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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10)>심의석 한나라당 성북갑 지구당 전 위원장
민주화 위해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민산 영성에 공헌
˝가까이서 본 YS, 앉으면 기도…신앙심 깊은 것으로 느껴져˝
2011년 10월 26일 (수) 윤종희 기자 yjh_1120@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중심에 있는 민주산악회(민산)가 정치 집단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민산을 단순히 세속적 정치집단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될 것 같다. 민산에는 '산상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산 회원들은 산 정상에 오르면 늘 둥그렇게 둘러모여 기도를 드렸다.

이 산상기도를 주도한 인물이 심의석 한나라당 성북갑 전 위원장이다. 심 전 위원장은 산상기도 준비를 위해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무릅꿇고 울부짖었다. 그렇게 나온 산상기도문을 엮어 '홍해에서 여리고까지'라는 책도 냈다. 이 책에 있는 기도문들을 읽어보면 민산이 얼마나 영적 모임있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심 전 위원장은 전남 여수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 졸업 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해 재무부에서 근무하다 1964년부터 (주)해동화재해상보험 사장을 역임한 뒤 1984년부터 민산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여수 산악회를 만들기도 했다. 18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심 전 위원장의 집을 찾아가 얘기를 들어봤다.

   
▲ 심의석 한나라당 성북갑 지구당 전 위원장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날 심 전 위원장은 필자에게 자신의 기도로 인해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내용을 자세히 정리한 글과 참고 사진을 내밀었다. 개인적 일에 불과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해 기록에 남겨야겠다고 마음 먹고 이틀에 걸쳐 썼다고 했다. 심 전 위원장이 민산 회원들 사이에서 꼼꼼한 것으로 유명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대 시절 학교 내에서 필력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정갈했다. 그의 글 전문을 먼저 소개한다.

매주 목요일마다 모이는 산행에서 내가 대표로 기도하는 일은 3당 합당 후에도, 김영삼 상임고문은 나오지 않았지만 김명륜 회장이 중심이 되어 계속되었는데, 기도의 톤(tone)은 합당 이전과 마찬가지로 노태우 정부에 대해 강력한 비판으로 일관했다. 겉으로는 합당을 했지만 속으로는 다음 정권의 행방을 놓고 민주계와 민정계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톤(tone)이었는가? 참고로 1987년 1월 22일에 청계산에서 한 “박종철 군이 죽었습니다”라는 기도를 여기에 예시한다.

박종철 군이 죽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박종철 군이 아무 죄도 없으면서 치안본부에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우리 종철이가 물고문에 시달리고, 전기고문에 시달리고, 결국은 고문에 못이겨 절규하면서 숨을 거두는 절박한 시간에, 우리는 사정도 모르는 채 따뜻한 방에서 잠자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고 했던 일이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린 학생은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고 숨을 거두었는데, 어른들은 이 고난의 십자가 지기를 거절한 채 이렇게 살아있다는 죄책감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하나님, 소위 제5공화국이라는 시대는 권력에 의한 살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2·12사태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고, 광주사태로 많은 국민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쓰러졌습니다. 출발부터 살인으로 시작되었던 이 불
   
▲ 심의석이 자신의 산상기도문을 엮어 낸 책이다. 심의석의 기도는 어떤 성명이나 논평보다 주목을 받았고 큰 힘을 발휘했다.
행한 정권은 그 치부를 가리고자 그 동안 어지간히 분칠을 해댔습니다마는, 은패는 커녕 반대로 그 치부는 계속해서 곪아 터졌습니다.

아무리 뚜껑을 덮어두어도 속에서 썩는 냄새는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붙잡아 들이고, 고문을 하고 고문을 하다가 죽으면 바다에도 던지고 산 속에도 버리고 길가 으슥한 곳에 버리기도 했으나, 우리는 다만 심증을 굳힐 뿐 내어놓을 만한 증거가 없어서 말도 못했고, 유가족을 위로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억울한 사정을 살펴주신 하나님 아버지, 그 동안 군사독재권력의 횡포에 희생당한 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땅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은 오늘 이 정권의 불의를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종철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시고 다른 많은 억울한 죽음이 해명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는 억울하게 죽은 박종철 군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내일 명동성당에서 '고 박종철 군 추도식'을 열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천부의 인권을 짓밟고 사람을 짐승처럼 다루는 이 포악한 정권은 이 추도식마저 '원천봉쇄'하겠다고 합니다. 천인공노할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제 정신을 차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이 추도회를 못 열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추도회를 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와 주소서. 내일 추도회가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어떠한 탄압속에서도 전 국민이 참여하여 박종철 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가족들의 슬픔을 만분의 일이라도 달래주며, 불의한 정권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우리 스스로 고문없는 사회의 건설을 다짐하게 하옵소서. 내일 추도회를 통하여 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987.1.22. 청계산에서)

