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서거 5주기 대담] 김덕룡 “약속 깨고, 또 깨고…3당합당 말고 방법 있겠나”
[YS 서거 5주기 대담] 김덕룡 “약속 깨고, 또 깨고…3당합당 말고 방법 있겠나”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0.11.16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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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 “YS, ‘DJ가 사면복권되면 양보 하겠다’ 한 적 없어”
○ “YS, 걱정 말아라 반복하며 DJ말만 철석같이 믿어”
○ “DJ, 소선거구제 받아주면 야권 통합하겠단 약속 깨”
○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시대 10년 앞당겨졌다고 자신”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김덕룡 김영삼민주화센터 이사장은 YS를 보필하며 민주화 시대의 여명을 열어젖힌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YS 서거 5주기를 앞두고 김 이사장을 만나 3당 합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들어봤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김영삼민주화센터 이사장은 YS를 보필하며 민주화 시대의 여명을 열어젖힌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YS 서거 5주기를 앞두고 김 이사장을 만나 3당 합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들어봤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신과 5공을 거치면서 민주화의 여정은 더뎠다. 어렵게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건만 양김(YS·DJ)의 분열로 군정은 연장됐다. YS(김영삼)는 DJ와의 통합으로 군정을 종식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방향을 돌려 YS는 3당 합당을 통해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군정을 종식했고 87 민주화 정신을 완성해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은” 성공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설왕설래다. ‘군정종식을 위한 최선의 선택 vs 대권욕에 눈먼 야합의 산물’이라는 쟁점이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시사오늘>은 YS 복심을 찾았다. YS가 왜 3당 합당의 길로 갔는지를 들어보기 위해서다.

“YS는 바보요. DJ(김대중) 말을 믿고 또 믿었소. 하지만 약속을 깨고, 또 깨고…. 야권 통합이 불가능했기에 3당 합당 말고 방법이 있나요. 그렇지 않고서는 피 흘림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던 상황이었어요. 민자당에 들어가서 대선후보를 쟁취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경우였어요. 세가 적었기 때문인데 그 어려운 걸 YS가 해낸 거예요.”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그는 상도동계(YS계파) 좌장으로 불린다.  서울대학교 선후배인 두 사람은 평생을 동고동락했다. 1964년 총학생회장 시절 굴욕적 한일 회담에 저항해 6·3 사태로 구속·제적됐을 때도 YS가 찾아와 위로해줬다. 1970년 상도동계에 입문, 비서실장으로서 보필하며  ‘민주산악회’,  ‘민추협’,  ‘신민당 창당’,  ‘2·12 선거혁명’,  ‘6월 항쟁’,  ‘87 직선제 쟁취’,   ‘문민정부 탄생’ 등을 함께 열었다.
 

김덕룡 이사장은 서울대 재학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다. YS 상도동계에 입문하고 나서도 YS와 함께 민주화 시대를 여는데 앞장섰다. 사진은 YS 단식과 민주산악회, 민추협 활동 때 자료다.ⓒ시사오늘
김덕룡 이사장은 서울대 재학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다. YS 상도동계에 입문하고 나서도 YS와 함께 민주화 시대를 여는데 앞장섰다. 사진은 YS 단식과 민주산악회, 민추협 활동 때 자료다.ⓒ시사오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는 YS어록처럼 새벽을 열어젖힌 주역 중 한 명이었다.

“감옥 생활이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난방이 안 돼 감방 안에 있는 물통이 다 얼었다. 그 물을 깨서 냉수마찰하고 그랬다. 독재정권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 그런 기분으로 감방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 <시사오늘> 인터뷰 중-


4차례에 걸친 투옥의 와중에도 군정 종식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김덕룡 이사장. 국회의원 5선을 지낸 그는 대통령실 국민통합 특별보좌관, 민화협 상임의장,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의장,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민주센터 외에도 민주화 추진협의회 공동 의장, UN 한반도평화번영재단, 세계 한민족공동체 재단 등을 이끌고 있다.

