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되짚기⑨] 이재오 “6·29선언 며칠 전 전두환 항복 알았다”
[6월 항쟁 되짚기⑨] 이재오 “6·29선언 며칠 전 전두환 항복 알았다”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0.08.24 0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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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6월 항쟁 성공의 결정타 돼줘”
“YS는 6·10대회 추진파, DJ는 반대…재야, 표결 부쳐”
“87 대선 대 YS는 후보 단일화, DJ는 비판적 지지로”
“후보 단일화파는 YS당으로, 비판적 지지는 DJ당으로”
“보수, 중도통합 않으면 희망 없어…나라의 틀 바꿔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6월 항쟁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그는 6월 항쟁을 이끈 범연합단체 국본에서 상임집행위원으로 있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6월 항쟁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그는 6월 항쟁을 이끈 범연합단체 국본에서 상임집행위원으로 있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보수는 진보를 끌어안을 수 있지만
진보는 보수를 끌어안지 못한다.
진정한 보수는 폭이 넓다.
지금은 흩어진 보수적 가치를 하나로 뭉치는 것.
그다음 좌우를 통합하고
남북을 통일해 하나가 되는 것.
그리하여 나라를 번창시킬 민족의 자산,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내 꿈이요.”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이하 이재오)의 말이다. 올해 일흔 여섯. 작년 처음 볼 때보다는 풍채 면에선 왜소해진 듯하다. 쇠심줄 같은 내면의 내공은 더 단단해진 듯했다. 얼굴은 까만데 흰 소가 떠오른다. 시대적 사명을 얘기하는 모습에서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우직하게 수레를 끄는 소의 초연함이 연상돼서인지도.

민주화운동의 대부라면 대부다. 심훈의 <상록수> 소설류와 같이 농촌 운동을 꿈꾸거나 잠시 교편을 잡았던 국어 교사로서의 생활을 오래도록 영위하고픈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시대는 청춘들을 평화로이 놓아두지 않았다. 중앙대 입학 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6·3시위를 주도하다 붙잡혀 간 것을 계기로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87체제를 열기까지 감옥에서 숱한 나날을 보내며 고문을 받았다. 하루 데모하면 하루 숨는 생활을 했다니 그 긴장의 연속이 감히 상상이 안 된다.

지금까지 주로 범진보 쪽 6월 항쟁의 주역을 만났다면 이번엔 범보수 쪽 주역을 만났다. 6월 항쟁은 새로운 분화를 낳았다. 87체제 전 민주화운동 할 당시 모두가 한 그릇 안에 있었다. 그러다 양김(김영삼, 김대중)이 분열하듯 저항의 역사도 두 줄기로 나뉘었다. 87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를 주창한 쪽은 대체로 YS(김영삼)를 따라 지금의 보수로, 비판적 지지를 한쪽은 주로 DJ(김대중)를 따라 지금의 민주당 주류로 성장했다고 한다.

6월 항쟁 성공의 결정적 동력과 87체제 과제를 주제로 인터뷰는 지난 13일 광화문 소재의 국민통합연대 사무실에서 가졌다.

 

1. 시민 참여 고조의 계기


시사오늘은 앞으로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 쟁취를 이뤄낸 6월 항쟁의 주역들을 만나 당시의 의미와 평가, 과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시사오늘은 앞으로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 쟁취를 이뤄낸 6월 항쟁의 주역들을 만나 당시의 의미와 평가, 과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그래픽=김유종)

 

87년 2월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당했고 전국은 시위로 들끓었다. 그 과정에서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피격돼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박종철 고문치사가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다면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시민들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 무렵 이재오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최고의결기구인 상임집행위원이었다. 국본이라고 하는 것이 재야단체는 물론 정치권, 시민단체, 학생운동, 종교계 등이 모두 모인 연합체였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를 철회하고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이재오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위원장이자 서울민통련 의장 자격으로 국본에 참여했다. 국본이 87년 5월 27일 만들어진 거라면, 민통련은 그보다 앞선 85년 9월 재야단체와 문화예술계 등이 연합해 만든 저항체였다. 이재오를 비롯해 백기완‧계훈제‧장기표·이부영·이창복 선생 등이 주축이었다.

