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인터뷰] 정대철 “민주당 복당 결심, 이낙연 대통령 만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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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인터뷰] 정대철 “민주당 복당 결심, 이낙연 대통령 만들려고…”
  • 윤진석 기자,한설희 기자
  • 승인 2020.05.02 11:11
  • 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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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前민주당대표
"코로나 총선, 국가 안정론이 정권 심판론 이겨" "퇴출당한 朴정부 총리가 野 지휘? … 난센스"
"지역주의 동의 No, 영남 민주당 득표율 늘어" “3지대 정치철학 변함없지만 위성정당에 물거품”
“민주당 복당 결심 결정타 계기는 이낙연 때문” “이낙연, 걸림돌 없을 만큼 잘 나가 외려 불안”
“나는 범동교동계이지만 노무현계에 더 가까워” “노무현 대통령 만든 일등공신, 생전 고마워해”
“신민당 전대서 YS 지지한 것은 그가 옳기 때문” “YS 총재 박탈, 부마항쟁 등 역사적 전화점 돼”
“80년 정치규제 묶여 미국 유학, 고생 많이 해” “85년 12대 총선 민한당 출마는 DJ 지시 때문”
“DJ, 민한당이 1당된다 설득, 정작 본인은 신민당” “YS와 DJ 후보단일화에선 DJ가 양보했으면”
“DJ는 화해와 용서의 정치인, 신의·정직은 글쎄” “YS는 순발력·정의로운 정치인, 혜안은 부족”
“단일화 실패 후… 정몽준 자택 찾는 기지 발휘” “3대가 국회의원…정치인 피 흘러, 고난도 많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한설희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 민주평화당 상임고문에서 민생당으로 합류하지 않은 그는 21대 총선 기간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선언했다. 복당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낙연 전 총리를 대선주자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 민주평화당 상임고문에서 민생당으로 합류하지 않은 그는 21대 총선 기간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선언했다. 복당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낙연 전 총리를 대선주자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풍채 좋고 네모반듯하다. 44년생이면 올해 77세.
정정하다. 목소리엔 힘이, 얼굴은 동안.
호걸 형이다.

“타이핑을 부탁해 갖고 오려다, 그냥 갖고 왔어요.”

원본은 본인 앞에 두고 복사 본을 건넨다. 종이 뭉치다. 들춰보니 낱장마다 번호를 매긴 A4용지만 20여 장이나 됐다. 틈틈이 짬을 내어 볼펜을 손에 꼭 쥐고 골똘히 적어 내려갔을 모습이 상상됐다.

“2시간 인터뷰 분량인데.(웃음)”

혼잣말하듯 웃는다. 혹시라도 까먹을까, 미리 준비한 답변이었다. 안 그래도 유창하고 거침없는 입담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놓친 것이 있나, 어느 장에 있는지 대번 기억하곤 뒤적뒤적. 젊은 시절 박사 논문을 쓸 때도 저렇게 논거 순으로 동글뱅이 번호를 매기며 했겠지. 부산스러운 와중에도 꼼꼼함이 십분 발휘됐다. 팔을 뻗었다 접었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 드라마틱한 상황 설명에선 박장대소.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다.

 

원로의 총선 평 … “지역주의 부활 No"


여의도 국회 앞 산정빌딩 통일시대준비위원회. 정 전 대표가 오랫동안 운영해온 사단법인 단체란다. 인터뷰는 지난달 27일 오후 2시에 진행됐다. 편의상 ‘정대철’로 통일.

- 이번 총선 어떻게 봤나요.

“국가 안정론이 정권 심판론을 이긴 선거였어요. 코로나 총선이라고 불릴 만큼 코로나19 사태가 블랙홀이 됐잖아요? 특이한 선거였죠. 영국, 프랑스, 에티오피아, 미국 등 47개국이 선거를 연기했는데, 우리나라는 국가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하고 총선을 치렀어요.

정치 지형상 유권자가 재편됐음이 확인되는 선거였죠. 보통 보수 대 진보가 52% vs 48%, 많이 보면 6대 4였거든요? 확 뒤집어졌어요. 현재는 보수 대 진보가 28 대 62에요. 18대 총선에서는 범보수 대 범진보가 57.5% vs 30.85% 정도. 21대 총선 들어와서는 범 진보가 월등히 늘어난 구조죠. 국민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요. 보수당 하면 강남, 영남, 부자당 이미지가 있어요. 20~40대는 마음을 떠났고, 50대는 정치적으로 진보성향에 가까워요.

