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생존] 미래연대에서 ‘길’을 찾다
[보수의 생존] 미래연대에서 ‘길’을 찾다
  • 한설희 기자
  • 승인 2020.05.16 1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대역행 DJ vs 주류역행 盧…"지역등권론 내세운 DJ, 용서할 수 없다"
大慘敗 통합당 자성 위한 모임…16대국회 소장파 모임 '미래연대'가 始祖
미래연대 막전막후(幕前幕後) 중심엔 이회창…2002 대선 이후 분열 가도
"주류만 쫓다 평생 비주류"…미래연대 선배가 후배 정치인에게 남기는 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통합당은 참패했다. 패인은 우경화(右傾化)다. 다만 아직 극우에 매몰되지 않고 당의 쇄신을 주장하는 비주류들이 있기에 희망도 있다. 〈시사오늘〉은 개혁보수모임 시조(始祖), 미래연대(2000)로부터 통합당 ‘혁신의 길’을 찾아 봤다. ⓒ시사오늘 김유종
통합당은 참패했다. 패인은 우경화(右傾化)다. 다만 아직 극우에 매몰되지 않고 당의 쇄신을 주장하는 비주류들이 있기에 희망도 있다. 〈시사오늘〉은 개혁보수모임 시조(始祖), 미래연대(2000)로부터 통합당 ‘혁신의 길’을 찾아 봤다. ⓒ시사오늘 김유종

 

시대역행자 DJ, 주류역행자 盧


“나는 김대중을 용납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반역사적 행위를 저질렀다.”

1995년 6월,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노무현은 같은 민주당, 그것도 민주당 주류 계파의 수장(首長)이었던 김대중(DJ)과 맞섰다.

그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었다. DJ가 선거를 이기기 위해 ‘지역할거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지역 등권론’을 내세워 호남 및 비(非)영남인들의 억눌려있던 지역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에 화답하듯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JP)도 “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 사람들을 ‘핫바지’라고 괴롭힌다”면서 ‘충청 핫바지론’을 들고 나왔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영남과 호남, 그리고 충청으로 삼분(三分)되고 말았다.

평생을 한국정치 속 지역주의 망령과 싸워온 노무현에게, DJ의 행동은 순리를 거스르는 ‘역행(逆行)’이자 민주주의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것과 같았다. 노무현은 그의 정당 인생 대부분을 DJ의 동교동계, 즉 구태(舊態) 주류에게 반기를 들고 ‘역행(逆行)’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행보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지를 받았고, 결국 그는 대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大慘敗 통합당 자성 위한 모임…始祖는 ‘미래연대’


노무현의 역행은 현재의 미래통합당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통합당은 참패했다. ‘참패’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대참패’ 수준이다. 상대편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0대 총선부터 시작해 2017 19대 대선, 2018 지방선거, 이번 21대 총선까지 4연승을 기록했다. 올해 총선에선 1987년 개헌 이후 최대 의석수라는 177석까지 얻었다.

통합당의 구구절절한 패인은 쉽게 한 단어로 요약된다. 우경화(右傾化).

이들은 탄핵 사태 이후 개혁에 실패했다. 일부 개혁파가 ‘뭐라도 해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바른정당을 꾸렸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고 ‘도로 새누리당’으로 회귀했다. ‘황교안 체제’라는 통합당은 그의 명성답게 새누리당 시절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고 태극기 부대와 손을 잡았다. 극우보수 세력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며 ‘콘크리트층’에 좌표를 뒀다.

당이 시대를 역행하니, 민심도 당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2008년 18대 총선에서 얻은 지지율 51.2%는 현재 34.3%까지 쪼그라들었다. 언론에서는 ‘보수의 위기’, 나아가 ‘보수의 궤멸’을 논하는 상황이다.

다만 극우에 매몰되지 않고 당의 쇄신을 주장하는 비주류들도 있다. 앞서 언급된 바른정당계 의원들과, 이제 막 등원(登院)을 앞두고 있는 21대 초선들이다. 김웅 당선자 등 초·재선 10여명은 당 쇄신을 위한 조직을 결성 중이다.

