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 “나는 DJ에 헌신…, 돌아온 건 외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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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나는 DJ에 헌신…, 돌아온 건 외면뿐”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11.08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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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40대 기수론’에 동참시키며, 그를 정치지도자 만든 주인공

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얘기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정치인이 ‘후농(後農) 김상현’이다.

민주당 김상현 전 의원은 19살 때 DJ를 만나 정치를 시작했다. 오늘날의 DJ가 있기까지는 후농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정치권에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난 8월 13일 DJ가 서거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김 전 의원의 이름은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왜일까?

DJ와 함께한 그의 정치역정을 듣기위해 지난 2일 여의도 후농청소년문화재단에서 김 전 의원을 만났다.

▲ 김상현 전 의원은 DJ를 40대 기수론에 동참시킨 주인공이다     © 시사오늘 권희정
후농, ‘40대 기수론’에 동참시키며 DJ 정치지도자 만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에 참여하기를 망설였는데 김상현 전 의원께서 적극적으로 설득해 김 전 대통령이 뛰어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김영삼과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왔지만 김 전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지 않으면 앞으로 지도자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수 있으니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고 했더니, 김 전 대통령은 ‘아무런 준비도 안됐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선언이 준비’라고 설득했습니다. 제가 서울의 ‘뉴 서울호텔’에서 차 한 잔 하자고 만난 자리에서였습니다. 저는 김 전 대통령에게 40대 기수론에 참여해야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김 전 대통령이 ‘하루만 생각하고 내일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음 날 ‘풍림’이라는 한정식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40대 기수론에) 동참의 뜻을 밝혔습니다. 나 아니었으면 김 전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에 참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당시 신민당 3선이었던 김영삼(YS) 의원은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것. 이에 당내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유진산은 “YS의 대선출마는 그야말로 구상유치(口尙乳臭)”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이후 DJ와 이철승이 대선후보경선에 뛰어들자 ‘40대 기수론’은 신민당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진산은 ‘불출마’를 선언하는 대신 YS DJ 이철승 중 한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YS와 이철승은 찬성했고, 자신을 지지해줄리 없다고 판단한 DJ는 이를 거부했다. YS와 이철승은 유진산을 만나, ‘유진산이 추천하는 후보를 밀겠다’고 서약했다.

70년 9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유진산은 “나는 당수로서 YS를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YS는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눈앞에 와 있었다.

하지만 결선투표를 앞두고 이철승의 배신으로 DJ가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DJ는 신민당 대선후보가 됨으로써 정치지도자로 발돋음하는 기폭제가 됐다.

84년 민추협 탄생때 “참여말라” DJ 메시지 묵살한 김상현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언론에서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을 김 전 대통령이 만든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 전 대통령은 반대했고 김 전 의원께서 주도적으로 만든 것 아닌가요.

“김 전 대통령은 민추협 구성에 반대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을 선언했을 때인데 저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만나 정치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민주화추진 간담회’로 이름을 정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구국’과 ‘투쟁’ 두 단어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구국투쟁동지회’라고 하자고 했었습니다. 결국 명칭은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됐지요.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앞장서야 민주세력이 활성화된다고 여겼지만 미국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YS하고 손잡지 마라’며 저를 말렸습니다.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같은 동교동계 가신그룹은 민추협에 참여를 안 했지요.”

1984년 김영삼의 단식투쟁 1주년을 기해 탄생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민추협은 민주산악회와 YS의 단식투쟁이라는 밑거름, 그리고 동교동계와의 연합을 통해 이뤄졌다.

민추협이 결성되기까지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괴롭힘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이와는 별개로 민추협이 만들어지기까지 가장 큰 어려움은 상도동(YS)과 동교동(DJ)의 연대였다. 이들이 하나의 합작품(민추협)을 만들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동교동쪽은 ‘선장(DJ)’이 없다며 민추협 참여를 놓고 내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영록 김종완 박종태 등은 “선장이 없는 상태에서 김영삼에게 붙으면 조직이 와해된다”며 YS와의 연대를 결사반대했다. 반면 김상현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등은 공동전선 구축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견 때문에 몇 개월간 논란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DJ는 “동교동계만의 독자노선을 만들라”며 YS와 연대를 반대했다.

하지만 DJ의 이러한 메시지는 제대로 먹혀들지 못했다. YS와의 연대를 강력히 주장한 김상현 때문이었다.

