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등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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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등산에서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20.10.12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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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광주여, 무등산이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등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무등산 정상이 보인다. 서석대 표지석을 배경으로 맨 앞 봉우리가 인왕봉, 맨 뒤 봉우리가 무등산의 주봉 천왕봉이다 ⓒ 최기영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등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무등산 정상이 보인다. 서석대 표지석을 배경으로 맨 앞 봉우리가 인왕봉, 맨 뒤 봉우리가 무등산의 주봉 천왕봉이다 ⓒ 최기영

무등산은 골짜기와 봉우리들이 즐비한 여느 산과는 다르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산세가 도시 하나를 감싸고 있다. 그래서 광주 사람들은 무등산을 어머니 산이라고 부른다. 광주 어디에서든 무등산의 서석대와 입석대를 볼 수 있다. 무등산은 그렇게 광주사람들 가까이에 항상 서 있었다. 

명절 연휴 첫날, 나는 홀로 무등산을 올랐다. 본가가 있는 남원과도 가깝고 당일 산행지로 무등산이 제격이었다. 무등산 국립공원 증심사 지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증심교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토끼등 이정표를 따라가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중봉의 가을 정취에 취해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중봉에서 서석대로 향하며  뒤돌아 본 모습 ⓒ 최기영
중봉의 가을 정취에 취해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중봉에서 서석대로 향하며 뒤돌아 본 모습 ⓒ 최기영

무등산은 그 이름처럼 산길도 그리 험하지 않고 부드럽다. 잘 정비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토끼등이 나온다. 거기서 동화사터 방향으로 길을 잡아 중봉 이정표를 따라 이어지는 숲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드디어 무등산 중봉(915m)에 도착했다. 

중봉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서석대와 입석대를 배경으로 광주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군락을 이룬 황금빛 억새가 하늘거리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이리도 아름다운 이곳을 광주 시민들이 마음껏 다니게 된 건 불과 20여 년 전부터다. 90년대 말까지 군부대가 있어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됐고, 이후에 산림이 복원됐다. 중봉의 가을 정취에 취해 한참을 쉬었다가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중봉에서 억새 군락을 지나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서 있는 서석대로 향했다. 그리고 병풍처럼 바위기둥들이 늘어 서있는 서석대(1100m)에 도착했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공간에 화산재가 쌓인 뒤 용암과 섞여 서서히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것을 주상절리라고 한다. 대부분의 주상절리는 해안가나 하천 등 저지대에 있다. 제주 중문, 경주 양남면, 경기도 연천의 재인폭포, 포천의 비둘기낭 폭포 등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상절리다. 

무등산 서석대. 서석대는 육지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대이다. 해가 질 때 수정처럼 반짝거린다고 해서 ‘서석의 수정 병풍’으로 불리기도 한다 ⓒ 최기영
무등산 서석대. 서석대는 육지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대이다. 해가 질 때 수정처럼 반짝거린다고 해서 ‘서석의 수정 병풍’으로 불리기도 한다 ⓒ 최기영

하지만 무등산 주상절리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정상 부위에 분포한다. 산 정상인 천왕봉(1187m)과 주변 지왕봉(1180m), 인왕봉(1140m)이 주상절리고 서석대 역시 해발 1050m에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 광대한 주상절리가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때문에 무등산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기도 하다. 

특히 서석대는 육지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대이다. 높이 30m, 너비 1~2m의 돌기둥 200여 개가 300~400m에 걸쳐 늘어서 있는데 해가 질 때 수정처럼 반짝거린다고 해서 '서석의 수정 병풍'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름다운 돌 병풍을 뒤로하고 계속 올라가자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등 세 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는 무등산 정상이 보인다. 그곳에는 우리나라 공군 방공포대가 주둔하고 있어 민간인은 오를 수 없다. 무등산 서석대와 입석대도 2010년에야 전면 개방됐다. 최근에는 연중 두어 차례 천왕봉으로 가는 길을 여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방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은 서석대가 무등산 정상 역할을 하는 셈이다. 

서석대에서 바라본 모습. 서석대에서 부드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한참 동안 광주시를 내려다봤다 ⓒ 최기영
서석대에서 바라본 모습. 서석대에서 부드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한참 동안 광주시를 내려다봤다 ⓒ 최기영

서석대에서 부드러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한참 동안 광주시를 내려다봤다. 곧 내려갈 장불재의 모습도 정겹다. 서석대 아래 해발 950m 지점에는 입석대가 있다. 높이 20m, 너비 1.5m 안팎의 돌기둥 40여 개가 모여 있는 또 하나의 무등산을 상징하는 주상절리대이다. 기괴한 바위기둥을 구경하며 나는 서서히 장불재로 향했다. 

장불재에는 광주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07년 5월 무등산을 찾아 광주 시민들과 함께 산행했고 이곳 장불재에서 등산하던 시민들을 향해 즉석에서 산상 연설을 했다. 그 뒤 시민들은 그와 함께 걸었던 장불재, 용추삼거리, 중머리재 그리고 내가 이날 산행을 시작했던 증심사 입구까지를 '무등산 노무현 길'로 지정했다. 

장불재에서 바라본 무등산 서석대(배경 왼쪽)와 입석대(배경 오른쪽) ⓒ 최기영
장불재에서 바라본 무등산 서석대(배경 왼쪽)와 입석대(배경 오른쪽) ⓒ 최기영

서석산, 무돌산, 무당산 등 무등산의 별칭은 꽤 많다. 무정산(無情山)도 그중 하나다. 굴곡진 현대사를 겪었던 광주의 아픔을 그저 무심하게 지켜만 봤던 무등산이 원망스러웠을까?

고려말 명신과 명장들을 다 죽이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된 후 나라에 가뭄이 들자 무등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무등산은 그에게 비를 내리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성계는 무등산 신을 지리산으로 귀양 보내고, 왕명을 거절한 이 산을 무정한 산이라는 의미의 '무정산'(無情山)이라 부르게 했다. 그는 그렇게 무등산에 '불복'(不服)과 반역'(反逆)의 의미를 덧씌웠다. 

장불재에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무등산을 올랐던 故 노무현 대통령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최기영
장불재에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무등산을 올랐던 故 노무현 대통령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최기영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광주 사람들은 이 지역 출신의 쟁쟁한 후보 대신, 고졸의 경상 출신이었던 노무현을 압도적으로 밀어줬다. 광주는 그렇게 '노풍'(盧風)의 진원지가 됐다. "아! 참 좋다." 지금은 산이 돼 버린 그가 장불재에 남겨둔 친필 방명록 문구다. 그의 환희와 아픔을 광주사람들은 무등산 장불재에 그렇게 두고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장불재에서 갈라지는 길은 여럿이다. 서석대와 입석대를 오르는 길, 화순 안양산으로 나아가는 길, 규봉암과 꼬막재로 돌아가는 길, 중봉과 동화사터로 내려가는 길, 그리고 원효사 계곡으로도 내려갈 수 있다. 나는 산길을 더 걷고 싶어서 중머리재를 지나 서인봉과 새인봉까지 올랐다가 운소봉을 거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어머니가 계시는 남원으로 향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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