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되짚기①] 김무성 “5·18이 민추협 결성 계기…목숨 걸고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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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 되짚기①] 김무성 “5·18이 민추협 결성 계기…목숨 걸고 투쟁”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4.21 1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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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민추협 공동의장 (現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YS 단식 진짜 목표, 그날 참상 전 세계 알리는 것” "민추협 YS가 주도, 동교동계 반대 많지만 지난 일”
“2‧12 총선 참여는 YS 불굴의 투지로 만들어낸 것” “민추협은 정의와 불의의 싸움, 목숨 걸고 투쟁했다”
“YS‧DJ 분열이야말로 민추협 활동서 가장 후회돼…” “YS, 후계구도 안 짜 놔…김현철 얘기 최형우 오해”
“당 대표 최형우였다면 신한국당 집권재창출했을 듯” “민추협 재결성, 슬픈 일이나 상교동‧동교동 골 깊어”
“文, 좌파 만족시키는 공식 내놓으면 이긴다고 생각” “이념 악용 정치 모리배 多… 통합 운동 벌이는 이유”
“국민개헌 발안권 취지 모르면서 사회주의자로 모함” “내게 와 朴 탄핵 반대했다는 조원진 말은 거짓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윤진석·정진호 기자]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신민당 승리와 87체제를 여는 모태가 됐다는 평가다. YS(김영삼) 주도로 DJ와 결합해 출범한 신민당은 창당 25일 만에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으로 67석을 얻어 관제야당을 무너뜨리고 제1야당으로 등극했다.ⓒ시사오늘(그래픽 = 김유종)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신민당 승리와 87체제를 여는 모태가 됐다는 평가다. YS(김영삼) 주도로 DJ와 결합해 출범한 신민당은 창당 25일 만에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으로 67석을 얻어 관제야당을 무너뜨리고 제1야당으로 등극했다.ⓒ시사오늘(그래픽 = 김유종)

 

군홧발이 지나가고 꽃은 떨어졌다. 해도 붉고 달도 붉다. 아프다 5월이. 무참히 짓밟힌 그날 이후 민주화 투쟁사(史)의 물줄기는 달라졌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두환 정권은 80년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멍에를 남겼다고들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날을 잊지 말자 했다. 87 체제를 열기까지 중요한 분수령이 돼준 민주화 사건이나 조직들이 5월에 태동한 이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이하 김무성). 인상이 소다. 넓적한 얼굴, 껌뻑껌뻑하는 모습이 닮았다. 말하는 것도 해가 뉘엿뉘엿 지듯 말한다. 뱃고동 같은 톤.

“민추협이 왜 만들어졌느냐.”
“YS(김영삼)가 왜 단식을 시작했느냐.”

그의 정치생애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빼고는 설명키 어렵다. 민추협은 전두환 독재 정권의 저항체, 87 민주화 체제를 만들었다. 그는 현재 민추협의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5·17 비상계엄 조치가 터지잖나.”

김무성은 5월이 갖는 역사적 무게는 크다고 했다. 그 무게감을 전하기 위해 나온 듯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31일 여의도 모처 식당에서 가졌다. 식사 후 윤중로 길을 걸으며 대화는 계속됐다. 가급적 말투를 살렸다.
 

김무성 전 대표는 민추협 창립 멤버다. 현재는 재결성된 민추협에서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민추협이 만들어지는데 큰 계기를 줬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전 대표는 민추협 창립 멤버다. 현재는 재결성된 민추협에서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민추협이 만들어지는데 큰 계기를 줬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 YS와 그날


시작은 79년 10월 4일 YS가 의원직에서 제명당하고부터다.

“부마항쟁이 터지고, 그 끝은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끝났다. 12·12 쿠데타로 군부가 장악한 이듬해 5월 17일 비상계엄 조치를 했단 말이지. 다음날(5월 18일) 광주에서 ‘계엄령 철폐하라’ ‘신군부 세력 퇴진해라’ ‘김대중 등 민주 인사 석방하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거든. 군인들이 총으로 쏴 진압을 하잖아. 철권통치였지. 사회가 전체적으로 완전히 주눅이 들어 엎드린 채 시간이 흘렀어. 외부에서는 광주의 참상을 아무도 몰랐지. 전부 구전으로만 안 거야. 나야 광주에 부친(해촌 김용주)이 운영하던 전남방직 공장이 있었으니까 빨리 알게 됐지만.”

김무성 전 대표는 전두환 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 기간은 깜깜한 암흑과도 같았고 굉장히 어려운 투쟁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전 대표는 전두환 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 기간은 깜깜한 암흑과도 같았고 굉장히 어려운 투쟁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는 가택연금을 당하던 중이었다.

“한 번은 (전두환 정권이) 큰아들 결혼식 날만 연금을 풀어준다고 하니까 YS가 안 가버리잖아. ‘내가 결혼식 가면 국민들이 가택연금당하고 있는 사실을 모를 거다. 내가 자유롭게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려는거냐. 나 결혼식 안 간다’…. 그러다 광주사태를….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했어. 전혀 비하하는 말이 아니야. 황교안 대표가 광주사태라 했다고 어느 언론에서 뭐라고 하던데 그건 소아병적인 태도지. (사이) YS가 단식을 하잖아? 광주 민주화운동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 해서 단식에 들어간 거거든.”

광주 민주화운동 3년 후인 83년 5월 18일부터 YS는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그때 요구한 게 정치범 석방, 언론통제 해제,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폐지 등이야. 정치 활동하지 말라고 다 묶어버렸으니까. 다음이 대통령 직선제. 전두환이가 체육관 대통령 됐을 때거든. 이 다섯 개를 내걸고 단식투쟁을 한 거야. 근데 이건 내세운 명분이고, 광주 민주화운동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이 진짜 목표였어. 그리고 4주년 때 민추협이 출범된 거지.” 

“광주사태로 맺힌 한(恨)은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 YS 어록처럼 5‧18을 알리고자  단식이 전개됐고, 민추협이 태동됐다는 얘기였다.

