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되짚기⑦] 이명준 “국본, YS·DJ 참여 이끌어내 항쟁 성공”
[6월 항쟁 되짚기⑦] 이명준 “국본, YS·DJ 참여 이끌어내 항쟁 성공”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0.03.13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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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당시 이명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간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천주교의 역할 중심의
6월 항쟁과 국본 집필 참여… ‘그 기록의 파노라마’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이명준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탄생에 노력했다. ⓒ시사오늘
이명준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탄생에 노력했다. ⓒ시사오늘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됐는데,
그까짓 것 갖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명동성당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7주기와 함께 故박종철 군의 추모가 열린 미사에서였다. 월요일 저녁 평일인데도 2000여 명이 강론을 듣기 위해 모여 앉았다. 경종을 울리는 발언의 수위는 상당히 쎘다.

“카인은 어디 있느냐?”

한편으로는 이리 들렸다. 

‘고문치사를 은폐한 자, 수장은 어디 있느냐?’
‘박종철을 죽인 자가 누구냐’는 물음 같았다.

<6월 항쟁 되짚기⑦>편의 주인공,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명준(47년생) 전 간사(이하 이명준)의 시각에서다.

이명준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탄생과 6월 항쟁이 성공하기까지 전략과 전술을 전개하는데 깊숙이 참여한 인물이다. 국본은 1987년 5월 27일 만들어졌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 철회와 직선제 쟁취를 위해 정치적 제도권,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천주교 등 종교계가 합심해 만든 단체다. 민주통일민중 운동연합(민통련) 부의장, 청년위원장,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삼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계획했다.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이명준은 삼선 개헌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저항의 불길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5·22 사건’(김상진 열사 추모집회)이라고 서울대 학생이 할복자살을 했다. 박 대통령은 75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많은 학생들이 반발했고, 붙잡혔다. 맨 밑의 학번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포함돼 있었다. 이명준도 투옥됐다.

“인혁당 사건 후 한 달 뒤인가. 처음에는 국가내란죄로 몰고 가더라. 고문을 많이 받았다. 원래는 8년여 형을 선고받았다. 4년여 옥살이를 하던 중 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특사로 풀려나게 됐다. 제적 상태라 학교에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한참 뒤 몇 차례의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졸업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달 24일 서울 용산구 한 카페에서다.

“6월 항쟁이 성공하기까지는 국민적 민주화의 열망과 참여 덕분이었다. 민심이 폭발하기까지는 준비하고 만들어가는 여러 계기들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국본의 태동이었고, 천주교의 선도적 역할이었다. YS․DJ(김영삼․김대중) 양 김을 축으로 한 정치권이 참여하게 된 것도 이들의 물밑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윽고 6월 항쟁이 성공하기까지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인상적인 대목을 중심으로 몇 가지로 재구성해봤다.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그가 집필에 참여한 <6월 항쟁과 국본>에서 발췌‧개략‧참조했다. 이명준을 비롯해 김도현, 성유보, 황인성 등이 87 전후를 정리해 펴낸 책이다. 
 

국민적 민주화의 열망으로 국본은 만들어졌다. 사진은 이명준 전 간사의 민주화운동 당시의 젊을 때의 모습이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명준 전 간사)
국민적 민주화의 열망으로 국본은 만들어졌다. 사진은 이명준 전 간사의 민주화운동 당시의 젊을 때의 모습이다.ⓒ시사오늘(사진 제공 : 이명준 전 간사)

 

이명준의 시점으로.

장면1# 성당 안 - 투쟁의 서막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던 날. 직선제 쟁취 촉구의 바람이 들끓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기존의 간선제를 다시금 밀어붙였다.

“무참히 깨어진 개헌의 꿈.”