그런데 나는 이러한 강경한 기도가 문제가 되어 합당 후 처음 치른 시의원 선거에서 공천헌금을 받았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뻔했고, 그 다음해에 치른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때까지 맡고 있던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두 가지 사건은 표면상으로는 시의원 선거에서 내가 공천한 세 후보가 모두 낙선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민주산악회에서 기도를  한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사건임을 후에 대학 동기인 정해창 청와대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여기에 그 전말을 밝히기로 한다.

합당 후 처음 치른 1991년 시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은 대승했다. 그러나 내가 지구당을 맡고 있는 서울 성동구(을) 선거구에서는 세 후보가 모두 낙선했다. 사후에 돌아보니 공천도 일부 잘못했고 선거운동도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의기소침하여 산 속에 들어가 있는데 낙선한 후보자 한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청와대에서 왔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와서 공천헌금으로  위원장에게 얼마를 주었는지 묻기에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기분이 개운치 않다는 것이었다. 공천을 주면서 돈을 받은 일이 없으니 걱정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다른 두 사람한테도 전화를 해봤더니 역시 청와대라고 하면서 사람이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공천헌금 공정가격이 3억 원이라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능력이 없어서 그랬는지 생각이 달라서 그랬는지 공천헌금을 받은 일이 없으니 염려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낙선해서 초상집이 된 곳에 와서 하필 그런 조사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섭섭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진상은 그 다음해 내가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지 못하는 과정에서 정해창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 들어났다. 내가 공천헌금을 받았더라면 틀림없이 그때 감옥에 끌려갔겠구나 싶었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가?

내 지역구에서의 시의원 선거 실패는 그 다음해인 1992년 국회의원 선거 때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공천하지 않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내 선거구 말고도 시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구역이 더러 있었는데 다른 구역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내 지역구만 문제 삼는 것은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1년 전 시의원 선거 결과가 어떻게 금년 국회의원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를 따지고 내 공천문제에 대해 선처해 줄 것을 부탁하려고 정해창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를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좀 도와주지 그래”라고 말했을 때 대뜸 퉁명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너가 어떻게 행동했는데 널 도와줄 수 있겠니?” 나는 직감적으로 노 대통령이 나를 공천하지 않으려는 것은 민주산악회에서의 내 기도가 문제가 되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잘 알았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합당 후 처음으로 청와대에서 지구당 조직책 임명장을 받을 때 찍은 사진에서 본 노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의 표정이 떠올랐다. 임명장을 받는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정반대로 달랐다. 김 대표최고위원의 표정은 따뜻했고 노 대통령의 표정은 차가왔다(사진 참조). 그 표정도 그 기도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시의원 선거 때 공천헌금을 받았는지 사후에 특별조사를 한 것도 그 기도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 3당 합당 후 청와대에서 처음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구당 조직책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이 심의석과 악수하고 있지만 표정은 예사롭지 않다. 마치 심의석을 노려보는 듯 하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흐믓한 표정을 짓고 있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진=심의석 제공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결국 민주산악회에서의 내 기도내용에 있다면 그를 만나 간청을 해봐도 그가 들어줄 수 있는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들어준다 해도 그러려면 내 기도내용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써야 할 것이니 그렇게까지 해서 공천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고 그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내 공천은 물 건너갔지만 동시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의 항의로 나와 같은 케이스인 민정계와 공화계의 지구당위원장들도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그때 공천을 받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나는 통일민주당으로 입후보한 지난번 선거에서는 졌지만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통일민주당 열세지역에 공천을 받아서 변변한 당원도 없이 선거를 치렀지만 이번은 달랐다. 4년 동안 지역을 관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3당 합당으로 민정·공화계의 방대한 세력이 당원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공식적인 정당 활동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매주 목요일이면 민주산악회 지부 산행에 150명 내외가 참여하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버스를 타고 나가는 원행에는 1천명 내외가 참여했다. 또한 보름에 한 번씩은 내가 주관하는 토지학교에 상당한 인원이 수도권 일원에서 모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토지학교는 당시 심각한 토지·주택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1990년 대 중반에 내가 발의하고 김용준 교수가 동의하여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3개월여의 준비 끝에 발기인 모임이 열렸다. 발기인은 박형규 제일교회 목사(이사장), 김용준 고려대학교 교수(교장), 심의석 위원장(상임이사), 김태동 성균관대학교 교수(이사), 이진순 숭실대학교 교수(이사), 노병구 전 광명지구당 위원장(감사), 정진일 전 안산지구당 위원장(감사)이었다. 그리고 출범 후에 국회에서 강신옥, 제정구 두 의원이 이사로 참여했다. 사무실은 나의 성동을 지구당 사무실을 나누어서 썼다.