 

2. 민추협의 시간史


인터뷰를 본격 전개함에 앞서 <시사오늘>이 정리한 민추협  시간사(史)부터 전한다.

○…1980년 5‧17 계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신군부는 무력으로 권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감. 8월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은 장충 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인단을 통해 5공화국 대통령에 당선. 국민 직접 선거 방식이 아닌 유신시대 선출 방식임. 이 시기 야당 정치인들은 온전치 못함. YS는 가택연금, DJ(김대중)는 투옥당함. 

○…1981년 1월 15일 신군부는 집권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 이틀 뒤 유치송을 총재로 하는 민주한국당(민한당)이, 일주일 뒤 김종철을 총재로 하는 한국국민당(국민당)이 창당됨. 전두환 정권이 여당뿐만 아니라 관제야당까지 만들어냄.

○…81년 5월 1일 YS는 가택연금 1년 만에 잠시 풀려남. 6월 9일 이민우, 김동영, 최형우, 문부식, 김덕룡, 오성룡, 최영호 등과 삼각산 등반 시작. 매주 목요일 산행을 전개. 80년 5‧17 계엄 이후 첫 정치 활동임. 탄압이 심했지만 서울, 대구, 부산, 충북, 강원, 전남 등 전국 규모로 확대. 암흑기 중 유일하게 규합할 수 있는 수단이자 민주화 투쟁의 방편이 됨. 훗날 민추협 탄생의 모태로,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의 주역이 돼 2‧12 총선 승리의 산파역이 됐다는 평가.

○…민산 활동으로 YS는 82년 5월 31일 다시 연금 조치됨. 83년 5‧18 3주년을 앞두고 중대 결심. 5월 18일 YS의 단식 투쟁으로 야권의 결집 촉발. 단식 15일 차인 6월 1일 유신 종말 이후 처음으로 YS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 등 야당 세력이 모여 범국민연합전선 추진. 이후 6월 9일 23일차 만에 단식 중단. 1년이 지난 1984년 5월 18일 마침내 민추협 탄생.

민추협은 신민당 승리를 통해 재야와 제도권 정치를 두루 아우렀다. 사진은 민주통신, 민주화추진협의회 소식지©뉴시스
민추협은 신민당 승리를 통해 재야와 제도권 정치를 두루 아우렀다. 사진은 민주통신, 민주화추진협의회 소식지©뉴시스

○…당초 YS는 단식을 계기로 만들어진 민주국민협의회에 재야인사를 참여시켜 국민연합으로 발전시킬 생각. 1983년 7월 DJ 동교동계 김상현을 만나 민주화운동을 함께 벌이자고 제의. 그러나 김상현 등이 정치권의 민주화운동기구를 만들자고 강력히 요구.

이 과정에서 미국에 있던 DJ는 “선장(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협력하면 조직이 와해된다”며 반대. 동교동계는 핵심 권노갑‧한화갑·김옥두 등은 참여 안 함. 박영록‧김종완‧박종태 등 재야세력도 반대. 김상현‧조연하‧김녹영‧박종률‧예춘호 등은 상도동과 공동구축 주장. 결국 상도동-동교동 간의 연합에서 만들어진 민추협은 DJ 반대로 동교동계 절반의 참여로 이뤄짐.

○…민추협 명칭을 놓고 YS는 ‘민주구국투쟁 동지회’ 주장, 김상현은 ‘민주화추진 간담회’.  이후 故김동영이 “목숨 걸고 투쟁하는데 무슨 간담회냐”고 이의를 제기해 최종 민추협으로 낙점.

○…또한 YS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공화계였던 김창근‧박찬종 섭외에 성공. 미국에 있던 JP(김종필)에게도 참여를 권유했으나 실패.

○…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서 ‘민주화투쟁 선언’ 성명 발표하며 발족. 이후 6월 14일 결성식 갖고 지도부를 비롯해 최고 의결기구인 10인 운영위 소위 만듬. YS는 공동의장, DJ는 고문, 김상현은 공동의장 대리.(DJ가 귀국하면 공동의장 맡기로 함) 10인 운영위는 상도동 측은 최형우·김명윤‧이민우‧윤혁표‧김동영, 동교동 측은 조연하‧김녹영‧박종률‧김성철 김윤식으로 구성.

○…84년 10월 집행부 완료. 10인 운영위를 상임운영위로 바꾸고, 상임위원 인원 20명 확대. 간사장 박종률(동교동), 부간사장 명화섭(상도동), 대변인 이협(동교동). 부대변인 최기선(상도동) , 기획조정실장 김덕룡(상도동), 헌법연구특별위원장 김명윤(상도동), 인권문제특별위원장 박찬종(공화계), 통일안보특별위원장 박성철, 노동자‧농어민특별위원장 김충섭, 학원문제 대책위원장 윤혁표 등.

○…전두환의 방해로 민추협 사무실 얻는데 난항을 겪음. 건물주들에게 사무실 내주지 말라고 압박. 우여곡절 끝에 84년 6월 초 비밀리에 종로 다동빌딩에서 관철동 대왕빌딩 13층(가건물 옥상)으로 옮겼다가 서소문 진흥빌딩으로 옮기는 수난사.

○…84년 12월 12대 총선을 앞두고, 민추협 내부에서는 현실정치참여 문제를 놓고 난항. YS는 야당답지 않은 관제야당을 대체할 명실상부 선명 야당을 창당해 총선에 참여하는 것이 적극적 민주화 투쟁이자 전두환 정권을 심판하는 길이라 주장. DJ는 참여 거부 의사 밝히며 민한당 지지로 더욱 난항(시사오늘 김상현 인터뷰 참조). 그러나 대세는 신당 쪽으로 기움. (앞서 11월 30일) 전두환 정권이 정치규제 3차 해금 조치 단행하자 이철승 등 비민추협 인사도 신당 창당 작업에 들어감.

