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박관용 “野, YS 만큼 용기와 결단 있는 지도자 절실”
[時代散策] 박관용 “野, YS 만큼 용기와 결단 있는 지도자 절실”
  • 구술 박관용|정리 정세운·윤진석 기자
  • 승인 2020.12.2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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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 전 국회의장
○ “잡혀갈 것 알고도 탈당 결행, 선명 야당으로”
○ “3당 합당 안 따라간 이기택, 나중엔 후회해”
○ “이기택 사람이나, YS가 비서실장으로 발탁”
○ “헌정사 최고는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 “盧 탄핵 잘잘못 떠나 의회주의 신념 지켜”
○ “무기력하기 짝 없는 野, 야당다운 게 살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구술 박관용|정리 정세운·윤진석 기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야당의 관건은 용기와 결단이라고 말했다.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야당의 관건은 용기와 결단이라고 말했다.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요즘 야당이 무기력하다고들 한다.

“야당의 갈 길에 대해 원로로서 한 말씀해주시지요.”

지난 14일 기자들이 찾아와 물었다. 이야기는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초구 소재의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이곳은 김영삼(YS) 문민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YS 초대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96년 마포포럼 부설로 창립했으니 햇수로 20년이 넘었다.

“용기와 결단이 부족해요.”

요즘 야당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민한당 탈당을 결행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 시절 우리는 용기와 결단이 충만했다.

“강서 갈비 회동이라고 불렀지요?”
기자는 물었고 나는 회상에 잠겼다.

 

1. 민한당 탈당



5공화국 하에서, 초선의원을 지낼 때다. 84년 12월 18일 정기국회가 끝난 뒤 나는 비장한 마음을 먹고 강서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감시를 피하고자 회식을 빙자한 비밀회동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 시기 민한당은 관제 야당 성격이 짙었다. 여당의 2중대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저게 뭐 야당이냐.’ 국민 눈에는 이리 비췄다.

“아, 이놈의 정당에서 못 해 먹겠다.”

김근조 고문치사 사건 등을 폭로하며 정권에 대항했던 나로서는 민한당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게는 야당의 피가 끓고 있었다. 오랫동안 민주당 경남도당 활동을 열심히 하던 어머니 영향도 컸다. 신군부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나는 YS가 이끄는 정통 야당인 신민당 소속이었다. 79년 YH무역 농성 탄압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백서 작업에 투입되는 등 유신 체제에 맞서 대여 투쟁에 일조해왔다. 그해 YS 의원직 제명으로 부마항쟁이 발발하고 10·26 사태가 날 때만 해도 서울의 봄이 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12·12 쿠데타와 80년 5·17 비상계엄 조치는 민주화의 날개를 꺾어놨다. 광주는 피로 물들었고, 정당은 해산됐다. 김영삼·김대중(YS·DJ) 등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은 정치쇄신 규제법에 묶여 감금되거나 붙잡혀 갔다. 나나 서석재(YS계) 등 비서관 출신들은 묶이지 않았다. 81년 11대 총선이 다가왔다. 체육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는 구색 맞추기용 야당은 놔두었다. 그곳에서나마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자 입당했던 나는 부산 동래구에 출마했다. 산골, 골목마다 맥주·밀가루·설탕·신발·담배·현금 봉투 등 신군부 지원에 의한 물자들이 판을 쳤다. 그럴수록 나는 정권을 규탄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여러분, 오늘 저녁부터 동래에 흰 눈이 내릴 것입니다. 흰 봉투도 갈 것이고, 흰 밀가루도 갈 것이고, 흰 쌀자루도 갈 것입니다. 그 눈에 미끄러지지 말고 이 박관용이를 붙들어 주십시오.”

1·2위 모두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나는 근소한 표 차로 2위에 당선됐다. 엄혹한 정국이었지만, 어렵사리 원내에 입성한 만큼 의욕이 컸다. 그러나 민한당은 대여 투쟁의 의지를 하나도 안 갖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젊은 의원들 몇몇이 튀는 발언을 했을 뿐이다. 지도부 자체는 무기력했다.

 

2. “가자, 신민당으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민한당 탈당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민한당 탈당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사쿠라 정치인들 밑에서 더는 일 못 하겠다. 과감히 탈당하자.”

나는 뛰쳐나갈 결심을 했다. 민한당 정책위의장이던 김현규 의원, 홍사덕·서석재·김찬우·최수환·손정혁 의원 등도 같은 생각이었다.