보수 정당 안에서 개혁을 꿈꿨던 자들의 모임은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미래연대(16대 국회)·새정치수요모임(17대)·민본21(18대)·아침소리(19대)·새누리당 혁신 모임(20대) 등 보수당 ‘소장파(少壯派)’는 비록 소수였음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2020년의 신(新)소장파는 통합당의 5연패를 막을 수 있을까.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선 먼저 이들의 시조(始祖)인 ‘미래연대(2000)’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작은 야심찼으나 분열로 마무리됐던 미래연대의 도전은 이들에겐 좋은 스승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미래연대 막전막후(幕前幕後) : 기


미래연대의 기점(起點)과 종점(終點)에는 이회창이 있다.ⓒ뉴시스
미래연대의 기점(起點)과 종점(終點)에는 이회창이 있다.ⓒ뉴시스

미래연대의 기점(起點)과 종점(終點)에는 이회창이 있다.

3당 합당을 통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집권으로, 보수엔 주류 격변이 이뤄졌다. YS는 당선 후 15대 총선 ‘개혁공천’을 통해 신한국당에서 민정당(민주정의당)계를 축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3~5공화국 출신의 ‘구보수’에서 민주계라는 ‘개혁보수’로 보수당의 중심 세력이 변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허주 김윤환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와 손을 잡는다. 그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청산’을 전면에 내걸었고, DJ 비자금 수사 연기를 이유로 ‘YS 인형 화형식’까지 벌였다. 이회창과 함께 부활한 민정계는 ‘이회창계’를 이루며 신한국당 주류로 올라섰고, 민주계는 비주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 JP와의 연합(DJP 연합)으로 97년 대선에서 승리한 DJ에겐 ‘우경화’라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이에 DJ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젊은 피 수혈론’을 내세워 ‘386운동권’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혁신을 꾀한다. 여기에 시민단체인 총선시민연대(박원순 공동대표)가 ‘낙천낙선운동’으로 가세하면서 정치권엔 일명 ‘바꿔’ 열풍이 불었다.

이회창 체제의 신한국당도 한나라당이라는 간판 아래서 정치권의 개혁 열풍에 편승해 윤여준 여의도 연구원장과 함께 ‘젊은 피’ 수혈에 나섰다. 이때 집결한 신진 정치인들이 바로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미래연대가 된다.

이에 대한 정태근 전 의원의 회고.

“미래연대는 이 총재의 공천으로 탄생한 조직이다. 이때 공천으로 김윤환·이기택·신상우 등 구세력들이 정리되면서 386 중 오세훈·원희룡·고진화 등 젊은 인사들이 미래연대에서 세를 결집해 개혁보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미래연대에서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역할인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이이재의 증언.

“16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독식하는 분위기였다. 민주당은 386 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영입해서 젊은 세대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나라당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여준 전 장관이 이회창 총재에게 젊고 참신한 인물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 총재는 15대 재보선으로 원내에 입성한 남경필 지사에게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남 지사는 33세의 나이로 한나라당에서 가장 젊었다.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성식, 김부겸, 김영춘, 정태근, 고진화 등과 함께 모임을 만들기로 하면서 미래연대가 시작됐다.”

미래연대 출범 준비식엔 남경필, 김부겸, 김영춘, 심재철, 김영선, 이성헌 등 정치인들과 이명우(이회창 계), 김성식(김덕룡 계), 차명진(김문수 계), 신동철(신상우 계)등 국회의원 보좌진, 임대윤 대구광역시 동구청장 등 지방자치단체장과 학계 대표들을 합쳐 총 55명이 참여했다.

野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출범

야권 내 ‘젊은 피’들의 모임인 미래연대가 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창립준비위 출범식을 가졌다. 이로써 야권에서도 국민회의의 ‘젊은 한국’에 대응하는 30.40대 청년정치 모임이 결성돼, 여야를 경계로 한 젊은 정치세대들의 경쟁과 대결이 주목된다.