 

1. 암흑기 ‘그때’


김덕룡 이사장은 70~80년대는 정치적 암흑기, 언론과 기록의 공백기라고 회상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70~80년대는 정치적 암흑기, 언론과 기록의 공백기라고 회상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난 5일 <시사오늘>은 강남구 서초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명사의 집무실에 가면 한쪽 벽면이 책으로 가득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김덕룡 이사장의 집무실 배경도 비슷한 모습이다. 책들로 빼곡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둥굴레차가 나오고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자리에 앉았는데 그(이하 김덕룡)는 <시사오늘>에 감사 인사부터 해왔다.

70~80년대를 회상하는 김덕룡.


“그 시대는 정치적 암흑기, 기록의 공백기였어요. YS가 목숨 걸고 단식 투쟁해도 신문에 나오지 않았어요. 지리산 곰의 생사 문제가 탑이었어요. ‘김영삼이 단식했다’는 사실을 쓸 수가 없었죠. 언론 노릇을 못 한 거예요. <시사오늘>이 당시를 추적해 많은 팩트를 기록해뒀다는 게…. 현대 정치학이나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책상 주변을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가만있자, 나한테 참고자료를 보내줬는데….”

<시사오늘>에서 준 자료를 말하는 거였다. 만나면 묻고자 ‘3당 합당 진실 찾기’ 에 대한 내용을 사전에 미리 보낸 터였다.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대요. 날짜 같은 것도 기억나서 좋았어요. 물론 조금 다른 건 있어요.”

- 어떤 점인가요.

“YS는 ‘DJ가 사면복권되면 양보 하겠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86년, 둘 다 오랫동안 정치 규제에 묶여 있을 때다.

“DJ는 (86년 11월 5일 민추협 사무실에서 시국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며) ‘정부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면 사면 복권되더라도 출마하지 않겠다’는 말을 분명히 했어요. 그러자 기자들이 나와 홍사덕 씨한테  ‘YS는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이냐’며 코멘트를 달라고 했어요. 국민적 여론은 두 사람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졌죠.”

87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직선제가 되면 사면 복권되더라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자, 서독을 방문 중이던 YS는  “민주화 후에도 DJ와 협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이 발언들은 직선제 이후 양김 간 신경전의 소재로 쓰였다.

- YS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거네요.

“분명히 양보하겠다고 한 일은 없어요.”

 

2. 철석 같이 믿은 YS


김덕룡 이사장은 86년 YS가 서독 방문 당시 DJ가 사면 복권되면 양보하겠다는 지지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진은 82세 생일 당시 김덕룡 이사장과 YS가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김덕룡 이사장은 86년 YS가 서독 방문 당시 DJ가 사면 복권되면 양보하겠다는 지지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진은 82세 생일 당시 김덕룡 이사장과 YS가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YS는 DJ가 양보할 줄 믿고 있었다고 한다. 87년 9월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이다.

“YS가 차를 타고 가면 ‘걱정 말아라’,  ‘걱정 말아라’ 해요.  ‘주변 사람들을 달래고 설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라며 DJ가 양보의 뜻을 비쳤다는 겁니다.”

김덕룡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단일화 회동이 지지부진하자)  ‘결판을 내야 합니다. 시간을 끌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내 보기엔 DJ가 양보 않습니다. 경선을 하자는 쪽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YS는 ‘걱정마라, 걱정마라’ 반복했지요.”

- DJ는 왜 안 나갈 것처럼 했을까요. 직선제를 전제로 불출마 약속한 것 때문일까요.

“당시는 ‘4대 불가’ 얘기가 상식적이었어요. 소위 영남, 기업인, 공직자, 군부 즉 4대 세력이 반대하기 때문에 DJ는 대통령 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거였어요. 그와 가까운 사람들도 ‘아직은 우리가 나설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죠. DJ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을 테니까 시간을 달라 했겠죠.”