식당에 모여 앉은 우리는 다음날 새벽 5시 기습적으로 탈당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 새벽이 왔고, 미리 준비해둔 탈당 성명서를 읽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안 그러면 신군부에 잡히고 말 거였다.

“탈당했다고 잡아간다는 게 법리적으로 좀….”

듣고 있던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말이 안 되는 소리지” 맞장구쳤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다. “안기부가 잡아가면 잡아가는 거니까….”

“김현규·홍사덕 의원은 잡혀갔잖아요?”

“두 사람은 잡혀갔지. 도망가다 잡혔고 숨어 있다가 잡혔고.”

“이후 신민당으로 갔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YS 단식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 됐다. 선명 야당을 재건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던 때였다.

“신민당으로 가자.”

탈당파들인 우리는 새로 창당되는 신민당행을 마음먹고 있었다. 명칭도 과거 야당 이름 그대로였다. 상도동으로 찾아가 이를 전하자 YS는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줬다. 이듬해 85년 2·12 치러진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켰다. 나도 부산 동래구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다. 다시 생각해도 우리의 용기는 대단했다. 탈당하면 구속될 줄로만 알고 있었지, 승산을 좇은 행동이 아니었다.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우리의 탈당이 신당 흥행의 전주곡이 돼줬다고 자부한다.

“81년 처음으로 금배지를 단 후 6선을 하는 동안 나는 매번 다른 당명 아래서 선거를 치렀어요. 대부분 나는 가만히 있는데 당이 다른 정당과 합당하거나, 당명을 바꿨기 때문이지. 근데 내 의지로 당을 바꾼 때가 바로 민한당에서 신민당을 선택한 이때였어요. 그때의 정치적 결단이, 내 정치적 인생을 좌우한 거야.”

 

3. 계보의 시작


청년 당시 4·19 학생 시위에 가담한 박관용 전 의장이 조수석에 앉아 있다.ⓒ박관용 전 의장 제공 회고록
청년 당시 4·19 학생 시위에 가담한 박관용 전 의장이 조수석에 앉아 있다.ⓒ박관용 전 의장 제공 회고록

 

이후 나는 신민당과 통일민주당을 거쳐 100만 개헌 서명운동에 나서는 등 87 체제를 여는 데 앞장섰다.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 김이 분열했을 때는 단일화 운동에 나섰다.

그때 기자가 물어왔다.

“87 단일화 때 중립을 지켰잖아요. 하지만 양 김이 경선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든단 말이죠. 반대로 의장께서 경선하자, 이런 주장이 아니라 양 김 단일화만 외쳤던 것 같아요. 행보가 좀 달랐더라고요. YS나 DJ 계보가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내색이었다.

“나는 이기택 사람이잖아요.”

따지자면 나는 이기택 계보였다. 4·19 주역인 우리는 부산중학교 1년 선후배 사이였다. 이기택(전 민주당 총재) 의원이 37년생, 내가 38년생이었다. 그는 67년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전국구 배지를 달았다. 나는 그의 비서를 시작으로 정계 입문했다. 처음 제안이 왔을 때는 생각 좀 해보자고 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데다 동지로 출발했기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고려대를 대표해 학생운동을 했다면, 부산에서는 동아대를 기반으로 한 나를 더 알아줬다. 하지만 그때 나는 막 결혼을 한 상태였다. 직업도 없을 때였다. 아내도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래. 비서를 하면 월급도 나올 테니까….”    

서울로 온 우리는 망원동의 판잣집 비슷한 곳에 세를 얻었다. 차관급 대우인 국회 교섭단체 전문위원으로 옮기기까지 6년 동안을 비서로 지냈다. 수행비서와 비서관밖에 없을 때다. 정책 보좌와 지역구 관리부터 상임위·정당 발언, 선거 연설문 작성 등을 도맡아 했다. 매일 국회 도서관을 다녔다. 책 보고 원고 쓰고 신문 사설을 오려내기 바빴다. 잘하기로 소문이 나서는 다른 의원실로부터 연설문 대필 요청들도 많이 들어왔다. 그것이 계기가 돼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들을 제치고 단 두 명 정원의 국회 교문위원에 뽑힐 수 있었다. “와, 니 원고 잘 썼다 그러대.” 송원영 총무가 칭찬했다며, 이기택 의원이 전해줬다. 시험문제는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대처 방안’이었다. 경제라면 자신 있었다. 이기택 의원이 상임위로 있던 경제과학위원회 자료를 준비하면서 공부를 많이 해두던 터였다.

