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정치 30년史] “손·학·규만 남았다”
[손학규 정치 30년史] “손·학·규만 남았다”
  • 윤진석‧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2.16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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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위일까…21대 총선 지나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조서영 기자)

바른미래당 당 대표 직을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시사오늘
바른미래당 당 대표 직을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정치인생 30년사의 공든탑이 흔들려지는 순간이다.ⓒ시사오늘

 

누구는 바벨탑 위의 손학규를 보겠다. 또 누구는 ‘아직 그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끝이 아니기에 끝은 모른다. 21대 총선 후, 마이웨이 그는 어디에 있을까.

장례식장, 그때

"어이고, 어이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주변으로 곡소리가 들려왔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스승의 영정 앞에서 상도동계와 민주계 정치인들은 꺼이꺼이 말을 잇지 못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정치적 아버지였다는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소장과 부둥켜안고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적자와 친자가 조문객을 맞는 사이 오른팔로 통했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하염없이 울었다. 복심이던 김덕룡 전 원내대표, 서청원 전 최고위원 등 모두가 문민정부를 함께 연 개혁 공신들이었다.

지금은 바른미래당 대표인 손학규(이하 손학규) 당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도 그 자리에 있었다. YS 전과 후로 민주주의 역사가 나뉜다고 한 손학규도 상도동에 정치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인상 깊게도 그는 2015년 11월 22일부터 5일간 국가장으로 치러진 기간 내내 YS 빈소를 떠나지 않았다.

한번은 장례식장 한 편에서 YS 후예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손학규도 함께였다.

“김무성 대표야말로 차기 대통령감이지.”

생전 당시 상도동계 모임인 민주동지회를 이끈 노병구 회장이 김 대표를 지목했다. 박근혜 정부 때였고, 여권 안팎에서는 유력 잠룡 주자로 김무성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릴 무렵이었다. 상도동계로서 “김무성을 밀자”는 얘기였다. 그 옆에 있던 손학규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당시 그는 전남 강진의 백련사 만덕산 자락 토담집에서 칩거를 하던 중이었다. 2014년 7‧30 재보궐 참패 이후 곧바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 그는 한 달 뒤인 8월, 부인 이윤영 여사와 함께 강진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YS 서거 소식에 상경해 빈소를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어쨌든 ‘김무성 대권주자’ 얘기에 묵묵히 있던 그의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던 정세운 평론가는 지난 14일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며 그의 표정에서 회한 같은 것을 읽었다고 했다.

“한때 손학규는 김 전 대표와 같은 당이었다. 한나라당에서 경기지사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 있었다. YS로 인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상도동계를 통해 대권의 적통을 잇고 싶었던 듯하다. 민주계의 좌장 역할을 하며 최형우 장관 팔순잔치에서 사회를 보거나, 민주동지회 행사비로 300만 원을 쾌척한 것이 표적이 돼 검찰 수사를 받는 등 잠시 곤욕을 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상도동계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찾고 이를 지키려고 했던 것 같다. 보통은 빈소에 좀 앉아있다 가는 것과 달리 자리를 줄곧 지키고 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김무성은 대권주자로, 자신은 강진 칩거 처지니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손학규 대표가 서울대장례식장에 마련된 YS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하고 있는 모습이다.ⓒ뉴시스
손학규 대표가 서울대장례식장에 마련된 YS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하고 있는 모습이다.ⓒ뉴시스

 

YS의 키즈

1993년 YS 키즈로 민자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으니 그의 정치인생도 근 30년이 돼간다. 그중 가장 화려했던 정치사를 돌아보면, 한나라당 내 개혁보수 진영에 있었을 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유학 후 인권시민운동 활동과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있던 손학규는 정계 입문하자마자 그해(93) 광명을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되며 별 어려움 없이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의정활동에 좋은 평판을 얻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재선에 도전해 성공을 거뒀다. YS로부터는 측근 월권에 대한 직언을 했음에도 대변인으로 발탁되고, 최연소 복지부 장관에 임명되는 등 간판으로 성장하며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그 시절 문민정부를 한마디로 집약하면 ‘개혁 정부’로 칭할 수 있다는 평가다. 이에 대한 회상 등이 담긴 <나의 목민심서 강진일기>(손학규 저)에 따르면 YS가 집권하면서는 또 하나의 혁명을 겪듯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하나회 척결, 청와대 안가 철거,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 공개, 부정부패 척결 등을 추진한 YS 지지율은 93퍼센트까지 치솟을 정도로 국민들은 개혁에 열광했다고 한다.