- 결국 깨졌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DJ가 양보할 마음이 없다는 김덕룡의 생각이 들어맞았다. 당시 단일화의 걸림돌은 ‘미창당 지구당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였다.

통일민주당은 56곳의 창당 지구당과 36곳의 미창당 지구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 미창당 지구당의 조직책을 만들어야 한다. 상도동 측은 50대 50으로 하자며 18곳씩 동교동과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다. 반면 동교동 측은 창당 지구당의 지구당위원장 수가 상도동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아니, 50대 50도 아니고, 그쪽에서 ‘미창당 지구당’을 자기들한테 대폭 양보해라, 이러는 거예요. 우리 참모진 입장에서는 ‘무작정 양보할 수 없지 않으냐.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죠. 그랬더니 YS가 ‘좋다. 당신들이 달라는 대로 주겠다. 경선으로 후보를 정하자’며 양보한 거예요.”

주장이 엇갈리자 양 측 간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나 10월 22일 후보경선을 담판 짓기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난 YS는 동교동 측 안을 수용해 버렸다.

- 심의석 전 한나라당 서울 성북갑지구당 위원장 얘기를 들어보니 그때 큰 소란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이런 결정이 어딨습니까.’ 우리 측에서는 난리가 났죠.”

YS가 DJ 안을 전폭 수용했다는 소식에 경기도 광명지부 창립대회에 있던 최형우·김덕룡 등 상도동계 핵심들은 탄식을 쏟아냈다. “후보를 양보한 거나 다름없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 그런데 결과적으로 DJ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외교구락부 회동 당시) DJ는 YS에게  ‘알겠습니다. 가서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라며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우리 쪽에 이중재 씨를 보내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탈당에 창당까지 선언했죠.”

 

3. 野 통합, 또 ‘불발’


김덕룡 이사장은 YS가 88년 13대 총선 때만이라도 야권 통합을 반드시 이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YS가 88년 13대 총선 때만이라도 야권 통합을 반드시 이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당을 깬 DJ는 그해 11월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양김 단일화 실패로 87년 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 이후에도 몇 차례 통합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통합이 또 한 차례 불발된 사례에 대해 물은 말)

“그렇죠. YS는 87년 대선 패배 후 민주세력이 분열돼 군부 통치가 연장된 것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어요. 88년 13대 총선 때만이라도 야권 통합을 반드시 이루자. 새롭게 민주화의 길을 단축시켜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통합을 위해 총재직도 사퇴했어요.”

백의종군이었다. YS는 88년 2월 오전 9시 “야권의 신속한 단일화를 위해 평당원으로 남겠다”며 통일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 통합 분위기가 무르익는 계기였죠.

“그런데 말입니다. DJ도 당연히 평민당 총재직을 사퇴해야 하는데 전혀 호응이 없는 거예요.”
야권통합 실무기구가 가동됐지만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당이 주장한 소선거구제 도입 여부의 선거구제 협상도 난항이었다. YS는 DJ 요구를 또다시 전격 수용하는 쪽을 택했다. 민주당에 유리한 중대선거구제 대신 평민당이 원하는 소선거구제를 받겠다고 한 것이다.

 

4. DJ의 약속


김덕룡 이사장은 DJ가 번번이 약속을 깨서 87년 YS와 DJ와의 단일화도, 88년 총선에서의 야권 통합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뉴시스(사진은 독자 정태원씨 제공)
김덕룡 이사장은 DJ가 번번이 약속을 깨서 87년 YS와 DJ와의 단일화도, 88년 총선에서의 야권 통합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뉴시스(사진은 독자 정태원씨 제공)


김덕룡은 여기까지 회상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로 넘어갔다.

