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우, "민한당 공천은 정보부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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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우, "민한당 공천은 정보부에서 했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11.16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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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유치송 총재와 신상우 사무총장
#1. 민한당의 유치송 총재는 유진산 신민당 총재가 당을 이끌고 계실 때 진산계의 중진참모였고 나는 그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늘 그분을 존경하고 따랐다. 대통령 선거인단선거에도 자신의 보좌관인 고병수 동지를 내 사무실에 보내 나를 도와주었는데, 막상 공천을 주지 못하게 되자 자신의 집에서 나를 만난 유치송 총재는 고개를 떨군 채 독백처럼 “총재라고 앉혀 놓고 아무런 실권이 없으니……” 하면서 연방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치송 총재는 자력으로 총재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민한당의 실권은 신상우 사무총장에게 있는 것으로 보였다. 많은 정치지망생들이 신상우 사무총장 집으로 모여들었다.
 
정치를 못하게 된 고흥문 씨도 내게 신상우 사무총장을 만나 내 이야기를 했더니 이번에는 공천이 확실한 것으로 말하더라고 하면서 미리 축하한다고 했고, 열심히 뛰어 꼭 당선되도록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공천심사 과정에서도 1차 심사에서 확정된 것이라고 공천심사위원인 박병일, 황산성 변호사에게서 심사 과정의 분위기와 내막을 전해 어디에선가 걸려온 전화 한 통화로 이미 결정된 사실을 뒤집어 서청원 씨, 다음은 한광옥 씨로 바뀐 것이다.

나는 이 결정이 신상우 씨가 개인적인 의지로 어딘가와 짜고 한 짓이라고 단정하고 인간적인 배신감과 정치에 대한 혐오를 느꼈다. 그래서 그때부터 몇 년 동안은 신상우 씨를 만나면 뻔히 쳐다보면서 인사도 악수도 하지 않았다.

문민정부 시절 신상우 씨는 언론을 통해 “민한당 공천은 정보부에서 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역시 신상우 씨 자신도 유치송 총재와 마찬가지로 아무 힘도 없는 형식적인 실권자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나는 전두환 독재정권 하에서 재수 없게 걸린 한계상황을 넘을 수 없었던 유치송 총재와 신상우 총장의 고뇌를 민주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나라의 운명이요, 역사 발전의 과정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신상우 총장의 고뇌에 찬 고백이 있은 뒤로 나는 신상우 총장과 인사도 하고 요즘은 아주 다정하게 지내고 있다.
 

▲ 김영삼 총재와 어머니, 처(맹경옥) 그리고 필자

김정두(金正斗)와 민권당 간부들

#2. 나는 그때까지 민권당에 당적을 두고 있었다. 김의택(金義澤) 총재는 내가 아무리 사업을 위해 정치생활을 그만두겠다고 해도 민권당은 급조된 정당이어서 정당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서 자주 안 나와도 중요 당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나를 중앙당기위원장직에 임명했다.

사무총장에는 전직 판사이자 대구고등법원장 출신의 변호사로서 고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변론을 맡았던 전직 국회의원 김정두(金正斗) 씨, 대변인에 대학교수 출신의 이영권(李永權) 씨, 조철구(趙澈九) 씨, 권기술(權琪述) 씨, 이인수(李仁秀) 씨, 김정수(金正洙) 의원, 임채홍 의원, 정대수 씨, 송재호 씨, 이병대 씨, 박대성(朴大成) 씨, 여성인 김동분(金東粉) 씨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중 이영권 씨는 내가 목장터를 잡고 시초설계를 할 때 나와 둘이 줄자를 가지고 풀밭을 이리저리 재면서 살림집 위치 등을 정하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집을 다 짓고 목장을 시작했을 때는 김정두 씨와 이영권 씨 등 여러 동지들이 와서 하룻밤을 같이 묵으면서 민권당의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기도 했다.

그날 연세가 많은 김정두 선생이 한밤중에 심한 복통을 일으켜 어찌나 혼이 났는지 다음날 김정두 선생은 “혼들 났지? 혹시 내가 여기서 영영 가버리면 그 일을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 하시면서 껄껄 웃으셨고, 우리는 “그런 걱정도 하기는 했습니다. 이만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며 모두 웃었다.

그러니 정치를 안 한다고 하면서도 늘 만나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이 그 사람들이니 아주 모른다고 뺄 수가 없었다.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어음사기사건
#3. 1982년초 7000억원의 대형 어음사기사건이 터져서 언론과 모든 국민이 시끄러웠다. 당시 중학교 10년차 선생님들의 한 달 월급이 25만원이었으니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아마 6~7조원의 어마어마한 금액이 될 것이다.
 
이순자 씨의 숙부인 이규광 씨의 처제가 되는 장영자 씨와 그의 남편 이철희 씨가 저지른 건국 이래 최대의 어음사기사건은 금융질서의 파괴는 물론 국민경제질서를 문란케 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의 친인척이 저지른 권력형 사기사건을 검찰은 물론 청와대, 국회, 어느 한 곳도 속 시원히 파헤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장영자 사건을 화제에 올렸지만 진실을 알 길이 없어 국민은 답답했다.
어느 날, 나는 민권당의 김의택 총재와 마주앉아 시국을 이야기하면서 이 엄청난 사건을 똑바로 처결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 하나 없는 것을 개탄했다. 우리는 “이럴 때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 있었다면 이렇게 뭉개고만 있지는 않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김의택 총재가 내게 제안했다.

“노 위원장,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정치규제에 묶여 무료하게 지내는 김영삼 총재와 이민우 회장을 만나 위로도 하고 회포도 풀 수 있게 노 위원장이 점심자리라도 한번 만들어보소. 정보부 아이들의 감시와 방해가 예상되니 노 위원장이 극비리에 두 분을 만나 추진해보시오.”
나는 김의택 총재의 부탁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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