그도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로의 전환기를 맞아 개혁에 적극 동참했다. YS계로부터 정치인이라면 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권력이 아닌, 나라를 책임질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슴으로 각인하게 된 시기였다고 전해진다.

2000년 16대 총선을 통한 3선 성공, 2002년 민선 3기 경기도지사 당선 등 모두 한나라당일 때 울린 파죽지세의 승전보들이었다. 경기도 일자리 72만개 창출 및 경제성장률 7.2퍼센트 달성 등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고, 전도유망한 차기 대통령 감으로 발돋움하던 것도 이때였다.

17대 대선을 앞두고서는 종종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여권 내 대선후보 주자들 중 호감도 조사 1위로 뽑히는 등 경쟁력도 날로 커지고 있었다. 정치적 스펙 면에서도 그만큼 화려한 경우도 보기 드물었다. 학계는 물론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등 임명직과 선출직을 두루 거치며 경륜과 실력을 검증받은 정치인 중에서는 그 시기 으뜸이었다. 이념적 색채가 옅은 점도 지지층 스펙트럼을 넓히는데 이점으로 작용했다. 본선에만 나가면 떼놓은 당상이라는 관측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껏 그는 경선을 통과해 본선에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006년 민생대장정을 떠난 뒤 이듬해 처음으로 출사표를 던졌던 17대 대선 당내 경선에서부터 그랬다. 전문가 그룹 층에서는 외연 확대 가능성이 충분한 우량주로 주목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경쟁자들에 비해 존재감을 높이지 못했다. 조직력이 약한 데다 영남 출신의 다른 주자들과 달리 수도권이 고향인 것도 지역주의 벽에 부딪쳐 고전을 면치 못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 결과 이명박 vs 박근혜 vs 손학규 삼강구도에서 지역 기반, 당심, 민심에서 모두 밀려나며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손학규 대표는 진보 진영으로 넘어오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사진은 전남 강진에서 칩거할 당시다.  만덕산에 올라 산 아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뉴시스
손학규 대표는 진보 진영으로 넘어오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사진은 전남 강진에서 칩거할 당시다. 만덕산에 올라 산 아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뉴시스

 

2막의 부침

손학규는 이후 14년의 당적을 정리하고, 그해 3월 탈당을 결심하고 만다. 그러나 “계속 남아있었으면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되거나 총리라도 했을 것”이라는 아쉬운 품평들이 따라올 만큼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 평론가도 그의 정치 인생에서 패착을 낳은 결정타는 이것이라고 봤다. 즉 “그에 있어 가장 잘한 선택이 YS 키즈가 돼 한나라당 내 개혁세력 차세대 리더로 입지를 확보해나간 것이라면 가장 선택을 못한 오판의 순간이 바로 탈당했을 때”라며 “보수 진영을 나가, 진보 진영으로 들어가면서부터 그는 속된 말로 죽을 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출신의 꼬리표를 떼지도, 주류세력의 리더가 되지도 못한 채 흥행 요소의 불쏘시개 역할로 번번이 활용되는 데 만족해야 했다는 견해다.

그럼에도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손학규는 개혁노선은 YS를 계승했지만, 한반도 노선은 DJ(김대중)의 햇볕정책에 신념을 두고 있었다. 평소 남북평화와 교류에 뜻을 두고 있던 데다 경기도지사 시절 북한과 직접 벼농사 지원 사업 등을 펼치며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때문에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햇볕정책만큼은 계승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당신 빨갱이요?”

당에서 비토가 쏟아졌고, 교류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대북 노선이 다른 이들과의 결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책을 통한 그의 설명이다. 훗날 손학규가 캐치프레이즈로 삼았던 ‘저녁이 있는 삶’이 말해주듯 보편적 복지 정책에 대한 생각도 한나라당과는 결이 달랐는데, 이 역시 탈당의 이유였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금 시간을 되돌릴 주사위가 놓여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어쩌면 한나라당 때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으로 주사위를 던질지 모르겠다. 그 같은 마음이 농축돼 YS 빈소를 지키고 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준비는 됐는데 운이 안 따라 준 것인지, 정치 인생 2막이던 민주당 시절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같은 해(2007년) 진보진영의 대권주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통합민주당(현 민주당)에 입당했지만, 기존 주도세력의 벽을 넘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경선에서 정동영 후보에 지고 본선 행 티켓을 얻지 못한 것이다. 이후 정 후보는 MB(이명박)에 큰 차로 패했고, 당을 수습해 이듬해(2008년) 18대 총선을 준비하는 몫은 그에게 남겨졌다. 그러나 MB정부 초기 버프를 받은 한나라당은 대승을 거뒀고, 참여정부 심판론은 예상보다 컸다. 당 대표로 나선 본인조차 종로에서 낙선했고, 당은 299석 중 단 81석만 얻는 대참패를 기록했다.