토지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서 언론기관의 관심을 끌었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토지학교 관련기사가 신문에 나거나 방송에 소개되었다. 매 2주일마다 열리는 강의에는 내 지역구 당원들을 포함하여 수도권에서 2백 명 내외가 참석했다. 주제별 세미나가 있는 때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토지학교에서 강의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토지학교 보고서Ⅰ'토지신화, 이번에는 깨질 것인가'와 동 보고서Ⅱ'집만 있어다오, 장남도 좋다'는 서울의 종이 값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전남대학교 경영대학 김광우 교수는 자기에게 '계획법'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써낸 「토지학교 보고서 독후감」을 책으로 만들어 보내왔다. 다른 대학에서도 이 책을 부교제로 쓰고 있다는 소문은 자주 들려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지역구는 당원들이 이름만 명부에 올려놓은 당원이 아니고 당 행사는 물론이고 본인의 취향에 따라 민주산악회로, 토지학교로 또는 양쪽 다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살아있는 조직이었다. 특히 토지학교는 나와 지구당의 성가를 한껏 올려놓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이었으니 공천만 받았으면 당선은 무난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애석한 일이다.

심 전 위원장의 글을 필자도 읽어 본 후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우선 그가 민산에 들어간 이유부터 물어봤다.

"YS의 23일 단식 후 발언에 확신"

-민산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1984년 8월 15일 오전 10시에 서울 하얏트호텔 커피숍에서 정채권 목사의 소개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산악회에 가입했습니다. 호남 출신인 제가 민산에 가입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1983년 연초로 기억되는데 정 목사가 저를 찾아와서 민산 얘기를 하면서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김영삼 총재가 아직 대통령 꿈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려면 산으로 갈 게 아니라 감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정 목사는 '보내줘야 갈 게 아니냐'고 말했고 이에 저는' 감옥에 갈 일을 안 하니까 안 보내는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습니다.

그 때 저는 YS가 1차 연금을 당했던 사실은 커녕 2차 연금 중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입에서 입으로 김 총재의 단식투쟁 사실이 알려지더니 서울대학교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한 후에는 거의 모든 국민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YS는 23일 간의 단식을 끝내면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나는 이제 두려움과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 선언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의 선언이 진심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때 단식을 끝내는 상황이었기에 정신이 맑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더욱 갔습니다. 역시 정치인의 말은 중요합니다."

   
▲ 1987년 6·29 선언 며칠 뒤인 7월 3일 내·외신 기자 등 600여 명이 참석한 북한산 산행식에서 기도하는 심의석. 위로 김명윤이 서있고 그 우로 YS, 김동규, 이우태, 서석재가 보인다. 사진=심의석 제공

-어떤 경위로 민산에서 대표로 기도를 하게 됐습니까.

"저가 민산 산행에 처음으로 참여한 것은 그해 10월 초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산행에 따라 나선 저는 참으로 놀라운 일에 접합니다. 정상에서 김영삼 상임고문의 인사말 앞에 기도하는 순서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만으로 구성된 단체도 아닌데 그 곳에서 기도로 공식행사를 시작하다니 한국정치사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내가 나갔을 때는 주로 정채권 목사가 대표로 기도를 했고 어떤 때는 김 장로(YS)도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게도 대표로 기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1986년 초라고 기억이 되는데 그날 산행에는 YS도 정채권 목사도 모두 불참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라는 이유로 김덕룡 당시 비서실장의 권유를 받아 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정 목사와 내가 대표로 기도를 하게 되었고 정 목사가 민주산악회를 떠난 후에는 주로 제가 기도하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위원장님의 기도가 유명세를 탄 것으로 압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잘 할 수 있었나요.