한마디로 야당인 보수정당의 실패죠.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까지 4연속 패하고 있어요. 조국 임명 강행과 국론분열, 울산 선거 부정 등의 정부발 악재가 있었지만 이슈화 선점을 놓쳤어요. 지리멸렬한 데다 쇄신마저 부족했어요. 박근혜 정부 때 국민으로부터 퇴출당했는데, 반성도 회개도 노력도 미흡한 거죠.”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이번 21대 총선 평에 대해 보수에서 진보로 주류 세력이 교체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이번 21대 총선 평에 대해 보수에서 진보로 주류 세력이 교체됐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잠시 뜸을 들이곤.

“퇴출 당시 총리가 (야당을) 지휘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죠.”

- 황교안 전 대표요?

“하하하.”

웃어넘겼다.

“민심에 역주행하고 있어요. 민심은 탈이념, 실용주의 노선으로 가는데 보수 노선을 갖고 우기면 쓰나…. 친황(황교안)으로 전향한 친박(박근혜)이 당권을 장악하지 않나, 극단적인 태극기 부대에 휘둘려 중도파를 날려버렸어요.”

- 또 다른 측면은 뭔가요.

“한국 사회 주류가 바뀌었어요.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탄핵, 경기침체 등을 겪으면서 소위 박정희 산업화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 주류가 바뀐 것 같아요. 대안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데도 실패했어요. 탈원전, 소득주도 성장(소주성)이 나쁘다고만 했지 어떤 대안을 내놓았는지는 내 기억에 없어요. 막말과 막장 공천까지… 선거를 지휘하는 인물 면에서도 그래요. 이낙연과 김종인이 대칭한다면 바람을 일으키는, 대선후보와 팔십 먹은 올드보이로 볼 때 김(金)이 패배할 거라는 느낌이 있었죠. 위성정당 문제도 중요한 변수의 요인이었어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를 보완하려고 준연동형제를 만든 건데 다당제 구현은 커녕 군소정당이 없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봐요.”

- 정치적 양극화가 두드러진 선거라는 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런데 이게 중요한 게 지역주의가 부활한 선거는 아니에요. 통계로도 나왔어요. 영남에서 보면 민주당의 정당 득표율은 오히려 상승했어요. 한 일간지 자료에 의하면 정당득표율 경우 20대 총선 37.8%에서 21대 총선 43.5%, 울산은 16.2%에서 38.6%, 경남 29.8%서 37.1%, 대구·경북 24.4%에서 28.5%로 상승추이에요. 선거가 거듭될수록 지역구도가 완화되고 있어요. 다만 이런 현상이 결과론적으로 의석수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인 거죠.”

- 통일 관련 단체를 이끌고 있잖아요? 김정은 중태설이다, 원산 체류설이다 말이 많습니다. 어느 쪽에 무게를 두나요.

“전혀 몰라요. 알 수도 없고, 정부기관에 물어봐야지. 정대철에게 물어봐서야되나. 우린 신문만 보는 거지. 근데 보름이나 지났는데 나와야 되거든요?”

 

3지대와 민주당, 그리고 이낙연


지난 일이지만 4·15총선 전 한창 3지대 빅텐트론이 추진된 바 있다.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등을 둘러싸고 구상됐다. 정대철은 가교 역할의 중심에 있었다.

- 민주평화당 고문일 당시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 영입 추진 등에 노력했는데요, 잘 안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처음엔 3당 의원들의 요청이 있었어요. (바른미래당의)박주선·김동철, (대안신당의)유성엽·장병완, (민주평화당의)조배숙·황주홍 의원 등 20여 명이 몰려왔어요. 홍석현 이사장하고,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을 앞세워 제3지대 빅텐트를 구성하자는 거였어요. 홍(洪)과 성(成)을 만나 그렇게 하자고 크게 합의했어요. 남은 것은 손학규·정동영·박지원 세 당수의 회동. 그런데 안 모여지는 거예요. 손은 박지원 나오면 안 나오겠대. 박은 손학규 나오면 안 하겠대. 정은 박이 나오면 안 된대. 결국 해보지도 못하고 무산된 거예요.”

그리고는

“자기들 책임이지.”

아쉬운지 혀를 찼다.

우여곡절 끝에 정대철은 지난 4월 3일 동교동계의 좌장 권노갑 전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복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불발됐다. 대통령 강성 지지자들의 반발이 심해 무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대철은 “최고위에서 논의해야 하는데 아직 열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는 말로 대신했다.

- 3지대를 모색해온 분이잖아요? 더불어민주당 복귀가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아직도 정치철학의 변화는 없어요. 다만 이 선거법 하에서는 제3당, 4당의 존립이 거의 불가능해요. 그럴 바엔 민주화 세력의 힘을 모아 정권 재창출을 돕자, 차선책을 택한 거죠. 권노갑 전 의원과 고민 끝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제3지대 철학에서만큼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다만 준연동형제에 의해 다당제 구조가 퇴색됨에 따라 민주당 복귀로의 차선책을 택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제3지대 철학에서만큼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다만 준연동형제에 의해 다당제 구조가 퇴색됨에 따라 민주당 복귀로의 차선책을 택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다시 복당 하게 된다면 4년 만이다. 77년 정계에 입문해 5선을 역임하는 동안 평화민주당,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등 주로 민주당사(史)와 함께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민주당 신파와 맥이 닿아있다.