김상현은 오랜 정치경력을 통해 누구보다도 DJ를 위해 헌신해 온 정치인이다. 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했을 때나 80년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갖은 악형과 고문을 당했다.

그런 김상현이 DJ 뜻에 따르지 않으면서 민추협을 만드는데 앞장선 것은 ‘민주화를 위한 신념’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그는 동교동 내부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민추협을 통한 민주세력의 결집이 시대의 대세라고 판단해 성심성의를 다했다.

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DJ가 ‘대통령 출마’를 위해 통일민주당을 뛰쳐나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을 때도 김상현은 쫓아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군정종식을 위한 ‘야권통합’에 온힘을 기울였다.

YS는 이에 대해 “그가 김대중과 나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야당의 정통성을 깨지 않으려는 정치인으로서의 충정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김상현도 “야권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연만으로 DJ를 따라갈 수 있느냐”고 회고한 적이 있다.

‘민추협’이 탄생하기까지 명칭 문제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상현이 얼마나 민추협에 애정을 쏟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YS는 강력한 투쟁의사를 표출하면서 ‘민주구국투쟁 동지회’를 주장했다. 하지만 김상현은 “명칭에서부터 너무 강경하면 아무 것도 안된다. 행동은 확실히 하되 대외적인 것은 좀 온건해야 한다면서 ‘민주화 추진 간담회’로 명칭을 제의했다.

이에 YS의 최측근이었던 고(故) 김동영은 “목숨을 걸고 투쟁하자는데 무슨 간담회”라고 이의를 제기, 결국 논란 끝에 채택한 명칭이 바로 ‘민주화추진협의회’였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DJ가 서거하자, 김 전 대통령은 민추협을 만들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데 앞장섰다고 보도했다. 김 전 의원 입장에선 이 보도가 아무래도 씁쓸했을 듯싶다.

▲ 김상현 전 의원은 DJ가 '민추협에 참여말라'는 메시지를 묵살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이후, DJ가 평민당 만들자, “야권분열”이라며 불참선언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을 창당할 때도 DJ는 반대한 것으로 압니다.

“제가 ‘선명야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창당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민한당이라는 야당이 있었지만 ‘민정당 2중대’라 불리던 관제야당으로 야당다운 야당은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나의 창당 제안을 듣고 ‘돈도 없고 사람도 없다’며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또한 재야의 협력 없이 신당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장기표, 김근태 같은 이들은 ‘총선을 보이콧 하자’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재야 인사들의 총선 보이콧은 군사 정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설득했고 문익환 목사가 ‘그렇게 하자’며 저의 창당 제안에 뜻을 같이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신민당 창당에 어떤 식으로 반대했습니까.

“이협과 최기선(전 인천시장)이 저의 집에 와 신당 창당 발기문을 검토했고 김영삼-김상현 공동의장 명의로 발표했습니다. 그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연구소에 몸담고 있던 심기석 동지를 밀사로 한국에 보냈습니다. 심기석 동지와 평창동에 있는 어느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김홍일도 같이 왔더군요. 그 때 ‘김홍일’은 의원이 아니었습니다. ‘DJ가 신당에 반대한다’며 ‘신당에 참여하면 절교를 선언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후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2월 8일 국내에 돌아와 연금 상태에 있다가 3월 1일 연금에서 해제됐고 김 전 대통령을 동교동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신민당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직후입니다. 저는 ‘(김 전 대통령이 총선 전에 한국에 돌아와) 형님의 승리’라고 말했고 김 전 대통령은 ‘자네한테 사과하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1985년 총선 후 사사건건 나를 견제했습니다.”

-1985년 총선 당시 김 전 의원을 둘러싸고 여러 루머가 돌았는데 사실입니까.

“제가 청와대에서 돈을 받았다거나 정보를 넘겨 동교동을 팔고 다닌다는 등의 헛소문이 돌았습니다. 역사는 진실에 있는 것입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해서 나갈 때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습니까.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저는 양김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100만 인 서명운동을 펼쳐 98만 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양김이 모두 출마하는 것은 노태우를 당선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민당 창당에 반대했던 겁니다. 제 정치 생명이 가장 위험하던 때였을 겁니다. 저는 김 전 대통령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평민당 창당을 막아보려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정치는 후세가 평가할 겁니다. 국회의원이라도 한 번 더 하려면 평민당에 참여해야 했지만 지역주의에 편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대의를 좇아 통일민주당에 남았습니다.”