김 추기경이 탄식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제2차 대전 중 어느 지하 피신처에 쓰여 있는 글귀였다. 추기경의 강론은 이어졌다.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요, 힘만이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정치의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됐던 헌법 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 아래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오늘의 정치가 아무리 허무하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하며, 정의와 진실을 단념하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아무리 모두가 이기주의에 흐르고 세파가 몰인정하여도, 우리들마저 사랑을 실천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같은 세상 속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과 진리를 증거 하시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의 사랑의 불을 지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마치 얼어붙었던 산과 바위틈에서 이 봄에 진달래가 환하게 피어나듯이, 그렇게 이 땅에도 인간다운 삶의 꽃이 피어나도록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김 추기경의 메시지는 천주교 개헌 투쟁의 서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중심가에 있는 명동성당은 모이기도, 알리기도 좋은 곳이었다. 6·10투쟁 과정에서도 저항의 보루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투쟁 당일에도 명동성당에서는 1986년 말부터 200여 명의 상계동 철거민들이 강제 철거에 항의하는 천막농성을 계속하고 있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있던 데에는 자발적 청년 조직인 명청의 역할도 컸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해 1980년대 초부터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쳐간 조직이었다.

 

장면2# 광주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며칠 뒤 천주교 항거의 징후는 광주에서부터 시작됐다. 광주대교구 소속 신부 등 사제 12명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전국으로 돌아가면서 했다.
 

이명준 전 간사는 동장에서 대통령까지의 구호가 당시 널리 대중적으로 알려졌다고 했다.ⓒ시사오늘
이명준 전 간사는 동장에서 대통령까지의 구호가 당시 널리 대중적으로 알려졌다고 했다.ⓒ시사오늘

 

이 기간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라는 구호가 처음으로 제시됐다. 나중에 굉장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구호가 됐다. 마을의 작은 동장에서부터 국가의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직접 뽑는 직선제의 요구….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구호였다.

신부들이 준비한 성명서에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됐다는 여러 긴박한 과정들이 녹아있었다. 은폐 조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5·3 인천사태와 관련해 수배 중 구속된 이부영의 증언으로 시작됐다.

영등포 교도소에 구속돼 있던 이부영은 은폐조작 사실을 알리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관 두 명이 제가 수용돼 있는 그 사동으로 별안간 수감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좀 경계를 하고 그랬는데, 한 사람은 찬송가를 부르고 또 한 사람은 방 안에서 울고 그랬어요.…… 화장실에서 쓰는 갱지에다가 몰래 쓴 편지를 저희들과 가까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교도관들을 통해서 밖에 있는 분들에게 알린 거죠.”

이부영이 1987년 2월 중순 경에 쓴 편지 3통이 교도관 한재동 손을 거쳐 전직 교도관 전병용에게 전달됐다. 전병용은 이를 3월 중순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이후 이틀 뒤 수배 중이던 장기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이부영을 숨겨준 이유로 수배 중이던 김정남은 고영구 변호사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알릴지가 고민이었다. 야당인 신민당 국회의원을 통해 임시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때 폭로하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제도권이라 편지의 출처와 과정, 경위 등을 밝혀야 하는 난점이 있었다. 이 문제를 같이 숙고한 고영구 변호사의 증언이다. 외신을 통해서 다시 국내로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위험성이 많다고 판단이 됐다.  최종적으로 선택을 한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자였다.

김정남은 함세웅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내는 편지도 동봉했다. 편지 내용은 최악의 경우 “축소, 조작 사실을 확인하고 전국사제단에게 제보한 사람이 수배 중의 김정남”이라고 밝혀도 좋다면서, 어떻게든 발표는 꼭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을 맡고 있던 함세웅 신부는 당시 구파 발 성당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편지를 받은 그는 5월 17일 주일 김승훈 신부에게 연락을 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에게도 연락했다. 제2선을 구축해놓은 것이다.
‘민주화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신부님들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이것만 공개하면 전두환 정권은 파멸된다.…… 무너진다.…… ’

6월 22일 <진실이 밝혀지기보다는 은폐되고 있다>는 제목의 장문의 성명이 발표됐다. 이를 계기로 수세에 있던 재야 민주화 진영과 야당은 일거에 생기를 회복했다. 4·13호헌조치 이후 신당 창당 과정에서 5공 정권의 물리적 탄압으로 계속 수세에 몰리던 민주당은 전국사제단 발표를 계기로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5월 23일, 민주당은 박종철군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각 총사퇴와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25일에는 사건에 책임을 지고 전두환 정권이 퇴진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내 언론은 연일 박종철 사건의 추이를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국민의 공분은 날로 끓어올랐다. 6월 민주화투쟁으로 점화되는 계기였다.

