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②] 미완성의 봄…“진정한 평가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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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②] 미완성의 봄…“진정한 평가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4.23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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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79~1980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1979.12.12. 12‧12 군사 반란


광화문광장에 세운 ‘전두환 동상’이 27일 오후 시민들의 타격으로 훼손되어 있다.ⓒ뉴시스
광화문광장에 세운 ‘전두환 동상’이 27일 오후 시민들의 타격으로 훼손돼 있다.ⓒ뉴시스

그날은 평범한 수요일 저녁이었다. 남산 너머 한남동에서 연달아 총소리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오후 7시, 전두환은 정승화를 내란 방조 용의자로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의 헌병대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가 충돌하며 총격전이 벌어졌다.

노태우와 전두환의 주장은 정승화가 박정희 서거 당시 궁정동 안가 만찬장 옆 별채에 머무르며 김재규의 범행을 묵시적으로 동의하며 도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12‧12는 10‧26 사태를 수사하던 중 혐의를 밝히기 위한 ‘합수부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임무수행’이라고 주장했다.

12.12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결같을 수밖에 없다. 12.12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책임자인 내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시해범 김재규의 내란에 동조한 혐의가 명백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조사하기 위해 연행하던 중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었다. 12.12는 이처럼 단순한 사건이었으나, 그 여파는 결과적으로 1980년대 초반의 권력 지형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놓게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시대적 의미를 갖게 된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267~268쪽.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의 주장은 달랐다. 그들은 ‘숙군(肅軍) 쿠데타(김영삼)’, ‘하극상의 반란(김대중)’으로 12‧12를 설명했다. 

이 날의 사건은 10‧26 이후의 ‘힘의 공백기’에 종지부를 찍은 하극상의 쿠데타였다. (중략)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은 박정희가 죽자, 민주화가 진행될 경우 박정희의 그늘 아래 유지해 왔던 자신들의 기득권이 붕괴될까 두려워했고, 여기에 권력의 공백을 틈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권욕이 보태져 18년 전 박정희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75~176쪽.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도대체 계엄령 하에서 어떻게 계엄사령관이 체포될 수 있는가. 하극상의 반란이었다. (중략) 10‧26 사건 이후 힘의 공백에는 전두환 장군이 있었다. (중략) 나는 어렴풋이 전두환과 그 주변에 있는 정치군인들의 힘이 느껴졌다. 그들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전두환의 야심도 읽을 수 있었다. 전두환은 곧 계엄사령관에 취임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90~391쪽.

이에 대해 전두환은 김재규가 정승화와 손잡고 하려던 것이 쿠데타라고 반박하며, 정권 장악 의도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김영삼 정권 때 위헌적 소급입법인 5.18특별법에 따라 진행된 검찰 수사와 재판에서는 12.12를 군사반란으로 단죄했다. 쿠데타를 정치학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얘기하면 ‘군대 등 무력을 동원해 집권자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김재규가 정승화와 손잡고 하려고 했던 것,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쿠데타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중략) 12.12가 어느날 급작스럽게 ‘쿠데타’로 규정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 반대 투쟁을 주도했던 김영삼, 김대중 씨가 평화적 정권 교체의 수혜자로 집권자가 되었을 때다. 그들은 반란의 주도자였던 정승화, 장태완 등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죄를 벗겨줌으로써 박 대통령의 추종세력으로 여겨지는 5공화국의 주역들을 단죄하려는 정치보복극을 연출했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264~268쪽. 

노태우 역시 12‧12를 ‘돌발사고’라고 명시하며, 사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쿠데타의 구성요건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 (중략)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240쪽.

12일 밤, 최규하는 정승화 연행에 대한 사후(事後) 승인을 내줬다. 김종필 증언록에는 13일 아침 최규하와의 통화 내용이 서술돼있다. 김종필 역시 12‧12를 ‘무력으로 실권을 장악한 군사 반란’이라고 평가했다.