패배의 책임을 안고 물러난 손학규는 강원도 춘천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2010년 10‧28 재보선 참패로 당이 어려워지자 구원투수로 복귀해 두 번째로 당 대표를 맡기에 이른다. 반MB전선이 구축되던 다음해(2011년)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관련 배수진을 치다 사퇴하기에 이르는 등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민주당 등 야권에는 회심의 시기를 맞은 때이기도 했다. 그도 이때는 타이밍을 잘 잡고 분당을 재보선에 출마했다. 마침내 당선되며 대권주자로서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당내 기반도 두터워져 당심은 손학규라는 말이 나올 만큼 조직력도 탄력이 붙고 있었다. 잘하면 18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주자로 등판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엿보이던 찰나였다.

하지만 이번 역시 더 단단히 뿌리내려져 있는 주류 세력을 제치고 열매를 맺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2012년 문재인 후보에 밀려 본선 행이 또 멀어지고 만 것이다. 그 뒤 수원병 총선에서 정치 신인에 패하고 정계 은퇴의 심정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강진)에 있다 나오기까지 2년 넘는 시간을 만덕산에서 지내야 했다.

중간에도 내려올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가 지원사격을 청했고, 국민의당에서는 안철수 전 대표도 도움을 부탁했다. 그러나 양쪽 다 거절했기에 야권의 성공도 그의 과실은 되지 못했다. 혹자는 이 역시 손 대표의 오판이라며, 기회를 놓친 것에 애석해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바른미래당을 탈당해가고 있지만 손 대표는 나홀로 당무에도 당 대표 직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시사오늘
많은 정치인들이 바른미래당을 탈당해가고 있지만 손학규 대표는 나홀로 당무에도 당 대표 직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시사오늘

 

끝은 뭘까

만 가지 덕을 쌓아야 내려온다는 뜻일까. 그도 자문하며 내려왔을 산세를 뒤로하고 2016년 3막 정치인생은 시작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박근혜 탄핵 정국 이후 치러진 2017년 19대 장미 대선을 앞두고 국민주권개혁회의 대표로서 안철수 국민의당(현 바른미래당)과 합당을 선언한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경선에서 안 전 대표를 이기고, 본선에 나가고 싶었을 테지만 세력이 없던 그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남은 것은 당 대표. 대선후보는 번번이 안 되면서 당 대표는 잘만 됐다. 지난해(2018년) 바른미래당 대표로 선출되며 민주당 이해찬 대표에 이어 올드보이 체제를 연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경륜을 살려 합리적 중도와 개혁적 보수를 아우르며, 당의 구심력을 높여주기를 바랐던 당초 기대가 무색하게 올 2월이 되기까지…. 결국 손학규만 남은 상황이 됐다. 쇠심줄 같은 고집으로 버티던 사이 함께하던 많은 이들이 당을 떠나간 것이다.

처음엔 4‧13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요구하던 이언주 의원이 떠났다. 패스트트랙 정국이 지나면서는 유승민‧정병국‧하태경‧오신환 의원 등 개혁보수 세력이 떠났다. 1년여간 독일과 미국을 거쳐 귀국한 안철수 전 대표도 떠났다. 김영환‧문병호‧김근식 등 국민의당계도 떠났다. 그에 우호적이었던 김성식 의원, 호남계인 김관영 전 원내대표도 떠났다. 손을 따라 민주당 탈당까지 감행한 바 있던 이찬열 의원도 떠났다.

손학규를 옹호하며, 그의 편에 섰던 장진영 변호사를 비롯해 물심양면으로 돕던 당직자들도 떠났다. 당권은 내려놔도 옥새는 못 내려놓겠다는 궤변 앞에 이대로 총선을 맞다가 희망은 없다며 충언한 측근들이었지만, 욕만 먹고 물러나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당보조금 100%를 받기 위해 속도를 내던 3당 통합(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추진도 아슬아슬하다. 박주선‧주승용‧김동철‧유성엽‧임재훈 의원 등 호남계 중심으로 당권을 내려놓으라는 요구에 혹시나 스스로 판을 깨트리지 않을까, 위태로운 현실이다. 과거 통합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때를 지나, 분열의 아이콘이 돼 자칫 당을 산산조각 낼 위기의 최대 정점을 찍을 상황인 것이다.

