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인터뷰] 김홍걸 “동교동계 통합당行, DJ 평생 괴롭힌 색깔론과 손잡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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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인터뷰] 김홍걸 “동교동계 통합당行, DJ 평생 괴롭힌 색깔론과 손잡는 것”
  • 한설희 기자
  • 승인 2020.02.28 10:36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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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걸 대표상임의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安과 동교동계 어머니 이용에 분노…호남 여론 악화는 김종인 탓 크다”
“호남계, ‘DJ팔이’로 정치생명 연장…통합당行, DJ 괴롭힌 색깔론과 손잡는 것”
“DJ 아들로만 정치하기 싫어 4년 전 출마 고사…통일 분야에서 제 역할 있을 것”
“文 대북정책, 초반에 지나치게 소극적…금강산관광 재개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시사오늘〉은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지난 25일 오후 마포구 민화협 사무실에서 만나, ‘DJ의 아들’이자 ‘정치신인’ 김홍걸의 출사표를 들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사오늘〉은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지난 25일 오후 마포구 민화협 사무실에서 만나, ‘DJ의 아들’이자 ‘정치신인’ 김홍걸의 출사표를 들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명 정치인의 아들로 산다는 것. 또 그의 직업을 물려받는다는 것. 분명 이점(利點)으로 작용하는 부분도 클 터다. 

일본 정계에선 정치인 다섯 명 중 한 명, 자민당으로 한정했을 경우 세 명 중 한 명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세습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도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였다.영미권이라고 다를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부시에 이어 연임에 성공했다. 뉴저지 주에서는 200년 넘게 프레링귀센 가문이 하원 의원을 지냈다. 영국은 300년 간 재직한 수상 57명 중 절반이 넘는 29명이 의원의 아들이라는 통계도 나왔다.

한국에서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집안을 대표적인 ‘정치 가문’으로 손꼽을 수 있겠다. 장남인 고 김홍일 전 의원은 15대·16대(전남 목포), 17대(비례대표) 내리 3선에 성공했고,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도 2007년 재·보궐선거 당시 전남 무안·신안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이제 마지막 3남인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까지 오는 21대 총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DJ의 아들 모두 아버지를 따라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현실은 녹록치 않다. 지금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자녀와 문희상 국회의장의 아들 등 ‘아빠찬스’, ‘세습정치’에 대한 비난이 주류를 이루는 2020년이다. 그의 도전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세간의 ‘세습정치’ 논란을 의식하고 있느냐 물으니 진지하게 “그렇다”고 답한다. 하지만 시종일관 차분하고 담담했다. 세상에 빚진 것 없다는 투다.

“저는 4년 전에도 쉽게 비례대표 자리로 국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사양했어요. ‘누구의 아들’이라는 점만 가지고, 힘 하나 안 들이고 한 자리 차지하자는 생각 같은 거 한 적이 없으니까요. 부모님 욕되게 하는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일부러 지난 번 출마하지 않았던 거죠.”

흔한 ‘세습정치’와는 시작점이 다르다는 것. 그것이 김홍걸 의장의 자부심이다. 그는 아버지 또는 형의 지역구를 물려받지 않았다. ‘DJ의 사람(동교동계)’들은 이미 저 살길을 찾아 민주당부터 미래통합당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의 후광, 즉 ‘후광(後廣, 김대중의 호)’의 후광(後光)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시사오늘〉은 김 의장을 지난 25일 오후 마포구 민화협 사무실에서 만나, ‘DJ의 아들’이자 ‘정치신인’ 김홍걸의 출사표를 들었다. 다음은 김 의장과의 일문일답.