"기도하는 법을 함석헌에게 배웠습니다. 함석헌은 설교를 너무나 잘했습니다. 중앙신학교에서 함석헌이 강의를 할 때 한 한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설교는 미리 써 온 것을 가지고 하나요'라고. 그러자 함석헌은 '이 사람아 설교를 어떻게 써 가지고 온 것으로 하나'라고 답했습니다. 이 학생은 '그러면 설교 원고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잘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함석헌은 이에 '설교 원고도 없이 어떻게 설교를 하나'라고 반문했습니다. 함석헌의 앞뒤가 안 맞는 말에 답이 들어있습니다. 미리 설교 원고를 충분히 준비하되 실제로 설교를 할 때는 원고 없이 현장감에 맞춰서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저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산상기도를 하게 되면서 '이 건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새벽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산상기도를 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목요일에 산행이 있기에 수요일 새벽까지 고함을 지르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밤에 기도 원고를 다 썼습니다. 하지만 목요일 산행 때는 그 원고를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내용과 현장 상황을 맞추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 현장에서 한 기도와 원고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와 현장에서 한 대로 원고를 고쳤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현장 분위기가 담기도록 했습니다."

-산상기도에서 YS를 너무 떠받드는 행태를 일소한 일화가 있던데요.

산상기도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김영삼 총재' 앞에 '민족의 지도자' 같은 이런 저런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또 뒤에 '님'자를 붙였습니다. 일부 목사님들도 YS를 추켜세우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것이 정말 못 마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데 한 인간을 그렇게 높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총재 앞에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총재 뒤에 '님'자도 안 붙이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기자가 대통령을 지칭할 때는 '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기자 개인보다는 대통령이 높지만 보도를 듣는 국민보다는 대통령이 낮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지 않아야 진정한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YS, 자신을 낮춰 부른 심의석을 오히려 총애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당시 홍인길 비서가 항의 하지 않았나요.

어느 날 산행식이 끝나자 홍인길 비서가 나에게 와서 기도할 때 왜 총재한테 '님'자를 붙이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순간 난감하더라구요. 예수를 믿지 않는 그에게 '님'자를 붙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 때 YS가 제게 와서 '장로님 오늘 기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어요. 그 때부터 김영삼 총재 앞뒤로 미사여구나 '님' 자를 붙이지 않는 이유를 홍 비서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YS가 제 마음을 이해해 준 것입니다. 저는 YS가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즉생'의 각오로 그렇게 기도 했는데 그 걸 받아들인 것입니다.

YS는 석두가 아니고 순발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YS와 얘기를 해보면 쓸데 없는 말은 안하고 핵심만 짚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지면 안 들으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산상기도를 통해 YS의 총애를 엄청 받았습니다. 취재 기자들도 '이런 사람에게 공천을 줘야한다'는 등 저를 좋게 평가하는 말을 YS에게 하고는 했습니다."

   
▲ 심의석은 기도할 때 '김영삼 총재' 앞에 '위대한 민족 지도자' 같은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았다. 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있었지만 YS는 오히려 심의석을 총애했다. 사진=심의석 제공
-YS의 총애를 받으면서 다른 회원들의 견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견제라기 보다는 민산에서 제가 기도로 바람을 일으키면서 YS가 워낙 저를 좋아하고 하니까 조금 섭섭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YS는 큰 대회 같은 모임에서 제가 줄을 서 있으면 지나가면서 툭 치고 가고는 했습니다. 제가 뒤를 돌아보면 씩 웃고 가는 겁니다. 너무 티가 나게 저를 좋아했어요. 어느 해에 운영위원을 (특별히) 추가로 선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김영삼, 심의석, 서석재가 추가로 들어갔습니다. 기존 9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상도동계에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하나'라는 불만 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본 YS의 신앙심은 어떠했나요.