- 민주당 복귀를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뭔가요.

“이낙연 전 총리 때문이죠. 그를 지지하기 때문이에요. 이 전 총리가 강력하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이낙연을 통해 새롭고, 성공할 수 있는 민주정권을 만들어볼 계획이에요. 나와 권노갑 전 의원을 비롯해 10여 명이 도와주기로 했죠.”

두 원로 정치인 외에도 최낙도, 홍기훈, 정호준 전 의원 등 12~13명가량이 복당을 타진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정대철의 아들인 정호준 전 의원은 민주당 복당 선언에 앞서 백의종군을 택했다. 중구성동을 등 총선 출마를 고사한 것이다. 앞으로 이낙연 대망론이 현실화되도록 지근거리에서 돕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 동교동계가 다 이 전 총리를 돕나요.

“나는 동교동계의 이너서클이 아니에요. 광범위하게 김대중계, 김영삼계 하면 김대중계지만… 도리어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최고 수장이지. 어떤 면에서는 중도계고요.”

- 민주당 진영에서는 철새 정치인들이다, 복당은 어림없다, 이런 목소리도 있더라고요.

“난 안철수 밀려고 나간 건데? 국민의당이 민주평화당과 안 갈라졌으면 좋았겠지만…. 우리가 뭔 철새예요. 나하고 권노갑 같은 사람은 정치하려는 것도 아니잖아. 동력이 돼주고 힘만 모아주는 거죠. 지지해주는 것으로 끝이잖아요.”

- 복당이 이뤄지는 건 확실한가요. 

“걱정할 거 없어요. 이 전 총리가 당권을 잡을 거니까.”

- 전당대회 나오나요?

“에잇. 전당대회 나가지 않아도 ‘이낙연 판’인데요 뭐.”

- 이 전 총리는 당내 지지기반이 약하다고 평가 되는데요, 이번에 후원회장 맡은 후보들 중 꽤 당선이 됐잖아요. 의외로 우군이 많이 생긴 게 아닌가요?

“(광주전남의) 이개호 의원 정도가 확실해요. 국민 지지는 센데, 정당 안에서의 지지세는 아직 약한 편이에요.”

- 왜 이 전 총리를 지지하나요. 이낙연 대망론인 이유는요?

“첫째 균형의 정치인이에요. 문 정권에서 주장하는 소득주도성장만 주장하지 않아요. 국회 답변을 보면 기업 파이도 키운다 하고, 자본주의 성장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말해요. 남북문제도 안보를 신경 써야 한다고 해요. 인사 문제도 진보, 보수 안 가린다고 해요. 똑똑하면 쓴다는 마인드예요.

둘째 소통을 잘해요. 선거서 승리해도 겸손하잖아요. 국민과의 소통도 잘하고. 칭찬받게끔 하더라니까. 언론과의 의사소통도 잘할 수 있는 정치인이에요. 셋째, 청렴결백하고 스캔들도 없어요. 정의로운 정치인이에요. 한 번은 국회의원 때인데 동아일보 수습기자라며 나를 찾아왔어요. 서울대 8년 후배더라고. 법과대 70학번이래. 내가 62학번. 대화를 하는데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 대망론을 이어가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하는 것은 뭔가요.

“걸림돌이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잘 나가요. 3년 가까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고 있어요. 그것도 특이해. 최근에는 대선후보 지지도가  40%에요. 홍준표 의원이나 이재명 경기지사는 30% 넘어간 일이 없어요. 어느 후보든 압도하고 있어서 사실 불안해 지기까지 할 정도예요. 너무 매끈해서 말이야. 대답도 실수 없이 잘해서. 뭔가 인간 냄새가 덜 난다? 요런 비판이 나오게 돼 있어요.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 같다, 호남 대선주자라 약한 면도 있다, 이런 평도 있고요.”

- 호남에서의 지지가 꽤 크죠? 

“이번에 열렬히 응원하는 것은,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까지 다 영남이잖아요. ‘김대중 이후 다시 좀 해보자.’, 그래서 뭉친 거예요. ‘다 좋은데 전라도인이야.’ 일반 국민 정서에는 아직도 그런 게 있어요. 나는 이북 실향민의 자손이고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것보다 더해요. 호남민이 그걸 모르겠어? 늘 피해의식이 있어요. 그래서 똘똘 뭉친 거예요.”