김 의장은 "민주당의 호남 여론 악화는 김종인 위원장의 영향이 크다"면서 "김 위원장의 ‘셀프공천’과 DJ비하발언으로 호남 민심이 더 나빠졌고, 국민의당 측에서 그걸 아주 잘 활용해먹었다"고 지적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김 의장은 "민주당의 호남 여론 악화는 김종인 위원장의 영향이 크다"면서 "김 위원장의 ‘셀프공천’과 DJ비하발언으로 호남 민심이 더 나빠졌고, 국민의당 측에서 그걸 아주 잘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安과 동교동계 어머니 이용에 분노해 입당…호남 여론 악화는 김종인 탓 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로 야인(野人)의 삶을 살다가, 돌연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2016년 초 민주당에서 안철수 씨와 호남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분당 사태’가 발생하면서, 야권의 분열로 인해 새누리당이 절대 다수의 의석을 얻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한 마디로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그때 안철수 씨가 1월 초 어머니(고 이희호 여사)께 새해 인사를 왔는데, 〈중앙일보〉 단독 기사로 어머니가 안철수 씨에게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는, 일종의 지지 발언을 하셨다는 내용의 거짓 보도가 났다. 처음엔 그걸 바로잡으려 나섰다. 그런데 과거 아버님(DJ)을 모셨던 사람들이 안철수 씨와 정치적으로 함께 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거다. 국회의원 출마 이런 것을 꿈꿔서 정치에 발을 들인 게 아니라 그런 의무감, 사명감에서 나섰다.”

-시작을 민주당에서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당시 민주당이 안철수 신당(국민의당)과의 대척점에 서 있었기 때문인가.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수십 년간 몸담으셨던 당이 민주당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주개혁세력의 정통을 지키는 당이 민주당이라고 봤다. 안철수 씨의 ‘우클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우리(민주개혁세력)와는 정체성이 다른 사람이다.

또 민주당이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고쳐서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단 민주당을 살려놓지 않으면 박근혜 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지켜낸 세력이 없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거나, 그분의 설득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다.”

김 의장은
김 의장은 "민주당에 입당한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수십 년간 몸담으셨던 당이 민주당이기 때문"이라며 "그나마 민주개혁세력의 정통을 지키는 당이 민주당"이라고 주장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2015년 민주당의 비례대표직 제안을 거절했고, 2016년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금은 출마하기로 마음을 바꾼 계기가 있나. 

“2016년엔 때가 아니라고 봤다. 그땐 국회에 진출할 준비가 전혀 안 됐다. 괜히 들어가서 제대로 의원 역할도 못 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면, 당에도 누가 되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이나 어머니께 특히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의원이 되는 것에만 집중하고, 되고 나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게 싫었다. 그래서 2016년부터 마음먹고 4년 동안 차근차근 준비를 했고, 국회의원이 되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리를 끝냈다. 이젠 준비가 됐고, 그래서 출마 결심을 했다.”

-2016년의 입당, 2020년의 출마에 대해 동교동계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오는 4월 총선 출마를 말리는 분은 없었다. 오히려 4년 전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다들 만류했다. 그때 민주당을 탈당해 국민의당으로 간 사람들 중에서, 제가 갑자기 민주당에 입당하니까 놀람과 서운함을 표출하신 분들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래, 기왕 민주당 갔으니까 비례대표 자리 하나 받아내라’고 하더라. 그렇게 당을 욕하고 나간 분들이 한 말이 저거라는 게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DJ의 고향인 호남에서 출마할 줄 알았다. 형인 김홍일 전 의원과 김홍업 전 의원 모두 호남에서 당선됐지 않나.

“호남은 아버님의 고향이다. 호남 분들의 지지 덕분에 아버님이 역경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 은혜는 저 또한 절대 잊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제가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아니다. 그쪽 지역은 거기서 성장하고 그쪽 정서를 잘 아시는 분들이 하는 게 맞다. 

그리고 호남이나 수도권 얘기는 제 입으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정말 호남에 출마할 생각이 있었다면 수시로 그곳을 다녔겠지. 서울 일로 바빠서 지난 1년 동안 한 두 번 밖에 가본 적 없다.”

-출마 의사를 밝힌 이후엔 ‘수도권(일산) 출마설’이 부각되기도 했다. 지역구가 아닌 비례대표로 선회한 이유가 있나.

“원래 당 지도부에서 작년에 먼저 비례대표 출마 권유를 했었다. 확정은 아니었지만, 넌지시 권유하는 정도의 얘기였다. 그런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비례대표 의석이 확 줄어든다는 전망이 나오니까, 당 총선기획 관계자들이 저를 상대로 테스트 삼아 여기저기 (여론조사를) 돌려봤다. 대체로 괜찮았지만 특별히 한 지역(일산)에서 더 나왔고, 즉흥적으로 ‘여기 한 번 시도하면 어떨까?’ 하는 말이 나왔던 거다. 거기에 제 의사는 없었다. 