○… 고심하던 YS는 신당이 성공하려면 재야, 비민추협을 포함한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야 하고, 신당에 원내 인사(민한당 의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시간을 끌며 규합해 나감. 12월 6일 황명수‧조순형‧신순범‧김정수 등 원내 인사 민추협 가입. 12월 7일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운영위 회의 통해 총선 참여 중론 모음. 다음날(8일) YS와 이철승 만나 국민이 원하는 참신한 야당 창당한다는 의견 뜻 모음. 마침내 12월 11일 YS, DJ, 김상현 공동 의장대행 이름으로 신당 창당 선언 및 총선 참여 공식 기자회견 가짐.

○…12월 18일 김현규‧서석재‧박관용‧홍사덕‧김찬우‧허경만‧최수환‧손정혁 등도 민한당 탈당 후 합류. 총선 흐름을 바꾸기 위한 조건이 만들어짐. 12월 20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서 신민당 창당 발기인 대회 갖고 출범. 신민당으로 정한 것은 유신 독재에 맞서 싸운 정통야당인 신민당을 계승한다는 뜻. 85년 1월 18일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대의원 532명 참여, 이민우 총재, 김녹영‧이기택‧조연하‧김수한‧노승환 부총재 선출.

 

3. 청년 김무성과 민추협


김무성 전 대표는 민추협의 의미는 불의와 정의의 싸움이라고 평했다. 김 전 대표는 YS 상도동계다. 그는 청년 정치인 시절부터 YS를 도와 지금까지 왔다. 사진은 민주화 운동 시절의 YS와 김무성©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김무성 전 대표는 민추협의 의미는 불의와 정의의 싸움이라고 평했다. 김 전 대표는 YS 상도동계다. 그는 청년 정치인 시절부터 YS를 도와 지금까지 왔다. 사진은 민주화 운동 시절의 YS와 김무성©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민추협 시간사에서는 당대 굵직한 이름들만 등장하지만, 민추협의 출범과 함께 갓 정치에 입문했던 청년 김무성도 YS를 도와 창립 멤버로 활약했다. 이듬해 4월 민추협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 민추협 사무실의 임대료를 내줬다고 알고 있다.

“관철동 빌딩이었다. 12층 건물 내 13층 옥탑방이었다. 무역회사 한다고 얻었거든. 보증금을 내가 냈지. 계약하고, 책상 놓고 했는데 밤에 경찰들이 집기를 전부 다 밑으로 내려놓은 거다. 우리가 싣고 올라가려고 하면, 엘리베이터를 꺼버려. 그러면 책상을 등에 지고 비상계단을 올라가 다시 들여놨지. 싸움을 여러 번 했어. 결국 1년도 못 돼 쫓겨나서 진흥빌딩으로 갔지.”

경찰들이 집기를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텅 빈 사무실 바닥에 모인 민추협 회원들은 바닥에 비닐을 깔고 의논하는 일명 ‘돗자리 회의’를 하곤 했다.

“굉장히 어려운 투쟁이었다. 나라를 위한 애국심이 기본이지만, 믿고 따를 지도자가 있다는 게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다. YS가 그런 지도자였어.”

- 상도동에서 민추협을 주도하다시피 했는데, 이제 와서 동교동과 공동으로 했다는 평가가 과연 옳은가, 이런 목소리도 있다. 어떻게 보나.

“YS가 주도한 거다. 다만 분열됐던 양김 정치 세력들이 통합해서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니 그 역사를 흔들고 싶은 생각이 없어. 좋게 보존이 돼야겠다는 입장이지. ‘사실은 이랬다’ 하는 말은 우리가 안 하려고 하지.”

- 故후농 김상현 전 의원은 2009년 <시사오늘>과 인터뷰를 했다. 누구보다 DJ를 위해 헌신한 정치인이면서도 민추협 결성에 적극 앞장선 것이 눈 밖에 났다고 했다.

“후농하고, 조연하‧박종률 이런 분들이 민추협은 '해야 될 일이다'며 나섰다. 같은 동교동 쪽에서 은근 반대하고 방해해도 이분들은 나섰다. DJ 눈에 벗어나 굉장히들 고생을 했다. 박종률 의원 경우 민추협의 간사장을 했는데, 동교동에 밉보여서 상도동에서 같이 하다 5·18 묘지에 안장됐다.”

반대하던 동교동계도 민추협 추진이 잘 운영되면서 나중에 합류하게 된다.

- 동교동과의 신경전도 대단했다고 들었다.

“대단했지.”

전국을 돌면서 민추협 현판식을 할 때다.

“언론 통제에 억압받던 때라 국민들이 스프링 튀듯 발산을 한단 말이야. 많은 군중이 모인 대중 집회는 운영의 묘가 굉장히 중요해. 연사들이 분위기를 띄우면 YS가 등장해서 연설을 하고 시가행진에 들어가는 거야. 동교동계가 ‘우리도 연설해야 할 거 아니냐’며 요구를 하기 시작했지. DJ가 미국에 있으니까 녹음테이프가 오는 거야. 40분, 50분 길이야. 아무리 DJ가 연설을 잘하더라도 녹음기 성능이 좋을 리가. 그걸 갖다 놓고 YS 연설 전에 틀어야 돼. 40~50분 틀어놓는 동안 김이 팍 새 버리지. 또 국장이 상도동 하면 부국장은 동교동, 국장이 동교동 하면 부국장은 상도동 이런 식으로 전부 딱 50대 50이야.(웃음).”
 

김무성 전 대표는 전두환 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 기간은 깜깜한 암흑과도 같았고 굉장히 어려운 투쟁이라고 말했다.©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김무성 전 대표는 전두환 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 기간은 깜깜한 암흑과도 같았고 굉장히 어려운 투쟁이라고 말했다.©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 민추협 만든 다음 총선 참여를 놓고 '한다 vs 안 한다' 했을 때 본인도 직접 개입했나?