장면3# - 민통련 회의

천주교 진영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며 큰 역할을 한 이들은 전국사제단신부들이다. 1984년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은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이하 천사협)을 출범시켰다. 천사협은 초기부터 민통련에 가입해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1987년 민통련은 전두환의 호헌조치 직후 내부 논의에 들어갔다. 민통련의 성유보 사무처장과 이해찬 기획실장, 천주교계의 나(이명준), 개신교계의 황인성, 민중불교운동연합의 고광진, 언론 부문의 정상모, 문화 부문의 김용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인재근과 유시춘, 상도동계의 김도현, 동교동계의 설훈과 한영애 등이 모였다.

어떻게 전선을 만들고 상황을 돌파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3대 기본원칙’을 작성했다.

첫째,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한다. 둘째, 대연합전선을 형성한다. 즉, 재야, 정치권, 종교계의 3자가 대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저 수준의 행동강령을 내세워야 한다. 최저 수준의 행동강령에는 쉽게 합의가 이뤄졌다. 불끄기, 경적 등이었다. 나는 종치기를 제안했다. 천주교는 저녁 6시 ‘만종’을 친다. 큰 이의 없이 합의됐다.

훗날 이 계획은 성공의 디딤돌이 됐다. 1987년 6월 18일로 기억된다. 저녁 6시 거리에는 적막의 기운이 흘렀다. 그 순간 성당의 종이 울렸다. 거리에서 여학생 한 명이 뛰어나왔다. 삽시간에 몇 천 명이 쏟아져 나왔다. 북동부 쪽은 고대 중심으로, 동대문에서 청계천에서, 연대 중심으로 신촌로에서 학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온 것이다.
 

이명준 전 간사는 제도권과 힘을 합쳐 범대중 노선으로 나아가야 6월 항쟁이 승리할 수 있다고 봤다.ⓒ시사오늘
이명준 전 간사는 제도권과 힘을 합쳐 범대중 노선으로 나아가야 6월 항쟁이 승리할 수 있다고 봤다.ⓒ시사오늘

 

장면4# -  YS‧DJ

“양김과 손을 잡아야 한다”

당시 국본을 결성할 때 벌어진 첨예한 논쟁 중 하나가 정치권의 참여 문제였다. 김대중(DJ)과 김영삼(YS)으로 대표되는 정치권과 함께 할 것인지, 민통련과 종교계만 할 것인지의 문제로 지루한 논쟁이 계속됐다.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입장차가 컸다. 천주교 사제단과 개신교는 DJ와 YS를 빼고 비정치적인 세력만 연대하자고 주장했다. 정치인들이 끼면 운동이 변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에 민통련에서는 대중적 시위가 확대해야한다고 봤다. YS와 DJ의 합류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동교동계는 국본에 무조건 참여하지만 YS가 주저하고 있다.”

1987년 5월 어느 날 민추협에서 일하고 있던 동교동계의 설훈이 전한 말이었다. 정치권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는 얘기였다. 주저했던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민추협의 한축을 이끌던 YS는 연대 활동에만 의의를 두고 있었다. 배경인즉 건대 사태 같은 대규모 시위, 5·3 인천 사태와 같은 과격한 시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나는 개헌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고 봤다. 방법을 택한 것이 천주교 사제단부터 설득하는 일이었다. 서울대교구 사제단의 대표격인 송진 신부를 통해 긴급하게 전국 사제단 회의를 소집했다.

“민추협은 정치 단체가 아니다. 정치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화를 위한 운동단체로 봐야한다”, “양 김을 묶어내야 한다. 양 김을 엮어야 대중투쟁을 폭발력 있게 성공시킬 수 있다. 민추협과 함께 하지 못하면 우리 진영이 굉장히 왜소해진다”, “정치권과 분리되면 우리만으로는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 어떻게든 함께 해야 한다”며 설득했다.