(중략) 구태정치 극복과 21세기 새정치 실현을 기치로 내세운 미래연대는 이날 창립준비 취지문을 통해 “현시점에서 정치개혁의 시작은 ‘1인 보스에 의한 지역할거 정치’의 극복에 있다”면서 “집권정당이 아닌 야당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중략) 미래연대는 앞으로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해 10월말이나 11월까지 3백여명의 회원을 확보, 창립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또 내년 총선을 통해 정계진출을 적극 시도할 계획이나 일부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 참신한 정책을 뒷받침하고 민의를 전달하는 창구역할을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래연대는 ‘연령층이 비슷하다’는 것을 빼고는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며, 기성정치권의 영향 하에 있었던 인물들이 많다는 점에서 당내외적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어느 정도 낼 수 있는 지 주목된다.

-〈조선일보〉, 1996년 9월 26일 기사

 

미래연대 막전막후(幕前幕後) : 승


미래연대라는 ‘새 얼굴’을 앞장세운 한나라당은 16대 총선에서 영남 몰표와 수도권 일부 지역을 기반으로 133석을 얻어 제1당 자리를 지킨다. 당의 선대위를 맡아 진두지휘했던 이회창 총재와 그의 민정계 측근들, 즉 ‘이회창계’도 주류 계파로 떠오른다. 이회창은 ‘제왕적 총재’로 불릴 만큼 비대한 권력을 가졌다.

미래연대의 주축들도 이때 대거 원내에 진입했다. 대표적 소장파 남경필·원희룡·정병국을 포함해 김부겸·김영춘·안영근·박종희·심재철·김성조·심규철·임태희·오세훈·윤경식·이성헌 총 14명이 당선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미래연대 원내 회원들은 2000년 7월 국회연구단체인 ‘미래산업연구회’를 창립하면서 정책 연구에도 앞장서는 등, 당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한나라당 권력의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이재에 따르면, 미래연대는 ‘깨끗한 이미지’를 내세워 16대 국회 초반엔 당 지도부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기도 했다.

“변호사 출신으로 깨끗한 이미지였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운동권 출신으로 학력고사와 사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원희룡 지사, 이회창 총리실에서 있었던 정두언 의원, 미스코리아 출신 경제학 박사 한승민 씨 등이 합류하면서 미래연대는 절정을 이뤘다. 2000년 1월 16일 공식 창립식을 가졌다. 미래연대 멤버 중 14명이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미래연대는 당선된 현역의원, 당협위원장, 외부 전문가그룹 등으로 나뉘었다. 당시 당 지도부도 무시할 수 없는 개혁·소장파로서 세력을 구축했다.”

정태근 역시 미래연대가 당의 혁신작업을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미래연대 내 원내외 인사들은 국가보안법 등 개혁적 법안을 개편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당내 주류였던 최병렬·김기춘 등과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면서 당의 혁신을 주도했다. 경제 민주화론도 이때부터 논의된 거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래연대와 이회창 총재의 사이는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김영춘은 “당에서도 젊은 정치인들이 선봉에 서자는 분위기”였다면서 당시의 이회창 총재는 ‘개혁보수’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젊은 의원들이 당에 많이 들어왔다. 젊은 사람끼리 뭉쳐서 개혁 작업의 선봉에 서자는 취지가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그땐 이회창 총재와도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고, 우리도 그를 ‘개혁보수’로 인정했다. 그때까진 이회창계 사람들과도 일종의 ‘동반자’ 개념이 있었던 것 같다.”

미래연대 대표로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는 등 신진개혁인사로 주목받던 김부겸 역시 “거기까지는 그랬다. 갈등이 첨예하게 된 것은 그 이후”라고 동의했다.

정태근은 “이 총재가 아닌 소위 ‘캠프7인방’과의 갈등은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고 첨언했다.

 

미래연대 막전막후(幕前幕後) : 전


그러나 2002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대선 주자 이회창과 미래연대는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민정계가 포함된 ‘구보수’는 낡은 이미지로 인해 청년 지지율을 끌어오지 못했다. 이에 김영춘·원희룡·권택기·미래연대 회원들은 2030 지지율을 높이고자 ‘2030 위원회’를 꾸리고 대책을 마련했지만, 이회창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이재는 당내 주류 세력들이 ‘이회창 대세론’으로 자만에 빠져 개혁파의 의견을 묵살했다고 털어놓았다.

