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 엇갈린 평가…구국의 결단 vs 기회주의 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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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엇갈린 평가…구국의 결단 vs 기회주의 야합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2.19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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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90년 1월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열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다.ⓒ시사오늘 김유종

2020년 대한민국 보수는 통합의 길을 택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한축이었던 김영삼(YS)은 같은 고민을 했고, 고민의 끝에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지금의 보수세력이 만들어졌다. 민주자유당 탄생이었다. 2020년 보수는 미래통합당을 신설했다.

통합 과정 속 누군가는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받아들였으며, 다른 누군가는 거세게 반대하며 물살을 맞았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렇다면 지금의 미래통합당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다.

이번 회고사는 1988년 선거제도 개편(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700)과 1989년 중간평가 유보(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525) 내용은 제외했다. 대신 1989년에서 1990년까지, 약 1년 간 진행된 합당 제안과 타협 과정과 대통령들의 엇갈린 평가에 초점을 맞췄다.

 

1989.03.07. 노태우-JP 회담: 민정당-공화당 합당 제안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 후 치른 제13대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이 125석으로 목표했던 과반수 의석(150석) 확보에 실패했다.ⓒ국회보 201405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 후 치른 제13대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이 125석으로 목표했던 과반수 의석(150석) 확보에 실패했다.ⓒ국회보 201405

1988년 제13대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례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으로, 헌정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했다. 이때 청와대를 중심으로 여소야대 국면을 개편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당시 이런 움직임을 정계 개편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청와대가 먼저 합당을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첫 물꼬는 노태우 중간평가를 중심으로 여야가 의견이 분분한 와중에 터졌다. 이와 관련 1989년 3월 노태우와 김종필은 청와대에서 3시간에 걸친 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김종필은 중간평가 중지와 함께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1989년 3월 7일 나는 노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다시 만났다. 배석자 없이 단 둘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 시간 가까이 회담했다. 나는 노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를 중지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이렇게 말했다.

“(중략) 북방외교는 지금 시기를 놓치면 하기가 힘듭니다. 국가 명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중략) 공화당 35명이 민정당과 합치면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뀝니다.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북방외교를 포함한 국방, 외교 정책을 소신껏 할 수 있습니다.”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을 처음으로 제안한 순간이었다. (중략) 노 대통령은 깜짝 놀라면서도 반색했다. 그는 내 손을 붙잡더니 “좋습니다. 곧 합시다.”라고 말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50~151쪽.

사실 김종필의 합당 제안은 처음이 아니었다. 1988년 6월 6개국 대사 초청 오찬에서도, 8월 미국 방문에서도, 그는 누차 보혁(保革) 구도의 보수대연합을 강조했다.

하지만 역사의 물길은 김종필이 처음 제안한 방향과 다르게 흘러갔다. 이는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의견에서 비롯됐다. 박철언이 노태우에게 3김(金)과의 통합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민정‧민주‧공화당의 합당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면서도, 김영삼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공화당과의 합당만 생각했던 노태우는 점차 박철언의 설득에 점차 마음이 기울었다.

정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김종필 총재는 보수 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김영삼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내게 진언을 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혁 구도로 일대 개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민주세력을 대통합하고 각 당에 있는 급진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중략) 박철언 보좌관에게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김영삼 김대중 두 총재의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82~483쪽.

하지만 김종필은 처음 합당을 제안한 뒤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이유를, 합당이 성사되기 직전에야 알게 된다. 노태우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과의 합당 협상을 한 자리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진행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민정당과 공화당의 양당 합당을 위한 논의가 비밀리에 시작됐다. (중략) 하지만 통합을 위한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당시 공안 사건이 속출하기도 했지만 노 대통령이 최종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시간을 끌면서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그 이유는 한참 시간이 흘러 합당이 성사되기 전에 알았다. 나의 합당 제안 사실을 들은 박철언 보좌관이 “이왕 야당하고 합당할 거면 민주당을 끌어들여 거대 여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노 대통령을 설득했다. 박철언은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이다. 처음엔 양당 통합만을 생각했던 노 대통령은 박철언 설득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대권 집념이 누구 못지않게 강한 김영삼 총재로서는 반길 만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나와 노 대통령이 합당에 뜻을 모은 지 한 달 쯤 뒤부터 박철언은 민주당과 합당 논의를 별도로 진행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내게 귀띔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짐작으로만 청와대 쪽 기류가 달라졌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51~153쪽.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은 예상대로 쉽게 진행됐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지였다. 두 정당 간 통합은 군부세력 간 통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합당의 물살은 민주당을 향하기 시작했다.


