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조선의 新惡 사림파와 한국의 정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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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조선의 新惡 사림파와 한국의 정치 실종
  • 윤명철 기자
  • 승인 2020.07.05 1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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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 처한 상황은 도탄에 빠진 조선 민초들의 삶과 오버랩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 처한 상황은 도탄에 빠진 조선 민초들의 삶과 오버랩이 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진제공=뉴시스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 처한 상황은 도탄에 빠진 조선 민초들의 삶과 오버랩이 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진제공=뉴시스

조선 역사상 반정(反正)은 세 번 있었다. 수양대군과 한명희 등 훈구세력에 의한 계유정난이 첫 번째요,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훈구파가 일으킨 중종반정, 그리고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기 위한 서인의 인조반정이다.

계유정난과 중종반정, 인조반정의 차이점은 주체 세력에 있다.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이 주도하고 한명회, 신숙주와 같은 가신들의 팀워크로 성공한 쿠데타다. 반면 중종반정은 중종이 주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박원종과 같은 쿠데타 주역들이 허수아비 왕을 옹립한 첫 번째 사례다. 인조반정도 마찬가지다. 선조 사후 권력투쟁에서 밀린 서인들이 광해군과 북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기획했고, 무능한 인조를 옹립시킨 사례다.

계유정난은 도의적으로는 정통성을 갖춘 단종을 내쫓고 권력을 찬탈해 역사의 오명을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의 통치체제를 완성한 세조와 성종의 치세를 만든 정치적으로 성공한 쿠데타다. 하지만 중종반정은 훈구파가 허수아비 왕 중종을 내세워 조선을 신권의 나라로 만든 쿠데타다. 

결국 중종은 왕권을 되찾고자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를 중용했지만 노회한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라는 피바람을 자초했다. 훈구파는 사림을 일시적으로 제거했지만 사림은 향촌에 은거하며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훈구파가 권력을 세습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동안 사림파는 서원과 향약을 통해 조선의 젊은 인재들을 자기 세력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사림에 의해 양성된 조선의 젊은 인재들은 과거를 통해 권력층에 침투했다. 조선의 조정은 서서히 사림에 의해 장악됐다. 또한 훈구파가 을사사화로 자신들의 권력다툼에 빠져 백성들로부터 민심을 잃어가고 있을 때도 사림파는 차근차근 집권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권력의 화신 문정왕후 사후, 훈구파의 수장인 윤원형이 제거되고 명종도 요절했다. 뜻하지 않게 왕에 오른 선조는 사림파를 중용했다. 사림의 천하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들도 훈구파와 똑같았다. 겉으로는 도의정치를 내세웠지만 권력을 향한 탐욕은 훈구파와 별 반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파해 그들만의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특히 대의명분과 같은 허울 좋은 이상향을 추구하다 보니 민생을 외면했다. 백성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고, 일본과 여진과 같은 주변국의 발호(跋扈)를 제대로 읽지 못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조선 팔도는 수백만 백성의 피로 물들여졌지만 사림파의 권력투쟁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조선 중기이후는 신악(新惡) 사림파의 치졸한 권력투쟁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신악(新惡) 사림파가 지배한 조선 후기는 근대화라는 세계사의 조류와 시대정신을 추구하지 못해 일제의 식민지라는 치욕을 자초했다. 나쁜 정치인을 가진 조선 백성의 죄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했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인국공 사태와 부동산 대란, 그리고 집권 여당의 폭주는 정치 실종으로 보여진다.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렬 검찰총장의 갈등으로 흑역사를 만들고 있다. 아울러 균형감을 잃었다는 혹평을 받고 있는 안보라인의 교체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한때 산업화 세력으로 자처하던 미래통합당의 무능과 분열은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 처한 상황은 도탄에 빠진 조선 민초들의 삶과 오버랩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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