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박정희> 박정희가 제일 잘했다?…“반란의 죄, 유신의 죄부터 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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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박정희> 박정희가 제일 잘했다?…“반란의 죄, 유신의 죄부터 논하자”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2.0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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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진실Ⅳ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모범을 보였더라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쳐 헌신했고, 세계정세에 밝아 반쪽만이라도 독립 정부를 세워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인데, 정권욕을 버리지 못하고 3선개헌을 해 무리한 욕심을 채우려다가 3·15 부정선거까지 하게 됐다. 이승만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나라의 불행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의 3선개헌만 없었더라면 박정희의 5·16쿠데타도 없었을 것이고 국민은 32년의 긴 세월동안 군부독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참으로 아쉬워한다. 미국처럼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민주정부로 이어져 왔더라면 지금은 훨씬 성숙한 민주정치 문화가 형성되고, 경제도 더 크게 발전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6년의 일제의 암흑을 지나고 또 32년의 긴 세월동안 우리는 반란군에 의해서 새로운 암흑을 겪었다. 다시는 그런 암흑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한다.

한국에도 워싱턴이 필요하다

애국적이고 헌신적이며 사명감이 투철한 지도자 한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17세기 신대륙 아메리카로 영국의 청교도들이 참된 ‘영혼의 세계’를 꿈꾸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모진 추위와 폭염으로 많은 희생이 됐지만 삶의 터전을 일궈 놓았다.

이들은 전쟁 영웅 조지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삼아 4년씩 두 번 8년이 지났을 때 워싱턴은 더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고사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물러나지 말고 더해야 한다고 강권했지만 그는 끝내 고사했다.

그때 미국의 헌법에는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라는 규정만 있고 몇 번이라는 제한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워싱턴이 마음만 먹으면 몇 번을 해도 법상, 도덕상 아무런 하자가 없었지만, 워싱턴은 “내가 해보니까 대통령은 4년씩 두 번이면 적당하다. 초대 대통령이 두 번만하고 그만둬야지 또 하게 되면 후배 대통령들에게 본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사하고 물러났다.

이 관습헌법은 150년 동안 헌법에 선수 제한이 없는데도 후배 대통령들이 워싱턴을 본받아 모두 두 번만하고 물러났다.

그것이 미국의 정신이 되었고 전통이고 민주주의의 모범적인 정치문화가 되었다. 지도자 한사람의 애국적인 헌신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다.

독립전쟁도 영국에 비해 훨씬 열악했고,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서로 다른 민족들이 모여 만든 당시 미국의 여건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했는데도 사심 없이 처신한 워싱턴의 솔선수범이 단번에 미국의 정신을 만들었다. GNP얼마를 더 올렸다고 훌륭한 대통령은 아니다. 깊이 생각하자.

‘잘 살면 된다?’, ‘하면 된다?’

박정희는 남이 만든 계획을 무력으로 빼앗아 그 공을 가로챘다.

‘잘 살면 된다?’,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것은 고사하고 ‘물질적 풍요’만을 외치면서 잘 살기 위해서는 ‘나를 따르라’고, 나를 무조건 따르지 않는 한국 놈은 맞아야 한다고,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어딘가로 끌고 가서 비인격적인 모욕과 신체적 고통을 주며 시키는 대로 하라고 강요했다. 

‘하면 된다?’ 하면 안 되는 것도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일률적으로 하면 된다고 대단한 자신감의 철학이나 되는 양 강압으로 밀어 붙였다.

거의 10년 동안 대책 없이 국민을 들들 볶다가 박정희가 가장 성공했다는 새마을운동을 겨우 시작했고, 가장 자랑하는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도 일본 청구권자금을 받아다가 10년이 넘어서야 만들어 중화학공업과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전쟁 없이 평화를 구가하면서 농경사회에서 공업화로 정책 방향을 틀고 있을 때여서 우리도 어느 지도자가 나왔어도 산업화의 길로 접어 들 수밖에 없는 때였다.
그간 이룩한 산업화의 성과를 마치 박정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국민의 자유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국민적 지도자가 있었다면

국민적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우리 국민들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투철해 양질의 인재양성에 힘을 쏟아 세계 선진국과 함께 발전했을 것이다. 더 건전하게 산업화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상관없이 아이들 공부는 극성맞게 시켰으니 말이다.

즉, 우리 경제는 반란군이 아니라 교육에 남다른 열을 쏟아 인재양성에 열중한 국민과 함께 착실하게 애국심과 성실성으로 기업을 창설하고 일으키는 수많은 기업의 명멸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성과를 박정희와 반란군에 의해 벼락치기로 이룬 것처럼 폄하하고 포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없어도 민주방식에 의한 기업 활동이 보장되었더라면 더 빨리, 더 건전하게 우리경제는 발전했을 것이다.

