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0·15 대선…박정희, 야당 될 각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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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15 대선…박정희, 야당 될 각오했다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10.15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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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당일 육영수 여사와 불국사行…개표 기간 내내 공명선거만 강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10월에는 서울시장 선거가 있다. 앞서, 한글날, 개천절, 국군의 날을 보냈다. 그리고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26 사건도 있다. 세월은 유수 같아서 어느 덧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지도 30여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는 기억하는 국민도 많지 않을 텐데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10월15일은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5·16을 이끌었던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이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의 공천으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어떠 했을까? 10일 저녁 늦게 동훈 전 통일원 차관(1976~1979)을 시사오늘 사무실에서 만났다. 동훈 전 차관은 1934년생으로 이회창 자유선진당 전 대표 및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서울대 동기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내기도 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연설문과 담화문 등을 쓰는 일을 여러해 동안 했다.

동훈 전 차관은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몇마디 말과 자료를 건넸다. 그의 말과 자료를 바탕으로 박 전 대통령의 당시 심정을 그려봤다. 그리고, 운 좋게도 박 전 대통령의 문경보통학교 교사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도 얻었다. 이 것도 소개하겠다.

시사오늘은 故박정희 전 대통령의 문경보통학교 교사시절 사진을 단독입수했다. 가운데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사오늘
1963년 10월 15일 선거 당시 국민들의 의식은 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도 심각하게 국민들의 감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역사의식'이 높아진 탓으로 '공명선거'가 이뤄졌다"고 동 전 차관은 말했다.

그 때는 TV중계도 없고 산간 낙도에서는 투표함 이송이 늦어져 전국 개표 완료까지는 이틀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개표 결과,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겨우 15만표 차로 신승했다.

박 후보는 이미 국민과 세계 앞에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의미심장하게 공언해 놓은 참이었다. 만일 군사정권을 이어 받은 민주공화당 후보이며 '군부'의 대표격인 박정희 후보가 패배 낙선할 경우 과연 이 나라 상황이 평정 그대로일까, 아니면 큰 소용돌이로 말려들어갈 것인가, 나라가 긴장했던 며칠 간이었다.

당시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박정희 후보와 함께 움직였던 이후락 실장은 행방불명 되었다가 17일 서울 사무실에 나타나 동훈 전 차관을 찾았다. 급하면 말을 더듬는 이 실장은 "박정희 후보를 단독 수행하여 경주 불국사에서 2박3일간 개표를 기다리며 함께 지냈는데(육영수 여사도 동행) 저간의 상황을 구술할 터이니 빨리 원고를 만들어 일간신문사에 보내라"고 동 전 차관에게 지시했다.

동 전 차관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대목은 박 의장은 개표 시작에서 개표가 끝날 때까지 방안에서 책 한권을 든 채로 중간보고도 안 받고 라디오도 치워버리고 혼자 누웠다가 앉았다가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 실장은 애타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 때 이후락 실장 자신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해요. 역시 대장부와 졸장부의 차이를 실감했다고 운운한 것이죠. 나는 원고를 만들면서 '이후락 예비역 소장'(별두개 장군)을 차마 '졸장부'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어서 쓰지 않았는데 이 실장은 그 대목이 왜 안 들어갔느냐고 짜증을 냈습니다. 몸을 극히 낮추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곧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여담이기는 하나 여러해 전 어느 공영방송 TV연속극 속에 바로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 관련 연출 장면이 있었는데 개표상황이 불리해지자 색안경을 낀 혁명주체 군인들이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군가'를 합창하며 '재쿠데타'라도 시도하는 듯 암시하는 것을 보았는데 연극치고는 유치하고 무책임하다고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박정희 후보는 경상북도 경주의 한 여관에 누워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연출했냐고 따진 것이다.

▲ ⓒ 시사오늘

동 전 차관은 이날 자신이 직접 적은 이후락 실장의 불국사 기행문 원고를 보여줬다. 원고는 오랜 세월을 담아서 인지 색이 바랬고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듯 했다. 이 원고의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옛말투와 잘 보이지 않은 부분은 수정·가필했다.

푸르고 맑은 1963년 10월 15일의 아침. 그러나 침울할 정도로 무겁고 심각한 표정들이 도열한 가운데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가 시작되었다. 말없는 행렬 속에 그 심판을 받아야 할 한 입후보자가 밝은 햇볕을 받으면서 장충단 언덕 비탈 길목에 마련된 투표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줄을 이은 맨끝으로부터 차례를 기다리는 그의 심중에는 무엇이 오고 있을까.