- 원로로 봤을 때 이낙연과 대적할 야당 주자는 누구인가요.

“난 모르겠는데. 새사람이 나와야겠는데. 유승민 정도? 세련됐잖아요. 요새 김종인 씨가 잘하던데. 40대 중에서 제대로 된 사람을 골라내겠다면서.”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79년 신민당 전대에서 이철승 당시 총재가 아닌 김영삼 총재 후보를 지지했다. 이유를 물으니 유신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YS 노선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79년 신민당 전대에서 이철승 당시 총재가 아닌 김영삼 총재 후보를 지지했다. 이유를 물으니 유신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YS 노선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민당부터 거슬러…과거로의 여행


정대철 집안은 명망가다. 1944년 서울 경성부 종로에서 관료이자 정치가였던 故정일형 박사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겸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故이태영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친인 정 박사는 평안북도가 고향인 실향민이다. 2공화국의 외무부 장관을 비롯해 2대 국회부터 9대까지 8선을 역임했다. 독립 운동가이자, 건국 공로가, 골수 야당 정치인으로 존경받아왔다. 해방 이후 3대 민의원을 지낸 김판술 전 의원은 생전 당시 정 박사에 대해 “그 좋은 학벌과 배경을 가지고도 독재에 항거하며 초지일관 국민에 대해 야당 정치인으로서 의리를 지켜왔고, 칠순의 나이를 넘겨서도 유신 독재와 싸웠다”고 전한 바 있다.

교수로 있던 정대철은 아버지가 1977년 박정희 유신 정권에 저항하다 의원직을 상실하자, 그해 아버지 지역구인 종로-중구 재보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듬해 신민당에 입당, 78년 10대 총선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한다. 79년 5·30 전당대회에서는 YS(김영삼)를 지지했다. 전당대회 하루 전 비주류였던 김영삼을 재야인사 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을지로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민권의 밤'이라는 단합대회를 갖고 지지키로 한다. 김대중계였던 정대철은 주류였던 이철승 총재 대신 김영삼을 선택했다.

- YS를 지지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신민당에 입당할 당시에는 당수가 이철승 총재였어요. 근데 이 양반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항해 투쟁할 의욕이 없더라고. 반면에 YS는 ‘유신은 귀신이다’, ‘빨리 철폐시켜야 된다’ 강경 투쟁하던 사람이었어요. 나는 그게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DJ는 감옥에 있어서 추종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YS의 부하가 됐지. 이철승 총재는 좀 섭섭해했지만….”

신민당은 YS가 총재가 됨으로써 선명야당으로 바뀌게 된다. 같은 해 8월 YS는 YH무역 노동자의 시위 도중 추락사를 규탄하며 철야농성을 주도하다 의원직에서 제명당한다.

정대철은 YS가 신민당 총재직에서도 박탈당하자 그의 당수 체제를 지지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기에 이른다. 평소 YS 측근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들조차 유신이 무서워 꺼렸던 상황에서는 보통의 결기가 없으면 할 수 없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YS 복직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故예춘호 전 의원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김영삼 총재가 총재직을 박탈당하고, 말도 안 되는 정운갑 대행 체제가 파행적으로 출범했다. 신민당 내에서는 의원 총회를 급히 소집하고 정운갑 권한대행 체제를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반해 이철승, 신도환 등 20여 명의 비주류 의원들이 정운갑 대행 체제를 지지하고 나섰다. 나는 최형우 의원과 손을 잡고 흩어진 의원들을 찾아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상황은 살벌했다. 이미 정부기관과 박 대통령 측에서 김영삼 총재의 정치 생명을 끊으려고 했던 때였기 때문이다. 김 총재를 지지하는 일이야말로 반국가 행위로 몰리는 형국이었다. 나는 그때 30대의 청년으로 겨우 재선 의원이었던 정대철 의원을 찾아갔고 서명해줄 것을 청했다. 그랬더니 그는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가슴에서 펜을 꺼내 정성스럽게 서명을 해줬다. 나는 정 의원의 용단이 고마워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말했더니 ‘선배님 섭섭합니다. 고맙다니요. 옳은 일을 하는데 무슨 고맙다는 말이 필요합니까.’옳은 일이니까 서슴없이 한다는 정 의원의 철학은 백번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처럼 명백하고 옳은 일조차 쉽사리 할 수 없었던 때였다. 결국 42명의 서명을 겨우 받아냈고, YS계 가운데 20여 명은 끝까지 서명에 불참했다.”(<정대철, 유난희 큰 배꼽>중 예춘호 전 의원의 기고 개략)

- YS 지지 자체가 모험이었던 거네요.