“민통련에서 국본을 만든 거나 다름없어요.”

말인 즉 원래는 국본이 아닌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려했다. 그런데 종교계가 참여하지 않았다. 한계를 느껴 국본을 조직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국본에서 이재오는 공보 쪽을 담당했다.

“국본 상임집행위원이 한 삼십여 명 됐어요. 각자의 역할이 있었어요. 나를 비롯해 이상수‧김상철·박용일 세 변호사가 한 팀이 돼 홍보분야를 맡았어요. 집회를 하면 동원이 문제잖아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인원을 모이게 할 수 있을지가 우리의 고민이었어요.”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성공의 확신보다 시민 참여를 계기로 성공할 수 있다는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성공의 확신보다 시민 참여를 계기로 성공할 수 있다는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6월 항쟁이 성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언제인지요. 

“그런 인식보단 전두환 정권을 끝장낼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여러 징후는 느끼고 있었죠. 시민들 참여가 점점 많아지니까. 대중동원을 하지 않아도 자발적 참여가 상당했어요. 대회를 진행했고 홍보하는데도 큰 무리가 없었어요.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기류가 갈수록 높아졌죠. 이 정권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세대에서 서울시청까지 가두행진할 때는 이재오와 계운제 선생이 앞장섰다. 갈수록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한열 열사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확산되며 민주화 열기가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

- 힘이 났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군사 독재 정권이니 언제 잡혀갈지 모르잖아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하루 데모하고 하루 숨는 것의 반복이었죠. 어떻게든 안 잡혀가야겠다, 잡혀가면 일을 못하니까. 이런 생각이었어요.”

 

2. 6·10 대회가 성공하기까지


민주항쟁은 6월 10일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그날은 전두환 정권이 장충동 체육관에서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날이었다. 국본에서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들만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간접 선거 방식으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이를 가능케 하는 호헌을 철폐할 것과 직선제를 쟁취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대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로 한 것이다.

6‧10항쟁이 결정되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국본 조직 내부에서도 의견은 엇갈렸다.

“당시 재야의 운동 노선은 크게 두 갈래였어요.”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6·10대회는 추진 찬성파로 반대파로 나뉘어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6·10대회는 추진 찬성파로 반대파로 나뉘어있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어떻게 나뉘었나요.

“6‧10 대회를 그대로 하자는 찬성파가 있었고, 아니면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6‧10 대회를 하는 게 빌미를 줄 수 있다’며 연기하자는 반대파가 있었어요.”

이재오는 그대로 하자는 쪽이었다.

- YS와 DJ는 어떤 입장이었나요.

“DJ 쪽은 연기를, YS는 그대로 하자는 찬성 쪽이었어요.”

의견을 모은 건 투표를 통해서였다. 마포구 서교동 마리스타 수녀원에서 회의를 가진 집행위원들은 토론 끝에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진행하자는 쪽이 많아 추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윽고 6월 10일 전국에서 열린 국민 대회는 독재 정권의 기세마저 위협할 위력을 떨쳤다.

회사원들을 상징하는 넥타이 부대, 비폭력 상징의 꽃을 든 어머니들까지 거리 곳곳 나와 평화 시위에 가담했다. 마침내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백기를 들고 만다. 차기 후계자로 지목받은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이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에 이른 것이다.

- 6‧29 선언할 때 깜짝 놀랐겠네요?

“지도부에 있던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우리끼리는 대충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전두환이 항복한다. 이번엔 우리가 이긴다’라고 낌새를 챘죠.”

- 6월 항쟁의 의의, 어떻게 평가하나요.

“말하자면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어진 군사 정권이 사실상 끝난 날이었지요. 소위 민간인에 의한 문민정부가 탄생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이 돼줬어요.”

- 성공 동력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 것은 뭔가요.