게다가 지역구에 출마하려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명 ‘지역구 관리’를 해야 하는데, 하고 있는 일이 바빠 그럴 겨를이 없다. 일단 제가 몸담고 있는 민화협은 시민단체라 후원을 받지 못하면 운영이 어려운 곳이다. 당장 한두 달 버틸 돈밖에 없는데, 무책임하게 ‘알아서 하시오’ 라며 후임자에게 던지고 갈 수는 없었다. 또 부끄러운 얘기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이나 어머니에 대한 추모사업, 기념사업이 현재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렇게 일을 많이 벌려놓은 상황에서 지역구 관리까지 할 순 없었다.”

-입당 후 민주당 호남 유세를 적극 도왔지만, 결국 국민의당에 밀려서 호남에선 패배했다. 당시 패인(敗因)이 뭐라고 생각하나.  

“사실 민주당의 호남 여론 악화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영향이 크다. 분당사태 이후 호남에서 당 여론이 안 좋다가 조금 나아질 때, 김 위원장이 소위 ‘셀프공천’을 했다. 게다가 아버님에 대해 불필요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자기가 비례대표가 하고 싶어 스스로 번호 2번을 받아 놓고서는, 아버님이 옛날에 비례대표 순번으로 ‘배수의 진’을 쳤던 것을 언급하면서 ‘정치헌금이 필요해서 그랬던 거지, 희생하려고 했겠느냐’는 비하 발언을 했다. 그것 때문에 호남 민심이 더 나빠졌고, 국민의당 측에서 그걸 아주 잘 활용했다. 결국 김종인 위원장이 호남 민심 회복을 하지 못하게 결정타를 먹인 거다.

그래놓고 김종인 위원장은 문재인 대표를 향해 ‘호남은 당신에 대한 반발심이 크다’, ‘호남에 가지 말라’는 엉뚱한 주문을 했다. 제가 그때 호남을 다녀봤지만, 출마자들은 오히려 김종인 대표에 대해서 불만이 컸다. 거꾸로 제게 ‘그분이 호남에 안 내려오게 해 달라.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더라.”

실제 DJ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11번, 1996년 15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14번 위치에 자신을 놓는 ‘배수의 진(背水陣)’ 전략을 펼쳤다. 당시 비례대표는 전국구(지역구) 의원에 비해선 ‘낮은 급’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였다. 이미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대권 주자라면 지역구에 도전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DJ는 이미지보단 실리를 생각했다. DJ의 선택 덕분에 13대 총선에서 DJ의 평화민주당은 제2당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15대 총선에서도 DJ의 국민회의는 13명의 전국구 의원을 배출하며 79석을 얻을 수 있었다.

김 의장은 국민의당 호남계를 향해
김 의장은 국민의당 호남계를 향해 "아버님 이름을 팔면서 자신의 정치 생명 연장을 꾀한다"며 "돌아가신 어른을 욕되게 말로만 DJ정신 얘기하지 말고, 그의 언행과 철학에 맞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호남계, ‘DJ팔이’로 정치생명 연장…미래통합당行, DJ 괴롭힌 색깔론과 손잡는 것”

-몇 남지 않은 민주당 내 ‘DJ계(동교동계)’이자, 사전적 의미 그대로 ‘DJ의 적자(嫡子)’다. 민주평화당이나 대안신당 등이 호남에서 DJ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호남 출신 정치인들, 국민의당 가셨던 분들 대다수가 아버님과 작던 크던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그런데도 아버님 이름을 팔면서 자신의 정치 생명 연장을 꾀한다. 말로만 DJ정신 얘기하지 말고, 돌아가신 어른의 언행과 철학에 맞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구태정치를 하면서 DJ정신 운운하는 것은 돌아가신 어른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그런데 요즘은 아예 그런 말조차도 잘 안 하는 것 같더라고. 이젠 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는지…. 전해들으니 비겁하게 ‘나를 찍으나 저쪽 민주당을 찍으나 별 차이 없다’, ‘나중에 합당할 수도 있으니 인물만 보고 찍어 달라’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 같더라. 이게 무슨 DJ정신인가.”

-동교동계가 최근 완전히 분화됐다. 호남3당의 통합으로 탄생한 민생당부터 최근엔 임재훈·이동섭 의원 등의 이적으로 미래통합당까지 흩어졌다.