1989.06.21. 노태우-YS 회담: 민정당-민주당 합당 제안

ⓒ시사오늘DB
ⓒ시사오늘DB

김영삼은 지난 3월 중간평가 유보를 둘러싼 정국을 1김3노(1金3盧)라고 표현했다. 이는 김대중‧김종필이 야당 총재 간 합의를 저버리고 노태우와 타협한 것에 대한 불만을 뜻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흘러, 1989년 6월 노태우와 김영삼이 청와대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때 노태우는 회담 중 ‘정책 연합’을 제안했다. 원만한 정국운영을 위해 협조해달라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김영삼이 “하려면 합당을 해야 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김영삼은 민정당과의 통합을 고려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노태우와 회담한 6월 21일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 날 한국정치의 지형을 바꾸는 한 가지 논의가 태동됐다. 회담 중 노태우는 나에게 원만한 정국운영을 위해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의 혼란한 시국에 대처하기 위해 정책 연합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나는 노태우에게 4·19 직후 민주당 신·구파의 대결 양상을 설명해 준 뒤, “하려면 합당을 해야지 정책연합은 또 다른 정국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합당’이라는 내 말에 그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김총재님,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정책연합은 안 되고, 하려면 통합을 해야 된다”고 다시 말했다.

물론 이때 내가 정말로 민정당과 합당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책연합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5공을 청산하기 전에 노태우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나에게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202~203쪽.

이후로 이어진 실무자 간 교섭 과정에 대해서는 각 대통령 회고사에는 명시돼있지 않다. 당시 교섭은 민정당 측에서 박준병 사무총장과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민주당 측에서 황병태 정책위 의장과 김덕룡 의원이 관여했다. 실무자들의 증언을 참고했다.

박철언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권에 따르면, 그는 김영삼 총재를 ‘당 내외의 상당한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로 △1989년 4월 보궐 선거에서 후보 매수 사건으로 인한 서석재 사무총장 구속 △박용만‧황낙주‧신상우 중진과 김동주‧노무현‧장석화 초선 의원의 야권 통합 요구 등을 들었다. 

박철언은 민주당과의 합당 과정을 ‘YS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빨리 합당이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하면서도, 자신의 체면과 명분을 세워줘야 합당할 수 있다고 노 대통령과 나를 계속 조르는 형국’이라고 봤다.

한편 김덕룡은 2016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중에야 YS가 1988년 야권 통합을 전제로 DJ가 주장한 소선거구제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하지만 정작 야권통합은 실패했고, 통일민주당은 원내 3당으로 추락했다”고 야권 통합이 아닌 3당 합당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김영삼은 회고록에 합당 과정을 상술(詳述)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2009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25%(민주계)대 75%(민정계)의 싸움으로 시작했으니 정치 생명이 위험했다. (합당 당시) 정치 상황이 경상도와 전라도가 완전히 쪼개져 있었고 경상도는 경남과 경북이 갈라져 있어 (합당을 안 하고는) 군사 정권을 못 끝내겠다는 판단에, 이를 업고 정권교체를 하려 했던 것이다”라며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는 심정”이라고 후술했다.


1989.12.15. 노태우-DJ 회담: 민정당-평민당 합당 제안

노태우는 마지막으로 김대중에게 통합을 제안했다. 1989년 말 야당 총재 3명과 청와대 회동이 끝난 후, 둘은 따로 만남을 가졌다. 노태우는 ‘이제 그만 고생하고, 나하고 당을 같이 하자’고 합당을 제안했지만, 김대중은 ‘군사정부와 5‧17쿠데타를 반대한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과 같이 당을 하겠냐’고 거절했다.

사실 노 대통령은 내게도 합당을 제의했다. 1989년 말 야당 총재 3명과 청와대 회동이 끝난 후 노 대통령이 나를 따로 만나자고 했다. 할 얘기가 있으니 남아 달라고 말했다. 둘만 남게 되자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김 총재, 이제 그만 고생하십시오. 나하고 같이 갑시다. 김 총재께서도 이제 편히 사십시오.(중략) 나하고 당을 같이합시다. 그래서 좋은 일이나 나쁜 일 같이 겪읍시다. 그간 고생을 많이 했지 않습니까.”

