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만 국민 안전 값어치가 고작 2000만 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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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국민 안전 값어치가 고작 2000만 원인가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0.01.09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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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불량 레미콘’ 업체에 사실상 면죄부…침묵하는 건설업계, 무책임한 정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사진은 글과 무관 ⓒ pixabay
사진은 글과 무관 ⓒ pixabay

"정의롭고 안전하며, 더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에 따라 우리 정부는 과감한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경제와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와 개혁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칙과 특권을 청산하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흔들림 없이 노력했습니다. 안전한 대한민국은 국민 모두의 바람입니다. 안전에 관한 노력은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존 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고 어린이 안전 종합대책을 더해 국민 안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경자년 새해를 맞아 내놓은 신년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그는 2019년 연말인 지난달 17일에도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국민 안전은 정부의 핵심 국정 목표로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하다. 안전은 국민 삶의 기본이고 성숙한 사회의 첫걸음"이라며 국민 안전 문제를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과연 문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국무회의를 주재한지 불과 이주 만에, 그리고 신년사를 발표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 수십만 명의 국민 안전에 대한 값어치가 2000만 원으로 책정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김미리 부장판사)는 불량 레미콘을 납품한 혐의(건설기술진흥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시멘트제조업체 성신양회와 이번 사건에 연루된 해당 회사 임직원 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성신양회는 값비싼 시멘트 함량을 줄이는 대신 단가가 저렴한 혼화재 비중을 늘린 불량 레미콘을 GS건설, HDC현대산업개발, 양우건설 등 건설업체의 270개 건축현장에 공급해 9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각 건설현장의 입주자 또는 수분양자를 500세대로 가정하고, 각 세대를 3인 가구로 환산하면 적어도 40만 명 이상의 국민이 대규모 하자, 재난 등에 노출된 셈이다. 건설사를 속이고 국민 안전을 위협해 부당이득을 취한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건축물의 안전성과 직결되는 레미콘 품질을 조작해 건설현장에서 사용되도록 했다. 이로 인한 손해는 일반 국민들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계획적·조직적으로 이뤄진 범행으로 배합비율을 조작하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한 전문적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등 범행수법도 불량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문 내용과는 달리, 재판부는 어처구니없게도 성신양회에 고작 벌금 2000만 원을 선고했다. 또한 이번 사건에 연루된 해당 회사 임직원 5명에게는 징역 1년 6개월~2년에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내렸다. 계획적·조직적으로 국민들을 안전 사각지대로 몰아넣은 불량한 범죄기업에게, 힘들고 어렵게 내 집을 마련한 국민들을 우롱한 범죄자들에게 사법부가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이다. 실제로 성신양회는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항소를 포기했다. 불량 레미콘을 팔아서 900억 원을 벌었는데 벌금 2000만 원으로 퉁친 데다, 임직원들도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니 굳이 항소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의 판결도 비상식적이지만, 성신양회가 불량 레미콘을 공급하는 바람에 피해를 입은 건설사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의구심이 든다. 피해보상을 요구하기는커녕, 심지어 일부 건설업체들은 불량 레미콘의 콘크리트 강도에 문제가 없다며 재판부에 성신양회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피의자를 두둔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쩌면 불량 레미콘이라는 걸 사전에 인지했음에도 공사비를 줄이거나 부당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성신양회와 함께 범죄를 모의한 공범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가 나서야 한다. 국토부는 지난해 5월 불량 레미콘 논란이 발생했을 당시 성신양회를 비롯해 불량 레미콘이 공급된 건설현장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선 바 있다. 해당 조사 결과를 국민들에게 낱낱이 공개하고 어떤 건설사가 어떤 아파트 단지에 얼마나 많은 불량 레미콘을 썼는지 밝혀서 진짜 피해자인 입주민과 수분양자들에게 적절한 안전조치와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공정거래위원회는 불량 레미콘을 사용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뤄진 분양계약이 불공정거래에 해당하는지 그 여부, 분양계약 체결 또는 입주 후 시공사에서 불량 레미콘을 납품받은 사실을 알았을 경우 입주예정자 또는 입주민들에게 시공사가 이를 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 여부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행정안전부는 불량 레미콘이 쓰인 건물과 시설물들을 대상으로 집중 점검·진단작업을 펼쳐야 한다. 입법부인 국회도 이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대해 전향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괜한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다. 재난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온다. 

수십만 국민 안전의 값어치가 고작 2000만 원으로 매겨졌다. 문 대통령은 "국민 안전은 정부의 핵심 국정 목표로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하다. 안전에 관한 노력은 끝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책임한 정부가 된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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