“나는 직접 개입은 안 했어. 굉장히 토론이 많았지.”

 - 2‧12 총선 참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에서의 이유는 뭔가. 질 것 같아서 인가?

“그렇지. 반대하는 쪽에서는 하나마나 질게 뻔하다고 봤어. 총선 참여는 YS의 불굴의 투지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느 정치학자가 평하기를 ‘DJ는 탄압받는 지도자였고 YS는 투쟁하는 지도자였다’고 하더라.”

- YS의 인간적인 매력은 뭐라고 보나.

“기본적으로 맑은 사람이야. 뒤가 없어. 일을 굉장히 복잡하게 생각해서 끌고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단순하게 생각해서 옳다 싶으면 쫙 한 길로 가버리는 사람이 있잖나. YS는 후자야. 대화를 하면 머리가 복잡하지가 않아.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 버리거든. 감추지 않지. 그걸 좋게 보면 좋은데 너무 단순하다고도 해.”

그때 갑자기 김무성이 목을 젖히고 껄껄 웃어젖혔다.

“으허허허. 하하하. 큭큭. 껄껄껄….”

민추협 활동 당시 YS와의 일화로 넘어갔다.

“경찰과 대치할 때는 YS가 항상 앞장섰지. 그럼 저쪽(경찰)에서는 사과탄(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과 모양의 최루탄)을 터뜨려. 파편이 튀면 눈이 다 실명되니까, 홍인길(민추협 운영위원)하고 나하고 둘이 키가 크거든. 저쪽에서 던지기 시작하면 천으로 YS 얼굴을 동여매지. 보호하려고. 그럼 YS가 싫다면서 ‘이 놈들아 놔라’ 이러고…. 하하하. 쉽게 말해 싸움닭이지. 백골단(사복경찰) 앞에 딱 팔짱을 끼고 YS가 선단 말이야. 우리가 옆에 있으면 ‘(자신의 팔을) 잡아라, 잡아라’며 고함을 쳐. 우리가 YS 양팔을 잡으면 다리를 들어서 두 발로 경찰차를 차고 그랬어. 으허허허허….”

자동 연상이 되는지 계속 웃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국면이었을 테지만 추억이 된 듯했다.

“그때 참 경찰한테 많이 맞았어. 닭장차에 끌려가 맞고, 경찰서에 잡혀갔다, 저항하다 맞고. 최루탄도 엄청나게 맞았지. 결국 독극물인데. 우리 다 암 걸려 죽는다고 생각했어. 매일 그걸 쏘는 거야. 공중을 향해 쏴야 되는데 바로 쏴버려. 맞으면 아파요. 거리가 상당히 있어도 말이지. 사과탄은 굴리게 돼있는데, 바로 위에서 터져 버린다고. 플라스틱 파편이 막 튀어. 수류탄 터지듯이."

-  민추협이 갖는 의미는 뭐로 보나.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었지. 상대는 총칼을 든 군인들이고 우리는 맨손이고, 감히 당해낼 수가 있겠나. 얻어터지는 거지. 굴하지 않고 목숨 걸고 투쟁한 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였어. 온몸을 던지겠다는 숭고한 생각이었지. 진짜 칠흑 같은 캄캄한 밤 같은 상황이었어. YS가 대통령 된다는 생각도 못했고, 그냥 옳은 일이니까 한 거지. 군부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 또 그렇게 한들 우리한테 돌아오는 게 뭐냐, 이런 생각도 안 했지. 모월 모시 어디서 투쟁 대회를 연다 하면 민추협 멤버들 집에 전부 사복 경찰들이 와있는 거야. 그때는 아파트 이런 게 많지 않잖아. 그러면 집 앞에 딱 와가지고 형사들이 밖에 못 나가게 해.”

- 본인도 감시 대상이었나.

“그렇지. 대회에 참여하려고 뒷담을 넘어가서 참석하는 사람, 5층 이런 데서 물받이 타고 내려와 집회에 오는 분,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어. 전날 안 들어가고 같이 여관방에서 팬티 바람으로 자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목욕탕 가서 씻고 데모 참여하고, 이런 게 연속이었어.”
 

김무성 전 대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상황에 대해 부친(해촌 김용주)이 운영하던 전남방직 공장이 광주에 있어서 빨리 알게 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전 대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상황에 대해 부친(해촌 김용주)이 운영하던 전남방직 공장이 광주에 있어서 빨리 알게 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4. 민주화 입문의 시작점


대화는 민추협 참여의 계기로 넘어갔다.

- 집이 넉넉한 줄 안다. 합류하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하다.

“나는 5·18 때문에 정치를 하게 된 거야."

포항에 있을 때였다.

“둘째형이 운영하는 동해제강의 공장장으로 있었어. 아파트 옆집에 다른 공장의 공장장이 이사를 온 거야. 그 부인이 광주 분이야. 아버지가 광주에서 정내과라는 내과를 한다더군. 근데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우리 집 문을 막 두드리는 거야. 광주가 지금 난리가 났대.
‘어떻게 난리가 났느냐.’
온 광주가 불바다 되고 총을 쏘고 아수라장이라는 거야. 자기 아버지 병원이 불탔는지 좀 알아봐 달라고.”

김무성 부친의 공장이 광주에 있자, 부탁을 해온 거였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잖아. 돌리는 전화가 있을 때거든. 포항에서 서울 본사로 돌려서 교환원 시켜, 다시 광주로 돌려서야 연락이 닿았지. ‘정내과 괜찮은지 좀 알아봐 달라.’  막 하루 이상 걸려서 연락이 왔는데 괜찮다는 거야. 다행이다, 주저앉더라고. 그 집 딸이 세계 챔피언 했던 프로골퍼 한희원이야.”
 

