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12)] 최동화 통일민주당 평택·송탄 지구당 전 위원장 ˝민산, 1992년 대선 당시 YS로부터 한푼도 지원 못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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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12)] 최동화 통일민주당 평택·송탄 지구당 전 위원장 ˝민산, 1992년 대선 당시 YS로부터 한푼도 지원 못 받아˝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11.28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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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 양반에게 돈 얘기 하는 건 정답 아냐…노태우 3천억 중앙당으로 들어갔을 것˝˝회원들, 사재 털어가며 자발적으로 참여…지금도 신기한 기적 같은 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주산악회(민산) 관련 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늘상 들었던 얘기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돈 문제에서는 깨끗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8월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원의 대선자금을 전달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인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이원조 전 국회의원을 통해 2천억원을 전달했고,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는 김영삼 후보의 긴급 요청으로 천억원을 더 지원했다는게 주요 골자다. 당시 돈을 전달받은 김 후보가 한밤중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했다는 내용도 공개됐다.

이에 대해 YS측은 '민자당으로 들어간 돈을 자기들이 나눠 갖고서는 이제와서 마치 YS가 직접 받은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며 회의록의 저의를 의심했다. 1983년부터 민산에서 활동한 최동화 전 통일민주당 평택·송탄 지구당 위원장으로부터도 "노태우가 줬다는 3천억원은 중앙당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YS 호주머니로 안들어 간 것은 틀림없다"는 발언이 나왔다. 2011년 11월 18일 마포구 성산동 <시사오늘> 사무실에서다. 그렇게 열두번째 민산되짚기 인터뷰는 시작됐다.

 

▲ 최동화 통일민주당 평택·송탄 전 지구당 위원장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이 YS에게 지원했다는 3천억 원의 실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솔직히, 민산 활동을 하는데 자금이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YS로부터 일절 지원이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제가 있는대로 긁어서 보태고 친구들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습니다. 또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으기도 했지요. YS는 돈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돈 얘기를 하는 건 정답이 아닙니다. 노태우가 줬다는 3천억원은 중앙당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YS 호주머니로 안 들어 간 것은 틀림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YS에게 3천억 원을 주었다는 1992년은 민산이 YS 대통령 만들기에 온 몸을 던졌던 시기다. 특히, 이 때는 상당수 민정계가 YS를 견제하던 때였다. 신하철 전 의원은 "민정계가 YS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1992년 대선 선거운동이 늦게 시작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며 "선거일이 12월 21일인데 11월 15일까지 선거운동을 안했다. 민정계는 계속해서 여론을 보다가 YS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으면 끌어내리려고 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상황이 열악했기에 민산은 사실상 홀로 몸부림쳐야 했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준 돈을 YS가 받았다면 그 돈을 민산에 건넸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민산 회원들 어느 누구도 YS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1992년 만큼  민산이 활발히 움직였던 시점이 1987년 대선 때이다. 당시 YS는 부산 수영만에 150~200만명을 모아 연설을 했고 민산회원들도 전국에서 모였다. 최 전 위원장은 그 때도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YS로부터 한 푼도 지원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버스 2대를 동원해 100여명을 이끌고 부산 수영만에서 열린 YS 대통령 추대 국민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버스 2대를 기업하는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그 친구가 한 대는 자기 회사버스로, 나머지 한 대는 자기 친구에게 빌려서 지원해줬습니다. 사실 지금도 신기합니다. YS가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자발적으로 회원들이 활동했다는 게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날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지 같이 내려간 대원들을 찾을 수 없어서 밤새도록 헤매다가 다음날 돌아왔습니다. 제가 책임자였기 때문에 대원들을 챙겨야 했는데 밤이 되니까 몹시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토록 금전적 지원을 받지 못했는데도 YS를 따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YS가 복이 많은 양반입니다. 마력이 있었습니다. 대도를 걷는 양반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많기 마련입니다. YS는 철학과를 나와서인지 시기적절하고 마음에 쏙드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대원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서 YS와 같이 등산을 자주 했는데 '산에 오르는 건 내려가는 것보다 쉽다. 내려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등의 철학적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양반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헬레니즘·헤브라이즘·르네상스 사상을 갖춘데다가 낭만적이고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줬고 신임이 가도록 행동했습니다. 인간관계도 아주 잘 유지했습니다."

