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광장] 정치권 ‘숫자 전쟁’의 시작…100만 군중 몰렸던 그 곳
[여의도광장] 정치권 ‘숫자 전쟁’의 시작…100만 군중 몰렸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12.06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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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정통 민주 후보’ 놓고 YS와 DJ 경쟁 벌어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조국 사태’가 정치권을 달구던 9월 말~10월 초. 서울 광화문광장과 서초동에서는 때 아닌 숫자 싸움이 벌어졌다. ⓒ뉴시스
‘조국 사태’가 정치권을 달구던 9월 말~10월 초. 서울 광화문광장과 서초동에서는 때 아닌 숫자 싸움이 벌어졌다. ⓒ뉴시스

‘조국 사태’가 정치권을 달구던 9월 말~10월 초. 서울 광화문광장과 서초동에서는 때 아닌 숫자 싸움이 벌어졌다. 9월 28일 서초동에서 개최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에 맞서, 10월 3일 광화문광장에서 ‘조국 파면’을 외치는 맞불 집회가 열리면서다.

서초동 집회 주최 측은 200만 명이 촛불문화제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의식한 듯 광화문광장 집회 주최 측은 서초동 집회 참여 인원이 부풀려졌다고 평가절하하면서 광화문에 30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강조했다. 이러자 서초동 집회 주최 측은 광화문 집회가 “기독교 단체, 교회에서 나와 부흥회 식으로 진행하고 당원을 동원하는 등 사실상의 관제데모”였다며 의미를 깎아내렸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두고, 보수와 진보가 ‘숫자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정치권의 ‘숫자 전쟁’ 시초는 언제일까.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는 좌·우익의 극한 대립이 일어났다. 특히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좌익과 반대하는 우익의 갈등은 세(勢) 대결로 이어지면서, 당시 서울 인구(120만여 명)의 1/12에 해당하는 10만 명이 남산에 운집하기도 했다. 거리에서 펼쳐진 정치적 집회는 해방 직후의 좌·우익 대립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과 유사한 형태의 ‘숫자 전쟁’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7년 대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30여 년간의 군부 독재가 종식되면서,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찾아왔다. 다수결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다수(多數)’의 의사가 절대적인 체제. 이러다 보니 대권 후보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과시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는 ‘동원 정치’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처음으로 ‘100만 명’이라는 인파를 동원한 인물은 DJ(김대중 전 대통령)로 기록돼 있다. 1987년 11월 30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DJ의 유세에는 130만 명의 청중이 몰려든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DJ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의 후보 단일화 협상이 결렬된 후 ‘정통 민주 후보’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여의도광장에서 선거유세 사상 최다인 130만 명을 동원하며 세를 과시했다. 다음은 당시 기사의 일부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처음으로 ‘100만 명’이라는 인파를 동원한 인물은 DJ(김대중 전 대통령)로 기록돼 있다. ⓒ김대중 평화센터
우리나라 정치에서 처음으로 ‘100만 명’이라는 인파를 동원한 인물은 DJ(김대중 전 대통령)로 기록돼 있다. ⓒ김대중 평화센터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29일 오후 영하의 추운 날씨인데도 가로 세로 각 1300m 180m의 여의도광장과 10차선 차도 광장 쪽을 향한 주요 도로와 한강둑 등까지 가득 메운 선거유세 사상 최고 인파인 130만이 넘는(주최 측 500만 명 발표·경찰 50만 명 추산) 청중이 모인 가운데 유세를 폈다.
김 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공명선거를 위해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적을 떠나고 부정선거와 관련 있는 안기부장·보안사령관·내무·법무·국방·문공부장관 등을 경질,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후보는 또 자신이 집권하면 구속자와 양심범의 석방, 공민권을 제약받고 있는 사람들의 공민권 회복, 80년에 해직된 공무원·노동자·언론인 등의 복직을 포함하는 대사면을 단행하겠다고 공약했다. (후략)
1987년 11월 30일자 <동아일보> ‘여의도광장 메운 인파 거국 내각 구성 등 주장’

DJ와의 경쟁 관계에 놓인 YS도 12월 5일 여의도광장에서 세몰이에 나섰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YS 역시 일주일 전 DJ와 비슷한 130만여 명의 청중을 모은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두 사람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여의도광장은 ‘광장 정치’의 출발점과도 같은 장소인 셈이다.

(전략) 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5일 서울 여의도 유세는 오후 2시 45분경 김 후보가 지지군중 속에 휩싸여 무개차편으로 광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열광하는 분위기 속에 본격 시작. 이날 김 후보가 영등포시장 앞을 거쳐 영등포로터리 서울교를 지날 때 많은 지지군중들이 김 후보의 무개차를 에워싸고 뒤따르는 바람에 영등포에서 여의도로 진입하는 차도가 완전 차단.
이날 유세장에는 여의도광장 11만4000평과 광장 뒤편 10차선도로 전경련 앞 공터 등은 물론 여의도에서 마포로 이어지는 서울대교 위에까지 청중들이 가득 채워 130만에 가까운 인파(주최 측 400만 명 주장, 경찰 50만 명 추산). (후략)
1987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 ‘대통령 선거 열기의 현장 “이 엄청난 민의를 보라” 후보마다 흥분’

흥미로운 점은, YS와 DJ의 정면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1992년 대선에서는 이 같은 ‘숫자 전쟁’이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서울 시내에서 100만 명 이상이 모이는 대규모 유세를 할 경우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보수와 진보가 매 주말마다 ‘세 몰이’에 열중하는 지금의 정치권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1992년 대선에서 YS와 DJ는 시민들의 불편을 고려해 대규모 유세를 자제하기로 했다. 정치권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시사오늘
1992년 대선에서는 YS와 DJ가 시민들의 불편을 고려해 여의도광장에서의 대규모 유세를 취소하기도 했다. ⓒ시사오늘

후보자와 정당들의 비방·폭로전으로 대선 분위기가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있다는 지적이 높아가는 가운데 11일 민자당과 민주당이 13일(민주)과 15일(민자)로 계획했던 서울 여의도 대규모 집회를 취소하고 상호 비방성 성명전을 중지키로 하는 등 과열 분위기 자제 의사를 밝혀 선거 막판에 과열·혼탁 분위기가 가라앉을지 주목된다.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 당은 유세문화를 한걸음 더 발전시킨다는 뜻에서 서울에서 대규모 유세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후보는 “여의도광장에서 100만 명 이상의 대규모 유세를 할 경우 선거를 과열시킬 뿐 아니라 서울의 교통을 마비시켜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줄 게 분명하다”며 “대규모 군중집회식 유세가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국민 뜻에 따라 서울에서는 유권자를 불러 모으는 유세가 아니라 찾아가는 소규모 유세를 열겠다”고 말했다.
민주당도 이날 김대중 후보 주재로 선거대책위 상임위원회의를 열고 13일 여의도광장에서 열기로 한 서울지역 대집회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당은 이날 회의가 끝난 뒤 “건전한 선거문화의 정착을 위해 세몰이식 과열경쟁을 피하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 대집회를 갖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후략)
1992년 12월 12일자 <한겨레> ‘민자·민주 여의도집회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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