“그렇죠. 나중에 부마항쟁에… 朴(박정희)죽고…. (신민당 전대 통해 YS가 총재가 된 일이) 훗날 민주 투쟁의 기폭제를 낳은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민주화 여정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80년 5·17 내란을 통해 전두환 군사정권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 5공화국은 시작과 함께 국회를 폐쇄하고 헌정을 중단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내각이 총사퇴됨에 따라 국회의원이던 정대철도 정치 규제를 당하면서 재갈이 물리게 된다.

- 그 뒤 미국 유학길에 오르잖아요?

“처음엔 (전두환 신군부에서) 안 보내주더라고요. 'DJ는 보내주는데 왜 나는 안보내주냐.'  뭐라 하니까 보내주더라고.”

80년부터 84년 간 정치활동을 규제당하는 동안 정대철은 미국 미주리 주립대학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정치학 박사 학위 과정을 밟은 것. DJ도 미국으로 망명해 낭인 생활을 하던 때였다. 정대철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DJ를 오게 해 그의 정착을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 미주리 대학 일대는 반정부 집회의 시발점이 됐다. 그 모닥불을 정대철이 피운 셈이라는 게 그의 지인인 김봉기 전 고대 교수의 전언이다. 

정대철과 미주리 대학과는 80년 전부터 연이 있어 왔다. 경기중고와 서울대 법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후 한양대 교수로 있다, 72년부터 3년 여간 미주리 주립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과정을 밟기도 했다. 이후 정계 입문 전까지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 미국에 있을 동안 고생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와 미주리 지인들과 은행에서 돈 빌려 세탁소도 하고, 그도 안 되면 조교도 하고, 바텐더도 하고….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애가 둘이었으니까 빠듯했지요. 남들이 하는 고생은 다 한 거지요. 아내가 특히 고생을 많이 했어요. 세탁할 때 생긴 습진이 한국 와서도 많이 괴롭혔지.”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DJ는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 YS는 순발력이 뛰어나고 정의로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DJ는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 YS는 순발력이 뛰어나고 정의로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한당 출마 이유는 DJ 때문


정대철은 귀국해서는 85년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아닌 민한당 후보로 종로-중구에 출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민정당, 신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당시는 1‧2위를 뽑는 중선거구제)

- 원래는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고 싶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다 민한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 건가요.

“DJ가 불렀어요. 민한당으로 나가라는 거예요. ‘봐라, 민한당이 1당이 된다.’ ‘조윤형(민한당 3대 총재)과 내가 민한당을 접수해라.’ 그걸 근거로 대권주자가 되겠다는 게 DJ 심산이었지요. 그런데 민한당은 관제야당이었거든요. 우리로서는 들어가기가 영 껄적지근한 거라. 그런데 우리 보러 들어가라 해놓고 정작 본인(DJ)은 신민당에 들어가더라고요. 깜짝 놀랐지 우리는. 그랬더니 DJ가 ‘YS와 이민우(신민당 총재)가 바람을 일으키더라. 잘못 판단했다고 해요.’ 우리만 희생된 거예요.(웃음)”

- 많이 아쉬웠겠어요.

“내가 ‘뭐요!’ 하니까 (DJ가)‘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6년간 정치 규제로 묶여 있다가 보스(DJ) 말 듣다가 폭삭 망한 거죠.(웃음) 근데 ‘괜찮아, 괜찮아’ 이래. 자기만 괜찮지, 뭘 괜찮아(웃음)”

위트 있게 말했지만 DJ에 대한 서운함이 엿보였다.

- 신민당 돌풍을 이야기할 때 직접 출마했던 종로 선거구가 자주 회자되고는 하는 데요 실제 그 위력이 강했나요.

“강했죠.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엄청났어요.”

- 6월 항쟁을 거쳐 87 체제 이후 YS와 DJ간 야권 후보 단일화가 실패했잖아요, 이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두고두고 회자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당시 YS와 DJ가 단일화를 한다면, 가능하면 DJ가 양보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입장이었어요. ‘노태우 되는 걸 막읍시다’라는 입장이었죠. 그렇지만 실패했고 (둘 다) 떨어졌단 말이에요.”

그 무렵 정대철은 평화민주당 대변인이었다.

“내가 대변인 자격으로 성명서를 냈어요. DJ가 안 내니 나라도 국민에 석고대죄 심정으로 잘못했다 한 거죠."

- 군사 독재를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YS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동의하나요.

“아, 그렇죠. YS, DJ 다 자기 역할이 있었던 거죠. 현실 정치에서 강하게 투쟁한….”

 

정대철이 본 YS와 DJ


그는 두 지도자를 어떻게 평가할까.
 

정대철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는 故정일형 전 국회의원이다. 정 전 아버지와 20년 터울의 DJ는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도 자주 놀러왔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는 故정일형 전 국회의원이다. 정 전 아버지와 20년 터울의 DJ는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도 자주 놀러왔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YS와 DJ는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나요.