“안타깝다.”

과거 그의 정치력에 가능성을 열어뒀던 신율 명지대 교수는 통화(14일)에서 너무 많이 변해버린 모습에 씁쓸함을 드러냈다.

“손학규는 우리나라 한국사에서 상당한 신념을 불사르면서 정치를 해왔던 사람 중 하나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나 심상정 정의당 대표보다 더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노동운동 전력으로 체포돼 어머니 장례식도 못 봤을 정도로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측면이 컸던 분이다.”

말처럼 젊은 시절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 빈민‧인권 운동에 앞장서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던 그다. 어릴 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일 년 전인 1947년 경기 시흥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 어렵게 자랐다.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신입생이던 1965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전태일 평전>을 쓴 故조영래 변호사, 민청련의 故김근태 전 상임고문과 학생운동의 트로이카로 불렸다. 무기정학, 탄광 생활, 옥살이, 수배생활이 이어졌지만 손의 민주화 운동은 멈춰지지 않았다.

효자로 소문난 그였건만 수배로 인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뒤늦게 알고 펑펑 운 일화는 두고두고 아프게 회자되고 있다. 부마항쟁 당시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보안대에 잡혀 ‘죽었구나’ 싶을 정도로 맞을 때도 있었다.

정말 죽겠다 싶었는데, 10‧26 사태로 가까스로 풀려났다고 하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유신의 종말이 아니었다면 손은 어찌 됐을까. 얽히고설킨 비극적 시대의 수레바퀴 앞에서 서늘해지기는 느낌이다.

어느덧 죽음의 계곡을 지나고 세찬 풍파를 거쳐 지금에 이른 손학규이건만 돌아가기엔 이미 멀리 와버린 걸까. 건넌 강이 너무 넓고 깊은지 모르겠다. 강진에서 산중 생활을 하며 욕심을 버리자고, 화두로 삼았다던 시간들 역시 의미 없이 흩어졌는지 모르겠다. 그저 몹쓸 노욕에 의해 망가져버리고 말았다는 곱지 않은 평판들만 손학규 주변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지천명의 나이에 이치를 깨닫고, 예순의 나이에 세상을 이해하고 일흔의 나이에 무엇을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다. 웃프지만 막힘없는 70대인 그이니, 스스로 옳다 여기며 마이웨이 행보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할 정도다.
 
한편으로 이해도 간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이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면 이때를 죽어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 놓나, 끝까지 가서 놓나, 결과가 마찬가지라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연장하고 싶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혹여 모를 한줌 재기의 끈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늘에서 동아줄을 기다리듯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많이들 가능성이 적다고 하지만 21대 총선에서 그에게 의원 배지가 주어질 수도, 혹은 못 얻고 정치인생을 종칠 수도 있는 기로에 서있다. 그렇다면 만의 하나 의원이 된다면, 그는 무엇을 꽃피우듯 시도하게 될까. 이에 대해 그를 오랫동안 지켜왔던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통화(14일)에서 “순전히 내 짐작이지만”을 전제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과거 내각제 개헌을 통해 정치발전을 이루고자 했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있지 않았나. 손 대표도 내각제 내지는 책임총리제, 이원집정부제 등을 해야 권력이 분산되고, 승자독식의 정당 폐해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독일식 정치를 염두에 두며 개헌을 통한 7공화국을  이루는 꿈, 그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 카드가 아닐까.”

P.S. 재작년 연동형 비례대표제 관철을 위해 국회에서 단식 투쟁을 하던 손학규의 모습이 끝으로 어른거린다. 밤중 모두가 가고, 침낭 한 옆의 조그마한 책상에 앉은 그는 홀로 있어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대판 신문을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중 저러니 만덕산 토담집에서 버텼구나, 싶었다. 유년시절 덩치 큰 동급생에게 맞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며 덤볐다던 일화처럼 위기에 몰릴수록 꼬장꼬장해진다고 할까. 스스로 잘 사임하던 때도 있었지만 남들이 내려오라 하자, 버티는 지금 어쩐지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 같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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