“그분(임재훈·이동섭)들이 아버님이 야당하실 적 잠시 당직자 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걸 DJ계나 동교동계라고 부를 수 있나. 아버님이 정치하실 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 숫자만 해도 수만 명이 넘는데, 그 사람들을 다 동교동계라고 칭할 수 없는 거다.”

-그들은 스스로 DJ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니 동교동계라고 주장한다.

“DJ정신을 계승한다는 사람이 한반도 평화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정당과 손을 잡을 수 있나. 색깔론으로 상대를 공격하려는 세력과 어떻게 손을 잡나? 그분들은 아버님께서 그쪽 미래통합당의 수구보수 세력으로부터 색깔론으로 공격당하는 것을 직접 봤을 텐데, 탄핵을 당하고도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변화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에게 가는 것을 무엇으로 합리화할 수 있겠나.”

김홍걸 의장은 인터뷰 내내 이희호 여사를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선 ‘아버님’ 또는 ‘어른’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에겐 ‘아버지 DJ’보다 ‘정치인 DJ’로 느껴지는 부분이 큰 듯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김홍걸 의장은 인터뷰 내내 이희호 여사를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선 ‘아버님’ 또는 ‘어른’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에겐 ‘아버지 DJ’보다 ‘정치인 DJ’로 느껴지는 부분이 큰 듯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그렇다면 본인이 정의하는 DJ정신은 무엇인가.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해 불과 6개월, 1년 후의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나중에 탈이 나든 말든, 국가에 문제가 생기든 말든 ‘일단 챙기고 보자’, ‘일단 반대하고 보자’ 식으로 돌부터 던지는 사람이 많다. 반면 아버님께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야당 생활을 하실 때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고 항상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싸웠다. 적대관계에 있더라도, 민주주의 발전이나 국가 장래를 위해서라면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아버님을 두고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제왕적 총재’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아버님은 반대하는 사람에겐 ‘딴 소리 말고 내 말만 따르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일이 붙잡고 설득하는, 그런 ‘큰 정치인’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다. 한 마디로 DJ의 정치는 정쟁에만 매달리지 않는, 국민이 정치혐오를 느끼지 않게 해주는 수준 높은 정치다.”

-DJ정신, DJ만의 정치를 느꼈던 일화가 있었나.

“1990년 노태우 정권 당시 남북 대화가 이뤄지고,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는 성과가 있었다. 그때 아버님께선 3당 합당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린 상황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미래를 위해 정부 여당에 적극 협조해 남북 관계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도록 협력하셨다. 정치인으로서 본인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야심도 버린 거다. 그렇게 국내 최초 공식 통일 방안인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도 나올 수 있었다. 노태우 정권에서 통일부장관을 하셨던 이홍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는 정부 측과 저희 아버님이 깊은 논의를 해서 나온 안이다. 

노태우 대통령을 옆에서 모셨던 분이 하는 말이, 노 전 대통령이 여당인 김영삼 총재와의 영수회담보다 아버님과 회담할 때의 표정이 더 좋았다고 하더라. 야당이지만 협력할 건 하는 자세로 항상 정부를 대했으니까 그랬던 것 아니겠는가.”

김홍걸 의장은 인터뷰 내내 이희호 여사를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선 ‘아버님’ 또는 ‘어른’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런 호칭이 그에겐 자연스러워 보였다. 김 의장은 DJ가 38세 때 얻은 늦둥이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DJ는 40대기수론으로 떠오른 대권주자였으며, 정치 거목(巨木)이었다. 그에겐 ‘아버지 DJ’보다 ‘정치인 DJ’로 느껴지는 부분이 큰 듯했다.

김 의장은 "저는 이미 4년 전 쉽게 비례대표로 갈 수 있었던 정당의 배려를 사양하고 백의종군했던 사람"이라며 세간의 세습 정치 비판을 향해 "결코 누구의 아들이라는 점만 가지고 힘 안 들이고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김 의장은 "저는 이미 4년 전 쉽게 비례대표로 갈 수 있었던 정당의 배려를 사양하고 백의종군했던 사람"이라며 세간의 세습 정치 비판을 향해 "결코 누구의 아들이라는 점만 가지고 힘 안 들이고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DJ 아들로만 정치하기 싫어 4년 전 출마 고사…통일 분야에 제 역할 있을 것”

-독재정권 하에서 DJ가 탄압받는 것을 지켜봤다.