"다른 사람의 신앙심을 평가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그 것을 알기는 어렵죠. 그런데 YS는 앉기만 하면 '기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YS가 기도를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말재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정말 자주 했습니다. 대통령이 돼서도 자기방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기도를 했으므로 타성에 젖은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저 문제가 나오는 순간 '역시, 김영삼은 못 따라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좁기로는 YS 집이 제일 좁습니다. 거실에 몇 명만 들어가도 돌아설 때가 없습니다. 식당에 10인용 식탁이 있는데 앉아 있으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식당이 워낙 좁기에 한 명 늘어난 11 명이 식탁에 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상을 따로 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산을 헌납했는데 이번 사저 일로 국민들에게 안 좋게 비춰져서 안타깝습니다. 누구도 (사저 문제에서는) YS를 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상도동계로 국회의원을 지낸 정재문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YS가 대만 총통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했고 나중에 대만 고관이 한국을 방문, YS 상도동 집을 찾았습니다. 이 때 정재문이 대만 고관에게 '집이 너무 작지요'라고 말했고 이에 "집이 넓으면 뭐합니까. 사람이 넓어야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YS는 그런 고집이 있었습니다. 돈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YS가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현승일에게 들었는데 자기가 6·3 데모로 감옥에 갔는데 YS가 맨 먼저 와서 사식비 같은 것을 넣어주더라는 겁니다. YS와 일면식도 없는데. YS가 민주화 운동 한 사람들을 굉장히 도와줬습니다. YS가 권력 욕심은 있어도 돈 욕심은 없었습니다. 돈 욕심 없는 것으로 지금까지 버티는 것 같습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순천고 동기인 허경만 전 전남도지사가 평민당 입당을 주선했고 이를 거절한 바람에 허 전 지사가 DJ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때 DJ가 허경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 지하에 데려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서 술자리에서 일어설 때 DJ가 허경만에게 '정치 그만 두는게 좋겠다. 친구 하나도 설득 못하는데'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때 허경만이는 '나중에 (심의석을) 써 먹을 때가 있을 겁니다'라고 받아넘겼다고 합니다. 그러자 DJ는 '아, 그런가'하고 말했다는 거에요. 허경만이도 DJ 만큼 내공이 있는 인물입니다."

YS, 1987년 당시 '석두' 소리까지 들으며 단일화 노력

-1987년 대선을 앞두고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단일화를 못 이룬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때 단일화가 무산된 것과 관련해 YS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단일화 협상 막판에 YS는 자기가 후보가 안돼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DJ의 요구를 남산 외교구락부 협상 때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YS와 DJ가 외교구락부에서 만나고 있을 때 민주산악회 경기도 광명 지부 창립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김동영, 최형우, 노병구, 김덕룡 등 YS를 제외한 상도동 핵심이 다 있었는데 YS가 DJ에게 한 제안이 알려지자 '김영삼은 석두'라는 탄식과 함께 소란이 일 정도였습니다. 그 만큼 YS에게 불리한 것이죠. 하지만 DJ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다 '4자 필승론'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YS가 그토록 자신에게 불리한 제안을 DJ에게 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과 국민들에게 떳떳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 후보 단일화에 대한 열망이 대단한 상황이었습니다. YS가 이런 열망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통일민주당은 92개 지구당의 경우, 미창당 지구당 36개를 제외하고 '30 대 26'으로 김영삼계가 우위에 있었다. 이 때 동교동계 협상자로 나선 이용희는 미창당 지구당을 동교동 20개 상도동 16개로 나눠 임명하자고 했고, 상도동 측 협상자인 고(故) 김동영은 "창당지구당 중 30개의 지구당 위원장이 다 우리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동수인 18개씩 나누자고 했다. 이 문제로 후보 단일화 협상이 늦어지자 김영삼은 1987년 10월22일 외교구락부에서 김대중과 만나 "당신이 원하는대로 미창당 지구당 중 20 곳의 지구당위원장을 임명하라"고 양보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자필승론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YS의 3당 합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시다시피 노태우는 처음 DJ와 합당을 하려고 했습니다. 상공부 차관을 했던 김동규 전 의원이 한 번은 동교동계 김봉호 전 의원과 남미 출장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봉호 전 의원이 김동규 전 의원에게 '우리가 민정당하고 합당하는데 우리가 여당되면 당신을 봐주겠다'고 말했다고 해요. 하지만, 결국은 YS와 합당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3당 합당을 안했으면 양 김 씨는 대통령이 못됐다고 봅니다. 잘 보십시요. 요즘도 '박정희 세력'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YS는 3당 합당에 대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실제로 YS는 대통령이 되어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시작돼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이어진 군정을 종식 시켰다. 만약, 3당 합당 결단이 없었으면 뿌리 깊은 군정 세력을 무너뜨리는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군사정권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전 대통령 인기가 가장 높습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표가 차기 대권주자로 가장 유력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1987년에) 양 김씨가 하나가 돼서 야권분열이 안됐다면 박정희 인기가 그렇게 오래 안 갔을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와 같거나 그 보다 더 심한 대우를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전두환·노태우가 쿠데타로 감옥에 갔으면 박정희도 감옥에 가야 하는게 맞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전두환이나 노태우보다 독재를 더 많이 한 게 아닙니까. 돈에서도 이들보다 깨끗하지 않지 않습니까. 경제발전을 얘기하는데 박정희가 자기 돈으로 경제를 일으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새마을운동과 경제를 연결 시키는데 새마을운동은 농업과 관련된 것이고 당시 경제발전은 중공업과 관련된 것입니다. 별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어떤 변수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YS, 박정희와 DJ 틈새에 끼어 민주화 공헌 인정 못 받아"
 