경제부흥의 주역은 박정희가 아니라 경제계의 이병철, 정주영, 경제협의회 멤버 및 자녀의 교육을 위하여 몸 바친 국민이다.

2011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이병철 정주영 전태일’이라고 제목을 달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전태일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해 올려놓고, 이병철 정주영에 대해서는 인색하다고 하면서 이병철 정주영에 대해서도 그들의 공적을 교과서에 올려달라고 교육과학기술부와 국사편찬위원회에 요청하는‘사설’을 썼다.

지금까지 동아일보는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보릿고개를 없애고 조국 근대화를 외치면서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경제적 풍요를 가져온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의 영도자가 박정희라고 하면서 박정희가 없었으면 우리의 오늘이 없을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설을 쓰는지 모르겠다.

만사지탄이 있지만 모처럼 바른말을 한 것 같아 대견하기까지 하다.

원래 우리나라의 경제는 4?19후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이병철 정주영 김연수 등이 이끌었던 현 전경련의 전신인 경제협의회와 합작으로 거의 완벽하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들어 놓고 모든 준비를 진행하던 중에 박정희의 반란으로 무산됐다.

박정희는 그들이 만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빼앗아서 서투른 솜씨로 흉내를 내느라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운영과정에 부조리도 많이 일으켜 부정부패로 쌓여 '한국병'을 만들기도 했다.

산업화의 주역은 경제인과 국민이었다.

민주당 정권과 함께 경제개발 계획을 만들어 놓고 출발선상에서 경제부흥의 꿈에 젖어 있던 이병철 정주영 김연수 등 경제협의회 멤버들은 갑자기 총칼로 무장한 박정희 일당의 군사반란으로 한없는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세계2차대전 후 오랫동안 전쟁 없이 새로운 산업화의 길로 매진한 선진국들의 산업화 추세를 잘 아는 이병철과 경제인들은 경제에 관한 한 철없는 박정희 일당의 무리수만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시 경제협의회의 계획에 비하여 5~6년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지만 기업가 정신이 투철했던 그들은 혀를 깨물고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경제 개발에 앞장섰다. 그 외에도 기업가 정신이 확고한 많은 중소기업인, 교육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 자손들을 교육시켜 훌륭한 인재를 키워낸 국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경제를 이룩한 것이다.

군사반란이 없이 민주당 정권이 만든 경제 계획대로 경제를 운영했더라면 더욱 빨리 양질의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루어 졌을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및 유신언론들과 논객들이 경제는 박정희가 다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진정으로 경제건설에 이바지한 경제인들과 국민은 안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병철과 정주영은 이미 왜정시절부터 경제에 몰두하여 기업을 일으킨 선각자 들이었다.

이병철은 이승만 정권 때 제당, 비료, 모직등의 경제활동을 하다가 박정희가 죽고 난 후 1983년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켰고, 정주영은 왜정말기부터 건설과 자동차 공업을 시작한 기업이었다.

이들의 경제 활동은 박정희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들은 가만히 두기만 했어도 기업을 잘 살리고 키울 정신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박정희의 반란정권하에서 권력자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기업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부당한 돈을 바쳐 정경유착의 오명을 쓰게 된 피해자들이다. 그것 때문에 당당한 기업가로서 교과서에 올리는 것을 꺼리는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많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동아일보의 말처럼 우리나라 경제 건설의 선각자는 박정희가 아니고 이병철 정주영 김연수 등 전 경제협의회, 현 전경련 회원 그리고 어려운 중에도 경제건설에  앞장서는 중소기업과 산업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산업 전사들과 국민이다.

이번 사설을 계기로 동아일보는 심기일전해서 이 사실을 바로 보도하고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경제 발전의 진실을 모든 국민이 제대로 알도록 방향을 바꿔주기 바란다.

경제개발의 주역은 처음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치밀하게 세워 놓은 장면정권과 경제협의회, 그리고 중소기업과 교육에 열정을 쏟아 인재를 양성한 국민임을 알려야 한다.

그 많은 기업인들을 모두 열거하지는 못하고 여기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으로 경제를 이끌어 온 대표기업가 이병철과 정주영을 싣는다.

이병철

이병철은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해방 후 1957년 국내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탁월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삼성물산 공사의 무역, 제일제당의 설탕, 제일모직의 의류, 삼성전자의 TV 등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했다.

이병철은 1980년 당시 일본 경단련 이바나 히데조도 박사로부터 “앞으로는 중후장대한 산업보다 경박 단소한 산업에 살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 숙고를 거쳐 주변의 무모하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산업에 투자해 현재의 삼성전자를 만들었다. 그때가 박정희가 죽고 난 후, 1983년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38년 당시 그가 투자한 3만원의 현재가치는 약 2억 4천 300만원이다. 이 돈이 236조원으로 약 97만 배 불어난 셈이다. 236조원은 올해 정부예산(292조 8천억 원)의 약 80%, 서울시 예산(21조 2천 500억 원)의 11배가 넘는 금액이다.

