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이’ 기본소득 논쟁…“보수·진보 모두 솔직해져야”
‘깜깜이’ 기본소득 논쟁…“보수·진보 모두 솔직해져야”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6.18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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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복지+기본소득이면 증세 불가피…증세 없으면 기존 복지 축소·폐지해야
전문가들 “정치권, 제대로 논쟁하려면 기본소득 의미부터 명확히 하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촉발시킨 기본소득 논쟁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시사오늘 김유종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촉발시킨 기본소득 논쟁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시사오늘 김유종

기본소득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촉발시킨 이 논쟁은, 여야 대권주자들을 거치면서 전 국민적 ‘핫이슈’로 떠올랐다. 정치권에서는 기본소득 문제가 차기 대권의 향방을 가를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지금의 기본소득 논쟁이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기본소득을 이용하는 데 그칠 뿐이라는 지적이다.

 

기본소득, 이름은 같아도 내용은 천지차이


현재의 기본소득 논의는 ‘전 국민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차원에 멈춰 있다. ‘빈곤 해소를 위해 도입해야 한다’는 쪽과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근로 의욕을 꺾을 것’이라는 쪽이 원론적 수준에서 맞부딪치는 모양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기본소득에 대한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반적으로 기본소득은 ‘복지의 확대’ 차원으로 인식되지만, 활용 방법에 따라서는 오히려 복지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가톨릭대 백승호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이화여대 이승윤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논문 <기본소득 논쟁 제대로 하기>에서 기본소득을 ‘좌파버전’과 ‘우파버전’으로 구분하며 “기본소득 논쟁들이 소모적인 경향을 갖는 이유는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에서 비판이 제기되는 측면도 있고, 기본소득이 단일한 입장에서 제안되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우파를 가로지르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에서 제안되고 있는 것과도 관련된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 역시 11일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기본소득도 계통이 두 가지다. 하나는 자유주적인 계통, 하나는 진보적인 계통”이라면서 “지금 가장 아쉬운 건 기본소득이란 말을 쓰면서 서로 다른 걸 이야기하고 있어서 논의를 좁혀나가기가 힘들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기본소득이 ‘좌파버전’이냐 ‘우파버전’이냐에 따라 논의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에 기본소득을 얹는 형태와 기존 복지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형태 두 종류로 나뉜다. ⓒ뉴시스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에 기본소득을 얹는 형태와 기존 복지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형태 두 종류로 나뉜다. ⓒ뉴시스

 

복지+기본소득 vs 복지 대신 기본소득


그렇다면 좌파버전의 기본소득과 우파버전의 기본소득 내용은 어떻게 다를까. 양쪽 모두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34조의 ‘사회권’에 기반을 둔다. 다만 차이가 있다. 좌파버전의 기본소득은 ‘현재의 복지제도로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담보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지금의 복지제도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기본소득이 보태져야 빈곤이 해소되고 양극화도 줄어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다 보니 좌파버전의 기본소득은 증세가 불가피하다. 모든 국민에게 월 50만 원씩 지급할 경우 연간 300조 원의 예산이 추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해도 기존 복지는 손대지 않는다. 추가되는 새로운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이라며 “1년에 2번 50만원은 기존 예산으로 충분하지만, 그다음 단계로 국민들이 동의하면 증세나 탄소세, 로봇세, 데이터세, 국토보유세 등으로 순차적으로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우파버전의 기본소득은 지금의 복지제도가 ‘비효율적’이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국가의 과도한 개입으로 비효율적 자원 분배가 이뤄지고 있는 현행 복지제도를 구조조정, 기본소득으로 통폐합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경우 증세는 최소화할 수 있지만, 기존의 복지 혜택은 폐지되거나 축소될 공산이 크다.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이 4일 기본소득에 대해 “기본소득에는 보수적 버전도 있다. 기존의 복지를 줄이고 국가를 축소해 그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지원한 후 사회보장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하도록 하자는 발상”이라며 “주로 유럽의 우익정당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적 개념의 기본소득이다.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복지마저 시장에 떠맡기려는 논리”라고 우려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김세연 전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국회의원 연구모임 ‘아젠다 2050’에서 “(기본소득은) 좌파적 관점에서는 기존 복지 제도의 완성된 버전으로, 우파적 관점에서는 기존의 복잡한 복지 체계를 단순화하는 ‘작은 정부’의 시도로 각광 받는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정치권, 기본소득 정의 명확히 해야


이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솔직한 자세로 기본소득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단순히 ‘기본소득을 주자, 말자’ 수준에 멈춘다면 국민들 사이의 갈등만 유발할 뿐, 생산적인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10일 <시사오늘>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정치권에서 내놓는 기본소득 담론은 국민을 갈라놓고 싸움붙이는 수준에 불과하다”며 “좌파는 엄청난 수준의 증세가 필요하다는 걸 숨기고, 우파는 기존 복지 혜택을 축소시키거나 폐지한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기본소득이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논쟁만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의 복지를 유지하면서 증세도 안 하면 기본소득은 많아야 한 달에 3~4만 원 주는 수준이 되고, 한 달에 수십만 원을 주려면 국민들이 지금보다 1.5배에서 2배 가까이 되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점에서 좌파식 기본소득은 무용(無用)하거나 세금폭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누구도 이 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보수도 비겁한 건 마찬가지다. 기본소득이라고 하니까 국민들은 막연히 ‘아, 보수가 복지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밀턴 프리드먼이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옹호하는 기본소득은 다양한 복지제도를 기본소득으로 통합해서 정부 기능을 축소하겠다는 이야기”라면서 “우파식 기본소득이 현실화되면 오히려 빈곤층은 수입이 줄어들 수도 있다.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제도를 대체하는 건지 추가되는 건지 설명도 없이 ‘기본소득 줄게’ 하는 건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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