"YS, 기독교적 사랑과 인문주의 정신 투철"

 

▲ 최동화 전 위원장이 YS(가운데), 김덕룡(오른쪽) 전 의원과 함께 산에 올랐다. 4·19 세대인 최 전 위원장은 역시 4·19 세대인 김 전 의원 등을 통해 YS와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진=최동화

-민산에 가입할 당시에는 어떤 생각을 했나요.

"그 때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YS는 상당히 인문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가로서 인간의 존엄, 기독교적인 사랑, 그런 정신이 특출한 분이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혜안도 훌륭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이 명확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YS만한 인재도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저런 분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YS의 인격과 정치적 혜안을 믿고 따를 수 있었습니다."

-민산 가입 당시에 주변에서 길을 놓아준 사람은 없나요.

"제가 4·19 때부터 민주화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김동영, 김덕룡, 박관용, 문정수, 이기택, 최형우 등이 전부 4·19세대라고 보면 됩니다. 복진풍은 대학 재학중에도 YS와 친했지요. 이들이 저보다 앞서 YS와 함께 일했기에 저는 YS에게 접근하기 쉬웠습니다. 4.19 세대끼리는 마음속으로 통하는 게 있습니다."

최 전 위원장은 1983년에 민산에 가입했다. 그러다 1985년 2월에 민산 평택 지부가 결성되면서 이 지역을 맡아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평택 지부가 출범할 당시 회원수는 500여명이었다. 당시 최 전 위원장은 민산 중앙 직책을 맡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 있는 곳에서 활동하는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는 평택·송탄·과천에서 활동했습니다. 민산 중앙에서 활동하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민산 교수직과 지도위원을 맡아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최 전 위원장은 민산 평택·송탄 지부가 결성될 즈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도 가입했다. 그 때 이우태 민산 산행대장은 그에게 민추협 노래를 만들 것을 권유했다.

"민추협가 작사했지만 빛 못봐"

"어느날 이우태 대장이 평택에는 큰 산이 없을텐데 어떻게 활동할 거냐고 물어요. 사실 평택에는 산이 아주 없어요. 그래서 저는 '동산이라도 오르면 되죠'라고 웃으며 말했어요. 그런데 민주산악회가 작사는 이우태 대장이 하고 작곡은 그 딸인 이지혜가 했는데 이 대장이 저보고 민추협 노래를 만들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작사를 했는데 나중에 그 인쇄문을 기관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가져가고 해서 제대로 못 돌렸고 또 작곡이 제대로 안돼서 그냥 시로 남게 됐습니다."


민추협 만세
                                        최동화

자유 종아 울려라 새벽이 밝아 온다
민추협 동지들아 정의의 사자들아
민중의 아픈설움 마음모아 보듬어라
군정연장 사슬끊어 자유민주 꽃피우자
자유만세 민주만세 민추협만세

한겨울이 지나면 봄빛이 찾아든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올지어다
우리의 선구자는 횃불들어 외쳤어라
군정종식 다짐하자 민추협이 나아간다
자유만세 민주만세 민추협만세

-민산이 본격적인 괘도에 오른 것은 지부 결성을 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그렇죠. 1983년도에 YS가 연금당하고 단식 투쟁을 5월 30일인가에 시작해 23일간 했는데 그 전부터 몇분이 산에 오르내리면서 민산 결성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1984년도에 지부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세력화에 들어가 200만 회원에 이르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그런 단체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1985년도에 이르러서는 지부가 140여개가 됐습니다.