“2002년 노무현 대 이회창 대선 구도에서, 이 총재의 2030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미래연대가 주축이 된 2030위원회를 발족했다. 김영춘 전 의원이 본부장을, 원희룡 지사가 부위원장을, 권택기 전 의원은 기획실장을, 나는 조직단장을 맡았다.

김영춘 전 의원은 이회창 선대위 회의만 다녀오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당 지도부가 2030위원회 기획안을 거절하거나 보류시키기 일쑤라고 말했다. ‘이기는 선거’에서 이것, 저것 하느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김영춘 전 의원이 선대위 회의 때마다 기획안을 보고하면 당 지도부는 ‘쓸데없는 일 좀 벌이지 말라’라고 말했다. 지도부는 ‘이회창 대세론’에 푹 빠져 있었다.”

김영춘은 대선이 가까워지자 이회창이 수구보수로 회귀하면서 사이가 악화됐다고 주장한다. 다만 미래연대 안에서도 ‘친이회창’과 ‘반이회창’이 나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미래연대가 빠른 속도로 붕괴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전까지 ‘제왕적 총재’라거나 ‘이회창 독재’라는 말은 미래연대 안에선 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2002년 대선 직전, 이회창 총재가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TK 민정계라는 ‘올드보이’들의 편에 서버렸다. 구보수 세력의 손을 먼저 잡고 당을 이끌고 나가는 바람에 서로 관계가 결렬됐다.

이 총재가 민정계에 업혀 개혁보수가 아니라 수구보수로 회귀하고 있다고 판단해 자주 충돌했다. 그러나 미래연대 안에서도 개혁적인 사람들은 이회창 총재와 싸웠고, 많은 경우들은 그의 손을 잡고 옹호했다. 그들 주장을 들어보면 이회창 대세론에 편승해서 대선 때 따라가자는 거다. 결국 미래연대는 대선 전부터 ‘친 이회창’과 ‘반 이회창’으로 갈라져 회복할 수 없는 내상을 입었다. 사실상 2002년 대선부턴 미래연대는 유명무실한 조직이 돼버렸다.”

미래연대 소속의 박종희 전 의원 역시 김영춘 의견에 일부 수긍하고 있다. 그는 남경필·오세훈·심규철·김영춘·김부겸 등 미래연대의 핵심 세력들이 ‘이회창 대세론’이라는 주류에 편승하면서 조직이 기성 정치와 다를 것 없어졌다고 비판한다.

“특히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 총재가) 미래연대 소속 의원들을 ‘정권교체의 전위대’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균열이) 더 심해졌다.

모임 좌장격인 남경필 의원은 대변인, 오세훈·심규철·김영춘·김부겸 의원 등은 청년·홍보·디지털 위원장 등 당직을 맡으면서 이회창 총재의 액세서리 내지 백댄서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당직을 맡지 못한 소장파들은 연신 총재실 주변을 기웃거리며 눈도장을 찍기도 해 도마 위에 올랐다.

이후 미래연대는 총재의 독주에 쓴 소리를 하긴 했지만 어느새 ‘이회창’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들면서 그 목소리마저 잦아들고 기성 정치인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행태를 보였다는 지적도 받았다. (중략) 미래연대에서는 대선 후보로 개혁 성향인 이부영 의원, 최고위원은 김부겸 의원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도 만들지 못했고 최고위원 진입도 실패했다.”

 

미래연대 막전막후(幕前幕後) : 결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면서, 미래연대는 분열 수순을 밟는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면서, 미래연대는 분열 수순을 밟는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일각의 우려대로 16대 대선에서 ‘재수생’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패했다. 득표율은 48.91% 대 46.58%. 근소한 차이였으나 미래연대는 패인을 다시 ‘수구화’에서 찾았다. 이들은 정당 내부 문제를 비롯해 경제·대북·외교 등 사회 여러 방면으로 개혁의 목소리를 내며 한나라당의 주류와 부딪혔지만, 한계를 느끼고 하나 둘 씩 당을 떠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나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바꾼 ‘독수리 오형제’다. 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 등 ‘강경 개혁파’에 속하던 이들은 2003년 7월 결국 한나라당을 떠난다.