그때, “87 대선을 앞두고 양 김이 단일화하려면 경선이 최선이었을 텐데 왜 그 방법을 주장한 YS 손을 들어주지 않았나요?”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다고 생각했는지, 기자가 아까 질문에 대해 재차 물어왔다.

“상도동하고 동교동계가 좌지우지하던 때 아니오. 이기택 의원은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고집도 있고 성격이 원래 그래요. 누구 밑에 들어가는 걸 싫어해요. 우두머리가 되려 했지. 독자노선 파였어요. 나야 그 양반 비서 출신이니 중간에서 자꾸 3 세력으로 남았던 거고요.”

 

4. 이기택의 묘수


이기택 의원은 신민당 시절부터 양  김과는 자주 대결 구도에 놓여 있었다. 대권을 꿈꿨기에 신민당이 양 김 주도로 흘러가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79년 전당대회 때 이기택 의원이 신도환 최고위원하고 결별하고 당권에 나선 이유는 뭐였나요.”

이야기는 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 때로 넘어갔다.

“이기택 의원이 신도환계였잖아요. 신도환 의원의 인품이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반공청년단 출신이란 이미지 때문에 신도환계로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 ‘독립합시다.’ 그 뒤로 나는 4·19 세대를 중심으로 민사연(민주사회연구원)을 조직했어요. 용산, 마포 등에 만들고 사람을 모아 나갔지요. 이기택 계보를 키우려 한 거였죠. 이 의원 본인도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당권에 도전한 거고요.”

전당대회 도전자는 이철승, YS, 이기택, 신도환 등이었다. 신민당 당사 4층에서 치러진 1차 투표 결과 재석 대의원 751명 중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가 나왔다. 사실상 박정희 정권이 밀었던 이철승과 선명 야당을 앞세워 국민의 지지를 받던 YS의 대결이었다. 2차 투표를 앞두고 막후교섭이 펼쳐진 가운데 신도환 최고위원은 이철승 대표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승패를 가를 열쇠는 이기택 의원에게 쥐어졌다.

“2차 경선 때 이기택 의원을 붙들고 YS를 지지해달라고 설득했잖아요?”
“내가 이기택 의원한테 그랬어요. 영원히 살려면 YS를 밀어야 한다.”

당시로 돌아가, 그 말을 듣고 있던 이기택 의원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철승 측은 만나줘도 YS가 보낸 사람은 돌려보냈다. 나는 이 의원이 정부의 압력에 굴복했다고 생각했다. 정부는 이기택 의원이 이철승 대표를 밀도록 그의 매형이 운영하는 태광산업 장부를 압수해가는 등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저 창밖의 함성이 안 들립니까?”

건물 밖에는 YS를 연호하는 함성들로 가득했다. 나는 이기택 의원의 양복을 꽉 잡고 머리를 들이받다시피 하며 대들었다. 그러자 이기택 의원이 귓속말로 나를 제지하듯 “가만히 좀 있어 봐!” 하고 말했다.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아, 내가 잘못 판단했구나.’ 오래 보좌하고도 그의 의중을 알아주지 못했구나,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사이 이 의원이 연단으로 올라가 YS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극적 반전의 결과 2차 경선 승자는 YS에게 돌아갔다. 정부에서 방해하지 못하도록 교란 작전을 일으킨 이기택 의원의 묘수가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5. 3당 합당과 YS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3당 합당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3당 합당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랬던 두 분이 3당 합당을 계기로 갈라졌잖아요?”
“그랬지.”
“이기택 의원도 처음엔 3당 합당行을 선택했다가 왜 안 간다고 한 거죠.”

