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단독인터뷰
김영삼, “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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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단독인터뷰
김영삼, “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10.24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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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바로볼 수 없어
노무현은 의리없어 평가 가치 없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지난 15일 본지와 가진 단독인터뷰에서 "DJ가 1년6개월동안 내 뒷조사를 했다. 나를 모욕주기위해 청문회에 불러내려 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지금은 용서했고, 모든 것을 화해했다"고 밝혔다.
 
YS는 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의리가 없다. 평가가치가 없다"고 잘라서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은 바로볼 수 없다"며 "지금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너무심하다"고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편집자>
 
다음은 인터뷰 전문

▲YS는 고령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김영삼(YS) 전 대통령(82)은 ‘현대정치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에서부터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정치를 해왔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정치사다. 김 전 대통령은 이들(역대 대통령)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만남을 요청했고 지난 15일 상도동 자택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김 전 대통령은 생각보다 건강했다. 김 전 대통령은 고령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기억력과 또렷한 발음으로 논리 정연한 답변을 들려줬다.

사실 ‘상도동계’는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대통령을 탄생시킨 첫 정치적 인맥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상도동계라고 부른 건 김 전 대통령의 자택이 상도동에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
인터뷰를 위해 상도동 자택을 찾아가며 문뜩 예전이 떠올랐다.

필자는 사실 YS가 대통령이 되기 전 상도동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거실 한가운데 김구 선생이 쓴 ‘철혈남아(鐵血男兒)’란 글귀가 걸려있던 게 생각났다. 공간은 새롭게 바뀐 게 없었다. 다만 김구 선생의 글이 걸려있던 자리에 YS 자신이 쓴 ‘호연지기(浩然之氣)’란 글로 대체돼 있었다.

“이승만은 건국의 주역, 다만 3선개헌 아쉬워”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화해했다고 말을 했지요. 박정희는 나를 제명해서 죽은 겁니다. 내가 박 정권으로부터 제명당하고 했던 말이 있지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최근 김 전 대통령은 한 월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멀쩡한 총재를 총재가 아니라고 해서 내쫒고, 나를 죽이려 백주 대낮에 염산으로 테러를 가하고 내 측근들을 연행해 얼마나 탄압하고 죽이지 못해 온갖 짓을 다하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했지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 나는 이미 다 풀었다’고 그런 말을 해주지 못한 게 아쉽다”고 밝혔다.
 
때문에 필자는 김 전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을 ‘용서’한 것으로 오인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루더니 10.28 재보선 얘기를 꺼냈다.

“박희태 대표가 전화를 걸어와 좀처럼 끊지 않아서 참…, 박 대표가 문민정부시절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고 지난 거제 기념관 개관식(4월)에도 참석해 양산에 내려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김기수 비서실장을 바라보며)다음주 화요일(20일) 비행기 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양산에 들른 후 일본으로 나가야겠어요.”

김 전 대통령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54년 만의 정권교체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주제로 특강하기 위해 26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방문에 앞서 양산에 들러 박희태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유세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지워유세 계획은 지켜지지 못했다.

김기수 비서실장은 이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이 아침 운동이 끝나고 샤워를 하던 중 갑작스레 (박 후보의)전화를 받았다”고 당시 사정을 밝히며 “지난 1일 부산, 거제에 이미 내려간 일이 있어 지방에 너무 자주 내려가는 것 같아 박 후보 지원 계획을 취소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김 전 대통령의 지원유세 철회와 관련해 “여러 사정이 있다”고도 말했는데 전직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게 됐을 때 받을 정치적 부담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짐작된다.

▲ YS는 이승만은 건국의 주역이라며 높은 평가를 내릴만 하지만 3선개헌이 아쉽다고 토로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이승만 대통령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만25세(정확히는 만26세가 맞음-편집자 주)에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어느 날 이기붕이 오후 3~4시 경에 청와대로 ‘이 박사’를 만나러 가자는 겁니다. 자유당 정권 때죠.

나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당으로 한민당이 있었는데 마음이 가지 않아서 자유당을 택했어요. 그날 다른 세 사람과 같이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김철환이라는 경북 지역 여 의원과 유도 선수였던 김상도 의원은 이름이 기억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 때 청와대는 일제시대 총독 관저였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뜯었지요. 그 때 이름이 뭐였더라, 경무대라고 했습니다.