나중에 민산 중앙에서 각 시·군별로 나누라고 해서 평택지부도 평택군, 평택시, 송탄시로 나뉘었고 저는 송탄시만 맡았습니다. 그렇게 지부가 나뉘면서 지부수가 200~300개로 늘어났습니다. 그 당시에 경기도 (광역)지부가 결성돼서 조종익 전 의원이 경기도 지부장을 맡았고 상임부위원장으로는 김재갑 씨가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포천의 홍창기, 안산의 정진일, 이천의 황규선, 화성의 차진모 등 통일민주당 지구당 위원장급들이 부지부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최 전 위원장은 갑자기 10·26 사건에 대해 얘기했다.

"1979년 10·26 사건이 터졌는데 그 이전에 부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신민당 총재인 YS의 의원직을 박탈하고 제명까지 시키면서 부마사태가 터졌고 그 게 10·26으로 연결된 것 같습니다. 1980년도에 들어와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했는데 이 것도 부마사태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에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미국으로 가고 YS는 1983년에 단식투쟁을 합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YS를 탄압하면서 불행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 시절 본인이 교단에서 물러난 얘기를 들려줬다.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2~3년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용산에 있는 학교에서 사회 교사를 했는데 그 때 군사정권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끄집어냈습니다. 저는 사회교사로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배울만큼 배웠기에 '민주주의면 민주주의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게 있느냐. 그건 독재하겠다는 게 아닌가'하고 반문을 했는데 누군가가 밀고를 해서 용산 경찰서에 갔고 즉결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오니까 학교에서는 무단결근으로 처리되어있고 그래서 더 이상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1978년 10월까지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골로 내려가서 돼지도 먹이고 했습니다. 저는 농사도 짓고 막노동도 해봤습니다. 제가 그 때 사건과 관련한 서류를 찾아보기 위해 용산 경찰서에 문의를 했더니 20년이 지나면 폐기되는 사항이라면서 관련 서류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정희 정권의 YS탄압…부마사태, 10·26,  5·18 연달아 터져"

-YS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1979년도에 신민당 총재에 당선되자마자 국회에서 제명 당하고 배지도 떼이고 하는 등 탄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전에 박 전 대통령이 YS를 한번 만나서 '내가 민주화 시키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그 약속도 안 지켜지지 않았나요. YS가 많이 당한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1987년 대선에서 YS와 DJ가 단일화를 못 이룬 것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요.

"두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같이 했는데 단일화가 안 된 이유는 DJ 욕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라질 명분이 없었습니다. '민주화'라는 공동목표에서 승리했다면 두 분이 돌아가면서 할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두 사람이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는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한 몸이 돼야 했지만 YS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했고, DJ는 개혁적이고 사회주의도 가미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안에 사회민주주의도 들어가있다고 봅니다. 공산주의 하고는 다릅니다. 유럽식 민주주의도 그런게 아닙니까. 그런 것 때문에 민주화를 늦췄다면 그건 잘못이라고 봅니다."

-YS의 3당 합당에 대해서도 평가해 주시죠.

"처음에는 희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해서 그 쪽과 싸워왔으니까요. 그러나 같은 보수라는 입장에서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물이 달라서 진통은 예상했지만. 그런데 YS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권 창출이 어렵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DJ와 늘 마찰이 있었습니다. 뭉치는 듯 하면서도 틀어지고는 했습니다. 우리가 총선에 출마해 떨어진 것도 그 것 때문입니다. 1988년 13대 총선 때 경기도 28개 선거구 중 5개구에서만 야당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안양의 신하철·이인제, 부천의 최기선, 광주의 유기준, 의정부의 목요상 등만 당선됐습니다. 이들은 모두 YS 쪽 사람들입니다. DJ 쪽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최 전 위원장도 13대 총선 당시 평택·송탄에 출마했다. 하지만 여당 후보 1명과 야당 후보 3명이 나왔다. 특히 민한당 총재를 지냈던 유치송도 나왔다. 결국 최 전 위원장은 낙선했다.

"3당 합당 전 상도동·동교동, 뭉치는 듯하면서도 틀어져"

-YS가 3당 합당과 관련해 직접 지구당 위원장들을 불러서 설득했다고 하는데요.