기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노태우 민정당, YS 통일민주당, 김종필 공화당이 통합한 90년 3당 합당 당시 이기택 의원은 YS가 있던 통일민주당의 부총재였다. 나는 3당 합당으로 가는 길이야말로 이기택 의원이 차기 대권을 잡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급기야 반대하던 이 의원도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3당 통합 추진위원으로 활동도 했다. 그러나 추진위원들과 청와대 가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뒤 마음이 바뀌었다. 들어 보니 “분위기가 영 마음에 안 든다. 박철언이가 거들먹거리는 것도 보기 싫다”는 이유였다. 끝내 이 의원은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내게도 이탈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 잡겠다는 YS 계획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 결정한 것을 번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갈라섰다. 23년 만의 정치적 동행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 뒤 이 의원은 3당 합당에 반대한 박찬종·김광일·김정길·노무현·이철 등과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기택 의원이 3당 합당에 합류했다면 차기 대선주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가능성이 매우 높았죠. 나중에 후회했죠.”
“이기택 의원이요?”
“네. 명분으로 갔지만, 실리를 못 찾은 거죠.”
“근데 3당 합당한 민자당을 보면 노태우 민정당계와 김종필 공화당계를 합하면 80%, 민주계는 20%에 불과했잖아요. 수적으로 열세인데 YS는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요.”

기자는 이 점도 궁금하게 여겼다.
“첫째는 용기, 둘째는 지적 전략 때문이에요. 공격할 때는 세게 하고, 빠질 땐 쫙 빠지면서…. 그런 정치적 전략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그 결과 YS는 92년 5월 19일 민자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온 YS를 고립시키고자 민정계 인사들의 방해도 심심치 않았다. 내각제 각서 유출 파문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이대로 대권은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YS는 하나씩 하나씩 장애물을 거둬내며 쟁취해 나갔다. 필요하다면 노태우 대통령과 정면충돌했다. 3당 합당 후 14대 대통령이 되기까지 YS 투쟁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 헌정사상 큰 업적



93년 문민정부가 개막했다. 나는 초대 비서실장이 됐다. 측근도 아니고 이기택 계보인 나를 발탁한 배경이 궁금했다.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89년 6월 YS와 함께 소련을 방문한 바 있었다. 현지에서 YS는 북측 고위급 인사인 허담과 회담을 하게 됐다. 소련에 접촉한 북측의 요청으로 이뤄진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나는 주한미군, 남북 현안 등에 대한 답변 자료를 긴급하게 작성했고, 회담에 나서는 YS에게 줬다. 다행히 허담의 질문은 내가 준비한 자료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의 내 모습을 좋게 보고, YS가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문민정부 평가 한번 해주시죠.”
회상에 잠겨있던 차, 기자가 물어왔다.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딱 두 가지를 제시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요.”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문민정부에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박관용 제공 회고록
문민정부에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다.ⓒ박관용 제공 회고록

 


때는 93년 3월. 문민정부가 막 탄생한 후였다.

“비서실장님.”
하루는 YS가 나를 불렀다.
“예. 각하.”
“내일 하나회를 척결합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하나회가 어떤 조직인가. 전두환 군사정권을 유지하게 한 사조직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비록 문민정부 시대가 시작됐지만, 총칼을 갖고 국군을 장악하던 무서운 조직이었다.
“준비가 엄격하게 안 돼 있으면 어렵습니다.”
“내 실은 준비를 해왔는데, 실장한테도 얘길 못하겠더라.”
알고 보니 YS는 자신을 포함해 기무사령관 등 셋하고만 비밀리에 하나회 해체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해서 못했소.”

명색이 비서실장인데, 사전 준비에 제외된 것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기자가 끼어들었다.

“김진영 장군과 친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허허허.”

나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하나회에 속해 있던 육군참모총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김 장군과 나는 부산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맞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내게 비밀로 한 까닭을 두고 김 장군 때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YS가 먼저 말을 해왔다.

“김진영과 동기동창 아니가.”
YS 말투를 따라 전하자, 일동 웃음이 났다.
‘아, 이 양반이 이래서 그랬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업적은 검은돈을 양성화해 투명 사회의 기틀을 다진 금융실명제였다. 이때도 YS는 보안에 각별했다. 관계된 몇 사람만 불렀다. 김포 쪽에 집 하나 얻어 전문가 7명이 극비리에 준비한 게 금융실명제였다. 그런 작업 끝에 93년 8월부로 전격 실시할 수가 있었다.

 

7. 지도자의 조건



감히 이 두 가지는 용기와 결단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 개혁이었다.

“YS 만큼 용기와 결단이 있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했다.

“또 그런 지도자로 누가 있나요?”
“없어요. 야당이 무기력한 것도 지도자가 없어서예요.”
“보수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거쳐 쪼그라든 것도 그래서일까요. 원로로서 어떻게 보나요.”
“첫째는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 하던 사람 아닙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뒤이어 얘기는 동문서답처럼 흘러갔다.

