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 신민당사] 김태촌 ‘신민당 각목 난동사건’ 벌어진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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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 신민당사] 김태촌 ‘신민당 각목 난동사건’ 벌어진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1.07 20: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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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부담스러웠던 박정희 정권…이철승 당선 위해 김태촌 사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인사동 북쪽 입구는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자 당권을 놓고 각목 난동 사건이 벌어졌던 안국동 신민당사가 위치했던 곳이다. ⓒ시사오늘
인사동 북쪽 입구는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자 당권을 놓고 각목 난동 사건이 벌어졌던 안국동 신민당사가 위치했던 곳이다. ⓒ시사오늘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직장인들과 인사동을 찾은 관광객들이 뒤섞여 붐비는 이곳에서 안국동 사거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관광안내소와 나무 몇 그루, 벤치 몇 개가 설치된 작은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인사동 북쪽 입구’ 정도로 생각하는 이 공간은, 사실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진 장소다. 관광안내소 앞 표지석에 써진 것처럼 조선시대 충훈부(忠勳府·국가에 공훈이 있는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청)가 있던 곳이며, 1945년 11월 11일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이 거행된 자리기도 하다.

벤치 옆 표지석에는 ‘조국 광복과 더불어 바다에 애착과 관심을 가진 손원일(초대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겨레의 선각자 70명이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는 신념과 의지로 1945년 11월 11일 이곳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 결단식을 거행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해군 창설 59주년을 맞이해 여기에 표지석을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30번지’에 해당하는 이 장소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투사들의 흔적이다. 비록 표지석이 세워져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민주화운동의 산실(産室)이던 신민당 당사(黨舍)가 위치하고 있었다. 윤보선계와 박순천계의 갈등으로 인해 갈라졌던 민중당과 신한당은 1967년 ‘정권 교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야권 통합을 이뤄내는데, 이를 통해 탄생한 것이 신민당이었다. 이때부터 ‘안국동 신민당사’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투사들의 기지(基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안국동 신민당사는 국민들의 뇌리에 ‘반민주(反民主)적 당권 투쟁’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의 현장이 바로 안국동 신민당사였기 때문이다.

안국동 신민당사 자리는 조선시대 충훈부가 있던 자리이자 해방병단 결단식이 거행된 자리이기도 하다. ⓒ시사오늘
안국동 신민당사 자리는 조선시대 충훈부가 있던 자리이자 해방병단 결단식이 거행된 자리이기도 하다. ⓒ시사오늘

1974년 8월 23일, 만45세의 나이에 최연소 야당 총재로 선출된 YS는 ‘야당다운 야당’을 만들어달라는 대의원들의 뜻을 받들어 민주화투쟁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재야민주세력과 손을 잡고 민주 회복을 위한 개헌 투쟁을 전개했고, 1975년에는 조윤형·최형우·김상현 등이 유신 직후 중앙정보부 등에 끌려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하자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이라는 회견문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을 압박해나갔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이 공산화되면서 YS의 스텝도 꼬이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일어난 ‘공산화 도미노’가 한반도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까닭이다. 이러자 YS와 박정희는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이 공산군에 함락된 지 3주 뒤인 5월 21일, 영수회담을 갖는다.

영수회담 이후 YS의 민주화 투쟁 강도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따르면, YS는 박정희의 ‘민주주의 하겠다’는 말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영수회담에 대한 YS 회고록 내용 일부다.

박정희는 창밖의 새를 가리키며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정희에게 ‘민주주의 하자, 대통령 직선제 하자’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박정희는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 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김 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내가 정권을 내려놓는다고 하면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일단 진심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문제는 YS가 투쟁 강도를 낮추면, 당내 입지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대의원들이 그를 택한 이유가 ‘선명야당’ 기치를 들어달라는 것이었던 만큼, YS의 입지 축소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에 따라 신민당은 YS를 지지하는 주류 세력과 반대하는 비주류 세력으로 양분됐고, 1976년 5월 전당대회를 통해 신임 총재 선출에 나선다.

김태촌은 차지철의 사주를 받아 안국동 신민당사와 신민당 전당대회장을 연이어 공격했다. ⓒ구글 이미지 검색
김태촌은 차지철의 사주를 받아 안국동 신민당사와 신민당 전당대회장을 연이어 공격했다. ⓒ구글 이미지 검색

이런 배경 속에서 벌어진 일이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었다. 영수회담 이후 투쟁 강도가 약해졌다고 해도,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 YS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철승은 후에 ‘사쿠라’라는 오명(汚名)을 썼을 만큼 온건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은 이철승을 차기 신민당 총재로 ‘밀어주기’로 결심하고, 조직폭력배 김태촌을 사주해 신민당사를 공격한다. 다음은 김태촌이 <시사저널>을 통해 회고한 당시 상황이다.

“김영삼 총재실로 피신한 주류 측 국회의원들이 안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소파·의자·책상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쌓아버렸다. 화가 난 우리는 당사 안의 모든 집기와 기물을 부수면서 총재실 문을 도끼로 내리쳤다.
드디어 총재실 문을 도끼로 부쉈다. 김영삼 총재를 납치하고 인질로 삼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 순간 총재실에 감금된 국회의원들이 탈출구를 찾아냈다. 총재실 북쪽에 폐쇄된 나무 문짝을 발로 차 넘어뜨린 뒤 비상계단을 이용해 탈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김영삼 총재만은 도망가지 않았다. 김 총재는 “깡패놈들에게 맞아 죽어?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철승 의원을 매장하고야 말겠다”라고 소리치며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죽일 듯한 기세로 다가가자 황낙주 의원이 김 총재를 강제로 떠밀면서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탈출시켰다. 당사 옆에는 안국복집이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총재실에서 3~4m 아래에 그 식당 슬레이트 지붕이 있었다. 주류 측 의원들은 앞 다퉈 지붕 위로 뛰어내렸다. 뒤이어 강제로 피신당한 김영삼 총재가 뛰어내렸는데, 그만 지붕에 구멍이 나서 한쪽 다리가 푹 빠져 크게 다쳤다. 그 주변으로 우리는 낫과 도끼를 던져 위협한 뒤 당사를 점거했다. 김 총재는 근처 신한의원으로 실려갔다.”

당사를 점거한 김태촌은 신민당 대의원 명단을 불태우고, 직인을 강탈했다. 얼마 뒤 전당대회는 열렸지만, 김태촌은 전당대회장이던 서울시민회관에까지 난입해 YS 측 대의원들의 입장을 막아버렸다. 결국 이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은 신민당 대표로 당선된다.

이러자 YS 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주류 측 대의원들은 신민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열어 YS를 총재로 선출한다. 이처럼 양측이 극단 대립을 이어가면서 분당(分黨) 위기에 몰리자, 양측은 이충환을 총재 대행으로 하고 9월 15일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는 데 합의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철승이 당권을 잡으며 신민당은 ‘참여하의 개혁’ 노선 아래 ‘온건 야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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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2020-01-08 07:50:30
안국역, 인사동 북쪽 입구 그 작은 공원이 그런 역사가 쌓여 있었군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