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15)] 최기선 전 인천시장˝김재규, 박정희 사랑하는 마음에서 장렬히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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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15)] 최기선 전 인천시장˝김재규, 박정희 사랑하는 마음에서 장렬히 죽여˝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2.02.13 11: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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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전두환 정권 향해 ´새끼들 다 죽여버린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산(민주산악회) 되짚기 15번째 주인공은 최기선 전 인천시장이다. 최 전 시장은 김영삼(YS) 정권과 김대중(DJ) 정권에서 인천시장을 지냈다. 최 전 시장은 분명 YS계이다. 이런 그가 DJ 정권에서 당 간판을 바꿔 지방선거에 나가 당선됐기에 언뜻 보면 배신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를 배신자라고 뒷말을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2012년 2월 3일 인천의 한 호텔에서 최 전 시장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정치일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YS와 DJ의 소통을 돕는 일을 했다.”

 

▲ 최기선 전 인천시장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권 변호사 조영래 등과 사법고시 거부 동맹

최 전 시장이 서울법대 재학 중 제적된 건 유명한 사실이다. 제적 사실을 통보 받은 그는 동숭동 길을 걸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얘기부터 들어봤다.

"64년도에 한일회담 반대 시위(6·3시위)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김중태 현승일 등 서울대 문리대가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문리대가 초토화 되면서 다음해인 65년부터는 서울법대가 학생운동에 앞장서게 됐지요. 그렇게 학생운동을 하다가 학교에서 제적됐습니다."

이후 최 전 시장은 군에 입대했다. 그 것도 최전방 부대인 백골부대였다. 그 때가 65년 10월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그에 대한 신원조회를 실시했다. 그 결과 DMZ 근무 부적격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북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대본부에서 군 복무를 했다고 한다.

-서울법대에 어떻게 다시 복교하게 됐나요.

"69년도에 제대를 했는데 저의 복교를 위해서 학생들이 복교 운동을 벌였습니다. 정형근 문희상 최연희 안상수 등이 동맹휴학을 했습니다. 제가 복교 했을 때 서울법대 학생운동이 세력화 돼 있었습니다. 서울법대가 학생운동 본산이 되었더라구요. 조영래 장기표 이신범 박세일 양건 등의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영래에 대해 경기고 출신의 이영희 선배가 ‘내년 되면 아주 우수한 학생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조영래가 경기고를 톱으로 졸업해서 서울대를 톱으로 들어왔더라구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 때 유신헌법하에서는 고시를 볼 수 없다며 시험을 거부하셨죠.

 

"유신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했습니다. 그런 헌법을 공부해서 뭐하나 하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안 보기로 했습니다. 고시 거부 운동을 했습니다. 그 때가 71년도입니다. 우리는 사법고시 보다는 정의와 민족의 자존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최기선은 유신헌법하에서 고시를 볼 수 없다며 시험을 포기한채 생계를 위해 73년 외환은행에 들어갔고, 79년에는 경남기업에서 근무했다.

-조영래의 경우는 사법시험을 치렀죠. 

"조영래 아버지가 고시합격을 소망했고 어머니도 소원이라고 말씀하시고 하니 조영래가 '내가 어머니 말씀을 거부할 수 없다'며 고시공부에 몰입해 아마 1년만에 합격했을
겁니다.”

최 전 시장은 자신이 서울 법대에 들어가게 된 얘기도 했다.

"제 고향이 경기도 김포인데 그때만 해도 한 학급에서 절반도 고등학교에 진학 못했습니다. 저희 집은 부자여서 제가 서울로 진학(보성고)했는데 한 번은 서울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집에서 키우는 개가 소고기를 먹는 겁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1년에 두 번 추석이나 설날에 고기를 먹었는데, 그걸 보니까 ‘사람이 개보나 못하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혁명가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성적도 중간 이하로 낙제를 겨우 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쌀 두말을 이고 올라오셨습니다. 그 때 저희 집은 몰락했습니다. 농토를 다 팔아 정유회사 차렸는데 사기 당하고 해서 멸했습니다. 어머니는 간곡히 장남인 제게 '너만 믿는다'며 눈물로 대학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고3이 돼서 결사적으로 공부했는데 서울법대 간 것도, 그곳에 전국 인재들 다 모인다는데 그러면 훌륭한 혁명전사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유신 극에 달하자 다시 전선에 나가기로 결심

-많은 혁명전사들을 만났습니까?

