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정신과 파격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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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정신과 파격의 상징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11.30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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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순의 음악실타래]-마그마의 '해야'

국내보다 외국에서 극찬 받아

1980년 제4회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곡으로 ‘해야’가 발표됐다. 그러나 수상자가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형 방송사고였다. 더군다나 라이브로 진행되던 방송이었으니 진행자는 물론이고 객석의 관객과 시청자 모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대 밖 출연자 대기석에 있던 마그마의 리더 조하문은 은상 수상자로 ‘참가번호 10번 마그마’가 호명되자 “우리는 분명 대상이다. 사회자가 잘못 불렀다”며 무대에 나가기를 거부해  다급해진 방송 진행요원이 빨리 나오라고 손을 잡아끌어 재촉하고 나서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은상 트로피를 받았다. 대상은 연세대 의대 출신 듀엣 이범용, 한명훈의 ‘꿈의 대화’에 돌아갔다.
 

▲ '해야'가 첫 선을 보인 1980년 제4회 대학가요제 음반. '해야'는 은상을 받았다.     © 시사오늘 박지순


‘나이프 조’라는 별명답게 찌르는 듯한 고음과 시원시원한 바이브레이션이 돋보인 폭발적인 창법을 구사한 조하문과 프로 이상의 실력을 갖췄으면서도 아마추어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 전위적인 기타 연주를 들려준 김광현은 장내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대학가요제 은상 발표되자 “잘못 불렀다” 수상 거부

조하문이 잠시 수상을 ‘거부’한 것처럼 ‘해야’의 은상 수상 발표를 들은 관객들도 술렁거렸다. 소문에 의하면 심사위원들이 대학생들의 무대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성급히 앞질러간 마그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경쾌하면서도 정감어린 ‘꿈의 대화’가 대상을 수상한 것은 어찌 보면 심사위원들의 구미에 맞아서일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해야’는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 이후 ‘헤비 락’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신중현을 ‘한국 락의 대부’라고 하고 1960년대 초에 이미 이 땅에도 한국화 된 락이 도입됐다고들 하지만 제대로 된 ‘헤비 락’은 마그마가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해야’의 혜성과 같은 가요계 등장은 실로 마그마가 오랜 시간 내공을 쌓은 결과였다. 귀공자 같은 외모를 지닌 조하문(연세대 지질학과)은 일찍이 초등학교 때 기타를 치기 시작해 중학교 때 벌써 밴드를 결성했고 고등학교 때는 음악으로 돈벌이를 제법 했다.

일본의 유명한 음악평론가가 그의 연주를 듣고 “왜 일본에는 이런 빼어난 기타리스트가 없는가”라고 말했다는 김광현(연세대 불어불문학과)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팝의 본고장에서 실력을 연마한 인재였다. 드럼을 친 문영식(서울대 경영학과)은 조하문과 김광현에게 좀 가리긴 했어도 뛰어난 조력자였다.
 
조하문 대학생 가요제에서 예선탈락 거듭

조하문은 1979년 5인조 아스펜스(Aspens, 백양나무)를 결성해 ‘전국대학가요경연대회(김수철이 이끈 ‘작은 거인’이 ‘일곱 색깔 무지개’로 입상한 대회)에 참가했지만 창작곡이어야 한다는 참가 규정을 모른 채 딮 퍼플(Deep Purple)의 곡을 연주해 실격처리 됐다. 그해 가을에는 ‘젊은이의 가요제’에 도전했다가 2차 예선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아스펜스는 결국 해체되고 조하문은 연고전 응원 연습 때 만난 김광현과 의기투합해 4인조 밴드를 결성한 후 연습 과정에서 3인조로 진용을 가다듬었다. 대학가요제 출전을 앞두고도 팀 이름이 없던 이들은 다방에 모여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지질학을 전공한 조하문의 제안에 따라 ‘폭발 일보 직전의 뜨거운 바위 녹은 물’을 의미하는 마그마로 팀명을 정한다.

1980년 당시 국내에서 3인조 밴드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는데 외국에서는 영국의 ‘크림(Cream, 에릭 클랩튼이 기타로 참여한 밴드)’이나 캐나다의 ‘트라이엄프(Triumph)’등 최고의 연주 실력을 갖춘 밴드들이 일부 있긴 했다.

3인조 밴드는 멤버 중 한 명이라도 확실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면 존립하기 힘든 구성이다. 밴드의 가장 안정적 형태인 4인조와 그에 대한 수정·변형이라 할 수 있는 5인조에 비해 3인조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해야’를 주의 깊게 듣고 있노라면 연주의 단순함과 허전함이 느껴지면서도 대담함과 변화무쌍함이 순간순간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연주 형태의 폭을 넓게 가질 수 있다는 3인조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마그마의 탁월함이다.
 
