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윤희숙 연설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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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윤희숙 연설이 남긴 것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8.04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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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투쟁 목소리 커지던 한국당, 원내투쟁으로 선회
진중권 “한국 사회가 한 걸음 더 진보한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미래통합당 윤희숙 의원의 연설이 호평을 받고 있다. ⓒ뉴시스
미래통합당 윤희숙 의원의 연설이 호평을 받고 있다. ⓒ뉴시스

7월 29일 미래통합당 의원총회. 통합당 의원들의 울분이 터져 나왔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의석수 우세를 바탕으로 야당의 항의를 무시한 채 각종 법안을 강행 처리하자, 통합당 의원들 사이에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반응이 쏟아진 겁니다.

급기야 홍문표 의원은 “상임위원회, 인사청문회가 무슨 필요 있나. 야당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 밖에 나가면 국민이 안 좋아할 거라고 참고 기다려왔는데 기다린 이유가 뭐냐. 국민에게 알려서 현수막이라도 걸든가 소규모 집회라도 해야 하고, 당원이라도 불러 울분을 알려야 한다”며 장외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내 최다선인 정진석 의원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만하면 심판받는다는 것을, 민심이 무섭다는 것을 권력에 취한 그들은 잊은 것 같다. 권력이 국민에 맞서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는 투쟁을 시작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내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장외투쟁에 회의적이었던 지도부도 생각을 바꾼 듯했습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의총을 한 번 더 열어 투쟁 방향을 점검하겠다. 장내·외 투쟁을 병행하되 장외투쟁의 방법들은 구체적으로 더 고민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장외투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모양새였습니다.

그러나 주말을 거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윤희숙 의원의 연설이 계기였습니다. 윤 의원은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민주당이 밀어붙인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의 부작용 가능성을 5분여 동안 조목조목 꼬집었습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보수가 저런 식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가 한 걸음 더 진보한 것”이라고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여론도 뜨거웠습니다. 정부 정책에 부정적 의견을 지닌 사람들은 ‘윤희숙을 국토부장관으로 보내야 한다’며 환호했습니다. 윤 의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메시지에는 반박하지 못하고 메신저만 공격하는 수준에 그치면서 여론을 뒤집지 못했습니다.

이러자 다급해진 민주당에서는 ‘헛발질’이 나왔습니다. 박범계 의원은 전형적인 ‘메신저 때려 메시지 물타기’을 했다가 역풍을 맞았습니다. “전세가 월세로 전환하는 것은 나쁜 현상이 아니다”라고 했던 윤준병 의원은 ‘현실을 모른다’는 비판에 휩싸였습니다. 심지어 같은 당 박주민 의원으로부터도 “국민 감정선이나 눈높이에 맞춰서 발언하시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주말이 지난 뒤, 통합당에서는 장외투쟁 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원내투쟁도 얼마든지 효과적일 수 있음을 윤 의원이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통합당 서울 송파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희숙 효과의 가장 큰 교훈은 소수 야당이라도 얼마든지 원내에서, 제도 안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고 당차게 싸울 수 있다는 점”이라고 썼습니다.

또 “야당은 국민과 함께 당당하게 합리적으로 끝까지 버텨야 한다. 윤희숙 의원의 5분 연설이야말로, 진정성을 갖고 합리적 내용으로 국민입장에서 호소하면 장외 투쟁 없이도 얼마든지 이기는 야당이 가능하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강조했습니다.

통합당 관계자도 3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윤 의원 연설 이후에 국회 본회의에서 연설을 하겠다는 반대 토론 신청자가 계속 나오고 있다”면서 “우리 당에는 교수 출신이나 연구원 출신처럼 전문성 있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전문성을 살리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으로 문재인 정부 정책을 평가할 계획”이라고 전했습니다.

통합당의 한 초선 의원실 관계자 역시 같은 날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윤 의원 연설 전까지만 해도 장외투쟁 이야기가 계속 나왔는데, 연설 이후에는 쏙 들어갔다. 원내에서도 얼마든지 여당을 견제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윤 의원의 연설 한 번이 장외로 뛰쳐나오려던 제1야당을 원내에 눌러앉히고 ‘연설 투쟁’을 하게 만든 겁니다.

윤 의원 연설이 호평을 받자, 통합당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정책 공부’ 바람이 분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또 중진 의원들 사이에서도 ‘그동안 현안에 제대로 대처해왔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진 전 교수의 말처럼, 어쩌면 윤 의원의 연설은 한국 정치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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