이 대목에서 최 전 시장은 대답대신 당시 상황을 재연해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외환은행에 다니다가 마산에 있는 경남기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77년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갔습니다. 그 때 국내 봉급이 10만 원이라면 사우디는 100만 원이었습니다. 저는 1년이 안 돼서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18평 아파트를 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다 79년도에 귀국했는데 유신이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캄캄한 암흑이었습니다. 도저히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전선에 나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협 형도 언론자유 없는 상황에서 기자생활을 할 의미가 없다며 중앙일보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최 전 시장이 말한 '이협 형'은 소위 동교동계로 분류되는 이협 전 의원이다. 서울법대 선배인 이협 전 의원은 최 전 시장이 YS계가 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야기는 이 전 의원의 결혼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시절 함께 학생운동을 한 우리들은 결혼하지 않고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협 형이 '내가 고백할 게 있다'며 '여공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그 분을 만났더니 동지로서 같이 갈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승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협 어머니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이협 형이 32살 되던 해에 도봉산 밑에 있는 절에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사회는 김규칠 선배가 보고요. 그런데 결혼식 직전에 이협 어머니가 뛰어 올라오면서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렇게 약속을 깨고 결혼한 이 전 의원은 미안했는지 최 전 시장에게도 결혼을 권유했다.

 

"협이 형이 YS가 이끄는 한국문제연구소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아가씨를 소개시켜줬습니다. 기자들도 다 좋아한다고 하면서 만나보라고 그래요. 그래서 만나보니 동지로서 같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YS 비서 최영숙과의 결혼, 상도동계 입문 결정적 계기
 
94년 작고한 최영숙은 1970년 숙명여대 졸업후, 교수추천으로 김영삼의 개인사무실인 한국문제연구소에 들어가 오랜 기간 비서로 근무했다. 그녀가 최기선을 만난 것은 비서 시절인 1975년. 최영숙은 당시 중앙일보 정치부기자로 신민당을 출입했던 이협의 소개로 최기선을 알게 됐고, 연애 2개월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10·26사태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게 되자 이협 최기선 등은 정치일선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됐다.

최기선은 처음에는 동교동에 합류할 생각을 가졌다. 79년 중앙일보를 사퇴한 이협이 자신보다 먼저 동교동 공보비서로 들어갔고, 당시 재야의 실력자였던 김대중도 최기선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결심이 뒤바뀌게 된 계기는 부인 최영숙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협이 동교동계로 갔으니까 당신은 상도동계를 가야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야권이 다시 합칠 수 있다"며 설득했다.

"이미 저는 학생 때 YS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YS가 야당 원내총재 할 때였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6살 많은 장명봉 선배가 학생회장을 했는데 학생운동권 대표로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해서 YS을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공천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저를 기억했던 YS가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최기선이 YS를 처음 만난 것은 학창시절인 1965년이다. 당시 원내총무이던 YS를 찾아가 친구 중 한명을 공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YS는 “젊은 학생들이니까 좀 더 학원에서 공부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거절했다.

-10·26이 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YS가 국회에서 제명되자 부마사태가 발생했고 그 바람에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리비아의 카다피와 비슷하게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김재규가 박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장렬히 죽였고 그래서 지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활하지 않았나요. 그렇지 않았다면 카다피처럼 처참히 죽었을 것입니다. 10·26 이후에 민주화 될 줄 알았는데 전두환이 12·12를 일으키고 또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졌습니다. 요즘의 리비아 사태 같은 게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YS는 가택연금이 되고 DJ는 구속되고 정당은 해산됐습니다. YS쪽에는 김덕룡 최기선 등이, DJ 쪽에는 이협 문희상 권노갑 한화갑 등이 그나마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정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최 전 시장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세계 언론에 한국 민주화운동 상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세계의 언론들이 저를 접촉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AP통신, 로이터 통신, 미국 ABC, LA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영국 타임지, 프랑스 르몽드지 등. 그래서 제가 대한민국 대변인 비슷하게 됐습니다. DJ 쪽도 제가 외국 언론에 연결시켜주고는 했습니다."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한국 민주세력 대변인 역할