“시민참여죠. 운동권끼리는 아무리 해도 확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해줌으로써 군사정권을 끝장낼 수 있었어요. 시민참여 없으면 끝장을 못 내요. 물론 그러기까지 민통련 같은 재야세력이 성공의 동력이 돼줬다고 생각해요. 끈질기게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시민운동이 가능하게 된 거죠. 정치권 또한 도움이 됐어요. YS 상도동계와 DJ 동교동계가 민주화운동을 해줬기에 크게 힘이 됐다고 생각해요. 85년 12대 총선에서 YS가 신민당 돌풍을 일으킨 것도 6월 항쟁 밑거름의 기폭제가 돼줬고요.”

 

3. 87 후 나눠진 재야의 두 줄기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87 대선 당시 김영삼, 김대중 양김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래야 노태우 정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87 대선 당시 김영삼, 김대중 양김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래야 노태우 정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87년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다.
6월 항쟁이 얻어낸 값진 결과였다.

- 대선 기간 후보 단일화를 추진한 것으로 압니다. (이재오는 군정종식을 위한 후보 단일화 쟁취 국민협의회를 조직해 양김 단일화에 적극 나선바 있다.)

“후보 단일화에 적극적인 쪽은 YS, 비판적 지지 쪽은 DJ였어요. 나나 조영래 변호사 등은 YS와 함께 후보 단일화를 하자는 쪽이었어요. 비판적 지지는 DJ쪽이었어요. 이해찬, 장영달 등이 그쪽에 있었죠. 당시 DJ가 내건 논리는 4자필승론이었어요. 김영삼 vs 김대중 vs 노태우  vs 김종필 넷이 나와야 김대중이 된다는 전략이었어요. ‘영남은 노태우와 김영삼이 표를 갈라먹고, 충청은 김종필이 가져가면 호남 몰표를 받는 김대중이 된다.’ 그게 4자필승론이었어요. DJ쪽은 이걸 내걸었고, 반대로 우리는 후보 단일화를 해야만 노태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 현실적으로 후보 단일화가 맞았던 거네요.

“그랬다면 노태우 정부가 안 되고 김영삼 정부가 먼저 들어섰겠죠.”

- 90년 들어서며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옮긴 이유는 뭐였나요.

“안 잡혀가기 위해서.(웃음)”

이재오는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감옥살이만 다섯 번, 고문 등 고초를 겪었다. 6월 항쟁이 지나서도 민통련의 후신인 전민련(전국민족노동연합)을 조직해 활동하다 잡혀 들어갔다.

“89년 감옥소에서 나오니 운동의 지속성이 없잖아요. 안 잡혀갈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정당을 만들면 된다, 법에 보장되니 안 잡혀간다. 그래서 만든 게 민중당이었어요.”

이른바 독자노선파.

“후보 단일화 노선은 주로 독자노선파였어요. 나를 비롯해 장기표, 김문수, 조춘구 씨 등이 독자노선을 하자는 쪽이었지요. 비판적 지지파는 독자적으로 정당할 것 없고 DJ가 있는 민주당에 들어가자. 기성정당에 들어가자는 쪽이었고요. 반대로 우리들은 YS, DJ로 흡수되는 것이 아닌 독자노선을 주장했고요.”

요즘으로 치면 제3의 길이었다.

- 당시 민중당의 목표는 뭐였나요.

“재야가 정권을 잡아 민중 권력을 창출하자. 기존 정당에 들어가 정권을 잡아봤자, 기성 정치, 심부름 정치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 근데 출마했다가 떨어졌잖아요.(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은평을에 출마했지만 득표율 17.4%를 얻으며 4위에 그쳤다.) 재야에서는 유명 인사였겠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느꼈겠어요. 그래서 YS 당으로 들어간 건가요.

“당시는 정당득표율 3%를 얻지 못하면 당이 해체돼야 했어요. 민중당은 3%를 얻지 못했죠. 계룡산인가, 2박3일간 전체 총회를 열고 토론을 했어요. 다시 당을 만들지, 아니면 시간을 가질지. 결론은 각자의 선택에 맡기자였어요. 기성 정당에선 YS쪽에서 주로 영입을 많이 했어요. DJ쪽은 지역구 의원들이 이미 있었으니까. 나나 김문수, 이우재 등은 YS쪽으로 영입됐죠.”