“그렇다. 제가 만 8살 때 아버님이 대선 출마를 하셨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감옥에 들어갔고, 대학생이 되고 20대가 됐을 때에서야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제가 20대 중반이 됐을 때쯤 겨우 정계에 복귀했다. 그 여러 고난들을 다 지켜봐야했다.”

-지금도 ‘아버지 DJ’보다 ‘정치인 DJ’로 느껴지는 부분이 큰 듯하다. 

“그런 셈이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국회의원이 됐기 때문에 항상 바깥에서 바빴다. 당연히 아버지는 국가적인 큰일(巨事)에 매달리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제겐 자연스러운 일,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왜 우리 아버지는 다른 부모처럼 나랑 집에서 놀아주지 못하나’ 같은 불만은 가져본 적도 없다.”

-DJ와 한국정치에 대해 심도 깊은 얘기를 나눠 본 적 있나.

“밖에서 워낙 바쁘셨기 때문에, 깊이 있는 정치 얘기를 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일일이 말씀을 안 하셔도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는 분이셨기 때문에 보고 배운 것이 많다.” 

-결과적으로 DJ의 3남이 모두 국회의원에 도전하게 됐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문희상 국회의장의 자녀 문제가 불거진 상황에서, ‘아빠찬스’, ‘세습정치’에 대해 비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비례대표를 투표(당원 및 중앙위원 투표)를 통해 정하는 거지, 당에서 누굴 정해줘서 힘 안 들이고 안정권에 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는 이미 4년 전 쉽게 비례대표로 갈 수 있었던 정당의 배려를 사양하고 백의종군했던 사람이다. 이제 4년 동안 제가 노력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코 누구의 아들이라는 점만 가지고 힘 안 들이고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지난번에 출마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한편 김 의장은 1982년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합격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고려대 학장에게 입학을 취소하라는 강요를 한 적도 있다. 이후 40세까지 취업에 곤란을 겪다가 지난 2012년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투신했다.

-경쟁 과정에서 ‘이 사람은 노동을 해 본적 없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 없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 출신이나 야당 생활만 했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직업을 갖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 훌륭한 의정 활동을 보여준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그 사람의 직업군만 보고 판단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라는 게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을 골고루 등용하는 그런 자리가 아닌가. 제 역할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김홍걸 의장은 지난 27일 그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민주당 비례대표 통일 분야에 신청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홍걸 의장은 지난 27일 그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민주당 비례대표 통일 분야에 신청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文 대북정책, 초반에 지나치게 소극적…금강산관광 재개해야”

김홍걸 의장은 지난 27일 그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민주당 비례대표 내 통일 분야에 신청했다. 통일 분야는 일반경쟁분야로, 비례공천관리위원회 심사 후 국민공천심사단 투표를 거쳐 최종 후보 20명을 뽑은 후 비례 순번이 결정된다. 그는 지난 2017년 12월 민화협 의장으로 취임한 후 얼어붙은 남북관계, 북미관계 하에서 민간이 할 수 있는 여러 사업들을 추진해 왔다.  

-민화협에선 어떤 사업을 추진했나. 

“민화협은 1998년 ‘통일에선 민간의 역할도 정부의 역할만큼 중요하다’는 아버님의 철학으로 탄생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민단체다. 매년 통일부와 협력해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교육사업 및 학술 심포지엄 등을 개최하고 있다. 최근에는 롯데 장학재단과 함께 남북 동질성 회복을 위한 학술연구 지원 사업을 추진했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사업도 했다. 북한에 대한 지원사업, 협력사업도 과거엔 많이 했는데, 최근에 와선 문이 닫혔다.”

-본인이 지원한 통일 부문과 관련해 내세울 수 있는 전문성이 있다면.

“여기선 부모님 잘 둔 덕에 정치한다는 말 전체를 부인하진 않겠다. 다만 아버님의 정신적 유산, 즉 아버님이 국제적으로 쌓은 명성과 네트워크를 제가 좋은 방향으로 활용해서 국가를 위해 공헌할 수 있다면 그건 긍정적으로 봐야할 일 아니겠는가. 