“(소선거구제를 받기 전) YS가 총재직 사퇴 후 설악산을 갔어요. 나는 YS 비서실장을 사퇴했던 터라 직접 모시고 가지는 않았어요. 정치규제에서 해제됐기 때문에 다음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준비를 할 때였죠. 근데 DJ 측 안인 소선거구제가 받아들여진 것 같다는 얘기가 나한테까지 들리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일까. 당시만 해도 핸드폰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설악산으로 급히 갔는데 그날 바로 속리산으로 갔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았는데 YS한테 DJ가 편지를 보낸 거예요. 문익환 목사와 이각범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통해서 말이죠. ‘만일 소선거구제를 받는다면 총재직도 사퇴하고 야권 통합하겠다.’ 그러니까 YS가 좋다, 그런 겁니다.”


- YS 선택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나요.

“나는 소선구제를 받게 돼도 통합이 어려울 거라고 봤어요. ‘총재님, 통합할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 소선거구제만 하게 되면 우리가 굉장히 불리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전국단위 조직이고 평민당은 호남 중심 정당이고, 우리가 자칫하면 총선에서 2당까지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뜻을 꺾지는 못했다.

“YS는 ‘그래도 통합해야 한다’며 DJ를 만난 겁니다. ‘DJ가 총재직에 있으면 어려우니 내려오고 소선거구제 가자.’ DJ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처음에 DJ는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통합야당의 양김 공동대표 체제’를 새롭게 제안했다. YS로서는 DJ가 총재직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의도로 읽혔다. 방향을 틀었다. 재야세력이 만든 한겨레민주당과의 통합으로 선회하게 된 계기였다.

“YS로서는 평민당이 안된다면 한겨레민주당이라도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러자 통합에서 제외된 DJ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총재직을 사퇴 한다’ 한 거예요.”

88년 3월 16일 DJ는 평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다시 민주당과 평민당 간의 통합 논의에 불이 지펴졌다.

“소선거구제 협상에 속도를 냈던 거죠. 국회에서 소선거구제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DJ가 완전히 달라져 있는 거예요.”

- 통합이 불발된 이유는요.

“거의 다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폭력 사태 나고 최종 합의에도 나타나지 않고….”

88년 3월 19일 서교호텔 주변. 야권 통합에 필요한 도장을 최종적으로 찍으려던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괴청년들이 들이닥쳤다. DJ로부터 결재받으러 간 평민당 간부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통합은 다시 파국을 맞았다.

“그러니까 또 이런 두 번의 사태가 있게 되고….”

 

5. 3당 합당의 결심


김덕룡 이사장은 3당 합당으로 인해 군정을 종식하고 민주화 시대를 앞당겼다고 소회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3당 합당으로 인해 군정을 종식하고 민주화 시대를 앞당겼다고 소회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90년 YS는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JP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3당 합당이었다.


- 야합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단 말이죠.

“난 3당 합당을 했기 때문에 소위 군정을 종식할 수 있었다고 봐요. 피 흘리지 않고 가장 빠른 시간에 민주화의 시계를 앞당길 수 있었던 거죠. 당시는 민주 대 반민주 대결구도였어요. 치열한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었죠. 나는 우리 국민이 능력도 있고, 민주화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민주화 시대가 도래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3당 합당이 아니었다면 과연 10년 내 민주화가 가능했겠는지 되묻고 싶어요. YS가 대통령 될 수 있던 것도 그 뒤 DJ에게 기회가 돌아간 것도 3당 합당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봐요.”

- 3당 합당이 최선이라고 보는 건가요.

“나는 최선이라고 봐요.”

- 야권 통합이 최선이 아니었을까요.

“야권통합이 불가능했으니 3당 합당이라는 길 밖에 없던 거죠. YS가 전략적 선택을 했기 때문에 문민정부를 열고 각종 개혁을 펼칠 수 있었어요. 특히 하나회를 해체했기 때문에 DJ한테 기회가 왔지….”

여러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듯했다. 92년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YS는 전두환을 추종한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청산을 비롯해 5·18 특별법 제정,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 4당 체제에서도 YS가 대통령 됐을 거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 같은 분이 대표적이죠.

