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격동의 현장인 천년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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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격동의 현장인 천년 고찰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1.0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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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 총본산 봉원사 탐방
봉원사는 서울 도심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봉원사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연세대학교가 있다. 서울에서 젊은이들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 인근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 있다는 사실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봉원사는 통일신라 때인 889년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창건해 반야사(般若寺)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그 후 고려 때는 보우가 중건, 보수하면서 절 이름을 금화사(金華寺)라고 고쳤다. 지금의 이름 봉원사는 영조 24년(1784년) 왕이 땅을 하사해 절을 새로 지으면서 갖게 됐다.

봉원사는 1970년 조계종에서 분리돼 나온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 본산이다. 조계종에 비해 세가 밀리긴 하지만 태고종은 한국의 여러 종단 중 조계종을 제외하면 최대 종단이다. 봉원사에 가보면 서울에 이렇게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절 경내가 넓고 건물도 여러 채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봉원사가 번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태조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도 화마를 피하지 못해 건물 대부분과 주변 암자들이 불탔지만 중창했다. 이후에도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고 다시 짓는 일이 반복됐다.
 
▲ 봉원사 극락전은 정면의 유리문이 이채를 띤다.     © 시사오늘 권희정


최근에는 지난 1991년 10월 8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8호인 대웅전이 전기누전으로 전소돼 1994년 복원했다. 이렇다 보니 봉원사에는 많은 건물들과 탑, 종 등 건조물들이 많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거의 없다.
 
봉원사 영산재 한국 최초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

대신 한국불교의 전통의식인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범패와 영산재가 계승, 보존되고 있고 한국의 무형문화재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성과를 올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인 단청 기능보유자 이만봉이 봉원사에서 살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기도 하다. 봉원사에는 보물급 탱화가 다수 보존돼 왔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한국전쟁 중에 불타고 현재 남아 있는 단청과 탱화는 이만봉의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문화재 지정이 예상된다.

봉원사 올라오는 길은 천년고찰다운 위용과 운치를 겸비하고 있다. 봉원사 입구를 알리는 곳에서 버스를 내리면 봉원사 경내까지는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이라는 해인사, 송광사, 화엄사에 뒤지지 않는다.

길을 가다보면 오른 편에 송덕비와 부도가 즐비하다. 봉원사가 천년 고찰임을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 같았다. 부도를 한 곳에 모아 세운 것은 봉원사의 오랜 전통으로 보였고 고승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 것 같아 보기가 좋았다.
 
경내를 한 눈에 바라보면 전체적으로 조화가 부족해 보여 아쉬움이 있었다. 봉원사에서 가장 큰 건물인 삼천불전은 최근에 지은 듯 현대식 건축양식이 상당히 가미돼 있고 법당과 종무소, 공양간(식당), 절 내 단체의 회합실 등 다양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삼천불전 앞에는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을 본뜬 석탑이 서 있는데 각이 살아 있어 고풍스런 맛은 부족하다.

대웅전은 삼천불전에 비하면 불교의 전통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편이지만 역시 단청의 색이 너무나 선명해 천년고찰의 분위기를 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봉원사 대웅전은 마당보다 건물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다. 지형과 산세를 살린 것으로 보이며 대웅전의 권위를 높여주는 측면도 엿보인다.

건물의 규모 면에서 삼천불전과 대웅전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규모가 큰데다 예스런 멋을 잃지 않은 여타 건물들을 시야에서 가리고 있어 절의 종교적 기능과는 별개인 문화자원으로서의 값어치가 발휘되지 못하는 인상이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신자들의 욕구를 채워야 하다 보니 불가피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 봉원사 미륵전은 절 내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 시사오늘 권희정


대웅전을 왼편으로 끼고 올라가노라면 명부전, 극락전, 미륵전, 칠성각, 만월전이 연이어 나온다. 명부전이 규모가 있을 뿐 나머지는 단출한 크기다. 명부전은 단청을 새로 한 듯 색이 살아있다. 앞 마당에는 법주사 쌍사자 석등 모형이 있어 봉원사에서만 볼 수 있는 석등을 왜 세우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극락전은 봉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같았다. 현판의 글씨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았지만  정면의 문들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유리문이 눈에 띄었는데 건물을 중수한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극락전 뒤로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의 흙길과 나무들이 극락전과 잘 어울렸다.
 
1908년 한글학회 창립된 곳으로도 기억돼

극락전 오른편 미륵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이채로운 표지석이 하나 있다. 1908년 국어연구학회가 봉원사에서 창립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한글학회 백돌 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고 적혀있다. 한글학회와 봉원사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의문이 들면서 구한말 한글 학자들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미륵전은 다른 절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해방 후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밖에서 보면 벽을 하얗게 칠한 서양식 2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트여 있다.
 
극락전처럼 정면에 유리문이 있어 서양 건축양식에는 어울리는 듯했다. 미륵전 안의 불상은 입상인데 전신이 하얗다. 이 역시 흔치 않은 예다. 태고종만의 특징인지 일본 불교의 영향인지 분명치는 않다.

미륵전 앞 마당 오른쪽에는 날씬하면서 솟구치는 속도감이 느껴지는 7층 석탑이 서 있다. 조계종 사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듯하다. 석탑 맞은편의 비석에는 봉원사의 주소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가 100번지>라고 씌어 있어 행정구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봉원사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만월전에는 말발굽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 이채로웠고 물고기 모양 풍경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면 기둥의 글씨들은 윤곽만 남은 채 모두 지워져 관리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문은 잠긴 채여서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것 같다. 만월전 뒤편의 돌담은 정갈해서 손으로 한 번 만져보게 된다.

정면 세 칸 크기의 칠성각은 떨어져 나간 문창살이 여러 군데 눈에 띄어 보수를 한 번 해야 할 듯싶었다. 칠성각에 모셔진 좌불도 미륵전의 불상처럼 흰색이어서 태고종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 봉원사는 한글학회가 창립된 유서깊은 곳이다.     © 시사오늘 권희정


한국의 전통사찰에서 범종각은 기능과 외관에서 모두 중요한 기능을 차지한다. 규모도 크고 눈에 잘 들어오는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절의 중앙부에 자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봉원사 범종각은 의외였다.
 
경내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데다 왜소한 규모였다. 종을 안 친지 오래돼 보였고 종각 안 구석에는 통나무가 여러 개 세워져 있어 창고 기능으로 대용되고 있는 듯 했다. 안으로 액자가 하나 걸려 있지만 글씨는 모두 지워져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 개화사상 배운 곳으로도 유명

봉원사는 겉모습과는 달리 한국 근대사의 최대 격변기였던 갑신정변의 산실 역할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개화 승려 이동인(李東仁)은 봉원사에 5년간 머물며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에게 개화사상을 불어넣었다. 이동인이 개화당 인사들과 1880년 대  봉원사 어디에서 비밀회합을 가졌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나중에 봉원사를 다시 찾았을 때는 보다 정돈되고 정갈한 모습이 돼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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