김무성 전 대표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시위에 가담하다 곤욕을 당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김무성 학창시절©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김무성 전 대표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시위에 가담하다 곤욕을 당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김무성 학창시절©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광주 상황에 대해 알게 된 김무성은 관심을 놓지 않고 계속 알아봤다. 행동파다. 대학(한양대) 전부터 고등학교(중동고) 때 이미 시위에 가담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 13개 고등학교 연합 시위를 주도하다,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시중에 떠도는 유언비어 같은 얘기가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이놈들, 이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군인이 국민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느냐.’”

비분강개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찾아간 곳은 YS 상도동이었다.

- 아버지와 YS와의 인연 때문에 찾아간 건가.

“그랬다면 DJ를 찾아갔어야 했지. 우리 아버지가 (장면 정부 당시) 민주당 신파거든. YS는 민주당 구파고. (민주당 신‧구파는 대립할 때가 많았다. 나중에 해공 신익희 등 구파는 신민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그때 이미 지역감정이 형성됐던 상황이었다. 나는 부산 사람이고 YS는 경남 선배고.”

김무성 부친은 故해촌 김용주 선생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교육의 영흥 보통학교 설립 등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다. 사업가이자 정치가였다. YS와는 60년 민주당 당시 각각 원내총무와 부총무 관계로 만났다. YS와 김무성은 경남중 선후배였다. YS는 46년, 김무성은 67년에 졸업했다.

“그래서 YS를 찾아갔지.(웃음) 김용주 아들이다 했더니 어서 와라, 된 거야. YS가 나보고 ‘나는 연금 중이라 앞으로 못 만나니까 김덕룡을 나처럼 만나라’ 했지.”

이에 앞서 78년 10대 총선에서도 YS와의 인연은 있었다. 김무성이 신민당 후보로 포항지구당 개편대회 경선에 참여했을 때다. 중앙정보부가 정종을 돌린 것을 트집 잡아 중도 포기하긴 했지만 중앙당의 YS로부터 친서를 받아 초반에 기세를 올린 바 있다. 

- 처음엔 경남중 동창회 때 YS를 만나 의기투합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줄 알았다. 

“아니다. 내가 (상도동에) 찾아간 거였다. 동창회는 YS가 단식하고 나서였다. 얼굴 껍질이 막 벗겨지고 굉장히 안 좋은 상태로 동창회에 왔더라. 이학봉이 실세일 때다. 신군부 출신의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이학봉이 경남중 11회, YS가 3회였다. 이학봉 주변에는 사람이 꽉 찼고 YS한테는 문부식 선배 딱 하나 서 있는 거야. 가만있을 수가 있나. 동문들한테서 가가지고 ‘이리 안 오나’며 YS 주변으로 오게 했지.”

민주화 투쟁이 본격화한 가운데 김무성은 민주산악회 활동부터 뛰어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일체 몰랐지.”

- 부친이 정치하는 것을 반대 한 것으로 안다.

“아버지가 당부한 게 있다. ‘정치해보니까 정치인들 협잡꾼이더라.’ 하하하하하하하.”

껄껄 웃었다.

“아버지는 사업하다가 이승만 독재에 반기를 들었거든. 사돈을 통해 야당에서 정치를 했다. 고향인 함양에서 출마를 했는데 자유당 말기 부정선거 피해로 떨어진 거야. 4·19 혁명 후에는 2공화국 참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로 나와 당선되고 민주당 원내총무가 됐어. YS가 부총무 할 때지. 5·16이 터져 야당 정치인들이 잡혀갔고 두 달인가 일체 연락도 안 됐어. 그 뒤 하는 말이 '내가 사업하다, 정치 외도를 해봤는데 이건 우리 집안사람 성격에 절대 안 맞는다. 너네는 함부로 정치하지 마라’고 했다. 하하하하하.”

- 그래서 비밀리에 한 건가.

“비밀리에 했지.”

- 삼동산업을 운영할 때 아니었나. 민주화 운동으로 불이익이 심했을 텐데?

“투쟁하면서는 내 기록이란 기록은 다 없애버렸어. 잡혀가면 다 불어야 되니까. 고문당하고 나온 선배들은 고생한 이야기를 하는데, 상황이 딱 터지면 도망가야 된다는 사람이 있고 도망가면 안 된다는 사람이 있었어. 고문받을 때는 마치 우리 속에 갇혀 사자하고 딱 둘이 앉은 기분이라는 거야. 김덕룡 의원 같은 사람들은 ‘도망가면 안 된다’며 도망가면 주변이 다 죽는다는 거지. 그러니 기록을 싹 다 없애버린다고. 그때는 수첩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을 때니까.”
 

김무성 전 대표는 YS‧DJ 분열이야말로 민추협 활동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양김 분열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전 대표는 YS‧DJ 분열이야말로 민추협 활동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양김 분열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5. 민추협 後와 양김 분열


- 민주협의 목표는 당연히 민주화 운동이었겠지만 내부적 목표는 뭐였나? 직선제 쟁취인가.

“(끄덕이며)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는 치욕적인 방식은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는 게 목표였다. 여러 가지로 초점을 흐리기보다 하나로 모으자는 전략이었어. 머리를 잘 쓴 거지.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굉장히 토론이 많았다. 직선제만이 최선의 방법이라며 강하게 밀어붙인 YS 공이 컸지.”

민추협이 내건 직선제 개헌은 분명한 정치 어젠다로서 대중에 각인됐다. 85년 2월 12대 총선을 통해 지지 동력을 확장시켰다. 민추협이 출범한 신민당은 창당 25일 만에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으로 67석을 얻어 관제야당 민한당을 무너뜨리고 제1야당으로 등극했다.

민추협이 ‘체제 저항적 재야단체’라는 위치에서 ‘제도정치권 내 제1야당’으로 변모한 계기였다.

미온적이던 DJ도 총선 이후인 3월 15일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수락했을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87년 6‧10 항쟁과 6‧29 선언, 직선제 쟁취의 실질적 도화선이 돼줬다.

- 근데 정작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니, 민추협이 해체되는 아이러니함을 겪지 않았나.

“민주화를 얻어냈으니까 민추협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지.”

- 후회되는 일은 뭐였나.