-YS가 대한민국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인데도 인기가 높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YS가 3당 합당을 하면서 야권세력은 DJ가 가져갔고 군부·보수 세력은 박정희가 가져갔습니다. YS는 그 틈새에 끼었습니다. 3당 합당 전에는 YS가 한 표가 많아도 DJ보다 앞선게 사실입니다. 또 외환위기 책임이 YS에게 집중되는 것도 한 이유인데, 외환위기는 YS 때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박정희 때부터 싹튼 것입니다."

-YS가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한 평가는 무엇입니까.

"민산해체는 나라를 위해서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때 만들어진 반공연맹이 지금까지 자유총연맹으로 남아서 국고를 까먹고 있습니다. 박정희 때 만들어진 새마을운동 조직이 지금까지 국고를 까먹고 있습니다. 전두환 때 조직인 바르게살기운동도 그렇습니다. (1987년에) YS와 DJ가 안 쪼개졌다면 이런 조직은 다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민산을 해체하지 않았다면 역시 무슨 사단법인화 돼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민산 해체는 YS가 너무나 잘한 일입니다."
 

-여수 산악회를 조직했다는데 힘을 발휘했나요.

"여수 산악회는 양 김 씨가 쪼개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쪼개졌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양 김 씨가 쪼개지지 않았다면 나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겁니다. 또, 제가 상도동 몫으로 공천을 받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양 김 씨로부터 받은 것이 되니까 양 쪽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민산 활동을 하면서 탄압받은 적은 없나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민산 활동하면서 탄압받은 것은 당시 정부기관에 끌려간 사람들이 고문 당하고 죽고 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도 중정과 보안사에 몇번 끌려갔지만 고문 받은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우리는 정치 조직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탄압을 덜 받았습니다."

-민산 회원들이 차기 총선이나 대선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나요.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나요. 이제 지나간 세대인데요."

"이우태 ·노병구, 가장 기억에 남아"

-민산 활동을 함께 한 회원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요.

"남부군을 쓴 이우태가 떠오릅니다. 이 분은 예수를 안 믿는 분인데 내 기도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자기가 남부군을 출판할 때는 민산에서는 제게 제일 먼저 원고를 보여주면서 '출판해도 될까'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 것을 보니 완전 딴 세상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밤을 새서 읽었습니다. 이우태는 저 한테는 선배였는데 저를 친구처럼 잘 대해줘서 기억에 남습니다. 노병구도 기억에 남는데 노병구는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갔습니다. 노병구가 전당대회 부의장을 하면 그 다음에 제가 전당대회 부의장을 했고 노병구가 민산 감사를 하면 그 다음에 제가 민산 감사를 하는 식이었어요. 노병구가 제게는 대선배인데 오래 친했어요. 이우태와 노병구에게는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내성적이고 이론적이었는데 노병구는 원만하고 사교적이고 활동적이었습니다. 이우태는 너무나 순진했는데 제 인격에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YS 빼고는 두사람이 제게 영향을 많이 준 사람들입니다.

-대학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 양아들의 서울법대 입학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올린 적이 있지요.