 

4. 승리의 요건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15대 총선에서 문민정부 여당이 이길 수 있던 요인으로 개혁적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15대 총선에서 문민정부 여당이 이길 수 있던 요인으로 개혁적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는 94년 YS 문민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에 입당했다.

- 2년여 뒤 실시된 15대 총선에서 여당이 선전했잖아요. 야당에서 제기했던 정권심판론의 바림이 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YS당이 이길 수 있던 이유는 뭐로 보나요.

“YS의 개혁적 인사 영입이 성공한 거죠. 그때만 해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수정당에선 빨갱이로 봤어요. 색깔론이 여전할 때였지요. 근데 YS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개혁적 인사인 우리들을 과감하게 영입했어요. YS가 민주주의적 신념을 강조하려면 아무래도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많이 영입해야 하니까. 지금 봐도 ‘김영삼 사람들’이 정치권에 남아 있잖아요. 홍준표, 안상수 등 모두 15대 때 들어와 정치적 주류가 된 거예요. 보수가 구보수와 결별하고 신보수 세력이 된 계기였죠.”

신보수인 이재오도 15대 총선부터 7‧28재보선 당선을 거쳐 19대까지 은평을에서 내리 5선을 했다. 야당 십 년, 여당 십 년이 교차되는 20년 동안 그도 원내 정치권 한복판에 있었다.

- 15대 영입이 중도의 영역을 넓혔다고 보는 건가요.

“중도의 스펙트럼을 넓혔기 때문에 살아난 거죠. YS가.”

- 그 원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일까요.

“물론요. 지금 통합당이 안 되는 이유가 중도에서 스펙트럼을 못 넓히기 때문이에요.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아서 안 되는 거죠. (지난 21대 총선도) 공천을 저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내가 국민통합연대를 만들어 중도통합에 힘썼어요. 그때 우리가 뭐라고 했냐면 황교안이가 그만둬라. 최고위원회 물러나라.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공천심사 물러나고 통합비대위를 만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중도보수 대통합 중심으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내려놓지 않았죠. 무늬만 통합이고, 자유한국당에서 기득권을 놓지를 못했어요. 총선 시간이 임박해오면서 우리야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잘 안 됐죠. 김형오 공관위원장 등이 처음에 말한 것과 달리 사심 공천을 했어요. 보수를 일차적으로 궤멸시킨 건 권력을 사유화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고, 2차적으로 망친 건 황교안‧김형오 등이에요. 다 내려놨어야 했어요.”

- 보수는 왜 조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없다는 평을 들을까요.

“욕심 때문이죠. 대가 소를 위해 희생해주기 바라는 것이 지금까지 한국적 보수예요. 선공후사가 아닌 선사후공이죠. 그래서 이번에도 망한 거예요. 다 제 잘났다고….”

- 예전엔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근데 요즘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것도 역사가 바뀌면서 보수는 분열로 망하고 진보는 부패로 망한다가 됐지.”

 

5. 중도보수 통합의 길


이재오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거쳐 MB(이명박) 정부 때는 최측근으로 불렸다. 막강한 실력자로 위세를 떨칠 만도 했지만 한차례 낙선 후 MB정부 초기에는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중국 베이징 대학 등에서 동북아 평화번영을 위한 방법론을 모색했다. 돌아와서는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7‧28 재보선을 통해 18대 원내 입성하고 MB정부 3기 개각 당시 특임 장관에 취임했다.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mb정부 당시 정권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던 것은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mb정부 당시 정권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던 것은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MB 때는 어땠나요. 그때는 보수를 지켰다고 생각하나요.

“MB는 정권 재창출했잖아요. 정권을 안 뺏기고 박근혜 정부에 넘겼잖아요. 그럼 성공한 거죠. MB때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MB계 혹은 중도실용주의파들)는 박근혜 정부 때 다 몰락하고 말았어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재오 등 MB계들은 새누리당 비주류로 밀려났다. 공천에서도 배제됐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이재오는 한때 늘푸른한국당을 창당,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강구하기도 했다.