“양김 분열이지.”

- 막을 수가 없었나.

“우리(상도동)는 ‘이 판을 전부 YS가 만든 것이니 우리가 해야 된다.’ ‘DJ는 지난번에 한 번 안 했나.’ 이게 우리 논리였다. (DJ는 71년 제7대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에 패했다.)  동교동에서는 ‘우리가 나이가 많다.’ ‘우리가 고생을 더 했지 않느냐.’ ‘가서 두들겨 맞고 사형선고까지 받고. 우리가 해야 된다.’ 양보할 수 없다 했지.”

좀처럼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학생들이 막 ‘양김 단일화하라’고 상도동, 동교동 쳐들어가고 그랬거든. 한 번은 전화가 왔어. 학생들이 상도동 집을 점령했다는 거야. 그래서 갔지. 좁은 상도동 마당에 꽉 차있어 애들이. 당시만 해도 야당에는 청년 당원들이 내몰아서 쫓아냈지. ‘분열되면 안 된다.’ 다들 그랬는데 우리 눈에는 그게 안 들어왔어. 서로들 ‘우리가 된다’고 생각했지. 눈이 멀었던 거지.”

- YS가 끝까지 경선을 하기위해 양보했지 않나.

“DJ가 끝까지 거부했지. 둘이는 안 되는 거야. 전두환‧노태우 항복 선언을 받아낸 것까지는 양 정치 세력이 협조해서 잘 됐어. 그러나 87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분열돼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 거지.”

양김의 단일화 실패 과정을 얘기하자면, 지구당 조직책 임명 문제가 있었다. 당시 지구당 숫자를 따져 보면 DJ 측이 열세다. 전국 92개 지구당 중 미창당지구당 36곳을 제외하면 56개 지구당 중 30 대 26으로 YS 측이 우세했다. 미창당지구당  조직책과 관련해 상도동 측은 18곳씩 50 대 50으로 나눠 임명하자고 제안했고, DJ 측은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23곳을 동교동계에게 달라고 주장했다.

경선이 늦어지자 YS는 그해 10월 22일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나 동교동 측 제시안을 전격 수용했다. 그러나 DJ가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분당을 선언하면서 단일화는 완전히 결렬됐다.

YS와 DJ 간 후보 단일화 협상이 결렬되면서 양김은 앙숙이 됐다. 87년 13대 대권은 노태우 후보에 돌아갔다.

- 87년 대선을 앞두고 YS는 DJ가 원하는 방식대로 대통령 경선을 하자고 했다. DJ는 안 한다면서 통일민주당(신민당 후신)을 깨고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두 사람의 공동 책임으로 몰고 가기는 어렵지 않나?

“이미 지나온 일이야. 자꾸 싸우기 시작하면 큰일을 그르쳐. 역사가들이 바로잡을 일이지.”

 

김무성 전 대표는 상도동계 정치인들과 동거동락하며 힘든 야당 시절을 보냈다. 이후 YS가 대통령이 되면서 개혁 정부를 여는데 동참했다. 사진은 문민정부 시절의 YS와 기무성©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김무성 전 대표는 상도동계 정치인들과 동거동락하며 힘든 야당 시절을 보냈다. 이후 YS가 대통령이 되면서 개혁 정부를 여는데 동참했다. 사진은 문민정부 시절의 YS와 김무성©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6.  YS 후계구도와 최형우


긴 터널을 지나왔다. 민추협 후 87 대선 실패, 3당합당 후 문민정부가 탄생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시절이었다. 고난과 영광을 YS계는 함께했다. 92년 14대 대선에서 김무성은 YS 대통령 후보 정책보좌관 역을 맡았다. 문민정부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청와대 민정사정 비서관을 지냈다. 5·18 특별법 제정 및 피해자 보상, 전두환·노태우 구속,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 공개 등 개혁에 동참했다. 상도동계 중 YS 적자로 통한다.

- 진짜 궁금한 것이 있다. 97년 15대 대선 때 최형우‧김덕룡‧이인제 등 9룡이 있지 않나. 민주계가 서로 담합했으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YS도 후계구도를 안 짜 놓은 게 잘못이야. 최형우‧김덕룡 선배가 노골적인 경쟁을 벌였거든. 너무 일찍 벌였어. 그랬더니 현철(YS차남)이가 둘 다 아니다 해서 견제를 했다고.”

민주계 외에도 이회창‧이수성‧이홍구, 민정계에서는 김윤환‧이한동, 그밖에 박찬종 등이 신한국당 9룡으로 불렸다.

- 본인이 최형우 대권행보를 막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때문에 최형우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풍문도 있다.

“오해다.”

잘라 말했다.

“김덕룡 선배랑도 가까웠지만 최형우 선배와도 가까웠거든. 내 볼 때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봤다. 근데 대통령 하겠다고 돌아다니면서 폭탄주를 먹고 다녔어. 이분이 술을 못 먹는 사람이야. 한 잔 먹으면 온 몸이 빨개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그 피로가 누적된 거지. (사이) 하여간 당 관리로 이한동 얘기가 돌더라고. 그리 되면 최 선배로서는 대통령도 안 되고 당 대표도 못하게 되는 거잖아.”

다음은 김무성이 당시 상황을 전해준 내용. 

이한동 당 대표 내정설에 김무성은 최형우(전 내무부장관)를 찾았다.

“어디 계시오?”

“북경대학교 총장이 부산에 와서 파라다이스 호텔서 저녁하고 있어.”

“할 말이 있소, 형님.”

김무성 말에 최형우가 중간에 나왔다.

“형님 내가 아무리 봐도 형님은 대권 안 됩니다. 근데 당권을 각하(YS)가 이한동이 준다는데 당 대표까지 뺏겨서야 되겠습니까. 당권으로 갑시다. 형님이 결심해 주면 내가 지금 바로 올라가서 YS 만나 이한동이 안 되고 최형우 시키자고 이야기하겠소.”

