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현숙 “의사봉 처음 잡아 본 여성의 눈물,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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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현숙 “의사봉 처음 잡아 본 여성의 눈물, 가슴이 뛰었다”
  • 한설희 기자
  • 승인 2020.07.29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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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제주특별자치도 성평등정책관
“성평등정책관, 원희룡 지사 핵심 공약 부서…단순 특보 개념과는 달라”
“직장 내 성폭력, 내부 해결론 안 돼…피해자 보호가 최우선”
“제주 여성이 세다고? 오히려 ‘이중고’…마을 자치, 여성 참여율 높여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한설희 기자]

〈시사오늘〉은 지난 7월 28일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이현숙 제주특별자치도 성평등정책관을 만났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사오늘〉은 지난 7월 28일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이현숙 제주특별자치도 성평등정책관을 만났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미투’ 운동이 시작된 2018년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권력형 성폭력 문제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해였다. 당시 안희정 충남지사로부터 불거진 성폭력 혐의가 정치계 전반의 문제로 확장되면서, 근본적 개혁을 위한 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은 너도나도 지방정부 내 성평등 전담 기구를 설치하며 시대적 요구에 화답하는 듯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오거돈 전 부산시장과 故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폭로됐다. 해당 행위가 공공기관 내 고위공직자로부터 발생했다는 점, 또 피해자 구제 장치가 없었다는 점 등은 답답할 정도로 안 전 지사의 사건과 닮았다. 이는 앞선 기구들이 무용지물로 전락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조사 결과, 실제 대부분의 성평등 기구가 여성·가족·청소년 복지 업무 집행까지 담당하면서 정책 업무는 뒷전에 내몰리고 있었다. 이들 중 처음과 같은 규모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제주도가 유일하다.

이에 〈시사오늘〉은 대한민국 성평등 정책 기구의 현주소이자 지향점, 제주특별자치도 성평등정책관을 찾았다. 이현숙 정책관과의 인터뷰는 지난 7월 28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제주도청 서울본부에서 이뤄졌다.

“성평등정책관, 원희룡 지사 핵심 공약 부서…단순 특보 개념과는 달라”

"성평등정책관은 원희룡 지사의 핵심 공약이다. 원 지사는 지난 선거에서 '모든 정책에 성평등을 담아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제주도청만 유일하게 성평등 정책 전담 부서를 2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만큼,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성평등을 전담하고 추진하는 체계를 안착시키는 과정이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벤치마킹하려고 우리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제주는 어떻게 전국 최초로 성평등 전담 부서를 따로 편성하게 됐나.

“원희룡 제주지사의 핵심 공약이었다. 원 지사가 지난 선거에서 ‘모든 정책에 성평등을 담아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며 부서 신설을 약속한 바 있다. 실제로 원 지사는 도내 성범죄 근절에 대한 의지가 아주 확고한 사람이다. 최근엔 도지사인 본인을 비롯해 고위공직자와 산하 공공기관장을 대상으로 한 ‘성 비위 감찰 전담기구’를 설치하자고 지시하기도 했다.”  

-최근 논란이 된 ‘젠더 특보’ 등 타 지자체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선 우리는 특보가 아니다. 행정부지사 직속으로 설치된 하나의 전담 부서다. 따라서 단순히 정무적 기능을 하거나 정책 제언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직 내부의 성평등, 이를 통한 전체 도민의 성평등을 이루고자 여러 매뉴얼을 만들고 실질적인 제도 변화를 이끌고 있다.”

-성평등정책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나.

“먼저 제주도의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들의 인식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래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맞춤형 성인지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도의 정책이나 관광 콘텐츠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면 개선을 권고하기도 한다.

올해부턴 정책·사업 결재 체크 항목에 ‘이 사업은 성평등 관점에서 검토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나 더 담는 ‘사전 성평등 검토제’도 시행했다. 부서장이 사전에 한 번 더 성평등 문제를 고려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정책 내 녹아있던 성차별을 개선한 사례를 하나 꼽는다면.

“성차별은 특히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서, 작년에 ‘성차별 용어 개선사업’을 집중적으로 했다. 실제 제주 홍보 콘텐츠에서 여성 비하적 표현을 사용해 논란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성차별적 용어를 쓰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시정하도록 모니터링하는 일을 한다.”

-바람직한 일이지만, 공무원들 입장에선 귀찮아하거나 싫어할 수도 있겠다.

“잔소리만 하는 부서처럼 보이니 그럴 수 있다. 성인지 교육도 공무원들은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니 반응이 늘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그래도 역할극을 담은 ‘연극형 성인지 교육’은 반응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19 때문에 해당 교육마저 사이버 강의로 전환됐다. 대면교육이 필요한 게 바로 이런 분야인데, 비대면 교육으로 성 감수성을 향상시키자니 한계가 있어 고민이 많다.”

"실태조사 결과, 여성 제주도민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높지만 개인 자존감이나 가정 내 의사결정 경험 수치는 낮았다. 한 마디로 가정 경제를 책임지면서 의사 결정에선 배제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거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직장 내 성폭력, 내부 해결론 안 돼…피해자 보호가 최우선”

이 정책관이 겪는 고충은 코로나19 때문만이 아니다.