"저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권력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서울 법대 2학년이 되었을 때 이기붕 아들 이강석이 서울법대에 입학을 했어요. 아시다시피 이강석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인데, 저와 서울고등학교 동기로 육사를 다니다가 서울 법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여론에는 이강석이가 서울 법대에 들어온 것을 놓고 '왜 특혜를 주느냐'는 비판론과 '대통령이 국립대에 자기 아들을 넣은 게 뭐가 큰 문제냐'라는 옹호론이 섞여 있었습니다. 저는 특권의식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습니다. 이 와중에 저가 이강석의 입학을 비판하는 글을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전달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 두 신문이 정권에 비판적이었습니다. 또, 신문에 독자투고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글을 들고 가서 냈는데, 동아일보에서는 실을 수 없다고 했고 그래서 경향신문에 가서 전달했는데 경향신문에서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약간 실망해서 경신고등학교 언덕길로 올라오는데 한 친구가 '네 글이 경향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났다'고 하는 거에요. 확인해 보니 정말 제 글이 크게 실렸더라구요. 그 때 이강석은 권총을 찬 군인이 호위를 한 가운데 대학을 다녔어요."

"1987년 전남 여수 유세장에서 전경들 YS향해 돌멩이 던져…노태우가 지시한 것으로 추측"

   
▲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인터뷰를 마무리 하려고 할 쯤 심 전 위원장 부인 김백선 여사가 "여수에서 난리 난 것도 말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심 전 위원장은 "당신이 좋은 걸 말해줬네. 나는 기억을 못했는데…"라면서 1987년 YS가 전남 여수에서 유세할 당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소상히 전했다.
 
"그 때 광주에서 난리가 난 바람에 YS가 전라도 쪽에는 안 오는 것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YS가 여수를 거쳐 가자고 하는 겁니다. YS는 제게 여수에 가도 괜찮냐고 물어봤습니다. 나는 총재가 온다고 해서 반가웠고 평민당에 속해 있던 고향 사람들에게도 물어보니 '표 안찍어주면 되지 YS가 온다고 뭐 큰 문제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제게 와서는 '위원장님, 지역이 지역인지라 입구가 아닌 퇴로도 봐두는게 어떻습니까'라고 말을 해요. 하지만 저는 건성으로 들었어요.

그러다 여수 집회 당일 전경 버스 10대가 왔는데, 저는 당연히 사고가 안 나도록 감시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온 줄 알았는데 집회가 시작되니까 전경들이 외투 속에서 돌멩이를 꺼내서 마구 던지는 거에요. 찬조 연설 때는 가만히 있다가 YS가 연설을 시작하니까 전경들이 돌멩이를 던지는 거에요. 저는 처음에 돌멩이에 맞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래도 내가 책임자라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살폈는데 전경들 주머니에서 돌이 쏟아지는 거에요. 그 때 순간적으로 경찰서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퇴로를 봐두라'는 말이요. 아마도 경찰서장은 전경들이 돌멩이를 던질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제게 그런식으로 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건 노태우가 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전경들이 다른 곳에서도 돌멩이를 던졌는데 노태우가 연설 할 때는 연단까지 안 날아가 정도로 던졌고 반면 야당 후보들이 할 때는 연단에 미치도록 던졌어요. 여수에서는 직통으로 던졌어요. 그렇게 난리가 나서 저희는 그 자리를 피해 일단 점심 예약을 한 식당으로 들어가 사태를 대충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당초 지나가기로 했던 순천은 건너 뛰고 광양에서 하동으로 해서 나왔습니다. 순천 방향으로 전경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제가 중앙당에 이 문제에 대해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너무나 바쁜 상황이었고 결정적으로 YS가 대선에서 떨어지면서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심 전 위원장의 부인 김백선 여사도 전경들이 돌멩이를 던지는 것을 봤다. 김백선 여사는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남편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소리치다가 정작 자신의 오른 쪽 쇠골 부분에 돌멩이를 맞아 그 자리에서 기절까지 했다. 김 여사는 당시 상황과 관련 "여수는 작은 동네라서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전경들이 돌멩이를 던지는게 바로 보였어요. 돌멩이를 던지다가 사람들에게 잡힌 전경들이 빌면서 놓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봤어요"라고 말했다.

윤종희 기자 yjh_1120@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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