넓지 않은 응접실 뒷문으로 이 박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 대통령을 ‘이 박사’라 불렀어요. ‘3선 개헌’소식이 신문에 솔솔 보도되던 무렵입니다. 이 박사에게 했던 말을 전부 다 할 수는 없지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박사가 80대였는데 손을 떨더라고요. 그러더니 별 말 없이 뒷 문으로 나가버렸어요.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이 박사가 나가고 이기붕이 화를 내며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노인을 화나게 하느냐’고 나무랬어요.”

김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이승만에 대해서는 ‘건국의 주역’이라며 높은 평가를 내렸다. 다만 3선 개헌이 강행된 후의 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며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면담한 후에도) 자유당을 탈당하지 않았습니다. 3선 개헌안이 토요일에 부결처리 됐는데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에 최순주 국회 부의장이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다시 가결된 것으로 통과시켰어요. ‘이 당은 안 되겠다’ 결심하고 동지들을 모아 10명이 함께 탈당했습니다.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아요.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습니다.”

자유당이 3선개헌을 추진하자 김영삼 의원은 대학동문인 현석호, 한동석 의원 등과 개헌반대 투쟁에 나섰다.

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는 재적 2백3명 가운데 찬성 1백35표, 반대 60표로 부결이었다.

당시 자유당은 원내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는데다가 무소속 의원도 10여명 정도 포섭해 놓아, 통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1표 모자라서 부결됐다. 임흥순 의원 등 무소속 의원 10명은 찬성표를 던졌지만 김영삼을 비롯한 현석호 민관식 이태용 황남팔 김두관 등 12명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에 부결됐다.

그런데 다음날, 최순주 부의장은 사사오입을 적용, 전날 부결로 선포한 개헌안이 통과시킨 것. 그 내용인 즉 203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사사오입에 따라서 이것은 통과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바로 볼 수 없어”
 
김 전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이 누구지’라고 물었고 ‘윤보선’이라고 답하자, “윤보선은 힘이 없었어요. 내각제에서는 총리가 실권을 갖고 있잖아요. 장면은 무능력자였습니다. 쿠데타를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평가할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을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중정(중앙정보부)을 앞세워 바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을 숨 못 쉬게 했어요. 이 사실을 국민들이 잘 모릅니다. 미화가 심해요. 공과를 따져야 합니다.”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평가도 부탁드립니다.

“전두환은 반역자입니다. 선거를 치르지 않고 대통령에 올랐다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노태우는 선거를 치렀다는 점에서는 인정해야할 부분이 있긴 하지요. 하지만 부정축재가 너무 심해서 내가 대통령이 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감옥에 넣은 게 아닙니다. 기업인들로부터 수천 억 원의 부정한 재산을 모았고 무능과 부정의 극치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순서가 이어지자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대중은 독재자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1년 6개월 동안 내 뒷조사를 했어요. 하지만 나온 게 없었지 않습니까. 청문회에 나오라고 하는데 나를 모욕 주려는 자리에 왜 나갑니까. 안 나갔지요. 김대중이 내 뒷조사를 했던 건 용서합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의 뒷조사를 했다면 아마 (비리가) 많이 나왔을 겁니다. 나는 안 했습니다. 김대중이 무서워서 영국으로 도망쳤지요. 그리고는 6개월 만에 돌아와서는 정계은퇴를 번복한 것인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화해를 안한 겁니까.

“아, 화해는 분명 한 겁니다.”

지난 8월10일 DJ의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오자 평생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YS는 DJ가 입원한 세브란스 병원에 찾아가 “DJ와 나는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애증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고 밝혔다.

YS는 이어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냐’는 질문에 “이제 그렇게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술회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반역자로 YS는 단정지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떻게 보십니까.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추천을 받아 지난 1988년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간판으로 첫 금배지를 달았다.

이후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 이뤄지자 노무현은 “반역사적 3당통합에 반대한다”며 당 잔류를 선언, YS와 멀어지게 됐다.

1995년 노무현은 민주당 간판을 들고 YS의 아성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시장 선거에 도전장을 냈다. 선거 초반까지는 집권당이던 민자당도 긴장할 정도로 노무현은 선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거 중반 DJ가 ‘지역등권론’을 들고 나오자 노무현의 ‘바람’을 꺼져갔고 결국 낙선했다. 노무현은 “DJ의 지역주의를 용서할 수 없다”며 맹비난했다.