“DJ는 우리 아버지하고 20년 차예요.”

정대철 집안과 DJ는 오래전부터 자주 왕래하던 사이였다. 정 박사가 1904년생, DJ는 1924년생이었다. DJ가 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자, 정 박사는 당 사무국장을 맡아 선거를 도와주기도 했다. 20년 터울이던 DJ는 그전부터 정 박사를 잘 따랐다. 집에도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20여 년 터울이던 정대철과도 자연스레 잘 알고 지냈다.

“DJ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아버지 앞에서 담배를 안 피고 꼭 내 방에 올라와 폈어요. 내가 대학생 때였거든. 둘이 맞담배를 폈지요. 당시 DJ는 온건파였어요. 월남 파병도 찬성하고, 한일협정도 찬성하고…. 박정희 독재 체제에 대해 온건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거예요. 젊은 혈기이던 나는 그런 DJ 노선을 존경하기가 어려웠어요. 어릴 때는 용기 없는 정치인, 비굴한 타협의 정치인, 사쿠라(변절의 비유)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머지않아 정대철의 마음도 바뀌게 된다.

"DJ가 죽음을 무릅쓰고 유신 폐지를 위해 강경 투쟁하고부터 존경하고 응원하기 시작했어요. DJ가 우리 아버지를 따랐듯 나도 열심히 그를 따랐어요. ‘DJ 다음엔 정대철이다.’ 그런 말들이 많았지요.”

민주화추진협의회 통일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등을 거치며 DJ의 뒤를 이을 차기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는 얘기였다.

샛길로 빠지다 다시 말을 이었다.

"DJ는 어떤 지도자냐면 온건 타협의 정치인, 화해와 용서의 정치인이라고 생각해요. 대통령 돼서 전두환 불러다 밥 먹이고. 비위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박근혜 불러다가 박정희 용서한다고도 했어요. 감옥 가서 용서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하던데 그걸 지키더라고요. 한 번은 우연히 호텔 다방에서 전두환을 만났을 때가 있었어요. ‘어이! 정 의원님’ 하더니 DJ를 칭찬하더라고요. 허허. 그리고 다 아는 거지만 국난 극복의 정치인이잖아요. 남북 간 긴장을 완화시킨 정치인이기도 하죠. 그걸로 노벨평화상도 받고.”

여기까지 말하다 ‘글쎄’ 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신의의 정치인, 정직한 정치인인지는 난 잘 모르겠어요.”

- 네?

“회의감이 좀 있어요. 첫째는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선 경선 1차 투표 당시 신파 이철승한테 DJ가 약속했거든요. 대권을 자기 밀어주면 당권을 주겠다, 그해 11월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을 당수로 지지하겠다고요. 각서를 써주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DJ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둘째,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두 번이나 번복했어요. 본인 나름대로 해명하기는 했지만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처신했다는 생각이에요. 셋째 김종필 씨와의 내각제 약속도 안 지켰어요. 국민적 지지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하긴 했지만 것도 안 지킨 거죠. 넷째 여하간 젊었을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무서운 정치인인 면도 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으면 평가해야지 안 그래요?”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 YS는요?

"순발력의 정치인. 어떤 순간을 빨리 캐치하고 팍 밀고나가 성공시켜요.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요. 지성적인 정치인은 아니에요.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지는 않았어요. DJ처럼 연설을 시켜도 ‘답답한 사람이다’ 했어요. 그래도 순발력과 밀어붙이는 그 추진력은 참 특별한 능력이에요. 둘째는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길을 가려고 노력한 사람이에요. 금융실명제도 하고, 하나회도 청산하고…. 군대 귀족 쫓아내 정의롭고 뒷배 없는 사람들이 제대로 승진하도록 하고. 단지, 내다보는 혜안이 짧아서…. 국가경제가 곤두박질치고 IMF 상황까지 온 거죠. 그것은 역사적으로 나쁘게 평가를 받았어요.”

- 3당 합당도 정치적 순발력과 연관이 있을까요?

“호랑이굴은 자기 얘기지만, 크게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로서는 대통령돼서 할 일 했다고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대권을 잡기 위해서 한 것을 변명하는 건…. 평가는 반반이죠.”

 

盧 대통령 만든 일등공신인 이유


화제를 돌렸다.

- 아까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공신이라고 했잖아요? 드라마틱한 일화를 들려준다면요?

