿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지만, 결과에 승복하고 DJ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지원유세를 다녔다 ⓒ시사오늘DB
YS는 패배 했지만, 결과에 승복하고 DJ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지원유세를 다녔다 ⓒ시사오늘DB

그렇게 신민당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먼 길을 돌아 전당대회 앞에 섰다. 서약에 따르면 이철승은 김영삼의 당선을 위해 협조해야 했기 때문에, 삼파전에서 이파전으로 좁혀졌다. 하지만 김대중-김영삼의 1차 투표 결과는 예상 외였다.

1차 투표 결과 총 투표 885표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기타 4표였다. 하지만 과반수 443표에 비해 김영삼의 표는 22표가 모자랐다. 모든 후보가 과반수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2차 투표(결선투표)가 곧바로 진행됐다.

2차 투표 결과에 따르면 총 884표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기타 16표로 역전극이 벌어졌다. 2차 투표의 역전극에 대한 평가는 세 사람이 모두 엇갈린다.

먼저 김영삼은 ‘1차 투표 직후 김대중과 이철승 사이에 당권을 건 흥정이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2차투표 역전은 왜 일어났는가? 가장 큰 이유는 1차투표 직후 김대중과 이철승 사이에 당권을 건 흥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1차투표에서 나온 78표의 백지투표 중 상당수가 나를 밀기로 약속했던 이철승의 표였다. (중략) 김대중은 이철승의 총참모 조연하와 대회장 입구의 장막 뒤에서 만나 자신의 명함 뒤에 각서를 써 주었다. 이철승씨의 표를 자신에게 몰아줄 경우 두 달 뒤인 “11월의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이철승 씨를 지지하기로 상호 합의각서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343~344쪽.

한편 김영삼이 주장한 김대중-이철승 후보 간 상호 합의 각서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은 다르다.

먼저 김대중의 입장이다. 김대중은 ‘이철승계 대의원이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써달라 했다’고 주장했다.

1970년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한 후 환호하는 DJ ⓒ김대중 평화센터
1970년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한 후 환호하는 DJ ⓒ김대중 평화센터

 

“이제 대통령 후보는 접니다.”

(중략) 재투표에 들어갈 때 기자들에게 재차 승리를 장담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앞서도 밝혔듯이 이철승계 대의원들은 거의가 과거에 신파에 속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철승 씨가 후보로 나서면 그를 찍지만 만약 불출마 했을 때는 나를 지지해달라고 말했다. 또 재투표가 있기 전에 이철승계의 김준섭 씨가 내게 다가오더니 각서 하나를 써 달라고 했다.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2차 투표에서 나를 찍겠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명함에 각서를 써줬다. 승리가 우선이었고, 당시만 해도 이철승 씨가 총재를 하기에는 부적격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안전 장치였다. (중략) 나는 과반을 훨씬 넘어 대통령 후보에 지명됐다. 한국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역전극이었다. 김영삼 후보 측에서는 망연자실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11~213쪽.

하지만 이철승은 ‘김대중이 나의 참모진에게 협조를 요청했다’고 반박했다. 이철승은 본인의 회고록에 위에서 언급한 김대중 자서전 내용을 옮긴 뒤 두 군데에서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첫째 각서는 이철승계의 김준섭 의원이 써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 둘째 이철승계의 표가 필요했던 김대중 씨가 표 확보를 위해 다급했던 마음에 먼저 각서를 써줬다는 점이다. 그는 김대중의 명함 사진과 함께 각서 내용도 명시했다.

2차 투표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대중 씨는 황급히 나의 참모진에게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과반수에서 61표가 모자란 김대중 씨는 내 계보의 추모표만 보태자면 승리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78표 : 나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표가 이동하였으나 일부 후보 선출 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표가 백지 투표를 한 것이다.

그때 협력을 조건으로 김대중 의원이 제시한 것이 바로 ‘김대중 각서’다. 나의 참모진에게 건네진 이 각서는 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다. 김대중 씨는 자기 명함에 친필로 이렇게 썼다.

각서
11월 정기 전당대회에서 당권은 이철승 동지 중심으로 편성한다. 후보 당수(이처승)는 분리한다.

그리고 이름자 아래 분명히 서명했다. 김대중, 조영규 의원과 나를 대신하여 조연하와 한영수가 서명했다.

각서
금차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는 김대중 의원을 추천하고(지지하고) 금년 11월 정기 전당대회에서는 이철승 씨를 당수로 지지하기로 서로 합의 각서를 교환함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21~423쪽.

또한 이철승은 김영삼과의 약속을 어기고 김대중을 지지했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여기서 밝혀 둘 것이 있다. 일부 사람들이 내가 유진산 당수와 김영삼 씨와의 약속을 어기고 당수 출마를 위해 김대중 씨를 지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나는 김대중 씨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또 내 선거 참모진들에게 김대중 씨를 지지하라고 지시한 일도 없다. 나는 신상 발언 직후 투표 시작 전에 심사가 불편한 상태였으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머리도 식힐 겸 혼자 안암동의 산업은행 테니스장으로 갔다. 그리고 테니스를 치는 동안 어떤 누구로부터도 김대중 씨 지지와 관련된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유진산 당수가 지명한 김영삼 씨를 반대하고 김대중 씨 측과 그런 야합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통신 시설도 없어 운동하고 있는 나와 짧은 시간에 그렇게 쉽게 연락을 주고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1편, 423쪽.

