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민주화운동 암흑기…민주화투사들의 ‘아지트’ 됐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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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민주화운동 암흑기…민주화투사들의 ‘아지트’ 됐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6.12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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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공포정치’ 펴던 1980년대 초…상도동계, 사랑방서 훗날 도모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사랑방은 지금의 무교동 음식문화의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사오늘
사랑방은 지금의 무교동 음식문화의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사오늘

‘서울의 봄’은 짧았다. 그리고 짧은 봄 뒤에는 더 혹독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쓰러지자 국민들은 대한민국에도 ‘민주주의’라는 꽃이 필 것이라고 믿었다.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할 것”이라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공언은 그 믿음을 공고하게 했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나아가 공포로 변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0·26 사건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같은 해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했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또 한 번의 군부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전두환은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통치권을 다져나갔다.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사회 정화’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동원한 ‘공포 정치’를 펼쳤다.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전두환은 공포 정치를 펼쳤다. ⓒ김대중평화센터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전두환은 공포 정치를 펼쳤다. ⓒ김대중평화센터

정치인들의 활동도 규제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가택 연금된 뒤 정계은퇴를 강요받았고,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도 감금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뿐만 아니라 재야(在野)에서 활동하던 정치세력도 철저히 통제했다.

YS는 자서전 <나의 정치 비망록>에서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차 가택연금은 분노의 1년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꽃봉오리가 무참히 짓밟힌데 대한 분노는 정말 삭이기 어려웠다. 잠도 잘 수 없고, 붓글씨를 쓰려 해도 잘 써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려 해도 잘 들어오지 않아 한참 읽어도 무엇을 읽었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전두환 정권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하자, 민주화 투사들도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희망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봤다.

‘사랑방’은 바로 그런 목적에서 만들어진 장소였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한 김덕룡·문정수·최기선·이영석·김병환 등은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흩어지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아지트’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이때 이들의 눈에 띈 곳이 ‘다대포’라는 소금구이 집이었다. 지금의 무교동 음식문화의 거리, 그러니까 무교동 ‘먹자골목’에 위치했던 ‘다대포’는 원래 김병환이 운영하던 식당이었는데, 이곳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자 김병환을 제외한 4명이 돈을 투자해 공동인수한 뒤 민속주점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이름도 ‘사랑방’으로 바꿨다. 이후 ‘사랑방’은 이름 그대로 상도동계 인사들이 드나들면서 친목을 다지고 훗날을 도모하는 장소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무교동 음식문화의 거리는 직장인들이 퇴근 후 한 잔 술로 애환을 달래는 곳이다. ⓒ시사오늘
예나 지금이나 무교동 음식문화의 거리는 직장인들이 퇴근 후 한 잔 술로 애환을 달래는 곳이다. ⓒ시사오늘

 

아래는 ‘사랑방’에 참여했던 김덕룡이 2013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첫 번째 연금이 끝난 다음 YS가 <뉴욕타임스> 기자와 기자회견을 했고, 그래서 ‘정치규제에 묶인 정치인이 민주주의를 갈망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이 보도되니까 그걸 기화로 해서 또 YS가 연금을 당했다. 그 연금 기간 동안 갈 데도 없고 사무실도 못 구하고 해서 우리가 자주 만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무교동에 비빔밥 집을 냈다. 당시에 저하고 문정수, 최기선, 김병환, 이영석 등이 7백만 원인가 9백만 원인가를 내서 개업을 했다. 전주에 있는 요리사를 데리고 왔는데 참 잘해서 손님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랑방’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애초에 돈을 벌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던 데다, 전두환 정권에서 정보 요원들을 파견해 감시한 탓이다. 다음은 김덕룡의 증언이다.

“솔직히 외상값도 많았고, 관리를 잘 못하니까 매출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적자였다. 게다가 나중에는 정보요원들이 와서 누가 왔는지 체크한다는 소문이 나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공직자들이 안 오는 거다. 그래서 나중에는 너무 적자 폭이 커져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6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사랑방’은 암흑기에 민주화 투사들의 희망을 한데 묶어놓는 장소로 기능하며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겼다. ‘사랑방’을 통해 인연을 이어간 상도동계는 곧이어 ‘민주산악회’를 조직했고, 민주산악회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신한민주당(신민당)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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