“한나라당 시절인데, 박근혜하고 나하고는 같은 부총재를 했어요. 총재는 이회창 씨였고. ‘박관용·박근혜’ 가나다순으로 앉으니까 항상 짝이었어요. 부총재니 아침 회의에서도, 외교통일위원회 상임위도 같아 나란히 앉았지요. 매일 만나 얘기하는데, 박근혜 대통령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 아닙니까. 4·19 때 직접 본 적이 있었어요.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난 지 얼마 안 돼 하루는 계엄부에서 각 대학의 데모 주동자들 7명을 뽑아 초청했어요. 부산 지역 시위를 주도한 나도 갔지요.

그때 본 계엄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이었어요. ‘정권도 바뀌었으니 내가 여러분들의 의견을 청취하겠다.’ 헌법이 어떻고 등등 학생들이 그러는데 나는 ‘혼란한 틈을 타서 물가가 오르고 서민 생활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관리를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지요. 이후 우르르 나가는데 ‘어이, 미스터 박. 자네 박 군이라고 그랬지?’ 나만 따로 불러 앉혔어요. ‘다른 놈들은 말이야, 학생들이 무슨 헌법이 어떠니 야단들인데 자네 물가 얘기가 내 머리를 톡톡톡 일깨워줬어.’ 자기도 박 씨라며 ‘자주 좀 와. 여러 얘기 좀 해줘.’ ‘예’ 하고는 그 뒤로 안 갔죠. 근데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를 그렇게 존경해요. 암튼 이 얘기를 전하자 ‘아, 박 (부)총재님 아버지하고 그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박근혜 대통령과는 친하게 지냈다. 흐트러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앉아있을 때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이런 사람 처음 본다, 할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8. 이회창과 이인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97 대선 과정에서 이회창과 이인제와의 협상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사진은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97 대선 과정에서 이회창과 이인제와의 협상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사진은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야기가 산으로 가자, 기자가 치고 들어왔다.

"97년 15대 대선에서 말이죠. YS 측근인 최형우·김덕룡 장관 등 민주계가 주류였는데 어떻게 이회창 총재가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YS가 이회창 총재를 좋아한 건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회창 씨가 대세였어요. 대쪽 판사 출신의 깨끗한 사람, 강직한 사람 이런 이미지 때문에…. 우리가 밀든 안 밀든 본선 후보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담담하게 전했다.

“민주계가 단합했으면 민주계가 이겼지 않았을까요.”
“그건 언론에서 추측해서 하는 얘기고, 그때는 YS 측근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의장님은 9룡 중 누굴 지지했었나요? 이회창도 9룡 중 한 명이었지만, 최형우·김덕룡·박찬종·이인제·이홍구·이수성·최병렬·이한동 등도 있었잖아요?”
“난 딱히 없었는데. 이기택 의원을 대통령 만들려고 혼신을 바쳤던 때를 말고, 누구를 꼭 대통령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지. 물론 이회창 후보가 우리 당 대선후보가 되면서 그를 도왔지만 말이오.”

“선거 막판 때 얘기 좀 묻겠습니다. 이회창 총재가 아들 병역 기피 의혹으로 지지율이 흔들리면서 이인제 의원도 당을 깨고 대선에 나왔잖아요. 의장께서 두 사람 간의 후보 단일화를 직접 추진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왜 실패한 건가요.”
“세월이 많이 지나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그렇게 운을 띄우며 설명에 들어갔다. 대통령 선거 일자가 가까워지면서 이인제 후보가 사퇴하지 않는 한 이회창 후보의 승리는 어렵다고 본 나는 이회창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직접 이인제 의원과 만나겠다. 협상의 전권을 달라’고 했다. 이 후보도 동의해, 나는 그 길로 이인제 후보에게 회동을 제안했다. 만나게 되면 당권이나 총리직을 제안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자의 말대로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인제 후보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어요. 알고 보니 마음이 바뀐 거예요. 며칠간 유세를 하며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 이인제 후보가 당선을 확신하게 됐다는 얘기가 전해졌어요.”

“인기에 힘입어 독자 출마 쪽으로 굳힌 거였네요.”
기자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안 거지만, 야당 후보였던 DJ 측이 유세장에 사람을 보내고, 후원금을 통해 독려하는 등 이인제 후보를 띄워 이회창 후보의 표를 잠식하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해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는 끝까지 완주했다. 492만 5000여 표를 얻었다. 당선된 김대중 후보와 2위를 기록한 이회창 후보의 표차는 39만 표에 불과했다.

