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정책] 노태우 정부 외교정책…“비동맹국을 잡아라”
[북방정책] 노태우 정부 외교정책…“비동맹국을 잡아라”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08.25 17: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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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88~1992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스물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스물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이웃나라를 공격하는 수법을 뜻한다. 전국시대에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하는 데 이 전략을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 방법을 고려해 북방정책을 펼쳤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북한이 문을 열지 않으므로 저 먼 데로 돌아가자고 판단한 것”이라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내가 추진한 대북 전략의 기본 개념이었다. (중략)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당면 목표와 최종 목표를 설정했다. 당면 목표는 남북한 통일이고, 최종 목표는 우리의 생활‧문화권을 북방으로 넓히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지금의 연변, 연해주 지역에까지 우리의 생활‧문화권을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해당 국가들과의 미묘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생활‧문화권을 넓히면 우리는 동북아의 변방국가가 아니라 명실공히 중심국가로서의 위상(位相)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노태우 회고록 下편 <전환기의 大戰略>, 141쪽.

그는 △제1단계,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 △제2단계, 남북한 통일 △제3단계, 연변‧연해주 등 생활‧문화권 확대 등 3단계로 나눠 정책을 추진했다. 그에게 북방정책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 북한을 개방시킬 수 있다면 통일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란 믿음이자 희망이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물네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다.

 

1988.07.07. 7‧7선언


1988년 2월, 노태우는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북방외교의 의지를 처음 드러냈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1988년 2월,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북방외교의 의지를 처음 드러냈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국제 평화와 협력의 외교적 노력을 더욱 더 하고자 합니다.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 국가에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게 하여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것입니다. (중략) 저로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길이 보인다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개의치 않고 방문해 어느 누구와도 진지하게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1988년 2월, 노태우는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북방외교의 의지를 처음 드러냈다. 이후 남북관계 개선 및 외교 노선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7‧7선언이다.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란 제목의 선언문은 6가지 핵심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남북동포 간의 상호 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왕래 △이산가족들 간 생사(生死)‧주소 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적극 주선‧지원 △남북 간 교역 문호 개방 및 남북 간 교역을 민족 내부교역으로 간주 △비군사적 물자에 대한 우방들의 교역 반대 금지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대결 외교 종결 및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 △북한과 미‧일 관계 개선에 협조 및 남한은 중‧소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등의 내용이었다.

노태우의 설명에 따르면, 선언은 미국 측과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이뤄졌다. 대신 당시 박철언 대통령 보좌관을 팀장으로 각 부서별 실무책임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북한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며칠 후 김일성은 북한을 방문한 동독 국방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노 대통령의 선언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의도’라고 비난했다. 이런 북한정권도 북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고립 상태에 들어가자 남북대화에 나서고 유엔 동시 가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상 7‧7선언에 굴복한 것이다. 이는 힘에 기초한 대화만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증거였다.

- 노태우 회고록 下편 <전환기의 大戰略>, 146쪽.

 

1989.02月~1992.08月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


한국이 동구권 국가 중 가장 먼저 수교한 국가는 헝가리였다. 1989년 헝가리 페리헤지 공항 환송행사에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이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하는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한국이 동구권 국가 중 가장 먼저 수교한 국가는 헝가리였다. 1989년 헝가리 페리헤지 공항 환송행사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하는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북방외교 제1단계는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였다. 한국이 가장 먼저 수교한 국가는 헝가리로, 1989년 2월 1일 헝가리의 외무담당 국무장관 줄러 호른이 방한해 한국-헝가리 수교 의정서에 서명했다.

동구권 가운데 헝가리와 가장 먼저 수교한 배경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다. 당시 북한의 방해 공작으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협조가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헝가리 IOC 위원이었던 팔 슈미트는 서울 올림픽을 지지하고, 인접 동구권 국가에 한국을 이해시키려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는 북한의 방해 공작이었다. 북한은 “공산진영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 협박했는데 처음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전체가 동조하다시피 했다. (중략) 그 벽을 뚫고 나가는 데 있어 특히 두 사람이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한 사람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고, 또 한 사람은 IOC의 스폰서 역할을 했던 아디다스의 호르스트 다슬러 회장이었다.