선거 이후 DJ가 민주당을 쪼개 ‘국민회의’를 만들자 노무현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DJ를 비난하며 또다시 당 잔류를 선언했다.

그러나 국민회의 후보인 DJ와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이 1997년 대선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자, 노무현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던 DJ를 지지했다.

이후 노무현은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3년 제16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아마도 YS는 이런 노무현의 정치행보를 놓고 ‘의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싶었다.

노 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회고록 ‘성공과 좌절’을 통해 DJ에 대해선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훌륭한 지도자”라고 후하게 평가했고, YS에 대해선 “1987년 이전까지의 정치적 업적은 DJ에 못지않지만 3당 합당으로 모든 것을 망쳐 놨다”고 평가했다.
 
“DJ는 독재자, 하지만 화해…노무현은 ‘평가가치 없다”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합당이 위험한 도박에 가까웠습니다.

“힘들었습니다. 25%(민주계)대 75%(민정계)의 싸움으로 시작했으니 정치 생명이 위험했어요. (합당 당시) 정치 상황이 경상도와 전라도가 완전히 쪼개져 있었고 경상도는 경남과 경북이 갈라져 있어서 (합당을 안 하고는) 군사정권을 못 끝내 군사정권을 업고 정권교체를 하려 했던 겁니다. 노태우는 합당 후 온갖 술수를 써서 내가 대통령이 못 되게 하려 했지만 나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신으로 정정당당히 싸웠습니다.”

3당합당을 놓고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구국의 결단’이란 평가와 함께 ‘야합’이란 비난이 상존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YS 입장에서 봤을 때 거의 ‘도박’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배석했던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인터뷰 후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도 3당합당에 반대했어. ‘죽으러 가는 길이 뻔한데 어떻게 따라갈 수 있냐’며 대놓고 YS한테 항의했지. 하지만 YS는 ‘군정을 종식시키는 것은 이 길밖에 없다’며 설득했어. 그래도 도저히 ‘같이 가겠다’는 말은 못했지. 그러나 YS 말고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는 거라. 그래서 결국 함께 했지.”

-현재의 남북 관계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

“공산주의자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베풀어도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재임 중에 쌀 15만 톤을 달라고 해서 5만 톤을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쌀을 실은 배가 원산으로 가는데 선장이 (북한 지역) 사진을 찍었다고 감옥에 보냈어요. 선장이 배에서 사진 좀 찍었다고 무슨 문제가 됩니까. ‘쌀을 안 주겠다’ 했지요. (공산주의자들은) 매달리다가도 금방 변합니다.”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2주 전에 갑작스레 김일성이 사망한 일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회고하시는지요.

“2주 후 평양행이 예정돼 있었는데 김일성이 그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남북관계가 상당히 진전됐을 겁니다. 당시 미국이 북한을 치려고 하던 상황이어서 북한이 겁을 먹고 카터를 초청했습니다. 카터가 북한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나도 걱정이 돼서 클린턴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클린턴이 미국에서는 전직 대통령 하는 일에 현직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라며 나더러 이해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후에 카터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평양에서 이틀을 자는데 서울에서 먼저 하루 자고 갈테니 청와대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부부가 같이 왔습니다. 청와대에서 카터가 북한에 가면 김일성을 두 번 만날 건데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미국 가기 전에 서울에서 다시 보자고 했어요.

카터가 북한에 다녀와서 김일성이 북한이 처한 위기에 대해 ‘이 사태를 어쩌나’ 걱정하면서 ‘김영삼만이 해결 가능하다, 김영삼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세계 신문에 톱으로 보도된 후 급속도로 정상회담 날짜가 잡혔어요.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정직하게 회담에 임했을 겁니다. 김일성이 먼저 제의했기 때문에 갖다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북한에 돈을 갖다 주고 정상회담을 했잖아요. 안 되는 일입니다.”
 
“김일성이 먼저 정상회담 제의해 와”

-젊은 정치인들에게 정치 원로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정치는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정직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진 정치인 중에 눈여겨보고 있거나 잘 하고 있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그 대답은 안 하겠습니다.”

원내인사들 중 민주계 인사는 몇 안된다. 김무성 안경률 이성헌 정병국 의원 등이 전부다. YS가 이들 중 한명을 지목할 것이란 예측을 했는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인터뷰가 끝내면서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제 나 하나만 남았다”고 말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생전에 있지만 진정한 대통령으로는 자신만이 남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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