수화기를 드니 최 대통령이 상기된 목소리로 대뜸 “아, 총재님이십니까. 저, 어젯밤에 죽을 뻔했시유”라고 말했다. 뭔 소리인가 했다. 대통령이 죽을 뻔하다니….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됐다고 이런 말이 나오는가. 내가 “무슨 소립니까. 대체 어떤 놈이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다는 겁니까?”라며 되물었다. 최 대통령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을 비롯해 장군 여러 명이 몰려와 결재해 달라고 난리를 쳤다”며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강원도 원주 사람도 말끝을 ‘~시유’로 끝내는지 최 대통령은 그날 밤의 두려움과 흥분을 억양이 이상한 충청도 말씨로 표현했다. 

(중략) 최 대통령은 군복을 입고 난데없이 등장한 이들 군부 실력자 앞에 엄청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전두환의 이런 무력시위는 항간의 소문처럼 그가 권총을 차고 들어와 최 대통령을 협박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최 대통령으로 하여금 ‘죽을 뻔했다’는 말을 남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68~69쪽.

 

 1980.1~4月. 안개 정국과 학원 민주화


1980년 새해를 맞았지만, 여전히 정국은 어두웠다. 어수선하고 불안한 시절에 사람들은 ‘안개 정국’이라 이름 붙였다. 

정치권에서는 김대중의 거취 문제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2월 29일에 그를 비롯한 재야인사 678명에게 사면‧복권 조치가 내려진 이후, 양 김은 3월 6일과 4월 4일 두 차례의 단독 회동을 가졌다. 

첫 회동에서 신민당 입당이 문제됐다. 김영삼은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윤보선, 김대중 두 사람을 상임고문으로 발표했다’며 입당을 요구하는 입장이었으나, 김대중은 ‘나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이유로 입당을 유보했다.

이 자리에서 신민당과 재야의 통합문제 등 민주회복을 위한 공동 대처방안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새삼 자신의 거취문제를 들고 나왔다. 요컨대, 자신은 신민당에 입당한 바 없는 만큼 앞으로 재야인사들과 협의한 후 정치적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곤혹스러웠다. 나는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직후 윤보선‧김대중 두 사람을 상임고문으로 발표한 바 있었다. 내가 직접 본인들로 승낙을 받아 발표한 것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85쪽.

신민당에서는 내가 조속히 입당하기를 바랐다. (중략) 그 자리에서도 김 총재는 거듭 나의 입당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생사고락을 같이한 재야 민주 인사들과 협의를 해야 했다. 정치권이 침묵하고 있을 때 온몸으로 독재에 저항하며 자유를 외쳤던 동지들과 함께 민주화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순리였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94쪽.

4월 4일 두 번째 회동 역시 양 김의 협력과 재야인사의 신민당 영입이 핵심이었다. 김대중의 입당으로 민주화 세력의 힘을 모으려는 김영삼과,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는 김대중이 평행선을 달렸다. 

나는 김대중이 하루빨리 신민당에 입당해 나와 김대중 두 사람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민주화세력의 힘을 모으는 것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는 표대결이 돼서는 안 된다,” “당헌을 개정해야 한다,” 재야에 문호개방을 늘려야 된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가 신민당에 입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이 신민당에 입당할 것처럼 얘기하면서도, 입당시기는 재야인사들과 논의해 봐야 한다며 자꾸만 대답을 회피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86쪽.

사흘 후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서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두 사람의 평가도 엇갈린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대통령선거에 대한 출마욕구가 민주화추진의 구심이어야 할 신민당에 대한 입당포기로 나타난 것(188~189쪽)’이라고 했으며, 김대중은 “재야인사에 대한 적극적인 영입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395쪽)”고 설명했다.