정주영

일제 강점기인 1937년 9월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해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1950년에는 현대건설 및 현대상선을 설립해 사장을 지냈다.

1960년에는 현대건설이 건설업 1위에 올라 우리나라 건설 붐을 일으켜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 현대는 그룹을 이뤄 정주영은 회장에 취임했다. 정주영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자본가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는 아직도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을 해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고 강조했다.

외국 학자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지만 기적이라는 말은 종교에나 있는 말이지 경제에는 기적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GNP가 올라가야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산업화부터 해놓고 일정수준에 갔을 때 민주주의를 하려고 했다’고 박정희도 그의 추종자들도 말하고 있지만, 그의 과거 행적으로 보아 민주주의는 그에게 맞지도 않고 또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박정희는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군인도 아니다. 굳이 군인이라고 한다면 명령불복종과 군법위반으로 군법회의 회부감이다. 또 주어진 여건에 비해 크게 이룩하지도 못하면서 ‘물질적 풍요’외에 생각해 본적이 없으니, 그 시대를 뛰어 넘는 문화적 성과를 이룩한 어떤 통치자와도 비교할 수가 없는데, 여론조사에서 1등으로 나오는 것은 어떤 신문 논설위원의 말처럼, 구세주를 고대하는 일부국민이 만든 신화인지도 모를 일이다.

왜정 36년과 6·25를 겪으면서 우리는 너무 배고프고 힘든 삶을 몸서리치게 경험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과 외국차관을 얻어다가 모처럼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신기하고 눈이 번쩍 띄었다.

박정희로부터 무려 32년 동안 그들의 소리만 들었고 또 그들과 함께 살면서 은연중 그것이 우리의 생활습관이 되어 나도 모르게 벗어 던지기 힘든 문화가 되었다. 그것을 군사문화라고 하던가.

박정희의 군사문화 32년 동안, 그들에게 아첨해 청와대 돈 봉투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도 많고 음으로 양으로 전에 없던 혜택을 받은 사람들도 참으로 많다. 그들이 모두 박정희 향수에 젖어 박정희를 과대 포장해 여론을 조성한다. 이 또한 우리나라의 운명인 것을. 한마디로 비극이다.

박정희로부터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는 32년의 군사독재 치하에서 무한대로 싹트고 자란 부정부패, 부조리의 부실 경제구조가, 투명하고 당당한 민주적 경제구조로 제도화하는 과정의 시작이 문민정부에 들어와서 가능했다.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의 전격실시 등으로 부채기업이 건전기업으로, 은행 등 금융 산업이 부실에서 벗어나 투명성을 회복했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쳐도 OECD 국가 중에서도 제일 먼저 벗어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투명하고 합리적인 당당한 개혁조치가 새로운 기운을 싹틔웠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키우고 가꾸자.

5년과 18년을 같은 잣대로 비교하다니

각종 여론조사 기관이나 언론사들이 여론조사를 한다. ‘역대 대통령 중 누가 정치를 제일 잘 했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정권의 ‘시작과 끝’, ‘집권기간’ 그리고 ‘집권과정’의 잘잘못은 빼고 말이다.
그러면 국민 중에 많은 사람이 ‘박정희가 제일 잘했다’고 대답한다고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은 일률적으로 자랑스럽게 보도한다.

반란을 일으켜 18년 동안 법도 규칙도 짓밟고 총칼로 위협해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비참하게 끝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32년은 성격상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불법정권인데도 말이다.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되어 모든 법과 규칙을 잘 지키면서 단지 5년 동안 박정희 일파가 어질러놓은 독재와 부패의 잔재를 털어내고 민주주의 토대를 잘 닦아놓은 김영삼 등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들과의 업적을 반란세력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합법과 불법, 정상과 비정상을 놓고 어느 것이 맞느냐고 묻고 대답하는 격이다. 웃기는 것이다.
박정희의 18년 업적과 김영삼 등 다른 대통령들의 5년을 똑같은 평가 기준으로 삼아 업적 평가를 하는 것은 더욱 안 된다.

5년과 18년이 똑같다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도 한심하지만, 그들의 거짓 질문을 믿고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것도 질문이라고 하고 이것도 대답이라고 하나. 정말 한심하다.

굳이 비교한다고 하면 아마도 박정희의 ‘반란의 죄’부터 ‘유신’까지 따지고 고려해야 하며 결론은 ‘다시는 박정희 같은 반란과 독재자는 나와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국민의 결단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희생으로 쟁취한 G20까지 올라선 자랑스러운 나라의 국격을 훼손하는 어리석은 짓을 다시는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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