최기선은 능통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민추협 대변인,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는 등 김영삼의 측근으로 성장했다. 특히 YS의 23일 단식투쟁 소식을 외국에 알리는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는 전혀 보도가 안 됐습니다. 민한당이라는 야당이 있었지만 YS가 단식한다는 얘기를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YS의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 사람인 박태인(한국명)에게 전달했습니다. 또 AP통신의 화이트 기자와 UPI 통신에도 전했습니다. 단식 1주일만에 전두환 정권이 YS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는데 저는 AP통신 화이트 기자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측근에 의하면 군부대로 끌려간 것 같다'는 보도가 나갔습니다. 미국에서 난리가 나고 제 목소리가 녹음이 돼서 뉴스에도 나가고. 그 다음날 경찰관 한 명이 와서는 YS를 군으로 끌고 간게 아니라 서울대 병원으로 옮겼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 이 시각부터 YS의 연금이 해제됐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저는 명륜동 전셋집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YS가 병원 12층에 누워 있었습니다. 군대가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고요.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최 전 시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식 1주일만에 연금이 풀리자 YS는 민주화를 위한 5가지 요구사항을 성명으로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지켜질 때까지 단식 계속한다면서요. 외신기자들이 새까맣게 많았습니다. 국내 기자들은 쓰지 못했지만. YS가 지독해서 물과 소금만 취했습니다. 간디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생명보장 못한다고 했는데, YS는 죽음의 길로 간다고 했습니다. YS가 깜박깜박하더라구요. 순간순간 의식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열렬히 브리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손명순 여사가 '이 나쁜 놈아 너희가 내 남편을 죽이려 하느냐'며 제 멱살을 잡고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손 여사는 저희가 단식을 중단시켜야 하는 데 오히려 더 부추기는 것으로 본 것 같습니다"

손명숙, YS 생명 위태롭자 멱살 잡으며 울분

-YS에게 단식을 중단하라고 요청하지는 않았나요.

"단식 21일 째, 그 때는 이미 미국에서 카터가, 그리고 로마교황도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한국 민주화을 지원하겠다고. 독일,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총재님 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겠다고 하고 외국 언론에도 많이 나왔습니다. 또 의사들도 생명이 위태롭다'고 귀에 대고 얘기하니, '내 몸은 내가 안데이'라고 말하더라구요. 그러다 23일 째 되는 날에 김덕룡과 저를 들어오라고 해서 '누워서 죽기 보다는 일어서서 민주화운동을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다시 민주화 운동이 재기되는 기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정권이 엄청난 탄압을 했을텐데 어떻게 외국 언론과 그렇게 접촉을 할 수 있었나요.

"제가 미국 대사는 물론, 영국 대사, 독일 대사도 비밀리에 만나서 얘기를 했습니다. 또 제가 가택연금을 수시로 당했는데 우리집 전화는 끊지 못했습니다. 뉴욕, 워싱턴, 파리에서 유수한 언론들로부터 전화가 오니까 끊어버리지 못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과 유럽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방조한다는 비판이 있었는데요.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인정한 것은 차선책이라고 봅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운동권에서는 미국을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주한 미국 대사를 했던 캐서린 스티븐슨과 만나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 때도 캐서린 스티븐슨은 미 대사관에 근무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며 설득하려고 했으나 민주주의 기본 이념에 어긋난다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한국 민주주의를 지원한다는 뜻을 YS와 DJ에게 전달해달라고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실제로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상당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YS·DJ, 서울·워싱턴 민주화 공동선언에 한 몫

-YS가 단식을 끝낸 후 DJ와 8·15 민주화공동 성명을 발표한 사건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DJ는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었습니다. DJ는 백악관 앞에서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데모를 했습니다. 그러다 83년 6월 경 단식 직후에 편지가 오갔습니다. 어떻게 주고받았는지 정확한 '루트'는 저도 모릅니다. 비밀리에 주고받은 것이죠. 저는 수유리 '미스터 문'(문익환 목사)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저희들 말고 다른 전달자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편지를 보니 8·15를 기해서 민주화 공동투쟁선언을 하자는 것인데, DJ는 YS 쪽에서 초안을 작성하면 서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동기자회견문을 작성해서 '미스터 문'에게 보냈고 83년 8월 12일에 DJ가 서명한 회견문이 도착했고 YS도 서명했습니다."

최 전 시장은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그런데 기자회견문이 6장 분량이었는데 이것을 300부를 복사해야 했습니다. 인쇄소에 맡기면 들통 날 게 뻔하고 해서 평소 나를 좋아하던 제약회사(한미약품) 총무과장을 만나 '이건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것이다. 들통 나면 네가 다니는 회사 문닫는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하니 목숨 걸고 하자'고 했고 밤 10시쯤 한미약품 사무실에서 그 친구와 함께 복사했습니다. 그 때 한미약품이 잘못 걸렸으면 완전히 망했을 겁니다."