정태근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선을 지니까 개혁파 중 탈당파가 발생했다. 김부겸·안영근·김영춘 등 미래연대 멤버는 나와 고진화에게 함께 탈당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들과 이회창의 직접적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 중 이부영 의원은 직선제를 통한 당 부총재를 역임했던 ‘거물급 인사’로서 파격적인 행보였다. 다음은 그가 설명해 준 탈당의 배경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분위기가 주류 쪽으로 지나치게 쏠려 있었고, 소수파의 목소리는 지탄받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한나라당 안에서 ‘신(新)주체론’을 주장했다. 공화당-민정당-민자당으로 이어진 노선은 지금같은 데탕트(탈냉전) 시대에 맞지 않으니, 우리도 시대에 맞춰 당 안에 있는 젊은 인사들을 주축으로 새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내용이었다.

신주체론에 따라 DJ의 6·15 남북정상선언도 지지했다. 그러니까 최병렬, 김태호 등 당내 극우 인사들이 나더러 그 자리에서 ‘당을 떠나라’고 그러더라고. 자기들하고는 체질이 맞지 않으니 당원들이 뽑은 부총재더러 떠나라는 거다. 그 사람들이 이 총재에게 가서 ‘이부영은 빨갱이’라고 하니까 그걸 믿었는지 사람을 통해 ‘빨갱이가 맞느냐’고 확인을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저런 사람이 대통령 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총재와 당에 대한 실망이 커져 그때부터 미래연대 사람들과 당을 떠날 준비를 했다. 처음엔 원희룡부터 남경필까지 약 10명에게 동의를 얻었는데, 다들 빠지더니 마지막엔 다섯 명 ‘독수리 오형제’만 있었다.”

김부겸의 증언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한나라당 주류와는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이 표방하는 정강정책과 개인 정체성 사이에서 괴리감이 생겼다. 좋은 뜻을 갖더라도 그 당의 본질을 바꿀만한 힘은 없었다. 대북송금 특별검사 반대, 국가보안법 개정 내지 폐지 주장, 미국이 하려고 했던 MD(다국적미사일방어체제) 참여 반대 등 사사건건 당 내 주류 생각과 내 생각이 부딪쳤다. 그러면서 점차 시달렸고 ‘정치적 왕따’가 됐다. 결국 못 견딘 거다.”

미래연대는 다섯 명의 이탈 이후 남·원·정 소장파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지만 세의 약화로 크게 활약하진 못했다. 그러나 일부는 포기하지 않고 17대 국회에서 ‘새정치수요모임’으로 재단장해 새로운 정풍 운동을 펼쳤다.

 

“주류만 쫓다간 평생 비주류”…미래연대가 남긴 교훈


미래연대부터 시작해 새정치수요모임(17대)·민본21(18대)·아침소리(19대)·새누리당혁신모임(20대) 등 보수당 ‘소장파(少壯派)’는 비록 소수였음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시사오늘 이근
미래연대부터 시작해 새정치수요모임(17대)·민본21(18대)·아침소리(19대)·새누리당혁신모임(20대) 등 보수당 ‘소장파(少壯派)’는 비록 소수였음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시사오늘 이근

이회창 및 구보수계 기득권과 맞섰던 미래연대는 아쉽게 끝맺었지만, 그 불씨는 아직 통합당에 남아 있다.