고개를 숙이며 잠자코 듣던 최형우가
 
“하-! 니 알아서 해라” 하고는 가버렸다.

“곧장 내가 YS를 만났지. YS가 가만히 듣고 있더라고. 그럴 땐 절대 내색을 안 해. (사이) 그런데 최형우 선배가 오해를 한 거야. 내가 김현철이랑 친하니까 김현철이 자기한테 나를 보냈다 오해를 한 거야. 나는 최 선배를 위해서 그런 건데. 이튿날이 토요일이었거든. 월요일에 본회의가 있었어. 근데 최 선배가 목욕하고 머리에 기름 바르고 빗질하고 와서 또 다니면서 악수하고 다니더라고. 다음날 화요일 (1996년 3월 11일) 아침에 쓰러져버렸어. 그날 서석재 선배가 최형우‧김덕룡 과다경쟁을 중재하려고 플라자호텔 일식집에서 7시 반에 만나자고 했거든. 8시 좀 늦게 얼굴이 푸석푸석해서 나타났지. 앉다가 팍 쓰러진 거야. 그래 가지고 원(영일) 여사(최형우 부인)는 나를 만난 뒤 밤에 잠도 안 자고 그랬다고…. 그래서 쓰러진 거라고‧…. 나를 얼마나 원망했는데….”

최 전 장관은  YS와의 정치적 동지이자 오른팔로 통한다. 민주화투쟁, 대통령 직선제 쟁취, 문민정부 탄생의 주역이다. 96년 3월 11일 돌연 뇌출혈로 쓰러진 뒤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김무성 표정 위로 착잡함이 어렸다. 

그러면 당시 상황에 대해 최 전 장관의 시각은 어떨까. <시사오늘>은 지난 2013년 6월 최 전 장관과 ‘민산 되짚기’를 주제로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최 전 장관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말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였다. 인터뷰는 원 여사가 최 전 장관 옆에서 대신 말을 전달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날(3월 11일) 최 전 장관이 쓰러지기 전후 상황에 대해 원 여사는 자신이 기억하는 바를 보태 자세히 자초지종을 전했다. 어떤 얘기를 했는지 옮기면 이렇다. 

“(서석제 만나기 전날)너무 안색이 안 좋아서 제가 '빨리 기자들 보내고 쉬어야 한다. 큰일 난다'고 했고 그래서 이 양반(최형우)이 기자들에게 '내가 너무 몸이 안 좋다. 쉬어야 겠다'고 말한 뒤 밤에 들어가서 쉬었는데 제가 걱정이 돼서 지압하는 사람을 불러서 주무르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김덕룡 서석재 두 분과 조찬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는 7시에 비행기로 대구에 갔습니다. 그러다 9시가 되니까 제게 전화가 왔어요. 최 장관이 쓰러졌다고…. 서울대 병원으로 가니 의식은 있는데 입에 뭘 물려놓고 있더라고요. 너무 입을 꽉 다무니까…. 그 때 쓰러지기 직전에 테이블에 있는 컵을 잡으려다가 못 잡고 쏟은 다음에 벽에 기대었다고 해요. 김덕룡 서석재 두 분이 막 주무르고 했는데 옆으로 쓰러졌다고 해요. 이미 그 전날부터 뇌졸중이 온 것 같습니다."

당시가 폭풍처럼 다가오는 듯싶다. 최 전 장관은 소리 내 울었고, 원 여사의 말은 빨라졌다.

"이 양반과 YS가 정말 힘들게 정치적 역경을 헤쳐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중대한 결정을 하는데 본인을 불러야 하는데 안 그래서 화가 났고 또, 이건 누구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이 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지적 관계가 아닙니까. 동지들끼리는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게 잘못된 겁니까?"

그러면서 당시 최 전 장관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대선에 도전했을 것임을 비쳤다.

"만약 어른이 못 도와줄 경우에는 투표를 통해서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130여 명의 의원들을 관리했습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어른이 흔들리니까…." 
- 民山되짚기(23) 최형우 편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877-

 

- 최형우가 당권을 잡았으면 정권 재창출이 됐을 듯싶다.

“그렇지. 안 놓쳤지. (그러면 대권은 김덕룡이 됐겠느냐는 물음에) 사주팔자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겠나?”

 

김무성 전 대표는 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당 대표를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했다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했을 거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전 대표는 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당 대표를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했다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했을 거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7. 민추협 재결성의 의미


다시 민추협 얘기로 돌아왔다.

-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싶더니 2002년 민추협이 복원됐다.

“분열돼 모일 수 없다가, 한참 뒤에야 모이게 된 거지. ‘아 그때 우리가 순수한 뜻으로 모여서 민주화 투쟁을 했는데 뜻을 버릴 수가 있느냐.’ 그래서 한 거지. 다시금 민추협을 정치 단체화 하자고 한 세력들이 많았어. 과거 민주화 투쟁을 했던 동지들 외에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였지. 그런데 들어와서 설치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건 아니다.’ ‘다시 원 회원들만 모이자’ 한 거지.”

16대 대선을 앞두고 양 세력은 YS와 DJ를 고문으로 한 민추협 법인체를 결성했다. 이사장은 김상현‧김명윤, 회장은 김덕룡‧김병오, 수석부이사장 서청원, 부이사장 신순범‧박종웅‧이협, 부회장 박광태· 김무성·김장곤·이규택 등이 맡았다.

- 재결성을 놓고 성과나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친목 모임 정도의 성격인가.

“친목단체라고 하기는 섭섭하지. 민추협 정신을 보존하고 발전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거지. 처음엔 사무실 하나 얻어놨는데 아무도 회비를 안 내. 조금씩 낼 수는 있는데 안 내.(웃음) 몇 년 동안 내 개인 돈으로 운영됐지. 그래서 유지가 된 거야 안 없어지고. 다행히 사단법인 만들어서 국회 지원받기 시작했고.”

- 계속 발전시킬 생각은 있나.