"YS는 3당 합당을 결심한 후에 우리들에게 진통이 따르겠지만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직접 문민정부를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어달라고 했습니다. 3당 합당 후에 YS는 그나마 민정계와 큰 갈등 없이 무난히 잘 넘어갔다고 봅니다. YS의 정치능력이 대단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3당 합당 안했으면 DJ가 후속타로 대통령이 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YS가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이 되어서 하나회 같은 것을 해체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DJ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YS는 대통령이 돼서 5.18 민주화 묘지를 성역화 하는 등 편가르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민산해체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요.

"YS가 집권 후에는 하나회를 해체했습니다. 책임자를 불러서 '군대 내 무슨 사조직이 필요하냐'면서 해체 시켰습니다. 직접 책임자를 불러서 그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런 상황에서 민산만 그대로 놔두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민산 동지들은 그럴 수 있냐고 얘기하지만 용단을 잘 내린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IMF 사태 책임을 YS에게 돌리는데요.

"그 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 상당히 오래된 게 곪아터진 것입니다. 하루 이틀 사이에 터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래 전부터 지속된 것이 터진 것입니다. 기업들이 자산의 500% 이상의 빚을 지고 그랬는데 그런 게 어느날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상도동계의 현재 정치적 위상은 어느 정도 되나요.

"아직 조직이 살아있다고 봅니다. 지금도 상도동 영감이 동원한다면 몇십만은 나올 것입니다. 200만 명이 넘었으므로 최소한 1~2십만 명은 나올 것입니다. 대단한 조직이었습니다. 상도동계가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흩어진게 아닙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나라가 잘못될 것 같으면 대선에 관여할 수도"

-YS가 내년 총선과 대선에 영향을 미칠까요.

"요새 국회의원들 보면 너무 중구난방입니다. YS가 원로로서 따끔한 얘기를 자주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반영이 될 지는 모르지만 해야된다고 봅니다. 일부에서는 가만히 있는게 옳다고 하지만 어려울 때 원로가 나서서 말하는게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YS가 특정인사를 지지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나요.

"특정인사를 지지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나라가 잘못될 것 같다면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YS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야 할까요.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YS를 찾아가서 좋은 얘기를 많이 하면서 도와달라고도 하고 상의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이 접촉을 많이 하다보면 달라지는 게 아닙니까. 박근혜 씨가 YS를 찾아가는 건 밑져야 본전입니다. 자기 위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 만큼 용기를 내야 합니다."

"박근혜, 용기 내서 YS 찾아가야"

-YS와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던 DJ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요.

"저는 YS와 함께 일을 했기 때문에 DJ에 대해서 평가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양반인데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살았으면 합니다. 저 세상에 가서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다만, 능력이 되신다면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민산 회원들 중에 특별히 친한 사람들이 있나요.

"경기도 지역 회원들하고 친하죠. 지금도 웃고 만나는 동지들이 많습니다. 조종익, 노병구, 신하철,  홍찬기, 정진일, 황규선, 차진모 등 경기도 지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민산 활동할 때 한 번은 포천의 홍찬기가 산림욕을 하러 오라고 해서 갔는데 우리에게 옷을 전부 벗으라고 해요. 자기는 벗지 않으면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나는 맨날 하는데'라고 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가 속았더라구요. 그 때 안산에 가서는 갯벌에서 술도 한잔 하고 이천에서는 황규선이가 쌀밥이 유명하다면서 대접을 하고 했어요. 민산활동이 힘들었지만 동지들 간의 우정이 큰 활력소가 됐습니다. 지금도 경기도 민주동지회 지부가 한달에 한번씩 만납니다."

이날 인터뷰 도중에도 최 전 위원장은 노병구 민주동지회 전 회장과 전화통화를 하며 우애를 다졌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 동안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어봤다. '민산 활동을 하면서 YS 가족이 산에 함께 오른 것을 봤냐'고. 

이에 "YS가족들은 등산에 참석을 안했다. 가족들을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현철이가 정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들이 나이가 들었으니까 자의적으로 하라는 식이지 찬성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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