(중략) “나는 군사 정부를 반대하고 또 5.17 쿠데타를 반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 대통령과 같이 당을 할 수 있습니까. 걸어온 길이 다르고 정치 노선이 다르지 않습니까. (중략) 오늘의 여소 야대는 국민이 선택한 것입니다. 노 대통령께서도 여소 야대가 하늘의 뜻이며 국민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민정당과 평민당이 합치는 것은 민의를 배반하는 엄중한 사건입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72~574쪽.

이어 김대중은 3당 합당의 부당함도 지적했다. 그는 ‘평민당이 본질이 다른 민정당과 함께 간다면 국민 앞에 우리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제가 듣기로는 3당이 합당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디다. 3당 합당만은 결코 안 됩니다. 지금 국정을 펴는 데 불편한 것이 없잖습니까. 우리 평민당은 그동안 초당적인 협조를 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우리가 한 번도 발목을 잡지 않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중략) 여소 야대란 것도 한 번 해봐야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략) 평민당이 본질이 다른 민정당과 함께 간다면 국민 앞에 우리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중략) 나는 그렇게 노 대통령의 통합 제의를 뿌리치고 돌아왔다. 그러나 노 정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김원기 원내총무가 당시 정권 막후 실세 박철언 정무 제1장관을 만나고 왔다며 보고했다.

“여당 쪽에서 만일 우리가 응한다면 평민당하고만 협상을 하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불쾌했다. “내 귀가 더러워지니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그렇게 김 총무의 말을 잘랐다. 

(중략) 김영삼 씨는 개인적으로 노 대통령의 후계자가 되고 싶었고, 김종필 씨는 내각제 개헌을 바랐을 것으로 보인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72~574쪽.


1990.01.11.~13. 노태우-야당 개별 단독회담

1990년 1월 11일부터 3일 간 노태우는 김대중(평민당), 김영삼(민주당), 김종필(공화당)과 영수 회담을 가졌다.

가장 먼저 노태우는 김대중과 단독회담을 갖고, 광주 보상, 민생 등 광범위한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또 한 번 노태우는 합당을 제안했으나, 김대중은 여전히 ‘협조할 것은 해드릴 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거절했다. 노태우는 이후로 합당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대화하던 중에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디 한 번 합쳐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하고 웃으면서 가볍게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는 “대통령 심중은 이해하지만 여당과 합친다는 말이 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어려워질 것입니다. 비록 여소야대 4당 체제지만 협조할 것은 해드릴 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의 입장에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앞으로 합당을 추진하더라도 특정 정당끼리만 비밀리에 상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김대중 총재에게 운을 뗀 셈이었다. 가능하면 당당하게 하고 싶었다. (중략) 김대중 총재가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중간평가를 유보하게 결정하는 과정에선 내가 국정을 편히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 일도 있다. 그렇기에 3당 합당을 하면서 제1야당이 모르게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 차원에서도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84~485쪽.

반면 김대중은 회고록에 이날에 대한 별도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노태우가 만난 사람은 김영삼이었다. 회담에서 그들은 남북문제를 비롯해 북방외교에 대한 초당적 대처, 5공 청산 및 광주문제에 대한 후속조치 등을 논의했다. 또한 정계개편 역시 쟁점이 됐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구국적 차원에서 정계개편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표현했다. 

12일 나는 노태우와 만났다. 이날 회담에서는 남북문제와 북방외교에 대한 초당적 대처, 5공청산 및 광주문제에 대한 후속조치 등이 논의되었다. 가장 중요했던 논의는 역시 정계개편 문제였다. (중략) 나는 그 동안의 심사숙고 해 온 결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중략) 지난 2년간의 4당체제는 철저히 지역성에 기초한 구조이기 때문에, 국민에게 정치불안과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있다. 소련과 동구권 등 세계 대변화 추세는 북한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구국적 차원에서 정계개편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확신한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237~239쪽.

노태우는 세 사람과의 회담을 끝내고 ‘김영삼에게 차기 대권이 가도 별 무리 가 없을 것’이라 언급했다.

두 사람(김대중‧김종필) 모두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그렇게만 된다면 차기 대권이 김영삼 총재에게 간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중략) 이와 관련해 내가 내린 지침은 ➀색채는 보수 ②정강은 의원내각제로 하고 ③지도체제는 총재를 정점으로 각 당 1명씩 최고위원으로 협의체를 구성하며 ④김영삼 총재의 위상과 대우를 특별히 배려하라는 것 등이었다. (중략) 합당 추진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은 신뢰가 문제였다.