- 노태우 회고록 下편 <전환기의 大戰略>, 149~150쪽.

이런 인연에서 비롯해, 노태우는 가장 먼저 헝가리와 수교를 맺었다. 그해 3월 헝가리가 서울무역사무소를 설치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북방외교가 추진됐다. 그해 11월 폴란드, 12월 유고슬라비아, 다음 해 3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무엇보다 북방외교에 있어서만큼은 여‧야가 노태우 정부와 뜻을 모았다.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1989년 1월 출국해 6개국을 순방했다.

1989년 제1야당 총재인 내게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귀한 시간들도 주어졌다. 1989년 1월 31일 출국하여 스웨덴, 이탈리아, 바티칸, 노르웨이, 네덜란드, 헝가리 등 6개국을 순방했다. (중략) 헝가리 방문은 한국의 정치인으로 처음이었다. 헝가리와는 우리가 방문하기 열흘 전쯤에야 수교했다. 그럼에도 시내 중심가에는 한국말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어 놀랐다. (중략) 작지만 강한 나라, 헝가리가 공산주의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도약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61~567쪽.

소련(러시아)을 공식 방문 중인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 고르바쵸프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소련(러시아)을 공식 방문 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소련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한편 김영삼은 1989년 6월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의 초청은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1988년 9월, 러시아 기자단의 단장 자격으로 방한한 이그나텐코(Ignatenko)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김영삼은 당시 한국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소련과 인터뷰를 가진 뒤, 이그나텐토는 그에게 고르바초프가 머지않아 극동지역을 방문 및 소련의 개방정책을 발표할 것이라 귀띔했다.

그는 “1989년 당시 한국 정치인의 소련 방문은 인간이 달나라에 가는 것과 같이 충격적인 일”이라며, 회고록을 통해 당시 흥분과 감격의 순간을 전했다.

내가 소련을 방문한 것은 우리 정치외교사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당시까지 한국과 소련의 교류는 사실상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상태였다. 그런데 나의 방문으로 본격적인 정치적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6월 9일 나와 마르티노프 IMEMO 소장대행이 서명한 통일민주당‧IMEMO간의 공동성명은 지금까지 한‧소관계가 비정상적이었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김총재의 소련 방문이 양국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최초의 돌파구를 열었다는 데 이해를 함께 했다”고 강조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86~187쪽.

그로부터 약 1년 후,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는 고르바초프와 한‧소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9월 뉴욕 국제연합본부에서 외무부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으로 수교가 이뤄졌다. 노태우는 회고록을 통해 한‧소 수교의 일련의 과정뿐만 아니라 회담 내용도 세세하게 담았다.

한소 정상회담이 실현되자 한국 언론들은 ‘냉전의 벽을 넘는 최대 거보(巨步)’, ‘한반도 대변화의 분기점’ 등으로 보도했다. 한소 수교는 남북한 간의 안정 내지 한국 안보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대소 경협에 대해 말이 많지만 북한의 위협을 줄인 점을 감안하면 나는 그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 노태우 회고록 下편 <전환기의 大戰略>, 222쪽.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국자금성 시찰 모습이다.ⓒ대통령 기록관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국자금성 시찰 모습이다.ⓒ대통령 기록관

한편 북방정책 1단계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 중 한중 관계가 가장 난항을 겪었다. 당초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국가 중 중국과의 관계 진전이 먼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서울과 베이징을 오가며 중국과의 비밀 협상은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를 겪으며, 중국 정부는 미국 등 여러 국가와 관계가 나빠졌다. 뿐만 아니라 대만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고민의 순간도 있었다. 노태우는 임기 6개월을 남기고 한‧중수교를 택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중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설명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북한 통일이라는 큰 그림을 놓고 보면, 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중국은 엄청나게 큰 역할과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중략) 하여튼 나와 참모들은 전통 우방인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내부적으로 강구했다는 점만은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중국 측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례를 제시하면서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 노태우 회고록 下편 <전환기의 大戰略>, 253~256쪽.

