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삼한 통일의 전략가 3대 천왕과 미래가 없는 제1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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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삼한 통일의 전략가 3대 천왕과 미래가 없는 제1야당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0.06.14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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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통합당은 자신의 시대적 역할을 찾아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미래통합당은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과 같이 삼한통일의 판을 깔아 줄 전략가가 있어야 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신라가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미래통합당은 자신의 시대적 역할을 찾아야 한다. 사진제고=뉴시스
미래통합당은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과 같이 삼한통일의 판을 깔아 줄 전략가가 있어야 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신라가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미래통합당은 자신의 시대적 역할을 찾아야 한다. 사진제고=뉴시스

삼국시대 최약체 신라가 삼한통일의 위업을 성취한 데는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이 떠오른다. 하지만 실은 지증왕 이래 법흥왕과 진흥왕의 국력 강화 정책이 없었다면 신라는 백제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 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한계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데 제약을 많이 받았다. 바닷길을 이용하자니 해양강국인 가야의 견제를 받아 근해로의 이동은 불가능해 외해로의 장거리 이동만 가능했다. 또한 육로는 동북아 최강 고구려에 막혀 있었다. 한 마디로 진퇴양난의 늪에 빠져 있었다.

연맹왕국에서 고대 국가로의 발전을 위해서는 영토 확장, 율령체제, 불교수용이라는 삼박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백제는 제일 먼저 한강 유역을 확보한 덕분에 중국 문물 수용을 위한 최단거리 바닷길을 활용할 수 있었다. 4세기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략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후 백제는 중국의 요서지방과 일본의 규슈까지 진출한 해상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고구려도 동북아 최강으로서 중원의 패자 수·당과 자웅을 겨룰 수 있던 배경은 이 삼박자를 달성한 덕분이었다. 소수림왕이 율령반포와 불교수용으로 고대 국가로의 체제를 정비했다. 이를 바탕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는 북으로는 흑룡강,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내몽골과 중국 북부, 그리고 남으로는 남한강 유역인 죽령 일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만들었다.

반면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한 세기를 풍미하고 있을 때 태백산맥에 가로막혀 선진 문물 수용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왕권이 미약해 토착세력을 견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국가 생존을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4세기 말인 내물왕 시절에 겨우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닷길은 오히려 왜국과 가야 연합군의 침략로가 됐다.

6세기가 되자 지증왕이 즉위했다. 소를 이용한 우경이 시작되자 농업생산력이 증대됐고, 시장이 열리면서 상업이 발달했다. 신라라는 국호도 왕이라는 중국식 칭호도 이때 생겼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신라 장군 이사부는 우산국을 점령해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의 우위를 점하는 역사적 근원을 마련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다음 타자는 법흥왕이었다. 그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했다. 특히 불교 공인에는 이차돈의 순교로 토착세력의 거센 반대를 제압했다는 정치적 사건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신라는 국가 발전에 독약이 된 것은 고구려와 백제와 같은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 토착세력이었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 이차돈의 순교였다.

진흥왕은 신라 전성기의 창시자였다. 이제 프로리그에 출전 가능한 선수가 된 이가 바로 진흥왕이었다. 지증왕과 법흥왕이 제대로 놀 수 있는 판을 깔아 준 것이다. 진흥왕은 거침이 없었다. 수백 년간 낙동강 후방을 위협했던 가야 연맹을 멸했다. 가야 정복은 김무력(김유신의 조부)과 같은 가야계 인재 영입을 덤으로 얻은 쾌거였다. 

진흥왕은 후방 위협인 가야를 제거하자 이제 한강 유역을 확보하기로 했다. 현재 주인인 고구려를 공략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그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사용했다. 일단 백제를 이용키로 했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겨 금강 유역으로 쫓겨난 악몽이 있었다. 백제 성왕이 고토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심리를 이용했다. 성왕은 진흥왕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진흥왕으로선 한강 확보를 위한 성배였지만, 성왕으로선 자신의 죽음을 앞당긴 독배가 됐다.    

나제 연합군은 한강의 고구려군을 몰아냈다. 이때 진흥왕은 백제를 배신하고 성왕을 유인해 살해했다. 당시 신라의 지휘관은 가야계 장군인 김무력이었다. 망국 인재 영입 성공의 대표작이다.

한강 유역 확보는 한반도의 주도권 장악을 의미하는 쾌거였다. 4세기 근초고왕, 5세기 장수왕의 전성기의 정점에는 한강 유역이 있었다. 풍부한 인구과 물자 확보, 즉 국력 신장의 마중물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서해로의 직통로를 확보했고, 이를 통해 후일 나당 연합군 탄생의 싹이 튼 것이다.

진흥왕은 목표가 달성되면 차후 목표를 세울 줄 아는 군주였다. 이제 강원도와 함경도를 노렸다. 강원도와 함경도는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으로 가로막혀 고구려가 원군을 보내기 어렵다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했다. 예전에 신라가 선진 문물 수용에 제약이 됐던 약점을 이제는 이점으로 역이용한 이가 바로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상징물을 남기고 싶어 했다. 만년 약소국의 설움을 한 번에 날려 보내야 백성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도 잊지 않았다. 점령지에 1개의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세웠다. 신라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우리가 진흥왕을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인재 양성에 나섰다. 화랑도를 만들었다. 현재 기준으로는 서울대와 육사를 합쳐 놓은 인재 양성 기관이다. 전국에 흩어진 15~16세 청소년 인재를 모았다. 화랑의 백미는 귀족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여러 신분을 한 데 모아 삼한 통일이라는 공통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했고, 후일 이들이 삼한 통일의 주역이 돼 천년 왕국 신라를 만들었다.

미래통합당은 헌정사상 전국단위 선거 4연패를 당한 최초의 제1야당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국민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고,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고구려에게 무시당하고 백제와 가야, 왜의 침략을 받아도 자신의 기득권 확보에만 몰두했던 토착세력의 현대판이 미래통합당이다.

이 정도로 몰락했으면 판을 뒤엎어야 할 역발상이 필요하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과 같이 삼한통일의 판을 깔아 줄 전략가가 있어야 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신라가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미래통합당은 자신의 시대적 역할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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