“내가 노무현(이하 노통)보다 두 살 많아요. 나는 대선에 나가지는 못하고 그냥 관전자였어요. 노통이 대선후보 되고선 새벽 6시 30분쯤 우리 집에 찾아온 거예요. 혼자. 아침인데 맥주를 달래. 깜짝 놀랐죠. 둘이 허름한 아파트에서 맥주 한잔 먹고 얘기하는데…. 나보고 ‘선대위를 맡아 총괄해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당시 상황이 어땠냐면, ‘노무현이 무슨 후보냐.’ 당내 많은 의원들이 창피하다 난리 치던 때에요. 내가 나섰어요. ‘새로 판을 만들 수 없지 않으냐.’ 설득하고 분위기 만들어나갔죠.”

16대 대선 이야기로 접어들자 그의 손동작은  커졌다. 목소리도 더욱 활기차졌다.

“난 선거 사무실을 떠 본 일이 없었어요. 지휘하느라고. 상대편 보니 정몽준이 이회창한테 안 되게 생겼더라고요. ‘후보 단일화 선거 하자.’ 덜컥 일을 벌인 거죠. 가까스로 이겼고. 처음엔 분위기가 괜찮았어요. 그런데 지원유세인가 어디서 노통이 추미애와 정몽준을 세워놓고 추미애를 치켜세우고 했다더라고요? 난 기억에 없어요. 정(鄭)이 기분 나빠서 단일화를 철회한 거예요. 내가 ‘안 되겠다’ 싶어 (당사) 밖으로 나갔죠. 정몽준과는 소주도 마신 사이여서 설득할 심산이었어요. 이거 웬걸. 서울운동장에 있다기에 갔더니 이미 떴대, 국민일보 빌딩에 있다고 해서 가면 집에 가고 없대. 하는 수없이 터벅터벅 당사로 되돌아갔어요. 노통이랑 70여 명이 축 늘어져있더라고요. ‘졌다’ 면서.”
 

정대철 전 국회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일등공신이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 전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을 끌고 정몽준 전 의원 자택에 찾아가자고 한 장본인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일등공신이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 전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을 끌고 정몽준 전 의원 자택에 찾아가자고 한 장본인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순간 정대철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노무현 손잡고 ‘나가자.’ ‘정몽준 집 가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 투표 전날 정몽준 전 의원의 자택을 찾아간 아이디어를 낸 주인공이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듯) 가자는 내 말에 노무현이 펄쩍 뛰면서 안 간대요. 그러거나 말았거나 내가 차에 태웠어요. 제3한강교 지나갈 땐데 ‘차 돌려!’ ‘안 해!’ 이러더라고요. 내가 만류하고, 다시 쫌 가다가는 ‘차 돌려!’ 여의도서 신촌으로 가는 동안만 차를 세 번이 돌렸죠.(웃음)”

박장대소했다.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당시 정몽준은 평창동에 살았어요. 딱 가니까, 기자들이 와있더라고.”

정대철은 절호의 타이밍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서글픈 표정만 짓고 있자. 그럼 동정 받는다.’ 내 동물적인 감각이었어요.”

- 미리 기자들을 불렀던 건가요?

“(고개를 저으며) 안 불렀어요. 다만 (노무현 대통령이) 서글퍼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있는 장면, 그게 국민 정서를 자극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일화는 계속됐다.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알죠? 그 당시 성공회 신부였는데, 내가 불렀어요. (노무현 대통령) 뒤에 서서 기도하게 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정몽준 마음을 돌려주시고….’ 나도 그 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핑 나더라고요. 자칫 카메라 비치면 웃기는 장면이 되니까, 울지 말라고 발을 꾹 밟기도 하고… 안 보이는 데서 눈물 훔치고. (사이) 차타고 당사로 다시 돌아갔죠. 그런데 의원들이 ‘방송으로 다 나갔다’ 면서….”

새벽 신문 1보에서도 전날 밤의 생생한 기록이 대서특필됐다. 그리고 맞은 투표 당일(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역전극을 반복하다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  동정론이 효과를 발휘한 거네요.

“단일화가 불발된 악영향보다 동정론이 심화돼서 표를 얻을 거로 예상했거든요. 직감적으로. 맞아떨어진거죠. 정치를 수십 년간 했으니까요. (사이) 노무현 대통령이 늘 고마워했어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했어. 형.’ 이러면서.(웃음)”

호탕한 웃음이 한바탕 들렸다. 돌이켜 생각해도 “정말 잊을 수 없는 일” 이라는 듯 희열에  찬  웃음이었다.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정치는 운이 많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보다 똑똑한 정치인들이 많았지만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정치는 운이 많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보다 똑똑한 정치인들이 많았지만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많이들 그러더라고요. 대통령 되는 건 결국 운이라고….

“정치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어요. 근데 아니야. 내 보기엔 운이 9, 기가 1이에요.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다 최고로 똑똑해서 됐나? DJ가 이회창보다 똑똑해서? 두고 봐야 해요.”