나는 박철언 장관에게 “야당 총재들을 만나 6.29선언에 임한 나의 심중과 그 이후 내가 약속을 실천해 온 과정,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문민 그룹에 정권을 넘겨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 적어도 3김씨가 한 번은 역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라”고 지시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85~486쪽.


1990.01.21. 3당 합당 막전(幕前)

합당 발표를 하루 앞두고 노태우는 김영삼‧김종필에게 대통합을 언급했다. 왜냐하면 김영삼‧김종필은 각자 자신들과만 합당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은 서로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다. 

문제가 남아 있었다. 김영삼, 김종필 총재는 각각 자신들과만 합당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통합 발표 2~3일 전에 이르러 박철언 장관이 김종필 총재에게 “내각제를 하려면 민주당에도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하고 운을 뗐다. 김영삼 총재에게도 “대통합을 하는 마당에 보수세력 상징인 김종필 총재에게도 의견을 타진해 본인이 하겠다고 하면 끼워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의견을 묻는 식으로 얘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김영삼 총재가 “안 돼, 안 돼, JP를 넣으면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넣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박 장관의 끈질긴 설득에 “그러면 한번 얘기해 보고, 본인이 흔쾌히 하겠다고 하면 끼워 주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끼워 주는 것이지 주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양보했다고 한다.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김영삼 총재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얘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핵심 참모회의를 연 결과 내각제 하면 큰일 난다는 반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내각제를 하면 김영삼 총재가 총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각제를 하면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자리를 나누게 되므로 사실상 의석수가 적은 민주계로서는 총리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요직은 전부 민정계가 독식하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스타일이 총리보다는 대통령이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중략) 나는 보고를 받고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통령인데 김 총재가 약속을 해놓고 배신할 수 있겠는가”며 그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486~487쪽.

청와대 회담 하루 전인 1990년 1월 21일 저녁 민주정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각각 소속 의원 모임을 소집해 22일 3당 합당이 있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평민당을 포함한 여야4당이 난리가 났다. (중략) 그 동안 노태우 대통령은 공화당, 민주당과 각기 다른 라인을 통해 양당 합당 논의를 진행해 왔다. (중략) 두 개의 채널은 따로 움직였으며 서로 차단됐다. 

나는 진작 노 대통령이 민주당과 접촉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날 동시 3당 합당을 선언하리라는 점은 까맣게 몰랐다. 나중에 보니 김영삼 총재도 민정, 민주 양당 합당으로만 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불쾌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닥칠 일이라면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중략) 그런데 그 날 밤 ‘이거 안 되겠다, 합당 깨야겠구나’ 하는 일이 또 발생했다. 김용환 의장이 청구동 집을 찾아와 청와대 입장이라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당초 3당은 청와대에서 내일 오전 10시에 노태우·김영삼·김종필 동시 3자회동을 하고 합당 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YS가 3자 회동은 안 된다, 노태우·YS 양자 회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완강히 요구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총재님은 오후 2시에 세 사람이 함께 만나자고 합니다.”

(중략) 세상사 양보할 일이 있고 양보해선 안 될 일이 있다. 민주당을 포함한 3당 합당은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보수대연합이란 합당 대의를 처음 제시한 사람으로서 합당에 선후를 나누고 내가 후발로 들어가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나는 김용환에게 “나라를 위한 구국의 결심을 제일 먼저 한 사람이 누구냐. 노 대통령이 누굴 욕보이려 하느냐. 합당을 백지화하겠다”고 말했다. 

(중략) 자정을 넘어 새벽 1시쯤 홍성철 비서실장이 김용환 의장을 데리고 황급히 찾아왔다. 홍 실장은 “총재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늘 오전 10시 3자회동으로 다시 조정했으니 진노를 푸십시오”하고 읍소했다. (중략) 그걸 보면서 노태우라는 사람이 헝클어진 상황을 하나 딱딱 정리하거나 분별 있게 선택하지 못하는 성격임을 알게 됐다. 합당 뒤에도 김영삼이 뭐라고 하면 그리로 쏠리고 박철언이 다른 얘기를 하면 또 그쪽으로 움직이곤 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56~160쪽.

 

1990.01.22. 3당 합당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오는 모습이다.ⓒ국회보 201201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오는 모습이다.ⓒ국회보 201201

약 10개월간의 긴 협상과 설득 끝에 3당 합당이 이뤄졌다. 1990년 1월 22일 오전 10시, 노태우는 청와대에서 김영삼‧김종필을 양 옆에 세우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로써 여소야대 정국 대신 여당 민주자유당은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게 됐으며, 야당은 평민당과 통합에 반대해 통일민주당 일부 의원을 중심으로 창당한 꼬마 민주당뿐이었다. 다음은 그날 발표된 합의사항 5개항이다.