- 근데 요즘은 같은 노선이었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을 보면 극우로 몰려 있잖아요.

“문재인에 대한 반대 감정이 극우로 몰리게 된 거예요. 중도통합으로 가야 했는데 원체 이 정부에 대한 반발이 크다 보니 극우화 돼 박근혜 쪽과 결합하게 된 거예요. 다행인 것은 이번 총선(21대)에서 ‘박근혜 이야기해 갖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극우론 안 된다’ 이게 드러난 것은 잘 된 일이에요. 이전에는 보수 쪽에서도 ‘박근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어요. 국민 마음은 이미 떠났는데 그걸 못 읽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던 거죠. 지금은 극우의 힘이 없다는 게 드러났어요. 박근혜라는 허상이 무너졌어요. 자기들 입장에 반대하면 다 탄핵파로 몰아붙인 그들의 목소리도 왜소해졌죠.”

- 하지만 여전히 보수 내 감정의 골이 깊은 것 같아요.

“분열의 책임을 정확히 알아야 해요. 보수만 해도 분열은 박근혜가 시켰잖아요. 자기 사람 제외하고 다 쳐냈어요. 스스로 사심을 버렸다면 탄핵도 안 당하고, 보수가 이 꼴을 당하지 않지. 임기를 다 채웠으면 문재인 정부가 나올 리도 없었어요. 정치하면 안 될 사람이 정치를 한 거예요. 이 정부도 마찬가지예요. 문재인 정부는 민주화의 정신을 망각했어요. 87체제에서 오히려 퇴보되고 역행하고 있어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이념 문제를 끌어들이면서 핵 유무 구별 없이 북한을 상대하고 있는 거예요.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어요. 책임은 정말로 책임져야 할 사람 한 명이 책임지는 게 나아요. 박근혜 정부 때는 결국 박근혜 책임인 거예요. 문재인 정부도 실패로 끝나면 그 책임은 문재인이 져야지.”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요.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중도통합을 해야 돼요. 미래통합당이 내부 혁신을 하고 시대흐름에 맞는 정책 대안을 제대로 내야죠. 그래도 지난 총선 때 보면 야당 의석수가 왕창 없어져서 그렇지 범야권 정당 득표율만 보면 40%가량을 국민이 줬어요. 야당에 대한 지지가 적은 건 아니에요. 희망이라면 희망이지.”

- 이 정도면 대안이 될 만하다는 의제가 있나요.

“나라의 틀을 바꿔야 해요. 첫째는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산해야 해요. 두 번째는 이 정부처럼 근거 없이 수도를 옮긴다고 할 게 아니고 행정구역을 체계적으로 개편해야 해요. 우리나라 체제는 1800년대 체제예요. 지금껏 바뀌지 않았어요. 시대는 IT와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는데, 나라의 행정구조는 1800년대 농경시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 본인이 안을 제안한다면요?

“나는 나라 자체의 틀을 바꿀 안이 있어요. 국토 균형발전을 가져올 해법이 있어요. 전국을 인구 100만 단위로 50개 나누고, 권역별 도시를 발전시키는 안이에요. 그 지역 공무원이나 기업 채용은 해당 지역 출신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로 50~60% 우선 채용하는 거예요. 삼성이 천안에 본사가 있다면 연고대만 가는 게 아니라 천안 지역 학생들 다수가 가게 되는 거죠. 서울도 워싱턴 DC처럼 상징적인 곳은 두되  강동, 강서, 강남, 강북 등 네 개 권역별로 나눠야 해요. 행정구역 체계도 중앙과 광역 두 단계로 줄여야 해요. 행정과 정치비용을 줄여 그 돈으로 복지 할 생각을 해야 해요. 이래야 지역균형발전과 인구분산이 가능해져요. 미래에 대한 대안이 없으면 국민은 희망이 없어요.”