최 전 시장은 이렇게 복사한 것을 신문지로 돌돌 말아서 먹는 것처럼 해서 경비를 뚫고 밤 11시쯤에 YS와 만났다.

"YS가 직접 6페이지 씩 스테이플러로 찍으며 회견문을 만들었습니다. 밤 12시쯤 됐을 때 YS가 수고했다며 좋은 술이 있는데 한 잔 하자고 해요. '나폴레옹 꼬냑'이었는데 '너 이런 것 맛보지 못했을 것'이라면서요. 하지만 저는 자주 봤던 술이었습니다. 그러다 집에 들어가서 6시에 깼는데 그 때부터 외신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서울 상도동에서는 아침 9시에, 워싱턴에서는 밤 7시에 중요한 일이 있다고. 미리 알리면 기자회견이 봉쇄될 수 있기 때문에 기자회견 직전에 언론에 통보한 겁니다. 그리고 저는 앞서 이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박태인 박사에게도 전달했습니다. 외신 기자들에게 알린 후 제가 상도동으로 가니 이미 골목에 방송차와 기자들로 꽉 찼습니다. 서울에선 김영삼, 워싱턴에선 김대중이 동시에 선언을 한 것입니다. 결정적인 민주화 계기가 됐습니다."

 

▲ 87년 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이 패배하자 최기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렇게 DJ와 YS가 힘을 합쳤지만 결국 87년 대선에서는 단일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86년에 DJ가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DJ가 광주에 내려가니까 40만 명이 모여서 추대를 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민주세력이 분열된 것입니다. 서울의 봄 때 갈라섰다가 민추협으로 합쳐졌는데 민주화가 이룩되니 또 다시 갈라졌습니다. YS나 DJ의 집권의지가 대단했습니다. 양쪽 지지세력들과 경상도와 전라도가 나뉘었습니다. 우리는 통합을 원했습니다. 뜻이 함께하는 다 같은 동지들이기 때문입니다. DJ 쪽 문희상은 저와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자기들 욕심만 채우는 사람들이 양 지도자를 앞세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87년 대선 때 나는 YS나 DJ 둘 중 한명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의가 불의에 질 수 없다는 믿음에서였지요. 그러나 개표 때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2개월 동안 술독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음해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천에 출마했습니다."

YS, 전두환 정권 향해 '새끼들 다 죽여버린다'

최 전 시장은 86년 DJ의 불출마 선언 당시 YS에게 자기가 한 말도 소개했다.

"그 때 전두환이 단말마적인 탄압을 했습니다. 86년 건국대 사태가 나고 문익환의 민통련이 무력으로 해산됐습니다. DJ가 예봉 차원에서 불출마 선언을 한 것 같습니다. YS는 로마 교황청 초청으로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 저와 조깅하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YS가 '너는 국내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하고 묻길래 '전두환 정권이 극렬한 탄압을 하는 것입니다. 깡패는 약자를 더 짓밟습니다. 그럴 때는 강하게 치고 나가야 합니다. 총재님이 유일한 보루로 남았는데 귀국해서 더 강력한 성명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네말이 맞다. 새끼들 죽여버린다'고 했어요."

YS는 86년 12월 동경 외신구락부에서 귀국 성명을 발표했다. YS는 전두환 정권의 민주화 탄압을 용납할 수 없고, 이승만 박정희 보다 더 불행한 말로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 전 시장에게 민산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산이 태동하게 된 시기부터 물었다.

"80년 5·18 이후 정당이 해산됐을 때 YS와 몇 사람이 산에 오른 것에서 시작됐는데 민주화운동이 다시 시작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매주 목요일 마다 산에 올랐는데 그 사람들이 30대 초중반으로 아이들이 초등학교나 유치원 다닐 때입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목요일이 되면 배낭 짊어지고 산에 가니 사람들이 '아, 큰 부자인가. 여유가 있다'며 애들한테 '너희 아버지 뭐하는 사람이야'라고 묻곤 했다고 해요."

-민산을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조달했나요.

"사람들이 민산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지부장에게 돈이 안 내려갔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함께 했습니다. 다만 민산 중앙사무실 보증금처럼 큰돈은 YS나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경제인들이 도와 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측근이라도 돈 출처는 모릅니다."

-민산 해체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민산 해체는 잘했다고 봅니다. YS측근 세력들이 파리 때처럼 몰려들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측근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YS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YS 말기에 IMF가 터져서 그런데, YS는 금융실명제라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회도 해산했습니다. DJ는 못했을 것입니다. 재평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IMF만 가지고 떠들어서는 안 됩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의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봅니까.