투표가 끝나고 김영삼은 단상에 올라가 “김대중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나의 승리입니다”라며 “나는 김대중 씨를 위해 거제도에서 무주구천동까지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고 외쳤다. 그렇게 김대중이 신민당 후보로 최종 확정됐다.

나는 의외의 결과에 충격을 받았으나, 그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려 왔다.

‘비록 표결에서는 패배했으나 나의 주장은 승리했다. 내가 제창한 40대기수론은 승리했고, 이제 신민당은 박정희에 맞설 기회를 잡은 셈이 아닌가!’

(중략) 대통령후보 지명전이 끝나고 그 날 밤 내가 선거본부에 돌아갔을 때 김동영, 최형우, 조윤형 등 선거참모들은 통곡을 했다. 나는 그들을 달랬다. 

“내가 죽은 줄 아는가. 역사 앞에 더 큰 일을 하게 되려고 하나님이 내게 고통을 주셨으니, 그걸 달게 받고 당명에 의해 선출된 김대중씨를 돕는 데 최선을 다하자.”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344~347쪽.

40대 대통령 후보의 탄생은 새바람이었다. 내가 대통령 후보로 당선이 되자 가장 놀란 것은 박 정권이었다. 당시 정보부장은 내가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낙관적인 정세 분석을 보고했던 모양이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경질됐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11~213쪽.

1971.04.27. 제7대 대통령 선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대결을 펼쳤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대결을 펼쳤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71년 제7대 대선은 김대중과 박정희 두 후보로 이루어졌다. 결국 선거는 94만여 표차로 박정희의 승리로 돌아갔다.

김대중은 제7대 대선을 ‘선거에서 이기고 투개표에서 졌다’고 평가했다. 이와 동시에 선거 부정 공작과 지역감정 조장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서술했다.

4월 27일 마침내 투표날이 왔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남은 것은 선거 부정을 막는 일이었다. 나는 신민당만으로는 부정 선거를 방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침 재야에서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중심으로 ‘선거 참관인 운동’이 일어났다. 나는 김상현 비서실장에게 그 운동을 돕도록 지시했다. 

(중략) 대구 공무원들은 자유 투표를 하지 못하고, 사전에 박 대통령에 기표가 된 투표용지를 받았다고 한다. (중략) 야당 지지자들에겐 이장과 반장이 아예 투표용지를 주지 않아 기권시켜 버렸다. 개표 부정도 잇달았다. (중략) 나와 우리 신민당이 일찍 경고했던 부정 선거는 전국에서 자행되었다. 투표용지 분실, 중복 투표, 대리 투표 등이 행해졌다.

나는 선거에서 이기고 투개표에서 졌다. 전문가들은 공정하게 선거를 치렀으면 내가 약 100만 표 정도는 앞섰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선거 부정 공작과 지역감정 조장에 졌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249~250쪽.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으로부터 선거 대책 본부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과 선거 실패에 따른 한(恨)을 표현했다.

(중략) 나는 김대중 후보로부터 선거 대책 본부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온다면 이를 흔쾌히 수용할 결심이 있었다. 박정희와의 대결을 앞두고 두 사람의 40대 후보, 그것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공동전선을 형성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제의는 오지 않았다. 김대중 후보자 후원자 격인 정일형 씨가 맡게 되었다.

(중략)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4월 18일 오후 서울 장충단에서 열린 야당의 유세였다. (중략) 그러나 나는 이날 안타까운 심정으로 충남지역의 벽촌을 돌아야했다. 김대중 후보의 선대본부에서 나에게 제시한 유세일정에는 서울집회에 내가 빠져 있었다. 

(중략) 결국 1971년의 4·27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의 승리로 끝이 났다. 94만여 표차였다. 1971년 대선 패배는 박정희의 지역감정 유발전략이 승리를 거둠과 동시에, 야당이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박정희에게 유신 장기 집권으로 가는 길을 터 주었다는 점에서 지울 수 없는 한을 남겼다.

당시 민심의 소재가 어디 있었는가는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신민당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공화당은 48.8%를 득표해 총 204석 의석 중 113석을 차지헀고, 신민당은 44.4%의 득표율로 과반수에서 13석이 모자라는 89석을 확보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348~350쪽.

“지금은 40대는 물론이고 50대도 힘들다”

다시 시계를 50년 뒤로 돌려 2019년. 여전히 우리는 새로운 보수, 개혁적 보수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을 소환하곤 한다.

하지만 현재 70년대 생으로 대표되는 40대 정치인들을 되돌아봤을 때, 당권을 넘어 대권까지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리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나마 지금 40대 중에서 김세연‧오신환‧이언주 의원 정도가 떠오른다”며 “지금은 40대는 생각도 못하고 50대도 대권에 도전하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강 대표는 “40대 기수론은 당권에 도전하며 대선 후보 출마 선언했던 김대중‧김영삼‧이철승 세 사람이 모두 40대였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고 전제한 뒤, “1970년대에는 40대 정치인이라도 세력이 형성돼 있었지만, 지금은 40대에게 그런 세(勢)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2019년과 1970년대를 비교해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제는 30~40대가 세력을 잡으려면, 20대 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치권에서 홀로 커서 발탁되는 방법 말고는 없다”며 “그래도 1970년대는 여건 면에서 끌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20~30대 때 총재 급 눈에 띄어서 발탁되는 경우가 드물지만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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