-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수가 정권을 잡아야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헌법적 가치의 보수를 말해요. 아직까지 세계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능가하는 가치는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려면 살길은 중도통합. 안 그러면 보수는 희망이 없어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중도통합. 그것이 보수가 가야 할 제1의 길이에요. 우리가 그걸 하기 위해 국민통합연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전국 17개 도시에 조직이 있어요.”

- 내년 재보선 앞두고 통합 움직임이 있겠네요?

“미래통합당 등과 단일대오로 후보를 내야죠.”

- 극우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요. 

“놔두면 돼요. 어느 시대고 극우, 극좌는 있었어요. 미국 워싱턴DC, 유럽에서도 볼 수 있는 게 그들이죠. 시대를 주도하거나 주류가 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어요. 극우 자체에 동의하고 안 하고 간에 존재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중도보수 통합의 중요 변수가 못 되겠지만, 극우도 있는 게 좋죠.”

 

6. 미래 얼굴


인터뷰 후반.
주목하는 잠룡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미스터트롯과 같은 방식으로 보수의 잠룡을 선출해야 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국민통합연대 대표는 미스터트롯과 같은 방식으로 보수의 잠룡을 선출해야 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요즘 눈길을 끄는 차기 대선주자들이 있나요.

“시간이 가면서 나타나겠죠.”

윤석열 검찰총장,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유승민 전 대표, 원희룡 제주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의 가능성에 대해 물으니 “경쟁력에 달려있다”는 말로 대신 답이 돌아왔다. 더 두고 봐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 어떤 사람이 나와야 할까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험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

- 요즘 김종인 비대위원장이나 주호영 원내대표는 물론 김무성 전 대표 등 야권에서는 미스터트롯과 같은 완전국민경선 방식으로 흥행몰이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공감하나요.

“미스터트롯 방식으로 해야 해요. 당에서 특정인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게 선거 패배를 통해 드러났잖아요. 누굴 사전에 키우는 방식으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어요.”

- 여권은 이낙연 vs 이재명 경쟁이라는 얘기가 많은데요, 누가 더 본선에 유리할 거로 보는지요.

“두고 봐야죠. 이낙연이든 이재명이든 둘 다 친문 직계는 아니잖아요. 친문(문재인) 세력이 후계구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판이 달라지겠지.”

- 친문에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나 김경수 경남지사 등이 여전히 거론되고 있는데요.

“재판에 살아남아도 국민들 마음속에 그들이 남아있진 못할 거예요.”

끝으로 이런저런 대화가 더 오갔다. ‘6월 항쟁의 기본 상식에 대해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다’는 따끔하면서도 애정 어린 충고도 새겨들을 대목이었다.  화제를 돌려 스스로는 어떤 노선으로 규정하는지 물었다. 중도통합을 강조했기에 중도란 말이 나올 듯싶었다. 질문에 이재오는 자신을 가리켜 “중도실용주의에 기반을 둔 혁신적 보수”라고 명명했다.

“나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같아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야 보수인데 우리나라 보수는 그동안 발전을 거부해왔어요. 세상 흐름을 따라 중도 실용주의적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 같은 신념, 철학은 똑같아요.”

한편 이재오는 4대강 전도사라 불릴 만큼 MB정부 때 주력한 4대강 사업에 대한 자부심이 여전한 듯 보였다. 인터뷰 시기는 9년 만의 집중 홍수로 전국 각지의 피해가 크던 때였다. 4대강 사업 재평가를 둘러싸고 여야 간 논쟁도 덩달아 불거졌다.

관련 현안에 이재오는 “4대강을 정비해서 주변에 홍수가 안 났다. 안 그랬으면 난리 났을 것”이라며 “지금도 4대강 주변의 주민들로부터 고맙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전했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때 과거 파헤치기에만 치중했지, 4대강 정비 후 남은 과제인 전국 400여 개의 지천하천을 정비하지 못해 난리가 난 것”이라며 “이제라도 문 정부는 지천하천 정비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P.S.

요약하면 이번 87년 6·10항쟁 되짚기 아홉 번째는 성공의 결정타가 돼줬던 시민 참여의 계기에 대해 전해준 재야 출신 정치인의 소회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린 특종기자의 투쟁기(이부영)에 이어서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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