올해 총선에서 통합당 당선자 103명 중 58명, 즉 56.3%는 초선이다. 이는 47.2%의 민주당보다도 높은 수치다. 선거 참패로 주류의 권력 공백이 발생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당 쇄신 활동의 적기라고 할 수 있다. 비주류가 주류를 역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보수당의 쇄신파는 선거철엔 기득권의 ‘이미지 메이킹’을 돕는 액세서리로, 때론 원내 거수기로 이용되기도 했다. DJ를 따라 ‘바꿔’ 열풍에 편승했던 이회창으로부터 탄생한 미래연대도 어쩌면 시작은 그랬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보수 정당은 이들 개혁파를 전면에 내세울 때에서야 성공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7대 대선에서 개혁 소장파가 지지했던 이명박 후보가 48.67%의 득표율로 정동영 후보(26.14%)를 크게 이긴 것이 대표적이다. 앞서 두 차례 대선에서 모두 패했던 이회창 전 총리와 다르게 개혁파를 포용하자마자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이회창 전 총리가 TK(대구·경북)를 중심으로 한 강성보수 결집에 ‘올인’한 반면, 이명박 후보는 보수정당 후보였음에도 지나치게 보수색을 띠지 않고 중도 진영에 자리를 잡았다. 개혁파는 그렇게 ‘표의 확장성’ 능력을 증명했다.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수구보수에 맞설 후배들이 가져야 할 소명 의식으로 보인다. 중도 표심을 놓고 진보와 치열한 다툼을 벌여야 하는 까닭이다.

여기, 역행을 시도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혔던 선배 정치인들이 후배들에게 남긴 메시지가 있다.

“결과는 아쉬웠을지 몰라도 미래연대의 과정은 틀리지 않았다.”

“주류를 뚫고 넘으려면 국민의 힘을 믿고 올곧게 지속적으로 바꿔내고자 하는 노력이 따라줘야 한다. 조금 도전하다가 안 되면 포기해버리는 식의 일회적인 도전으로는 어림없다.”

“미래연대 대다수는 보수 정당 안에서 기득권 세력에게 끌려 다니면서 정체성을 잃고 분열됐다. 이회창 총재든 또 다른 당권파이든, 압도적인 기득권의 벽을 마주한 젊은 정치인들이 공천이니 뭐니 여러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순응하고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미래연대 가치를 던져버린 데서 비극이 시작된 거다.”

“지도부 눈치, 주류 눈치를 봐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는 것은 개혁주의자의 말이 아니라 현실주의자의 말이다.”

“기성주류의 뒤만 좇아다니면 영원히 주류가 될 수가 없다. 기존 주류와 정면승부하고 정당의 기본 틀과 문화를 바꿔내는 혁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기존 정당의 아류 내지 꼬마밖에 안 되는 거다.”

“개혁마인드로 무장한 사람이 나서야 한다. 그래야 시대변화와 국민의 민심을 읽고, 당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리더십을 구축할 수 있다.”

“쇄신의 목소리는 항상 다수의 목소리가 아닌 소수의 목소리일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장이 관철됐을 때는 나름 보람을 느끼지만 다수 당내 의원들과의 생각의 차이로 이뤄지지 못할 때는 좌절감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정치 아닌가. 모든 걸 우리 뜻대로만 한다면 쇄신파가 아니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고 정치개혁을 일구는 자세다.”

“이젠 시대 변화에 당이 부응할 수 있도록 만들고, 무조건 지키는 것이 보수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국 보수당처럼 사회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고 혁신 주체들이 철학이 있어야 한다. 무엇인 혁신인지, 혁신에 대한 철학과 가치를 분명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 막연히 ‘혁신’, ‘혁신’말만 하면 당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미래연대는 후에 친이계로 모였지만, 동시에 MB를 견제하는 역할도 했다. 4대강 사업을 순차적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소득세법 개정도 추진했다. 정동기 민정수석이 감사원장 가는 것을 낙마시킨 것도 사실 우리 소장파가 한 일이다. 후배들이 ‘보스’를 따르더라도 이런 정신을 이어받았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이이재 2015년 본지 인터뷰
김영춘 2020년 인터뷰
김부겸 2012년 본지 인터뷰
박종희 자전 에세이 <꿈은 좌절마저 삼킨다>
이부영 2020년 인터뷰
이기재 2017년 본지 인터뷰
정병국·황영철·김영춘 2012년 본지 인터뷰
정태근 2020년 인터뷰

* 그 외 답변주신 미래연대 전 실무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더불어민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