-DJ가 집권한 후 김 전 의원이 국민의 정부에서 아무 직책도 맡지 못한 것은 국민회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정대철 대권-김상현 당권’을 내세웠기 때문으로 봐도 될까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총재에서 물러나시고) 당 총재는 경선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정대철 전 의원이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고 저는 당권에 도전했던 겁니다.”

-정 전 의원이 과연 김 전 대통령을 이길 가능성이 있었을까요.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당내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을 위해서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을 필요했습니다.”

▲ 김상현 전 의원은 DJ정부시절 변변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이는 YS정부의 최형우와 비교된다  © 시사오늘 권희정
DJ 최측근임에도 불구, 국민의 정부에서 요직 맡지 못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대들기도 했던 최형우 전 의원을 문민정부의 요직에 기용했습니다. 김 전 의원과 비교되는 부분인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공산주의로 말하면 숙청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나를 어렵게만 했지 도와준 적이 없어요. 오랜 정치를 하면서 당 대표를 맡은 적도 없고 원내총무나 사무총장을 한 적도 없습니다.”

YS와 DJ는 한국정치사에 있어 영원한 라이벌이다. 이들의 정치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치인이 ‘최형우’와 ‘김상현’이다.

최형우는 YS와 정치를 하는 동안 많은 갈등을 빚었다. 1972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가 유진산을 지지하자, 최형우는 YS 앞에서 술상을 발로 걷어차며 “그딴 식으로 하다가는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못한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90년 3당합당 때는 “죽으러 들어가는 굴에 혼자나 가서 죽지, 왜 나를 끌어 들이냐”며 YS에게 대놓고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YS 정부가 들어서자, 최형우는 내무부 장관 등 요직을 거치며 정권 2인자로 부상했다.

반면, 김상현은 무엇 때문인지 DJ 정권하에서 변변한 직책을 받지 못했다.

 -동교동계 인사들과는 교류가 없는지요.

“개인적으로는 친합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상대방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자세입니다. 내 입장을 고집해서는 안 되지요. 서구의 전술에서는 도망가는 적에게 황금의 다리를 놓아 주고 퇴로를 열어주라고 했습니다. 우리 정치는 그 반대입니다. 상생을 추구하는 포용력이 중요합니다.”

-친노 세력이 독자 세력화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움직임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친노세력은 민주당과 합쳐야 합니다. 지금처럼 떨어져 있으면 피차간에 결과가 좋지 않을 겁니다. 정동영, 신건 무소속 의원도 입당을 받아줘야 합니다. 정동영 의원의 경우 전주에서 출마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았지만 출마를 결심했다면 당에서 공천을 줬어야 합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왔던 사람 아닙니까.”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진보세력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요.

“정책연대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들이 민주당 서대문 위원장을 하고 있는데 자식이 아버지에 이어 정치를 물려 받는 예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들은) 정치에 소양이 있어서 하는 것뿐이지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65년 서울 서대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첫 출마해 당선될 때 경력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한 환영 국민위원장’이란 특이 사항이 있었습니다. 국민위원장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3ㆍ1청년 동지회’ 300여 명이 서울 수성초등학교에 모여 환영대회를 열었던 기억이 납니다.”

-1965년 선거가 첫 출마였는데 김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그 때는 김 전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에서 국회의원으로 첫 당선되자마자 5?16으로 의원직을 잃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세력이 없었을 때지요. 김 전 대통령에게 받은 도움은 없었습니다.”

-‘후농(後農)’이라는 호는 고은 시인이 지어준 것으로 압니다.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고은 시인이 처음에는 고생하더라도 나중에 수확을 후하게 거두라는 의미로 지어줬습니다. 하지만 수확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짓밟히기만 했습니다.”

80년 감옥에서 만난 고은 시인이 “인생 전반기에는 고생이 많으니 후반엔 수확을 많이 하라”며 ‘後農’이란 호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호가 무색하게도 그의 정치말년이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주로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들려주십시오. 정치 재개 의사도 들려주십시오.

“특별한 일 없이 사람이나 만나고 후진들을 도우며 삽니다.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습니다.”

-신진 정치인들 중에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송영길, 박주선, 이낙연, 김부겸 의원 등입니다. 앞으로 지도자로 부상할 사람들입니다. 대중적 이미지도 좋고 건실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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