“당시는 알다시피 지역 정당이었어요. 민정당은 TK(대구경북), 통일민주당은 PK(부산경남), 평민당은 호남, JP는 충청인데 각각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어요. 4당 체제를 깨기가 어려웠어요.”

- 3당 합당으로 호남을 고립시켰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DJ가 끝까지 통합을 안 했기 때문에 지역 구도가 더 강화되고 호남이 더 고립된 거예요.”

- 왜 DJ와 통합이 안 된다고 생각한 건가요.

“나는 DJ가 양보할 것 같지 않았어요.”

- 정치적 판단인가요.

“집념이랄까…. DJ와 대화할 기회가 좀 있었어요. 정치적 탄압이 많던 때니 감시로 인해 YS와 DJ가 만나기 어려운 시대였지요. 그럴 때면 DJ는 나를 부르곤 했지요. 동교동 집에 데려와서는 ‘김 실장, 이건 이렇지 않나’며 여러 얘기를 들려줬어요.

역경을 거치면서 DJ는 스스로에 대해 ‘나는 하늘이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운명적으로 항시 승리가 따른다는 생각을 한 거죠.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도 넘긴 데다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예상치 않게 승리했잖아요.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낸 거예요. 도취라기보다는 자기 성취감이라고 할까. 그런 게 큰 분이었어요.”

70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처음 들고 나온 건 YS 였다. 유진산으로부터 ‘젖비린내 난다’는 공격을 받았지만 당의 노쇠함을 비판하며 새 바람을 일으키고자 했다. 같은 40대인 DJ나 이철승을 설득해 함께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결선 투표에서 이철승이 약속을 깨는 바람에 본선 티켓은 DJ에게 돌아갔다.

 

6. 뿌리를 찾아


김덕룡 이사장은 3당 합당에 대해 YS는 국민을 믿고 DJ에 양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3당 합당으로 인해 현대 정치사의 지형이 바뀌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덕룡 이사장은 3당 합당에 대해 YS는 국민을 믿고 DJ에 양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3당 합당으로 인해 현대 정치사의 지형이 바뀌었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만약에 말이죠. 87년 대선에서 단일화 경선이 이뤄졌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조건만 보면 YS가 불리했죠. 그러나 결코 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람들이 DJ는 안 된다고 보던 때에요. 투표권이 있는 지구당 대의원들은 현실적입니다. 노태우를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선택했을 거예요.”

- YS도 같은 생각이었을까요.

“YS는 국민을 믿었어요. 그는 늘 ‘국민을 믿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설령 경선하더라도 ‘국민이 지지해주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본거죠.”

YS는 그 시절 DJ보다 인기가 더 좋았다. 87 대선 득표에서도 DJ보다 표를 더 많이 받았다. 그것이 정면승부를 할 수 있던 동력이 돼줬다는 분석이었다.

“국민을 믿고 양보한 거죠.”

여운을 안겨주는 말이었다. 때론 독백처럼 읊조리던 김덕룡은 끝으로 군정 종식 외 3당 합당의 또 다른 의미에 주목했다. 

“3당 합당은 현대 정치사의 지형을 바꿔놓았죠. 4당 체제를 양당 체제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보수와 진보로 바꾸는 계기였어요.”

그리고 의미심장한 얘기. 국민의힘이 정체성을 찾고 정권교체의 모멘텀을 만들려면 뿌리를 3당 합당 이후로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야당을 두고 ‘박정희 정당’ 이라고 하잖아요. YS가 집권하고 신한국당을 만든 것부터 뿌리라 할 수 있어요.”

신한국당이 국민의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군사독재 정권과 YS가 만든 신한국당은 구분돼야 한다는 강조점이기도 했다.

“야당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면 ‘신한국당으로 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김덕룡의 말에 야당은 뭐라 답할까. YS ‘대도무문’ 의 가르침을 구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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