- 애석한 사람은 누구로 보나요.

“다 애석해요. 나도 애석하지. 왕년에는 대권주자였는데.(웃음) 그리고 이회창.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슬슬 마무리를 지었다.

- 앞으로 우리나라에 필요한 지도자는 어떤 유형인가요.

“3가지예요. 첫째는 시대적 소명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 즉 남북 공존의 평화를 열 수 있는 사람, 둘째는 개혁을 통해 부정부패 없애고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 셋째는 보편적 복지를 실천해 격차를 없애고,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사람. 이런 지도자가 필요해요.”

 

정치인의 피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솔직하고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편협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드는 데 사명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전 국회의원은 솔직하고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편협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드는 데 사명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치는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정대철도 비슷한 말을 평소에 했다고 들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했다.

“민족주의, 배타주의, 감상주의, 흑백논리…. 우리가 다 극복해야 할 것들이에요. 나만 해도 ‘경기고 나온 놈이 어떻게 김대중을 지지해’, 이런 야유를 들었으니…. ‘광주일고 출신이 김영삼 밀면 동창회 모임은커녕 지역서 살기도 어렵다’는 말도 있었어요. 지연·학연·혈연 이런 편협주의 다 없어져야 해요. 장기적 안목에서 정치의식 구조가 바뀌어야 해요. 내 정치 사명도 거기에 있고요.”

문희상 국회의장 부자 논란처럼 지역구 물려주기 등 정치적 세습 논란이 빈축을 산 바 있다. 과거 통용되던 것들도 국민 인식이 바뀌면서 용납되기 어려워진 측면들도 적잖다. 정치인의 자녀들 또한 부모의 후광을 극복하고 인정받기는 전보다 더 어려워진 셈이다. 그에게도 슬쩍 화살을 돌려봤다.

- 정치에서도 세습 논란이 문제였잖아요?

“아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바람이 새듯.

“우린 정치인의 피가 흘러요.”

그러면서 자신은 어떻게 처음 당선이 됐는지 못다 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들(정호준)도 1억 원 가까운 대기업 연봉을 받다 직장을 그만두고 정치인의 삶을 살겠다며 터닝 포인트 한 일화까지 술술 넘어갔다.

3대가 국회의원을 지냈다. 아버지는 8선, 본인은 5선, 아들은 초선이니 도합 14선이다. 부인 또한 자유당과 공화당 때의 무임소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故 박현숙 여사의 손녀이다. DNA로 치면 완벽한 정치적 뿌리를 지닌 것이다.

화려한 명문가로 부를 누렸을 것 같지만. 실제는 아닌 듯싶었다. 파란만장한 정치적 격랑 속에서 고달픈 야당 정치인의 녹록지 못한 고난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일생 퍼주는 성격도 한몫하는 듯했다. 25년간 열두 번 이사를 한 만큼 그 또한 결혼 후 19년 만에 처음 집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한쪽에 비치된 <정대철, 유난히 큰 배꼽>(정대철 사랑 모임 펴냄)을 꺼내 하나씩 쥐어줬다. 왜 유난히 큰 배꼽인지, 책장을 넘기면서 알게 됐다.

1944년. 그가 태어난 해다. 정 박사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회를 주선하고 항일운동을 하다, 평양 감옥에 수감됐을 때다.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이 여사는 외숙모의 도움으로 차디찬 바닥서 아이를 낳았다. 가위도 뭣도 없을 만큼 형편이 여의치가 못했다고 한다. 하는 수없이 외숙모가 치아로 탯줄을 끊어 오이만큼 부풀어진 배꼽을 얻게 됐다는 사연이었다.

책을 덮으며. 겉표지 위로 젊은 시절 정대철의 모습이 담겼다. 최근 선풍적 인기를 끈 미스터 트롯 경연대회의 한 출연자 얼굴과 겹친다. 귀염상이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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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2020-05-02 12:32:12
숟가락 얹지 말고 빠지세요. 뭘 만들고 자시고 한다고 되는게 대통령 입니까? 국민의 선택입니다~

아이고 2020-05-02 15:05:11
국민위에 정대철이라는 오만이 가득하네.
뭘 만들고 말고 하나? 좀 쉬세요!!!!!!!!!!!!!
이낙연 전 총리님이 이런 분들 가까이 하면 대권 근처도 가기전에 아웃된다는건 아시겠지.

dd 2020-05-02 12:03:42
대철아, 부끄럽지두 않니? 지조를 좀 지켜라.

구강회 2020-05-03 00:25:00
그냥 가던길 가시지요? 우리 지금 잘 하고 있거든요.

Gdgg 2020-05-02 21:32:09
진짜 대통령 만들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사시오.
당신이 설치면 될것도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