‘성평등 관련 부서를 따로 두는 것은 예산 낭비’라는 차별적 시각에 맞서 가시화된 성과를 드러내야 하는 입장이지만, 부서 신설로 도내 성 의식 수준이 갑자기 높아질 수도 없을뿐더러 성평등 분야는 성과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이 정책관은 이날 “아직도 성평등·성주류화 정책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단순한 정책 사업으로 여기는 공직과 도민사회의 인식에 부딪히기도 한다”면서 “그래도 현장에서 도민들의 인식이 조금이나마 개선됐다고 느꼈을 때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최근 지자체 단체장들의 성추행 논란이 이어졌다. 제주도는 성 비위 사건 발생 시 어떤 절차로 문제를 해결하나.

“제주특별자치도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 따라 해결한다. 제주는 외부 전문가들을 고충상담원 및 고충심의위원으로 두고, 피해자 지원과 행위자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가 고충 책임관인데, 성평등정책관이 생긴 이후 성희롱으로 인정되는 사례가 늘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정책관이 생기니까 성희롱이 늘었다’는 트집을 잡기도 하더라. 그러나 평등 전담 부서의 존재와 성인지 교육의 효과로 예전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부적절한 일들도 성희롱으로 판단된 거다. 일종의 ‘긍정적 변화’라고 강조하고 싶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고충이 있다면.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가 대부분이다보니 사례마다 어렵다. 이런 경우 우리가 어느 선까지 개입을 해야 될지, 또 어디까지 비공개로 해야 될지 고민이 깊어진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 보호가 제1원칙이다. 우선적으로 피해자가 그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더 이상의 아픔을 겪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되는 것이 마땅하다.”

“제주 여성, 세다고? 오히려 ‘이중고’…마을 자치, 여성 참여율 높여야”

-성평등정책관이 도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일은 없나.

“꽤 많다. 도민들의 성평등 의식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책을 구현하는 것부터 시작해, 구체적인 사안으로는 작년에 유튜버 ‘하말넘많’이 대상을 수상했던 ‘성평등 크리에이터 공모전’, 마을 내 여성 임원 비율을 높이는 ‘성평등 마을 만들기 사업’도 하고 있다. 도민들을 직접 찾아가는 성평등 교육도 진행 중이다.”

-지역사회의 성평등 수준은 어떻다고 생각하나.

“‘제주도는 여자가 세다’, ‘제주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다’는 보편적 인식이 존재한다. 그런데 막상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높지만, 개인의 자존감이나 가정 내 의사결정 경험은 낮은 수치를 보였다. 한 마디로 가정경제를 책임지면서도 의사결정에서는 배제되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거다.”

"아직도 성평등·성주류화 정책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단순한 정책 사업으로 여기는 공직과 도민사회의 인식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래도 현장에서 도민들의 인식이 조금이나마 개선됐다고 느꼈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여성의 경제 능력과 성 평등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가.

“제주라는 섬 지역의 특수성과 척박한 지리환경 탓도 있다. 제주 여성들은 ‘해녀’, ‘밭일’, ‘가사노동’ 등의 주체로 살아오면서, 동시에 유교적인 전통에 따른 여성상도 강요받아야 했다.

우리는 지방자치, 그 중에서도 제주 내 마을 단위의 자치 형태를 살펴봤다. 마을 대소사를 결정하는 마을회·청년회·개발위원회 등 의사결정조직에서 부녀회장 단 한 명 빼곤 전부 남성이더라. 여성들은 노동을 도맡지만 주요 결정에선 배제된다. 마을 축제에서 노동만 했을 뿐, 회의에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청년회도 남성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여성들, 특히 비혼 여성은 마을의 중요한 결정에 투입될 수 없는 구조였던 거다.”

-무엇이 문제였나. 또, 마을 단위의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들여다보니 ‘마을 규약’이 문제였다. 규약 자체에 이미 남성들만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래서 최근 여성단체와 함께 ‘마을 1인 1표제’를 주장하면서 마을 규약을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우선 3개 마을을 ‘시범 마을’로 지정하고, 마을 여성들에게 회의를 진행하는 법도 가르쳤다. 이분들이 ‘의사봉을 처음 두드려본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감동이었다. 회의에 참석했지만 의사봉은 처음 잡아 본 여성회원은 눈물을 보이기도 해 가슴이 찡했다. 올해는 여성농민회와 함께 5개 마을을 추가로 확대하려고 한다.”

-도민 대상 프로그램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면.

“경로당에서 성인지 교육을 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강사가 자신이 겪었던 성차별 경험을 이야기하던 도중, 한 할아버지께서 조용히 입을 여셨다.

‘우리 누이가 참 똑똑했는데, 나한테 계속 밥만 해주고 살았어. 부모님은 나더러 남자가 부엌에 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말로 얼씬도 못하게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스러워. 그때 내가 부모님께 대항했어야 했는데, 굳이 누이에게 밥을 얻어먹었어야 했는지….’

듣는 사람 모두가 울컥했다. 성차별은 남자들에게도 죄책감과 부담으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어르신들이 자기 속내를 얘기하면서 치유를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럴 때 특히 보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주 지역은 여성 고용률이 전국 평균과 비교해 높은 수준이지만, 일자리의 질이나 여성 안전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낮은 편이다. 이런 약한 부분들을 키워내는 게 우리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성차별 사회의 장벽은 여전히 완강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은 많다. 여성 스스로의 변화도 필요하다. ‘배려받는 정책의 수혜자’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 정책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고민하고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본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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