그는 "평온한 분위기에 매우 만족해하면서 "공명선거만 완전하게 수행된다면 당락은 차치하고 혁명기간 중에 저질러진 여러가지 과오가 이로써 만회도 되고 국민들도 너그럽게 혜양(惠養)할 터이겠지만"하고 하늘로 푸른 연기를 내뿜었다.

전국에 걸쳐 사고없이 공정한 관리하에 투표가 진행된다는 보고를 받고 안도의 숨을 내 쉰 그 때에는 선거유세의 강행군으로부터 밀려온 피로가 일시에 엄습하는 것 같았을 것. 정말 이제는 휴식이 간절했었을 것이다.

오후 2시경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여의도 공항으로 달려 다시 남쪽 하늘을 날았다. 조종사 마저도 이륙 후까지 행선지를 몰랐으니 안 사람은 이 세상에 없겠지.

여장(旅裝)을 풀고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에 곳곳에서 개표가 될 무렵이었다. 초조한 심정과는 달리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개표의 공정을 걱정하면서 혹 (무슨 사고가 없느냐고) 물을 뿐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찍 자리에 들면서 가지고 온 책 한 권을 펼치고 아예 라디오는 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개표 중간보고를 받기 조차 거절하였다. 저녁 늦게부터는 차가운 비마저 내렸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몸을 웅크린채 식사에 마주 앉았다. 부인(육영수 여사)도 격노에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식사를 들면서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말투로 말썽없이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물어볼 뿐 득표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없었다.

그는 이후 이렇게 말했다. "이 실장,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집권자가 자신이 패배해도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공명한 선거가 가능한 것이지 꼭 승리해야 하겠다, 한번 더 해먹어야 하겠다는 집권자의 욕심이 작용할 때에는 공명선거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요. 특히 우리의 현실에서는….

사실 나는 출마하면서부터 이미 떨어져도 좋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오. 선거에서 지면 우리 후세에 기리 모범이 될 멋있는 야당운동을 벌이기로 작정했었지. 문제는 군사혁명의 결단으로 치르는 이번 선거를 문자 그대로 공명선거로 끝맺어야 하오.

또, 많은 외국 군사혁명의 혁명주체세력들과 달리 공명한 선거를 통해 표 차이는 적더라도 진정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오. 이 번에 깨끗한 공명선거가 진행된다면 앞으로 누가 집권하든 부정선거라는 말도 끄내지 못할거요. 공정한 선거라는 전통을 세울 수 있고 그 토대가 잡힐 것이요."

▲ ⓒ시사오늘

동 전 차관은 이날 "나는 사회적 활동분야가 넓은 편으로 그 중에서도 정치·언론 분야는 늘 섞이거나 부딪히는 쪽"이라면서 "그러다보니 때때로 나자신이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과 언론 등을 통해 나오는 정보·지식 사이에 차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그 사안이 시정(市井)의 일상 생활 영역이라면 몰라도 나라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일 경우 그 차원이 달라진다"며 "오늘날 세태는 이처럼 잘못된 지식이나 정보를 여기 저기에 마구 퍼나르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이 것을 매우 걱정한다"고 전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인식 차와 잘못된 논쟁으로, 홀로 탄식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며 "이 대명천지에 선사시대나 고대사도 아닌 현대사를 놓고 황당한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다. 날조가 있고 왜곡이 있고…"라고 답답해 했다.

동 전 차관은 이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의 문경보통학교 교사시절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이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 연설을 끝맺으니 다음에는 거기에 박정희 프로필을 써서 첨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때까지만해도 박정희 대장을 지근거리에서 본일조차 없었습니다. 이력서를 찾아보니 대구사범학교 졸업후에 문경의 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출장길에 문경의 국민학교와 하숙집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1974년 8월 어느날 박 대통령이 구내 전화로 직접 나를 찾아서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낡은 '앨범'을 건네주면서 이 것은 옛날 문경국민학교 재직시 한 제자가 나에게 보고 돌려달라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찾아 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방에 돌아와 살펴보니 육영수 여사가 별세한 지 10여일 후에 방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사진 몇장을 복사해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동 전 차관이 보여준 사진 속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한 교사가 있었다. 요즘 고등학생 정도로 어려보이는 이 교사는 트럼펫을 들고 있었다. 주변에는 동료교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타와 아코디언 등을 들고 있었다. 사진이 찍힌 연도는 1943년 정도로 추정되며 그 해 여름 방학 때 학교 운동장에서 밴드 연습을 한 것 같다고 동 전 차관은 말했다.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교사 박정희의 표정에 시선이 한참동안 머물렀다. 동 전 차관은 사진 반환 지시가 담긴 박 전 대표의 친필 메모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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