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화랑] ‘3당 합당’으로 가는 역사의 물줄기 바꾸려 했던 그 곳
[동방화랑] ‘3당 합당’으로 가는 역사의 물줄기 바꾸려 했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9.18 17: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당 합당 막기 위해 ‘야권통합운동’ 벌인 최형우, 동방화랑서 자금 마련 위한 서예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YS와 DJ는 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였지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뉴시스
YS와 DJ는 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였지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뉴시스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경쟁자인 동시에 협력자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면서도,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29민주화선언으로 ‘공동의 적’이 무너지자, YS와 DJ의 오랜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됐다. 1987년 제13대 대선에서의 후보 단일화 실패는 시작에 불과했다.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벌인 야권 통합 협상 무산, 노태우 정권 중간평가에 대한 이견 등 두 사람은 정치적 고비마다 엇박자를 냈다.

특히 DJ에 대한 YS의 실망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YS는 자신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소선거구제를 수용했음에도 야권 통합이 결렬된 것을 DJ의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YS는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민주당·평민당·한겨레민주당 협상대표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막판 3자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3월 19일, 예상외의 폭력 사태로 통합은 완전히 무산됐다. 통합협상에 최종적으로 도장을 찍기로 한 시각, 서교호텔 주변에는 대낮부터 괴청년들이 북적거렸다. 게다가 최종안을 들고 김대중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평민당 협상대표는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장소를 옮기려던 민주당 협상대표들에게 괴청년들이 달려들어 난장판이 벌어졌다.

나의 총재직 사퇴로 불을 당신 총선 전 야권통합 논의는 김대중의 총재직 사퇴까지는 이끌어 냈으나, 폭력사태로 결국 판이 깨지고야 말았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42-143

여기에 DJ가 노태우와 중간평가 유보에 합의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YS는 DJ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제13대 대선 직전 노태우는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오늘의 약속을 포함해서 6·29선언과 그간의 모든 선거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도록 하겠다”며 임기 도중 재신임 투표를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노태우와 개별 회담을 가진 DJ가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통해 노태우의 재신임을 결정하자’는 입장을 전면 철회했기 때문이다.

중간평가를 피해 나가기로 방침을 정한 노태우는 나의 공세를 외면하고 김대중과의 협상을 계속했다. 노태우는 김대중과의 밀약을 통해 3월 20일 아침 중간평가 유보를 선언했다. 

통일민주당은 21일 마포 가든호텔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 3.20 중간평가 유보담화를 대(對)국민 기만행위라고 규정한 뒤 노태우정권 타도를 선언하고 나섰다. 민정당과 평민당 양당을 불신하게 된 나는 당시의 정국상황을 ‘1노(盧)3김(金)’이 아닌 ‘1김(金)3노(盧)’라고 표현했다.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73~175

최형우는 야권 통합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사동의 동방화랑에서 서예전을 열었다. ⓒ시사오늘
최형우는 야권 통합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사동의 동방화랑에서 서예전을 열었다. ⓒ시사오늘

이때부터 YS는 야권 통합을 통한 군부종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차선책으로 정계 개편을 모색해나갔다. 실제로 YS는 1989년 10월 2일 안양 컨트리클럽에서 골프 회동을 갖는 등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의 접촉면을 넓히며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서 ‘보수 대 진보’ 구도로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언론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합당 시나리오’가 돌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러자 계속해서 평민당과의 통합 필요성을 역설해 오던 최형우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최형우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합당설이 불거지자, 군부독재세력과의 합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야권 통합 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섰다. 최형우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통합이 ‘민주당에는 마이너스, 공화당에는 플러스’라는 입장을 고수하던 터였다.

최형우의 강경한 태도에, YS도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사실 YS도 ‘3당 합당’은 차선책일 뿐, 가능하다면 야권 통합이 최선책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박용만·황명수·황낙주·신상우·박종률 등 중진들이 최형우와 뜻을 함께하기로 하고, 김정길·노무현·장석화·박태권·강신옥·정정훈·신영국·백남치 등의 민주연구모임 멤버들과 김동주 등 6~7명의 민주동우회 회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야권 통합 운동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최형우는 야권 통합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진 의원들에게 200만 원씩을 걷었지만, 목표를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최형우가 떠올린 것이 전시회를 통한 모금이었다. 최형우는 전두환 정권 하에서 정치활동을 규제당한 뒤, 여초 김응현 선생으로부터 9년 동안 서예를 배워 붓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최형우의 서예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故김상현은 2009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온산(최형우의 호)이 쓴 글씨를 보면 안 살 수가 없어, 저절로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 나도 그의 서예전에 들러 몇 점 구입한 적이 있다”고 술회했다.

최형우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1989년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동방화랑에서 서예전을 열었다. 이 서예전에서 모은 돈이 자그마치 1억 원. 최형우는 이 돈으로 사무실을 열고 야권 통합 작업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다. ‘3당 합당’이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정치사적 대사건’이라면, 동방화랑은 뒤틀린 흐름을 막기 위한 최형우의 ‘마지막 발버둥’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인 셈이다.

하지만 최형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주요 중진 의원들이 대거 참여했던 민주당 측과 달리, 평민당은 통합에 미온적이었다. 평민당 내 통합 찬성파는 정대철·조세형·김덕규·이해찬·이상수 등 10여 명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동교동계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4당 체제에서 제1야당 총재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DJ는 어떤 방식으로든 4당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DJ가 야권 통합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자, 평민당 측 인사들도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의 요청에 평민당이 응답하지 않으면서, 최형우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힘을 잃었다. 그렇게 역사는 ‘3당 합당’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됐다.

담당업무 : 국회 및 미래통합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