 

9. 탄핵 의사봉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자신의 일관된 의회민주주의 신념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자신의 일관된 의회민주주의 신념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대화는 국회의장을 역임할 당시로 전환됐다. 노무현 참여 정부 때인 2002년 7월 8일 나는 제16대 국회 후반기 의장으로 선출됐다. 건국 초 ‘이승만·신익희 의장’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대통령이 지명하지 않고 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장이었다. 대학 다닐 때 ‘모의 국회의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는 진짜 국회의장이 돼야지’ 했는데, 그 꿈이 42년 만에 현실로 이뤄진 거였다.

 ‘의회주의자’였던 나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명실상부한 입법부로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정 개혁에 앞장섰다. 삼권분립이 헌법 전에만 살아있는 게 아닌 국정의 현실에 구현되도록 권위 회복에 나서는 한편 국회예산정책처를 신설하는 등 정책적 역량 강화에 힘썼다.

하지만 극명한 명암을 안기던 때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국회의장으로서 의사봉을 두드리던 순간이었다.

“탄핵 과정이야 웬만한 건 다 아니까, 다시 국회의장이 된다 해도 의사봉을 두드릴 건지…. 그런 것도 궁금합니다.”

인터뷰 후반부 무렵 기자는 탄핵 문제를 끄집어냈다.

“탄핵을 잘했나 못했나를 떠나서 입법부가 갖는 권능, 국민의 대표기관이고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곳이 국회다,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삼권분립을 지켜나가고 어떤 경우에도 의회민주주의 기본원칙이 훼손되는 관례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2004년 3월 12일 국회 본회의장.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투표자 195명 가운데 정족수인 187명을 훌쩍 넘는 193명의 찬성을 얻어 가결됐다.

“그날은 고민 끝에 의사봉을 쥔 것이지만, 애당초 처음에는 탄핵이라는 말만 나오고 흐지부지 끝날 거로 생각했어요. 근데 시간이 가면서 노 대통령이 상황을 자꾸 악화시키는 상황으로 가는 거예요.”

2003년 10월 측근들에 대한 비리가 터져 나오자 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자신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그 뒤 11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친노(노무현) 세력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졌다. 2004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이라며 열린우리당 편을 들었다. 이는 곧 공무원의 중립 위반 등 선거 개입 논란을 일으켰다. 새천년민주당은 반발하며 노 대통령에게 사과를 촉구했다. 급기야 3월 5일 기자회견을 열어서는 선거 중립 위반과 측근 비리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이행하지 않을 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는 한나라당보다 새천년민주당이 더 적극적이었다.

노 대통령도 물러나지 않았다. 3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총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고 정치적 결단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탄핵을 총선용 이벤트로 여기는 듯한 발언에 야당 의원들은 격분했다.

나는 파국을 막고 싶었다. 여당 원내대표가 의장실까지 찾아왔다 되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 그로부터 새로운 타협안이 나와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나를 만나러 온 것도 여론전을 의식한 쇼라는 걸 알았다. 고민 끝에 의사봉을 잡기까지 의장 공관 뒷산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의원 다수가 강행하는 상황이라 분위기상 통과될 것 같았다.

내가 책임지는 건 아니지만 의사봉 두드린 놈보고 뭐라 할 거 아니겠나. 별별 생각이 들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지 얼마 안 돼 내게 자문을 듣고자 찾아왔던 것도 기억이 났다. 나는 국회와 청와대 관계, 청와대 생활 등을 조언해줬다. 그런 뒤 “지금 당선자께서는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지만 1년 후에는 제왕이 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본인은 그럴 리 없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 내 예상이 맞았구나 하는 씁쓸함이 들었다.

 

10. 통일과 사명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자신은 오랫동안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다고 말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자신은 오랫동안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다고 말했다. 이날 박 전 의장이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벗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통일 관련, 한 말씀 해주시죠.”
기자는 복잡한 표정을 읽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내게 통일은, 4·19 직후 처음으로 ‘통일’이란 용어를 붙여 개최한 고려대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한 이후 사명처럼 여겨지던 의미였다.

“남북 국회회담이라고 있는데, 85년 시작했거든요. 11번의 예비회담을 모두 참석한 경우는 우리 의장님밖에 없어요.”