①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발전과 국민대화합‧민족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오로지 역사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아무 조건 없이 정당법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하고 새 정당의 명칭은 가칭 「민주자유당」으로 한다. 전당대회 시까지는 3당 총재가 공동대표가 된다.

②새 정당은 모든 온건‧중도 민주세력이 다 같이 참여하는 국민정당으로서 자주‧자존의 바탕 위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주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기저로 하여 실질적인 복지와 정의를 실현하며 민족문화를 창달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는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가장 적합한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를 창출한다.

③합당의 절차와 방법은 국민적 여망을 바탕으로 당원의 총의를 최대한 존중하여 추진한다. 합당 등록절차는 금년 2월말 이내에 완료하고 새로운 정당의 전당대회는 금년 5월말까지 개최하는 것으로 하되 늦어도 정당법에 의한 합당 등록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개최한다.

④구체적인 합당절차와 이에 따른 제반사항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3당 각 5인으로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합당을 위한 모든 실무적인 사무를 담당한다.

⑤민족민주역량의 총 단합을 위하여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모든 정당과 단체, 개인에게 문호를 활짝 열고 동참을 호소한다. 그러나 새로운 정당에 참여하지 않는 어떠한 정당‧정파나 단체와도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한 대화와 타협으로 정치발전을 위해 긴밀히 협조한다.


엇갈린 평가…구국의 결단 VS 기회주의 야합

3당 합당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구국의 결단’으로 보는 관점과 ‘기회주의 야합’으로 보는 관점이 그것이다. 아래는 각 대통령들의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를 요약한 내용이다. 

김영삼 “3당 합당은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차선이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는 심정이었다.” - 2009년 본지와의 YS 인터뷰.

김종필 “내가 합당에 참여한 건 북방외교를 성공시키고 보수대연합과 보혁 구도의 정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그때 우리나라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었다.” - 김종필 증언록 161~163쪽.

노태우 “우리는 합당을 이룸으로써 정국 안정은 물론이고 국민들에게 공약한 사업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민주화와 자율화, 그리고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비롯한 큼직큼직한 국책 사업, 방대한 SOC 투자 등은 국익을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했다. 이런 국가적 사업을 정쟁으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 노태우 회고록 489~490쪽.

VS

김대중 “3당 합당은 누가 뭐래도 밀실 야합이다. 당사자들은 보수 세력의 대연합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반민주의 야합이고 반호남의 연합이었다.” - 김대중 회고록 572쪽.

노무현 “3당 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됐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 노무현 자서전 113~116쪽.

전두환 “당시에 합당 세력들은 스스로 ‘구국의 결단’이라든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이라며 자신들의 결정을 합리화했지만, 기회주의와 야합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 전두환 회고록 219쪽.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문가들 간에도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YS는 군정종식을 위해 야권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1988년 야권통합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평민당의 소선거구제 안을 수용했던 것”이라 말했다. 이어 정 평론가는 “합당서명식에는 평민당 협상대표는 돌아오지 않고 괴청년들이 나타나 폭력사태로 번졌다”며 “YS는 DJ와의 야권통합이 물 건너가자 군정 종식을 위해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추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19일 “동기를 보면 야합의 성격이 크다”고 봤다. 그 이유로 “제13대 총선을 통해 YS는 민주당이 제1야당에서 2당으로 전락한 것이 충격이 컸다”며 “YS의 선거 패배에 대한 자괴감 극복과 YS의 정치적 야심이 불러일으킨 합당”이라고 평가했다.

또 강 대표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3당 합당과 미래통합당을 두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 설명했다. 그는 “첫 번째로 정체성 변화”라며 “90년대 통합의 동기는 야합의 성격이 강했지만, 결과적으로 민주화 세력이 군부 세력과 합당하는 과정에서 진영 논리가 와해됐다. 이로써 중도를 넘어서서 좌파적 성향까지 끌어들여 정당의 정체성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미래통합당은 도로 새누리당이라 할 정도로 선거의 승기를 잡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두 번째는 선거 전과 후에 나온 통합”이라며 “90년대 통합은 선거 후에 조정책으로 나왔으나, 미래통합당은 선거 전에 정치 공학적 계산에 따라 나온 선거연대”라고 덧붙였다.

이렇듯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3당 합당은 ‘구국의 결단’인가, ‘기회주의 야합’인가. 이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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