 

"DJ와 YS가 화합했다면 노태우가 생길 수 없었는데. YS의 고육지책이 3당 합당입니다. 저는 반대했지만 YS가 적진 속으로 홀로 들어가는,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어 합류했습니다. 3당 합당은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도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봅니다. 분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노태우 쪽에서 DJ에게 제안을 했어요. 그 때 YS 쪽에서는 황병태 등이, DJ 쪽에서는 김봉호 등이 막후 협상을 했습니다. 이분들이 투쟁성에서 약했기 때문에 그 역할을 맡았던 것이지요."

-3당 합당 후 민자당에서 몇 차례 탈당하려고 했지요.

"3당 합당 이후 YS 고사작전이 있었습니다. 박철언이 앞장서고 야비한 짓을 했을 때 우리가 강력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강삼재 서청원 등이 민자당을 깨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때 YS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또 노태우 세력으로서는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쪽에서도 한 걸음 물러섰지요. YS를 고사시키려는 음모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군사세력들이 굴복했습니다. 마침내 군사정권이 뿌리 뽑히며 문민정부가 수립됐습니다."

박정희는 YS와 싸우다 죽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평가를 해주시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그 당시 돈이 없어서 젊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간호사와 광부로 독일에 갔을 때이니까요. 박정희도 역사에 기여한 바 있다고 봅니다. 유신헌법 안 만들고 10년 정도만 하고 물러났으면 좋았을 텐데…. 인권 탄압하고 인혁당 사건으로 젊은이들 죽이고 했지만 나름 경제발전을 이룬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역대 정권들이 나라 발전을 위해 그 때 그 때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YS와 싸우다 죽은 것입니다. YS는 목숨 걸고 투쟁했습니다."

인터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최 전 시장이 왜 정당을 옮겨 다니며 인천시장을 했는지 물어봤다.

"인천시장할 때 전반기 5년은 YS와 손잡았고 후반기 5년은 DJ와 손잡았습니다. DJ가 이협 선배에게 저를 말했다고 해요. DJ와 YS는 다 민주화세력이고 제가 YS 비서실장을 했지만 DJ도 저를 아껴줬습니다. 그 때 DJ가 JP와 손잡고 있었는데 JP가 제가 국회의원 때 선명하고 강력한 야당 인사였다며 용돈도 많이 주고 했습니다. 98년도 선거에서 나오려고 했는데 경기도는 JP가, 인천은 DJ가 공천권을 가졌어요. 그런데 JP가 임창렬이 싫다고 하는 바람에 JP가 인천을 맡고 DJ가 경기도를 가졌습니다. 그 바람에 자민련으로 인천시장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인천시장으로 경제특구할 때 DJ가 많이 도와줬습니다."

-YS가 섭섭해 하지 않았나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올 1월 1일에도 찾아가 인사드렸습니다. 제가 DJ 정권에서 인천시장할 때 YS가 바다를 좋아하니까 을왕리에 초청해서 회도 대접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이 한 번 움직이면 그 수행원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2006년도에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인천시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 때 열린우리당에서 출마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근태 정동영 문희상 등이 부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남이 가지 않으려는 길을 갈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여당에서 후보를 내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서 인천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출마를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2002년도를 기해서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2006년도에 출마할 때는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2월 대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나요.

"지금 안철수 교수가 인기가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고 박근혜 전 대표가 박정희 대통령 딸이지만 지지율이 높은 게 이상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문재인 이사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고요. 한나라당이 집권당으로서의 모습을 상실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너무 신뢰를 잃었고…. 야권이 집권하지 않겠습니까?"

최 전 시장은 이날 민주화 동지들과 차린 민속주점이 6개월 만에 도산한 얘기도 들려줬다.

"81년 사랑방 민속주점을 열었습니다. 나와 문정수 김덕룡 이영석(중앙일보 기자) 등 5명이 600만 원 씩 모아 3천만 원 가지고 차렸습니다. 몇 개월 잘 됐지요. 손님이 바글바글 했습니다. 그러나 정보부원들이 어느 날 앉아 있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 중에 공무원이나 판·검사 동창들이 많았는데 목이 날아갈 위험이 있었죠.  결국, 6개월만에 망했습니다. 또 친구들이 외상술을 많이 먹었는데 그 것도 못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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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덕 2016-05-05 18:03:06
미군기지에서 살아나올수있던건 최기선 선생님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