양 김이 신민당 입당 및 신당 창당과 관련 난항을 겪는 동안, 대학가가 심상치 않았다. 3월 개강을 맞은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생들은 유신 체제에 협력했던 ‘어용 교수 퇴진’을 요구하며 교내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4월 24일에는 서울 14개 대학의 교수들이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80.5月. 서울의 봄 종말


시민들이 '김대중 석방하라'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김대중평화센터
시민들이 '김대중 석방하라'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김대중평화센터

교내에 국한됐던 시위는 5월 초 교문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하에서 학생들의 집회를 격렬해졌다. 김대중은 학생들의 움직임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비상계엄 하에서도 시위는 날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군인들은 시위를 수수방관했다. 학생들 집회와 시위는 반정부 투쟁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이런 학생들 움직임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시위가 격해지면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세력에게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지금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만 있으면 이렇듯 학생들을 만류했다. 신군부는 국민들과 민주화 세력을 분리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 혼란이었고, 그래서 학생들의 과격 시위는 저들이 고대하던 호재였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97쪽.

김대중의 예상대로 투쟁은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5월 13일과 14일에는 주요 도시에서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15일에도 서울역 앞에서 20여개(전두환 회고록에는 80여 개 대학 10만 여명의 학생이라고 명시돼있다) 대학의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학생 대표들은 일단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16일부터 학교로 향하기로 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었다. 

시민들의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군부와 충돌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동안 의사 표시를 분명하고도 충분히 했기 때문에 앞으로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군인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도 이들을 자제하게 만들었다. 모든 주요 도시의 외곽에 군인들이 집중 배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이 같은 움직임에 안도했다. 집에서 회견을 갖고 이를 환영했다. 정말 16일에는 대학가가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99~400쪽.

16일은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대학으로 돌아갔고, 모든 것이 잠잠해진 시점이었다. 그때 폭풍이 밀려들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5‧17 쿠데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의 국내 상황을 안이하게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 같다. 군이 가만히 있었으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안보에 관계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급기야 5월 17일에는 전국 대학의 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정권 퇴진’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는 정보가 사전 입수되었다. 5‧17 계엄확대조치는 바로 이 정보에 근거해 취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날을 기해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서울에서는 군이 투입되었다.

- 노태우 회고록 上편, 242~244쪽.

전두환은 회고록의 100쪽 이상을 할애해 1980년 정국의 혼란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1980년 5월의 위기감은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 다르다”며 안보 책임자였던 본인이 느낀 위기감에 대해 상술했다.

1980년 5월, 결정적 시기가 임박했다고 카운트다운하고 있던 북한의 남침 위협, 과도기의 위기관리 정부를 계속 흔들어대는 정치 혼란, 민중혁명을 하겠다고 헌정질서에 도전하는 폭력시위 속에 대한민국은 결정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그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대비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 전두환 회고록 1편, 370쪽.

 

“진정한 평가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자그마치 18년이었다. 204일간의 봄날은 18년 독재에서 민주화로 소프트 랜딩(soft landing, 연착륙)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역사에 만약(If)은 없다지만, 5‧17 계엄 확대 조치가 없었다면 1987년 민주화가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와 관련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유신에서 바로 민주화로 연착륙(軟着陸)하는 것이 희망사항이었다”면서도 “희망이 현실로 나타날 것인가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강 대표는 “이상적으로 민주화에 대해 생각해보면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군부 독재 이후 바로 민주화로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군부 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길은 소프트 랜딩이 아닌 하드 랜딩(hard landing, 경착륙)이었다. 그리고 경착륙(硬着陸)은 필연적으로 비행기에도, 활주로에도, 균열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크고 작은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경착륙을 막을 다리가 필요했다.

강 대표는 “군사 정권, 민주 정권 등 모든 정권은 역사 발전에 한 가지 역할씩은 해왔다”며 “본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전두환-노태우 두 정권은 87년 체제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전두환-노태우 체제에 대한 평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586세대가 물러나고,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누구나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시기가 왔을 때 비로소 냉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끝)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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