“슬픈 이야기지만 상교동‧동교동 골이 워낙 깊어. 다는 아니지만, 주류가 경상도‧전라도에 정치적 뿌리를 갖고 있잖아. 동서 간 지역감정 골은 더 깊어졌다고. 이번 선거도 호남에서 민주당이 싹쓸이할 걸? 부산은 통합당이 유리하고. 같이 다니기는 어렵다고. 서로 역사 되새기면서 이러는 건 좋은데 같이 손을 잡는 건 불가능해.”

 

8. 4‧15 총선과 통합당


4‧15 총선을 앞두고 자연스레 현안으로 옮겨왔다.

- 영남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김영춘‧김부겸은 대망론에 불을 지피며 지역주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정작 분열 정국이 심화돼서인지 허망하게 들린다.

“과거에는 지역감정을 조장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회득했다. 지금은 이념을 악용하는 정치 모리배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내가 통합 운동을 벌이는 거야. 처음 지지부진할 때 ‘선거 이기려면 닥치고 통합이다.’ ‘왜 통합 안 하느냐.’ ‘황교안‧유승민 당장 만나서 무조건 통합해라.’ 그랬던 거지. 우파는 통합하고 중도의 길로 가야 살아.”
 

김무성 전 대표는 이념을 악용하는 정치 모리배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우파 재집권을 위해 통합 운동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무성 전 대표는 이념을 악용하는 정치 모리배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우파 재집권을 위해 통합 운동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평소 그의 지론이 묻어났다. 갈등을 키우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갈등을 줄이는 정치인이었다.

“정치는 중간이야. 중간이 있어야 되거든. 정치를 모르는 놈들이 그걸 회색주의자라고 매도하는 거지. 타협 없이 정치가 되나, 안 되지. 정치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부동산업자들이야. 복덕방이라는 게 100만 원 달라는 사람 90만 원 주겠다는 사람 양보 이끌어내서 95만 원에 계약하게 만들잖아.”

 - 통합당 공천이 민정계(구보수)스럽다는 평도 있다.

“공관위라는 게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잘하겠다, 했잖아? 하다 보면 힘이 세지는 것을 알아. 스스로가 권력을 향유하게 되지. 김형오 전 공관위원장이 와서 쳐내니까 잘한다 하고, 당한 사람도 순응하고 이러니까…. 처음엔 잘했어. 나중이 문제였지. 홍준표 전 대표를 고향(밀양)에 안 내보낸 것은 좋았어. 양산 컷오프는 하면 안 됐던 거야.”

김무성은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보수통합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호남 차출론 등은 오르내리다 말았다.

- 호남 출마는 왜 안 됐던 건가.

“수권정당인데 호남 공천신청자가 단 두 명인 거야. 나라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디든 어느 곳이든 마다하는 곳이 있다면 가겠다는 각오였지. (실제 출마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자) 그게 권력의 속성이야.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끝까지 두둔했는데…. 왜 나를 견제해.”

말을 아꼈다.

개헌 논란 얘기를 꺼내자 김무성은 표정부터 부글부글했다. 국민개헌 발안권을 꺼냈지만 반발에 부딪치자 접고 나서였다. 
 
“제왕적 권력구조를 권력분산형으로 바꾸는 게 최고 중요한 일이야. 대통령 되면 안 해버리잖아. 국회에서 추진하면 막아버리잖아.”

- 근데 본인이 대통령 됐으면 개헌했을까 싶다. 권력의 단맛을 아는데 임기 줄여서 하는 게 쉽지 않을 듯하다.

“내가 됐으면 임기를 줄여서라도 개헌을 했어. 그게 애국심이지. 5년 하면 뭐하노. 한 2년 화끈하게 딱 끝내고 나라 위해서 딱. 개혁 정책은 1년 반 안에 다 끝내야 돼.”

김무성은 국민개헌 발안권 취지에 대해 다시 말을 이었다.

“여하튼 정치인 너네한테 못 맡기겠다, 국민에게 넘기겠다 그거야. 우리나라 최초 헌법에 국민개헌 발안권이란 게 있어. 유신 때 없앤 건데 그걸 복원하는 거야. 내각제 개헌 하자는 말도 없어. 그런데 내가 좌파들하고 손잡고 고려연방제로 끌고 가기 위한 음모가 시작됐다는 거야. 아니 나보고 사회주의자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가.”

격앙했다.

“(박근혜 정부 최순실 국정농단 당시) 단 한 명도 나한테 탄핵하지 말자고 이야기 한 사람 없어. 조원진이 ‘김무성한테 탄핵하면 안 된다고 했다’며 돌아다니지? 지금 다 거짓말하는 거야. 그때는 다들 '벙-쪄서' 하늘만 봤어. (박 전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사람도 전부 거짓말이고.”

화제를 돌렸다. 

-  반기문 전 사무총장은 왜 지난 장미 대선에서 포기한 건가?

“나도 모르겠어. 만나면 한번 물어보게. 표면적인 것은 돈 문제일 수도. 대통령선거 하면 너무 많이 들잖아.”

지난 2017년 바른정당 시절 그는 반 전 총장을 대선후보로 영입하려 했다. 반 전 총장이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없던 일로 됐다.

인터뷰가 끝난 후 김무성은 여의도 벚꽃 산책을 제안했다. 함께 윤중로를 걸었다. 20여 년이 넘는 의정생활의 마지막을 생각했는지 깊은 상념에 젖은 듯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처럼 벚꽃이 떨어졌다. 그는 다시 국회의원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6선에 이르는 동안 상향식 공천을 통한 정당민주주의 완성의 꿈도 당 대표 시절 이룬 공무원 연금개혁 후 과제도 미완성으로 남았다. 돌아보면 우파 분열을 가장 두려워했다. 번번이 백의종군을 했다. 뭐라도 할 예정이란다.

“정치인은 사심이 없어야 돼. YS처럼….”

며칠 뒤 부산 지원 유세 소식이 들렸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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