그런 것들을 잘 활용해 북한·중국·일본 3개국과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3년 전부턴 중국에서 출발한 기차가 북한을 통과해 우리 남한까지 오는 ‘대륙 철도 연결 이벤트’를 추진 중이다. 우리나라가 육로를 통해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내용의 이벤트다. 이미 중국 정부 측과 교섭이 됐다. 코로나19 사태만 아니었다면 열흘 전 중국에 가서 공산당 핵심부서 사람들과 공식 회담을 갖고, 추후엔 북한과 3자 회담까지 뻗어나가기로 얘기가 끝난 상태였다. 이 프로젝트들은 금년 내, 빠르면 상반기 내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국회의원들은 ‘의원외교’라는 핑계로 외국에 가서 그냥 구경만 하고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국가 외교에 도움이 되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사람에 비해 저는 제 역할을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DJ와 노무현 정부의 바통을 이어받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정책에 대해 평가한다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노무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이어받아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신(新)경제’, 즉 북방개척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방향은 옳은 방향을 잡았다고 본다. 

다만 외교·안보 쪽 참모진들이 대통령에게 모든 부담을 지우려고만 한다. 실무자 단계에서 과감하게 치고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운 좋게 한반도 평화가 찾아오고 북방진출 할 수 있는 시대가 오더라도, 우리가 당사자답게 주도권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나중에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대통령께서 결정하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외교·안보 당국자 참모진들이 좀 더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김 의장은
김 의장은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을 재개함으로써 남북관계를 원활하게 풀어갈 기회가 있었는데, 2018년 9·19 남북정상회담 직후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아쉬운 점"이라고 토로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예시를 하나 들자면 1998년 금강산 관광은 임동원 당시 청와대 안보 수석 비서관이 결심 끝에 아버님께 ‘제가 책임지고 할 테니 맡겨주십시오’ 말만 하고 강행했던 일이다. 그땐 미국과 협의도 다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분이 그렇게 과감하게 치고 나가지 않았다면 금강산 관광은 실행되지 않았을 거다.”

-문재인 정부가 ‘정부 대 정부’ 소통만 강조하고, 민간 교류에는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북한 측이 그렇게(무력 도발) 나왔던 탓도 크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고 난 후에 오랜만에 남북 교류가 재개된 상황이라 통일부나 정부 부처에서 초반엔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너무 조심한 나머지 민간이 적극적으로 나아가도록 장려를 하지 않았던 거다. 김연철 장관(2019년 4월 입각) 들어서고부터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미 북미회담 결렬로 모든 게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북측 실무자들도 상부의 지시 없이는 한국 민간단체와 교류할 수 없다는 입장이더라.”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을 재개할 필요가 있다고 보나. 

“그렇다. 그것을 재개함으로써 남북관계를 원활하게 풀어갈 기회가 있었는데, 2018년 9·19 남북정상회담 직후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게 굉장히 아쉽다. 개성공단과 달리 금강산관광은 문제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우리가 얼마든지 UN제재에 걸리지 않으면서 추진할 수 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중국이나 다른 외국 자본에게 북방진출의 기회를 뺏기고, 우리는 중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걱정이 든다.”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정치인 김홍걸’과 ‘DJ의 아들 김홍걸’ 각각의 입장에서 출사표를 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의장은 “출사표라고 하니까 너무 거창한 것 같다”며 부담스러워 하다가, 짧은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려줬다. 

“그동안 정치혐오만 부추기는 정치인들 때문에 정치 자체에 싫증내시는 분들도 많을 걸로 압니다. 제가 국회에 들어가게 된다면 최소한 유권자들이 ‘괜히 찍었다’며 눈살을 찌푸리게 될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아버님과 똑같이 정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건방진 소리겠죠. 저는 돌아가신 어른의 10분의 1도 못 따라갈 사람이니까요. 다만 DJ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저 혼자 DJ정신을 계승한다고 자부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제2의 김대중’이 되겠다는 욕심보다는, 제2의 김대중과 제2의 노무현이 나올 수 있는 젊은 세대의 토양을 만드는 것이 아들로써 제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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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치인 2020-02-28 11:20:58
응원합니다

김승현 2020-02-28 11:26:22
시대는 변했습니다 시대에 맞는정치가 필요합니다

남양주인 2020-02-28 15:59:43
본인의 의지로 본인의 색깔'로 정치 하시기 바랍니다 반갑네요

정치란 2020-02-28 14:33:27
인터뷰가 감명깊네요. 잘 읽었습니다.

dj 2020-02-28 14:39:50
김홍걸님 늘 응원합니다 다음 인터뷰도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