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패주의 마지막 여정, 포천 국망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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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패주의 마지막 여정, 포천 국망봉에서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20.09.21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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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혼란한 이 시간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국망봉 정상 근처 여기저기에 흩어져 느긋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염소들. 사방으로 어우러진 산세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 최기영
국망봉 정상 근처 여기저기에 흩어져 느긋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염소들. 사방으로 어우러진 산세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 최기영

올여름은 누구나 너무도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잦아들 것 같았던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다시 기세를 떨치고 있고, 유난히 길었던 장마에 강력한 태풍까지 겹쳤다. 

역마의 기운을 타고난 나 역시 몹시 힘들었다. 주말이면 여기저기 산을 찾아다니며 여름을 나곤 했는데 올해는 홀로 또는 가까운 지인들과 서울 근교 산을 찾아 오르는 정도가 전부다. 멀리 있는 명산을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산악회 버스를 타는 것이 기다려지고, 설레기보다는 왠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도 많았다. 지난 주말도 그랬다. 그래도 등산을 못 할 정도는 아니겠다 싶어서 일단 차를 몰고 포천에 있는 국망봉으로 향했다. 

초입을 지나 숲이 나오면 곧바로 험한 된비알이 이어진다. 태풍이 지난 뒤에 아직도 이파리가 살아있는 생목이 산길에 힘없이 쓰러져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산길이 지난 여름 폭우와 태풍으로 엉망이 돼 있었다 ⓒ 최기영
초입을 지나 숲이 나오면 곧바로 험한 된비알이 이어진다. 태풍이 지난 뒤에 아직도 이파리가 살아있는 생목이 산길에 힘없이 쓰러져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산길이 지난 여름 폭우와 태풍으로 엉망이 돼 있었다 ⓒ 최기영

국망봉(國望峰, 1168m)은 경기 포천 이동면에 있는 산이다. 산 이름에 '망'(望)자가 들어있는 것에서 짐작되듯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광활하고 시원하기 그지없다. 

국망봉은 가평군 쪽 용수마을에서 오를 수 있다. 이 코스는 견치봉(개이빨산, 1102m)을 거쳐 국망봉으로 향한다.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장쾌한 산길을 더 걷고 싶다면 포천 이동면 구담사에서 올라 민둥산과 견치봉을 지나 국망봉으로 향해도 된다. 더욱 긴 코스도 있는데 강씨봉, 국망봉, 명성산을 연계하는 종주 코스다. 그리고 이 길은 바로 궁예가 자신이 꿈꾸던 미륵의 세상이 쓰러지고 철원을 떠나 도망을 치며 최후를 맞았던 패주의 마지막 여정이기도 하다. 나는 이날 차를 몰고 갔기에 도로가 잘 이어진 포천 이동면 장암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생수공장과 '국망봉 자연휴양림'이 있는데 그곳에 국망봉으로 향하는 산길이 있다. 

국망봉은 흙길이 많은 육산이지만 산이 크고 억세 굉장히 가파르다. 산길도 잘 정비돼 있지 않다. 초입을 지나 숲이 나오면 곧바로 험한 된비알이다. 지난여름 태풍은 아직도 이파리가 살아있는 생목을 그대로 산길에 쓰러뜨려 놓기도 했다. 

험한 산길을 오르다보면 무인 대피소가 나온다. 산꾼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아, 작은 대피소가 고맙고 반갑다 ⓒ 최기영
험한 산길을 오르다보면 무인 대피소가 나온다. 산꾼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아, 작은 대피소가 고맙고 반갑다 ⓒ 최기영

그 길을 조심스럽게 오르다 보면 무인 대피소가 나온다. 그 흔한 계단도 거의 없었고 위험한 낭떠러지를 곁에 둔 좁고 험한 산길에 느슨하게 늘어진 로프만이 있던 길이지만, 그나마 산꾼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아 작은 대피소가 고맙고 반갑다. 그곳에서 땀을 식히며 물을 들이켰더니 온몸을 스쳐 지나가는 가을바람이 이제는 제법 싸늘하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길인데 더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오르는 내내 수풀에 가려 뭐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답답하고 힘들었던 수고로움은, 유난히 도드라지도록 솟아 있는 국망봉 정상에 서자 단방에 날아갔다. 신로봉과 도마치 방향으로 한북정맥이 시원하게 뻗어있었고 견치봉과 도성고개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운악산, 명지산, 화악산 등 경기 명산이 어우러져 거대한 산세를 이뤘다. 그리고 그 산세의 품에 마을을 이룬 포천의 모습도 정겹다. 날이 좋으면 북한산과 도봉산도 보인다고 하던데 허투루 한 말은 아닌 듯 싶다.

국망봉을 올랐던 그 날, 비가 예보돼 있어서인지 오르는 내내 거의 사람 구경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니 뜻밖에 흑염소 떼가 나를 맞이했다. 목에 숫자가 있는 표식을 달고 있는 거로 봐서는 주인이 있는 것 같았다. 정상 근처 여기저기에 흩어져 느긋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염소들의 모습과 사방으로 어우러진 산세의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신로봉과 도마치 방향으로 한북정맥이 시원하게 뻗어있는 모습  ⓒ 최기영
신로봉과 도마치 방향으로 한북정맥이 시원하게 뻗어있는 모습 ⓒ 최기영
산세의 품에 마을을 이룬 이동면의 모습도 정겹다 ⓒ 최기영
산세의 품에 마을을 이룬 이동면의 모습도 정겹다 ⓒ 최기영

철원이 궁예의 꿈이 서린 곳이라면, 포천은 그에게 좌절과 회한의 땅이다. 국망봉에서 견치봉과 민둥산을 거치면 강씨봉이 나오는데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건 일당을 피해 머물렀던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순두부로 유명한 포천 영중면 성동리 파주골은 '패주골'의 변형이다. 패주 궁예는 철원을 떠나 국망봉에 서서 자신이 세운 나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게 궁예가 도성 철원을 바라봤다고 해 '국망봉'(國望峰)이 됐다. 포천에는 이렇듯 쓰러진 궁예의 꿈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비록 승자가 쓰는 역사에서는 패주에 몹시 가혹했지만, 민중들은 그런 그의 꿈을 기억하며 보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국망봉에서 바라봤다던 궁예의 도성은 지금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DMZ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천 년 전,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그곳은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 있다. 

다툼은 어느 한쪽이 물러서야 끝이 난다. 그 끝이 궁예처럼 누군가의 가혹한 죽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다퉈서 지켜내야 하는 가치가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등을 돌리거나 서로가 어르고 달래는 선에서 다툼을 마무리해야 한다. 무한대의 시간을 쓸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거나, 누구나 공감하는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요즘은 정말 뉴스 보기가 짜증이 나고 겁이 난다. 바이러스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이 퍼져가는데, 저들의 명분은 무엇이길래 저리도 악다구니를 쓰며 다투고만 있는지….

그래도 학교 시절 우리나라 국토 70%가 산지라고 배웠는데 그 사실이 너무도 고맙다. 그렇게 그 산지를 걷다 보면 이 시간도 지난여름의 기나긴 장마처럼, 거센 태풍처럼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국망봉에 올라 시원한 가을바람과 멋진 풍광에 취해 있다가 바로 내려가자니 아쉬웠다. 짧게나마 산길을 더 걷고 싶어 견치봉을 갔다가 되돌아와 차가 있는 곳으로 하산을 했다. 생수공장 옆에는 정암저수지가 있는데 거기서 흘려보내는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땀을 닦으며 산행을 마무리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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