인터뷰 내내 동석 중이던 김석우 원장(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이 거들었다. 외교통인 그는 YS 대통령 시절 의전수석 비서관과 통일원 차관을 지냈다. 청와대 생활을 함께 한 우리는 내가 국회의장일 때 그는 의장 비서실장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하고 있다. 이날도 내가 중간중간 가물가물한 것이 있으면 도움이 될까 해 옆에 있던 차였다.

나는 통일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져 왔다. 89년 국회통일특별위원장으로 있을 무렵 한민족연합체통일방안을 파격적으로 만들어 갑론을박을 낳기도 했다. 당시 진보적 젊은 학자로 꼽힌 손학규 서강대 교수, 진보의 사상적 은사라 불린 리영희 교수 등을 초대해 3일에 걸쳐 통일문제공청회도 열었다.

평양을 방문한 것은 1992년 IPU(국제의원연맹) 총회 참석 때다.

“평양에 갔더니 김일성이 저녁 만찬을 준비했어요. 각 대표와 저녁을 먹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일성을 만나야지 되겠는 거야. 그냥 가면 경호원들이 잡을 것 같아서 잔을 들고 뚜벅뚜벅 차분히 갔지. 경호원들도 막지는 못하고 주변을 막 이렇게 에워싸고…. 김일성 주석 앞에 가서는 ‘남북한이 어떻게든지 통일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그림요. 해야 디요.” 뚱뚱한데 위엄이 넘쳐요. 김일성이하고 악수하고, 그렇게 만난 사람은 대한민국에 나밖에 없을 거예요.”

 

11. 한반도 전망



“통일 전망은요?”
“어렵습니다.”
나는 단언하며 말을 이었다.

“통일의 조건은 어느 한 나라가 망하거나, 백기를 들거나 할 때 가능해요. 과거 6·25 때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잖아요. 솔직한 말로 그때 북한이 무력으로 통일을 하려 한 거잖아요. 통일은 공산주의가 멸망하거나 자유민주주의가 멸망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양쪽 다 원체 전력이 강화돼 있어서 통일될 길이 없어요. 중국과 러시아가 있고 미국과 일본이 있어 전쟁도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한반도는 분단이 영구화된 거나 다름없어요.”

“그럼 평화공존 체제는 가능할까요.”

“아, 합의는 안 했지만, 지금이 평화공존이죠. 우리가 치지 않고 북한이 치지 않고, 휴전선을 중심으로 공존해 살고 있잖아요. 사실상 코리아가 두 한국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냉철한 현실 인식들을 쏟아내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때 김 원장이 말을 보탰다.

“당분간 통일의 가능성은 없지요. 근데 우리 남쪽은 성공한 셈이고, 북쪽은 실패한 체제인 것은 드러났잖아요.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관리해나가면 되는 거지요.”
“일각에서는 체제 논란 위기도 나오던데요.”
이번엔 기자가 말해왔다.
“자유민주주의 헌법 체제를 유지해나가야 해요.”
그건 내 기본 철학이었다.

“그러려면 야당이 야당다워야 해요. 옛날에 조병옥·신익희·김영삼·김대중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왔어요. 그런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지켜질 수 있었던 거예요. 근데 지금은 야당이 미비하기 짝이 없어요. 잘못한 걸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균일하게 싸워 국가발전을 이뤄야 하는데 말이죠.”
“원로들이 그런 역할을 해줄 수는 없나요.”
“그런 얘기는 많이 나오지만, 우리 원로들은 ‘지나간 시대’니까….”

“여담인데, 손학규나 이인제나 너무 일찍 탈당해 대선주자가 안 된 게 아닌가 싶어요.”
환기하듯 기자는 이 말을 물어왔다.
“성급하게 나갔지.”

뒤이어 몇 차례의 여담이 잇따랐다. 이기택 의원의 결혼 질문도 물어와, 최형우 장관과 내가 이화여대를 찾아가 중매 선 일화 등을 전해줬다. 내 나이 83세. 세월이 흘러 어떤 건 더 또렷이, 어떤 건 더 아득하니 느껴진다. 시간은 이렇게 간다. 내 얘기가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다.

※<시사오늘>의 ‘시대산책’은 인터뷰이의 구술을 화자의 시점으로 재구성해 정리하는 형식의 코너입니다. 기술상의 이해를 돕고자 화자의 심리적 기법을 가미, 배경상의 설명을 부연한 점 말씀드립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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