여러 과정 끝에 천주교계가 참여하게 됨으로써 다음 노력이 향할 곳은 개신교 쪽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개신교계를 통해 YS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노력의 연장선에서 마침내 DJ와 YS가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신교가 문제였다. YS 참여에 도움을 줬지만 개신교 자체는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DJ와 YS다. 개신교의 참여가 꼭 필요하지만, 정치권하고 못하겠다면 민통련은 오히려 야당과 연대해서 문제를 풀어가겠다. 1986년 개헌 현판식 때 민통련은 민추협과 여러 번 연대를 한 경험이 있다. 민통련의 지도부도 굉장한 분들이지만 DJ와 YS의 대중적 영향력이 훨씬 큰 것이 현실이다”

이해찬이 개신교에 항의하며 한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개신교도 함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이명준 전 간사는 부산 시위의 현장이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끈 큰 축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이명준 전 간사는 부산 시위의 현장이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끈 큰 축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장면5# 부산 시위 현장

6월 항쟁의 구심점 중 하나는 명동성당이었다. 6월 15일 명동성당 농성이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6월 항쟁의 계기를 이어갈 새로운 거점이 필요했다.

부산 가톨릭센터였다.

6월 16일 부산가톨릭센터 측은 문을 열고 경찰에 밀려난 300여 명의 시위대를 받아들였다. 22일까지 농성이 시작됐다. 이곳은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구심 역할을 하던 상징적인 장소였다. 자칫 서울의 대규모 시위나 명동성당 농성만 지나치게 부각되고는 있지만, 전국적 시위가 곳곳에서 있었기에 6월 항쟁이 성공을 거둘 수 있던 것이다. 특히 6월 18일 부산에서의 30만 인파가 모인 시위는 6월 항쟁의 성공을 가르는 하나의 분수령이 돼줬다. 역사의 현장에는 훗날 두 명의 대통령이 될 인물도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노무현 부산국본 상임집행위원장과 문재인 집행위원이었다. 이날 시위의 열기는 엄청났다. 집권 세력이 부산의 시위의 규모와 열기를 보고 6·29 항복 선언을 준비했다는 설이 돌 정도였다. 그만큼 부산 시민들의 투쟁은 6월 항쟁 승리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판단이다.
부산 시위 위력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교도통신사 서울지국에 근무하던 장준영 기자의 경험담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장준영 교도통신사 서울지국 기자 : “여기 서울본부인데요. 오늘 부산 시위 상황은 어떤가요?”

부산 시경 상황실 근무자 : “넵, 지금 경찰들이 시위대한테 밀리고 있어요.”

장 기자의 바로 옆 책상에 있던 일본인 기자는 이 같은 부산 상황을 전해 듣고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한국 경찰, 부산에서 시위대에 밀리다!”라는 속보를 전 세계에 타전한 것이다. 외신 기자들이 비행기를 타고 속속 서울로 들어왔다. 6월 항쟁이 세계적 이슈로 주목받는 순간이었다. 제 아무리 전두환 정권이라도 외신 기자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덩달아 국내 언론도 관련 기사를 쏟아내는 기폭제가 됐다.

장면6#- 필리핀 2월 혁명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나는 어디에서 6월 항쟁 성공의 실마리를 얻었나 생각한다. 85년 말 민통련 청년회장을 할 때였다. 천주교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아일랜드, 미국, 영국, 벨기에 등을 방문했다. 86년인가, 함세웅 신부와 함께 필리핀의 2월 혁명을 목도하게 됐다.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마르코스 독재자에 맞서 저항했다.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을 군으로 누르지 않았다.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저강도 정책임을 알게 됐다. 희망을 느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이 됐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일까.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쟁취를 이룬 것은 역사의 획을 그은 큰 성과다. 헌법 개정을 통해 87 체제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야권의 후보 단일화는 실패했다. 민주화 진영의 대선 승리로 연결되지 못했다. 민주화와 한반도 시간의 속도를 늦춘 한계가 아닐 수 없었다. 

장면7# - 광장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박근혜 정권 탄핵 정국에서의 촛불 혁명을 떠올려본다. 방법은 달랐지만 6월 항쟁 그때처럼 민심의 열망은 뜨거웠다. 그러나 87 이후 민주화는 완성돼왔는가? 라는 자문에 대한 생각은 회의적이다. 우리 민주화의 지점은 어디인가. 자문하는 찰나 맞은편 이도 물어온다. 6월 항쟁이 남긴 과제는 뭐냐는 질문이었다.
 
“민주화의 공고화.”

갈 길이 멀다. 

p.s.

요약하면 이번 87년 6·10항쟁 되짚기 일곱 번째는 성공의  밑거름이 돼줬던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에 이어 노동운동권 그룹으로서의 6월 항쟁 되짚기를 조명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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