‘해야’ 수록 마그마 유일한 독집LP 수집 열풍으로 가격 폭등

대학가요제 수상 이후 마그마에 쏟아진 뜨거운 반응과 달리 이들은 1981년 힛트레코드사에서 단 한 장의 기념음반을 내고 음악을 접는다. 바로 이 음반이 마그마와 ‘해야’를 전설로 만든 가요사 최고 명반 중 하나가 됐다.
 
▲ 지난 2004년 CD로 재발매된 마그마의 유일한 독집 음반. 이 음반의 초반LP는 희귀 고가 음반으로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 시사오늘 박지순


마그마 독집은 LP전문점에서 20~30만 원에 거래되는데 이마저도 구하기 힘들다. 필자도 꽤 많은 음반을 수집해 오고 있지만 마그마 초반 LP 실물은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다.
 
마그마 초반 LP가 고가 희귀음반이 된 것은 처음부터 발매량이 적기도 했고 김광현의 ‘해야’ 기타연주에 매료된 일본 매니아들이 대거 구입해 갔기 때문이다. 영국의 음반 수집가들에게도 인기 아이템이다.

대학가요제 음반과 마그마 음반에 녹음된 ‘해야’를 비교해 들으면 마그마 수록곡이 확실히 녹음과 연주 모두 빼어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대학가요제 음반은 대회 직후에 급조해서 만들다보니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고 마그마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집이라는 생각으로 멤버들이 시간적 여유를 갖고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던 듯싶다.

마그마 초반은 필자도 꼭 소장하고 싶은 음반이었지만 ‘자금의 압박’으로 손에 넣지 못했고 재발매를 원하는 매니아들이 많았다. 결국 지난 2004년 음반사 창고에 잠자고 있던 마스터 테잎이 발견되면서 LP와 CD 한정반으로 재발매 됐다. 필자는 CD 한 장을 갖게 되면서 그나마 소원을 풀었다.
 
‘해야’ 30년째 연세대 공식 응원가로 인기 독차지

‘해야’에는 조하문의 수상거부와 함께 재밌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해야’의 가사는 박두진 시, 조하문 개사로 돼 있다. 박두진은 유명한 청록파 시인으로 1980년 당시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학내에서 엄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조하문이 박두진 교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시 ‘해야’를 가사로 썼던 것이고 이런 사실을 뒤 늦게 안 박 교수는 대노했다. 그러나 조하문이 박 교수를 찾아가 정중히 용서를 구했고 ‘해야’가 벌써 연세대 공식 응원가로 전교생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어 박 교수도 조하문을 선처했다고 한다.

필자는 얼마 전 동생처럼 알고 지내는 연세대 신입생에게 “니네 지금도 학교에서 ‘해야’ 부르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대답은 “네! 어떻게 아세요?”였다. 발표된 지 30년이 지난 노래를 20살짜리 대학생이 부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야’는 대단한 노래다.
 
▲ 조하문이 솔로로 활동하며 발표한 넉 장의 음반들. 1집은 가요사 최초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 시사오늘 박지순


마그마의 세 멤버들은 고별 음반을 내고 김광현은 학자로, 문영식은 경영인으로 본업의 길을 걸었다. 조하문은 서울 강남에서 예술극장을 운영하다 1987년 솔로 1집을 내고 음악 활동을 재개했는데 ‘이 밤을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우리’가 빅 히트하면서 가요사 최초로 밀리언 셀러(음반 100만 장 판매, 조용필 1집이 최초라는 견해도 있지만 집계가 분명치 않은 듯하다.)를 기록했다.

솔로 1집에도 수록된 ‘해야’는 마그마 시절과는 전혀 새로운 편곡으로 단장했고 락보다는 팝적인 요소가 강하다. 솔로 음반에 어울리게 조하문의 보컬을 강조한 편곡으로 볼 수 있겠는데 음악성면에서는 실망스런 수준이다.
 
조하문, 목회자로 제2의 인생

여담으로, 조하문은 지금 교회 목회자로 살고 있다. 캐나다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사목에 열중하고 있는 그는 마그마 시절의 날렵하고 수려한 외모에서 살도 적당히 찌고 넉넉한 웃음을 지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변했다.
 
▲ 조하문은 목회자가 되기 전 가스펠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 시사오늘 박지순


솔로 4집까지 한 때는 최고의 가수로 군림하면서도 이면에서는 오랜 동안 어두움의 시간을 보내며 정신병원을 드나들기까지 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에 들어가기 전 ‘가스펠(Gospel)’이라는 성가 음반을 냈다. 필자는 조하문의 가스펠을 듣고 인간의 내면 깊숙한 데서 다소곳하지만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순수의 목소리에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

‘해야’를 부를 때보다 조하문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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