이로써 노태우는 임기 전반에 걸쳐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를 완성했다. 이후 1992년 9월에는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9.09月~1992.2月 남북관계 개선


199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한반도의비핵화와평화구축을위한선언' 담화 발표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199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한반도의비핵화와평화구축을위한선언' 담화 발표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북방정책의 제2단계는 남북한 통일이었다. 문자 그대로의 통일은 이뤄내지 못했으나, 통일을 위한 남북관계의 개선을 이끌어냈다. 노태우는 이 과정에서 “남북관계, 통일문제는 우리(남‧북)가 해결한다”는 기본 입장을 고수했다.

노태우는 7‧7 선언 이후 1989년 9월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통해 △자주 △평화 △민주 등 통일 3원칙을 내세웠다. 이 방안은 과도체제로서 남북연합의 과정을 거쳐 민주공화국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은 한국을 제외시키고 미국과 직접 만나 주한미군 문제를 논의하려 했으며, 남한을 포함하더라도 3자(者)회담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북방정책이 진전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화가 찾아오면서 남과 북의 대화도 시작됐다.

이후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이 2차례 열렸으며, 1991년 9월에는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이 만장일치로 유엔 동시 가입을 승인받았다. 연이어 12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끌어냈으며, 1991년 12월 마지막 날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최종 합의했다.

그러나 이를 한 문단으로 남북관계 진전의 성과만 설명하기엔, 지난(至難)한 과정이 있었다. 3차 고위급 회담 이후 4차 회담 전까지 북한의 중단으로 약 10개월 간 교착 기간이 있었으며, 유엔 가입 역시 북한은 남북한 단일의석 유엔 가입을 주장해 입장차를 보였다.

북한은 세 차례의 고위급회담을 통해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와 남한사회의 강점을 목격하고 흡수통일의 공포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반해 남한에서는 북한사회의 비참한 현실이 알려지면서 통일열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 노태우 회고록 下편 <전환기의 大戰略>, 308쪽.

남북고위급 회담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남북기본합의서의 뼈대가 만들어졌다. 이후로도 쟁점 사항에 대한 수차례의 조율과 제5차 고위급 회담까지 거친 후에야 마침내 합의에 이르렀다.

1992년 2월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는 “(남과 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한다”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는 남북 불가침의 내용이 담겼다.

1991년 11월에 발표된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는 “우리의 평화 의지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고 화학생물무기를 이 땅에서 제거할 것”이라며 “핵무기가 없는 한반도를 실현함으로써 이 땅에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열게 되기를 7천만 동포와 더불어 충심으로 바란다”는 문구가 담겼다.

 

능동적인 자주 외교의 시작, 노태우의 북방정책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북방정책 보고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북방정책 보고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이다.ⓒ대통령기록관

2020년 6월 기준, 한국이 수교하고 있는 국가는 총 191개국이다. 이 가운데 노태우 정부 시절 북방외교를 통해 새로 수교한 국가는 45개국으로, 23.6%에 달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개방정책과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 등 대내‧외적인 변화, 그리고 1988년 올림픽과 1987년 민주화를 매개로 북방정책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회고록 下편의 절반 이상을 북방외교에 할애했다. 그는 북방정책이 가지는 의미를 “우리 한국 외교가 능동적으로 발전한 것”이라 자평했다.

지난 6월 동아시아문화센터(원장 노재헌)가 주최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대북정책 평가 세미나’가 열렸다. 황지환 서울시립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이 자리에서 “냉전의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사건 속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외교 전략을 세우고 추진하려 했던 자신감에 기반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했다.

황 교수는 “진영 논리에 의한 대북정책을 20년 이상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데,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배울 게 있다”며 “대북정책 역사상 한미동맹을 우선하며, 북한에 포용적인 정책을 펼친 시기는 노태우 정부가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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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2020-08-26 11:19:41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